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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25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약점을 강점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 - 4. 이기심으로 이기심!
본문 : 사도행전 15장 41절(36~41절)
그래서 시리아와 길리기아를 돌아다니며, 모든 교회를 튼튼하게 하였다. <새번역>
사랑과 은혜와 말씀과 성령의 충만함으로 성령행전이라고도 불리는 사도행전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다툼 몇 가지가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다툼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등장합니다. 다른 이도 아닌 전도여행까지 함께 떠났던, 생사고락을 함께 했었던,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입니다. 그것도 보통 다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심하게 다툰 끝에, 서로 갈라서고 말았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떠나갔다. <사도행전 15장 39절, 새번역>
서로 갈라설 정도로 심하게 다투었다는 것입니다. 끝에는 비로소 화해했더라는 이야기로 끝나야 사도행전의 기록일텐데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아예 갈라선 바울과 바나바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실라와 함께 전도여행을 떠나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키프로스로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심한 다툼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울과 바나바의 서로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마가라고 불리는 요한 때문이었습니다. 이 요한과 관련하여 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건을 사도행전 13장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그 일행은 바보에서 배를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로 건너갔다. 그런데 요한은 그들과 헤어져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사도행전 13장 13절, 새번역>
마가라 불리던 요한은 소위 금수저로, 부잣집 도련님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 예루살렘에 있었고, 120명이상이 모일 수 있는 큰 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주요 모임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오순절 성령님의 임재가 있었던 장소도 같은 장소입니다. 이런 집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 바로 마가 요한이었고, 어머니와 교회의 영향을 받아 훌륭한 신앙인으로 자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의 구제 헌금을 전달하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오는 길에 마가 요한을 동역자로 삼고 안디옥으로 데려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선교여행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돕기 위해 동행하는 인물이 됩니다. 당당히 선교사의 행렬에 동참한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 때문이지 바울과 바나바와 헤어져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린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가 왜 돌아갔는지에 대한 이유를 분명히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 즉 상의하지 못하고 결정한 일에 대해서 당시 일행들은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도 여행을 멈출 수는 없었기에 최선을 다해 마무리하고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2차 전도여행의 닻을 올리려는 바울과 바나바입니다. 바울은 바나바에게 말씀을 전파한 여러 도시로 다시 찾아가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살펴보자고 제안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그 제안에 대한 이야기보다 먼저 이 이야기를 꺼내게 됩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마가라는 요한도 데리고 가려고 하였다. <사도행전 15장 37절, 새번역>
사실 바울에게 바나바는 특별한 인물이었습니다. 다메섹에서의 회심 후 아무도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을 때 자기를 변호해 주고, 또 자신에게 사역의 기회를 준 바나바는 바울에게 은인과도 같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제안과는 상관없이 먼저 마가 요한의 이야기를 챙기는 바나바를 보면서 동역에 대한 마음이 흔들렸음이 분명합니다. 사역보다 사람이 먼저인 것처럼 보였던 것이고, 하필 그 사람이 바로 마가 요한인 것이 더 바울을 흔들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나바의 이런 행동에 거절을 표시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버리고 함께 일하러 가지 않은 그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았다. <사도행전 15장 38절, 새번역>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바울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바나바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한 번 정도 실수할 수 있으니 같이 가자는 말과 같이 갈 수 없다는 말의 부딪힘은 처음에는 가벼운 말다툼에서 아주 심한 다툼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아까 살펴 본 대로의 결론이 나게 된 것입니다. 바나바가 먼저 마가 요한을 데리고 키프로스로 떠나 버리게 되었습니다.
제 3자의 입장에서 볼 때 여러분은 오늘 이야기가 어떻게 보여 지십니까? 이 다툼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충분히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어찌 보면 작은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바울과 바나바, 마가 요한에게서 모두 자기의 의견을 굽히지 못하고, 자기의 의견만을 이야기하는 이기적인 태도를 발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 절대로 존재하지 말아야 할 약점, ‘이기심’에 대한 이야기를 그래서 오늘 함께 나누어볼까 하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할 인물은 바로, ‘마가 요한’입니다. 저는 이 요한의 이기심을 그리스도인이 가장 경계해야 할 이기심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의 이기심은 두 가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첫째, 독단적인 행동!
그는 바울과 바나바 등 일행들과 충분히 상의해서 결정할 수 있었음에도 갑자기 독단적인 행동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향수병이었든, 지침이었든, 어떤 괴로움과 아픔이 있었던, 그 이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너무도 중요한 전도 여행에서 충분히 상의할 수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상의하지 않았고,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태도로 집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둘째, 직접 사과 하지 않은 비겁함!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일행들이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마가 요한은 자신의 실수를 직접 사과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바나바에게 다시 전도 여행을 떠나고 싶은 것을 드러낸 것으로 보아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어느 정도 뉘우치고 반성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가 해야 했던 행동은 직접 사과하는 것이었고, 직접 해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바나바 뒤에 숨어서, 자신 때문에 심한 다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뒤에서 숨어 있는 비겁함을 보이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독단적인 행동과 비겁함이라는 이기심은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이런 이기심은 약점이 아니라 단점이고, 악점입니다. 그리스도인과는 동행할 수 없는 이기심입니다. 이런 이기심을 가지고서는 함께와 동역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저 독단적인 행동과 분열, 다툼 밖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결과를 통해 충분히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의 이기심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해석을 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중요한 지점은 여기서부터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바나바의 이기심, 즉 우리 눈에 약점처럼 보이는 이기심을 통해 오히려 ‘이기심’을 즉, 승리라는 강점으로 변화시켜 주신다는 것을 보여 주고 계신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어서 ‘바울’의 이기심을 만나 보겠습니다.
바울은 사실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 역시 누구보다 하나님으로부터 용서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죄인 중 괴수였던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도여행 중 그 용서와 사랑을 통해 많은 이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드는 복음의 역사를 써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바나바의 태도에는, 마가 요한의 실수에는, 왜 이렇게 차갑게 반응한 것일까요? 왜 이렇게 이기적인 태도를 보였을까요? 충분히 이해하고, 충분히 용서하고, 다툼이 아니라 화해를 통해 함께 떠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바울의 이기심처럼 보이는 그 행동에는 아주 중요한 행동이 숨겨져 있었던 것을 알고 계십니까?
첫째, 바울은 바나바의 변화를 감지했기에 그렇게 행동한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에게 주어진 사역은 분명했습니다.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1차 전도 여행을 그렇게 잘 마치고 돌아온 것입니다. 상황이 힘들게 하고, 사람이 힘들게 해도, 그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에 더 집중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그 사역보다 자신의 지인인 마가 요한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것에 대해서 바울은 경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전도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바울은 당연히 바나바도 그 이야기에 동참해 줄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먼저 바나바가 바울의 재방문에 대한 제안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후 마가 요한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면 저는 바울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바나바에게 우선순위가 바뀐 변화를 바울은 눈치를 챈 것입니다. 바나바의 입장도 이해가 갑니다. 자신의 조카인 마가 요한을 어찌 그냥 내버려 둘 수 있었겠습니까? 마리아의 눈치도 보였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던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를 보아서라도 마가 요한을 챙겼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그런 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중요합니다. 사람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과의 문제 때문에 사역이 뒤로 밀리는 것을 바울은 용납해 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바나바의 말을 들어주면 이제 앞으로 사역보다 사람과의 문제가 더 중요하게 생각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나바가 사역 이야기 후에 마가요한 이야기를 했다면, 마가 요한이 먼저 사과를 했다면, 바울은 결코 이런 태도를 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볼 때 이기적인 행동처럼 보이는 바울의 행동이 이기심이 아닌 더 구체적인 이유는 두 번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둘째, 바울은 바나바의 외식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게바(베드로)가 안디옥에 왔을 때에 잘못한 일이 있어서, 나는 얼굴을 마주 보고 그를 나무랐습니다. 그것은 게바가, 야고보에게서 몇몇 사람이 오기 전에는 이방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그들이 오니, 할례 받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떠나 물러난 일입니다. 나머지 유대 사람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하였고, 마침내는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갔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1~13절, 새번역>
바울은 베드로가 안디옥에 왔을 때 베드로가 외식(가식)하는 행동에 대해서 비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뿐만 아니라 한 사람이 더 등장하는데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 역시 외식적인 행동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나바가 여전히 율법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방 선교를 떠나 왔음에도 불구하고, 잘 마쳤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바나바의 행동 속에서는 율법적 행동이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나바와 결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율법적 행동, 즉 외식적이고 가식적인 모습으로는 전도 여행을 떠난다고 하더라도 열매 맺기가 어려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부분에 대해서도 바울은 바나바에게 지적을 했을 것이고, 마가 요한의 문제로 시작해서, 결국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 외식하고 가식적으로 보이는 행동에 대한 바울의 지적에 대해 바나바는 화가 났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바울과 달리 안디옥 교회 사람들의 인사조차 받지 않고 자신의 고향 키프로스로 떠나가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사도행전에서는 ‘바나바’,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가 없게 됩니다.
바울은 요즘 말로 하면 ‘극T’의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이기적으로 보이고, 오히려 독단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셔야 합니다. 바울은 충분히 그런 행동을 보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바나바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좋은 조언을 해주려 했던 것입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 우선순위에 대해서 다시금 회복시켜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나바’야말로 이기적인 사람일까요? 우리는 바나바의 이기심도 좀 더 깊게 살펴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바나바의 이야기입니다.
첫째, 바나바의 이름의 뜻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키프로스 태생으로, 레위 사람이요, 사도들에게서 바나바 곧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별명을 받은 요셉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밭을 팔아서,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 <사도행전 4장 36~37절, 새번역>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요셉이란 이름보다 그는 위로의 아들이란 이름으로 불려 질 정도로 위로의 대가였던 것입니다. 그 위로의 대가가 당연히 마가 요한의 실수를 덮어주려 하는 것은 당연한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역의 현장에 있더라도 이렇게 사람을 먼저 생각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위로의 사람이 없다면 한 번 실수한 것으로 영원히 기회를 부여받지 못하고 죄책감과 패배감에 살아갈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바나바의 이런 노력이 없었다면 바울과 마가요한의 관계도 이렇게 변화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그대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십시오. 그 사람은 나의 일에 요긴한 사람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11절, 새번역>
바나바가 없었다면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바나바가 있었기에 그의 사역 초기에 분명히 문제도 있었지만, 그 실패 속에서 바나바의 위로를 통해 10여 년 이상 자기 정립을 하는 기간을 보냈고, 그 후 그의 사역은 동역자로서 시작보다 끝마무리를 잘한 전도자였으며, 바울이 사망한 후에는 베드로와도 동역하며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도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위로의 아들, 바나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바나바가 마가 요한에 대해서 옹호하는 태도를 보인 것을 너무 이기적인 태도로 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사역도 중요하지만 사람도 중요하다는 것을 바울에게 전해주게 됩니다.
사역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사람도 중요합니다. 사람과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과의 문제가 사역보다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은 사역보다 중요합니다.
바나바는 사람보다 사역을 더 중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래서 너무도 차가워 보일 수 있는 바울을 향해 그래도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따뜻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끝까지 전해주고 싶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이 두 영역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사역이 중요하다는 사람과 사람이 중요하다는 사람의 연합이야말로 진짜 교회에 꼭 필요한 연합입니다. 물론 바나바가 뜻이 맞지 않는다고 해서 먼저 안디옥교회의 인사도 없이 떠난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나바가 생각할 때는 바울을 적극적으로 따르고 후원하던 안디옥교회 사람들이 전부 그렇게 보였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소신대로 사람을 먼저 선택한 것입니다. 자신에게도 사역이 왜 중요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사람을 선택했고, 다시 위로의 아들이었던 자신의 초심을 찾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간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바나바의 마음이 바울에게 전해졌을까요? 당연히 전해졌습니다. 바울은 이번 일을 계기로 더욱 더 사람과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많은 편지를 남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래 참음으로써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십시오.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에베소서 4장 2절B~3절, 새번역>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여 주고, 서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는 띠입니다. <골로새서 3장 13~14절, 새번역>
저는 바울이 이 편지를 쓰면서 바나바를 떠올렸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사랑과 평화의 띠가 왜 그리도 중요한지 바나바와의 다툼, 헤어짐에서 분명히 깨달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방향성의 차이입니다. 어느 것이 틀린 것이라고 말하면 문제가 됩니다. 틀린 것이 아니라 방향성이 다른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사역이 중요했고, 바나바에게는 사람이 중요했습니다. 그러니 이 둘은 환상의 콤비였던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의 연합이 바로 교회의 모습입니다. 절대 서로의 이기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왜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 줄 아십니까?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이 두 사람의 이기심처럼 보이는 모습을 통하여 정말로 승리의 소식, ‘이기심’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리아와 길리기아를 돌아다니며, 모든 교회를 튼튼하게 하였다. <사도행전 15장 41절, 새번역>
우리가 볼 때는 바울, 바나바의 이기적인 태도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다시 한 번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기심이란 약점을 얼마든지 강점으로 만드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마치 각 사람에게 맞는 달란트를 주신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의 개성을 가진 독특한 개개인의 역할을 부여하신 것처럼, 달라 보이고, 이기적으로 보이고, 하나 될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이들을, 어쩌면 오늘 우리의 모습을 하나 된 교회로 만들어 가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을 바울이 기록한 것에 대해서 아주 깊은 묵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로마서 8장 28절, 새번역>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우리 각자의 입장만 생각하고, 우리의 눈으로 볼 때는 상대가 이기적인 모습으로만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깊이와 상황과 마음을 다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개개인의 상황을 다 아시고 우리를 연합하시고자, 이기심이란 약점을 통하여 이기심을 허락하는 강점이 되게 하시고자,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만 이기심에 대해서 분명하게 해야 할 것은 마가 요한이 보였던 독단적인 행동과 비겁함이란 이기심은 반드시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건 이기심이 아니라 잘못된 행동입니다.
그리고 나의 뜻과 다르다고 해서 상대방을 이기적인 존재로 만들기보다는 그의 생각을 통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보기에도 내 모습은 이기적일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으면 서로의 모습이 이기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이기적일 수 있음을 다툼이 아닌 양보를 소유하고 상대를 인정해 주는 것은 어떨까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이기적으로 보이는 우리의 모습들을 어떻게 하나로 만들어 가시는지, 연합하게 하시는지 내어 맡겨 보는 것은 어떨까요?
다툼이 있더라도 화해가 있게 하실 것이고, 부침이 있더라도 완성이 있게 하실 것이고, 너무도 다름이 있었지만 어느새 예수를 닮은 우리 모두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기적인 마음인 ‘이기심’이 아닌, 승리인 ‘이기심’을 우리 모두에게 보여 주실 것입니다. 그 날까지 우리 함께 만들어져 갔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지어져 갔으면 좋겠습니다. 이 8월 약점을 강점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말씀들로 채워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설교들을 마무리하면서, 사랑하는 모든 동역자들에게,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존중합니다. 축복합니다. 우리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하여 함께 지어져 갑시다!”
결단 찬양 - 함께 지어져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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