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명장(名將). 초명은 은천(殷川). 본관은 금주(衿州).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궁진(弓珍)의 아들. 983년(성종 2) 문과(文科)에 장원, 예부시랑(禮部侍郎)이 되고, 1010년(현종 1) 거란(契丹) 성종(聖宗)의 침입에 조신(朝臣)들은 항복을 주장했으나 이를 반대하고 하공진(河拱辰)으로 하여금 적을 설득시키도록 하여 물러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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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장군 동상, 경기 수원시 팔달구 팔달공원" |
고려의 명장(名將). 초명은 은천(殷川). 본관은 금주(衿州).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궁진(弓珍)의 아들.
983년(성종 2) 문과(文科)에 장원, 예부시랑(禮部侍郎)이 되고, 1010년(현종 1) 거란(契丹) 성종(聖宗)의 침입에 조신(朝臣)들은 항복을 주장했으나 이를 반대하고 하공진(河拱辰)으로 하여금 적을 설득시키도록 하여 물러가게 했다.
그 뒤 국자좨주(國子祭酒)·한림학사(翰林學士)·승지(承旨)·중추원사(中樞院使)·이부상서(吏部尙書)·서경유수(西京留守)·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를 역임하였고, 18년(현종 9)에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으로 고려에 침공하자 이듬해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군사 20만 8000을 이끌고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무찔렀다.
19년 회군(回軍)하는 적을 구주(龜州)에서 크게 격파하고 개선할 때 영파역(迎波驛)에서 왕의 영접을 받았으며, 검교태위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 식읍삼백호(檢校太尉門下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天水縣開國男食邑三百戶)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30년(현종 21) 왕에게 청하여 개경(開京)에 축성(築城)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고, 31년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군개국후 식읍일천호(特進檢校太師侍中天水郡開國侯食邑一千戶)에 봉해졌다.
현종 묘정(廟庭)에 배향,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 《구선집(求善集)》 등이 있다. 시호는 인헌(仁憲).
강감찬은 고려 제3대 정종 3년 11월 19일에 금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엔 작고 못생겼으나 재주와 용맹이 뛰어났다. 983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예부시랑이라는 벼슬에 올랐고, 한림학사· 이부 상서 등을 지냈다. 강감찬은 침착하고 의지가 강했으며, 학문과 지략에 뛰어났다. 1010년에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오자 대부분의 신하들은 항복을 주장 하였으나 강감찬은 이에 끝까지 반대하고 하공진을 적진에 보내 설득시켜 물러 가게하였다. 그 뒤 서경유수 ·문하평장사를 역임하며 왕의총애를 받았다.
1018년에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의 10만 대군이 다시 쳐들어오자, 70세의 나이로 상원수가 되어 홍화진에서 거란군을 물리쳤다. 이듬해 자기 나라로 되돌아가는 거란군을 귀주에서 크게 무찔러 이겼는데, 이것을 '귀주대첩'이라고 한다. 그 후 강감찬은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자연과 글을 벗하며 조용히 살았다. 저서로는 <구선집> <낙도교거집> 등이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서울시 관악구에 있는 낙성대는 그가 태어난 사적지이다
연 대 |
나 이 |
생애와 업적 |
9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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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지금의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서 태어남 |
954 |
7세 |
아버지에게 학문과 무술을 배움 |
964 |
17세 |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김장길을 찾아가 양아들이 됨(10년간 세상을 두루 다님) |
983 |
36세 |
과거에 응시하여 제술과에 장원으로 급제함. |
992 |
45세 |
정4품 벼슬인 예부시랑에 오름. |
993 |
46세 |
거란의 소손녕이 쳐들어 옴. 강감찬의 주장에 따라 서희가 뛰어난 외교로 거란군을 물러나게 함. |
1010 |
63세 |
거란 왕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옴. 신하들이 거란에 항복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홀로 반대하고 현종을 남쪽으로 피난하게 함. |
1011 |
64세 |
국자좨주가 됨. 다시 한림학사 승지로 승진함. |
1012 |
65세 |
동북면 행영병마사가 되어 국방에 힘씀. |
1014 |
67세 |
중추사로 승진함. 군사훈련에 힘씀.이따금 고려 땅으로 넘어오는 거란군을 물리침. |
1016 |
69세 |
이부상서로 승진함. |
1018 |
71세 |
서북면 행영병마사가 되어 거란에 침입에 대비함.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옴. 상원수로 출전하여 흥화진에서 강물을 이용하여 거란군을 크게 무찌름. |
1019 |
72세 |
뛰어난 지략으로 개경함락을 단념하고 돌아가는 거란군을 귀주에서 크게 무찌름. 영파역까지 나온 현종의 뜨거운 환영을 받음. |
1020 |
73세 |
왕의 허락으로 벼슬에서 물러남. 특진 검교대사, 천수현 개국자의 벼슬과 작위 받음. |
1030 |
83세 |
문화시중으로 임명됨. |
1031 |
84세 |
세상을 떠남. |
1010년 (현종1)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에 침입했다. 이 때 강조가 나가 싸우다 지자, 신하들은 왕에게 항복하기를 권했으나, 끝내 이에 반대하고, 하공진을 적에게 보내어 설득시켜 물러가게 하였다.
그가 서경 유수에 임명되었을 때, 거란은 다시 고려를 괴롭히기 시작하여 거란이 고려의 강동 6주를 내놓으라고 하는 것을 거절하자, 1018(현종 9) 거란은 다시 10만의 군사로 쳐들어왔다. 이 때 70세였던 그는 20만 군사를 이끌고 흥화진으로 진군하여 거란군과 싸웠다.
여기서 그의 군사들은 큰 밧줄에 쇠가죽을 꿰어 삽교천(의주 동쪽의 큰 냇물) 상류의 물을 막고, 부근의 산속에 숨어있다가 적군이 나타나자 갑자기 막았던 강물을 터놓아 적군을 무찔렀다. 그러나 적장 소배압은 나머지 군사들을 이끌고 황해도까지 밀고 내려왔으므로 이들과 싸움을 벌여 물러나게 하였다.
도망치는 적군을 공격하여 귀주에서 완전히 쳐부수었는데, 이것을 귀주 대첩이라고 한다. 그 후 거란은 다시는 고려를 넘보지 못하였다. 뒤에 강감찬은 추충협모안국공신의 호를 받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자연과 글을 벗하여 조용히 살았다. 서울시 관악구에 있는 낙성대는 그가 태어난 사적지이다. 저서로는 '낙도 교거집(樂道郊居集)','구선집(求善集)' 등이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84세로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 크게 장사를 지내 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