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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야스쿠니 신사에서 메이지유신의 행동대장인 조슈번 신사쿠를 생각하다!
2019년 4월 12일 도쿄에서 벚꽃을 보려고 우에노공원과 센소지를 거쳐 치도리가후치
(千鳥ヶ淵公園) 를 찾으니 마침 도쿄대학 입학식이 열리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유학
등 9월에 시작되는 미국의 학기에 맞추기 위함인지..... 추위가 가시지 않은 3월에
새 학기 를 시작하지만, 일본은 벚꽃이 만개한 봄철 4월에 학교 신학기가 시작 됩니다.
치도리가후치 안쪽에 자리한 우리나라 국립묘지외 같은 후생성이 관리하는 전몰자 묘지 (戦没者
せんぼつしゃ 墓苑) 는 야스쿠니 신사를 불쾌하게 여기는 미국 존 케리 국무장관과 척 헤이글
국방장관이 2013년 10월 3일 참배했으며, 아베 총리도 논란을 피하기 위해 야스쿠니 대신에
이 묘지를 찾아 참배했는데 시간도 없는데다 인파가 엄청나니 뚫고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되돌아 나와 이웃에 있는 야스쿠니신사 (靖國神社) 를 찾아가는데 우리 선입견으로 참전 노병들이
낡은 군복을 입고 욱일기를 앞세우며 구호를 외치면서 행진하는 등.... 좀 살벌한 전쟁 분위기가
나는 곳으로 긴장했더니.... 오늘은 찾는 사람도 별로 없는지라 조용~ 하니 너무나도 한가롭습니다?
신사 참배로는 엄청 넓은데 비해 사람들이 적은데다가 하도 조용해 다른 보통 신사를 들렀을
때 보다도 더욱 한가하니 졸립다는 느낌 마저 드는데..... 경찰이나 경비원도 보이지
않고 그냥 평화로운 분위기로, 도쿄대 입학식을 마친 학생 중에서도 아주 극소수만
들를 뿐...... 전반적으로 한가로운데 우린 신사에 입장하지는 않고 바깥에서 구경만 합니다.
누구 여행기 에 보니 도대체 저 안에 무엇이 있나 궁금해서 들어갔더니.... 벚꽃이 많고 동백도
있으며 말 동상과 괴수상에 청동 대포 가 있고, 기념관이 두개 있으며 연못 에 본당 이
있다는데... 한번 들어가 구경하고 싶지만 아직 후락원과 분쿄 2군데를 찾아 벚꽃을 더 보고
기차를 타고 멀리 군마현 쿠사츠 온천까지 가야하는 일정이라 시간이 없으니 그만 포기합니다.
지금 일본은 러시아-중국-북한에 맞서는 한국-미국-일본 동맹을 이루고 있지만....... 미국이
세계 경찰 역활에 피로감을 느끼고 제2 먼로 독트린으로 아메리카로 철수하면 중국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에 힘을 실어줄 것인데... 그럼 1905년 태프트-가쓰라 협정 처럼
미국은 또 다시 한국을 일본에 팔아넘길 것이니 "미국을 등에 업은 일본과 전쟁" 이라!!!
손자에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라 했으니 적전술 공부 하는셈 치고 일본에 대해 알아봅니다.
여기 야스쿠니 는 도쿄(東京) 한가운데인 지요다구 (千代田區) 왕궁(황궁) 북쪽에 있는
신사(神社) 로 8만여개에 달하는 일본 전역의 신사 가운데서도 가장 규모가 큰,
신사 중의 신사로 불리는데....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직후인 1869년 막부(幕府) 군
과의 싸움에서 죽은 자들의 영혼 을 '일본의 신' 으로 추앙하기 위해 건립 되었습니다.
신사가 만들어질 당시의 명칭은 도쿄 쇼콘샤(招魂社 초혼사) 로 일본 전역에 세워진
쇼콘샤 가운데 왕실(황실) 이 나서 참배하는 신사였는데, 이후 쇼콘샤는 일본의
대외침략 과 발맞추어 국가 신도의 군사적 성격을 대표하는 신사로 자리잡았고
세이난(西南) 전쟁 2년후 1879년에 현재의 이름, 야스쿠니 신사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야스쿠니(靖國 정국) 는 말 그대로 '나라를 편안하게 한다' 는 뜻이니... 호국신사 이자
왕국(황국) 신사 로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전쟁에서 사망한 자들의 영령을
위해 제사하고 일왕(천황) 의 참배라는 특별한 대우를 해줌으로써... 전쟁 때 마다
국민에게 일왕(천황) 숭배와 군국주의를 고무, 침투 시키는데 절대적 구실을 했습니다.
또 전몰자들은 일왕(천황) 을 위해 죽음 으로써 생전의 잘잘못은 상관 없이 신(神)이 되어 국민의
예배를 받을수 있도록 유도했으니..... 일본의 젊은이들은 '야스쿠니에서 만나자' 는 약속
을 하고 전쟁터로 떠났을만큼 가치의 기준을 일왕(천황) 에 대한 충성 여부에 두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야스쿠니 신사의 제신(祭神) 의 원리는 국민의 도덕관을 매우 혼란하게 만들었으니....
일왕(천황) 을 위한 죽음은 "명분없는 침략전쟁에서의 죽음" 이었기 때문에 일본 군국주의
는 이것을 정당화 할 수 있는 근거로 신화 의식을 조작해 야스쿠니신사를 탄생시킨 것입니다.
전쟁이 끝난뒤 연합군총사령부는 야스쿠니신사의 호국적 성격을 알고 단순한 종교시설과
순수한 전몰자 추도시설 중 하나를 택하라고 일본 정부에 명령하니..... 야스쿠니는
종교시설을 택했지만, 1947년 일본은 신헌법에서 정교분리를 규정한 뒤에도
야스쿠니 신사의 특수한 기능인, 전몰자 추도시설 기능을 완전히 박탈하지는 못했습니다.
야스쿠니 신사 를 국가의 관리 아래 두자는 법안 은 여론에 밀려서 번번이 실패 하기는
하였지만... 갈수록 이러한 주장들이 설득력을 얻기 시작하였고, 1959년 10월 17일
에는 대한제국 황제의 후손인 이우 왕자 를 사망 당시 국적이 일본 이었다는 이유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하는 영새봉안제(靈璽奉安祭) 가 거행되었는데.... 이우 왕자는
고종의 손자이자 의친왕 아들로 1945년 8월 7일 히로시마 원자폭탄에 맞아 죽었습니다.
1978년 도조 히데키를 비롯 A급 전범 14명 이 합사되는 일이 발생하자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으니...... 일본의 보수 우파 세력은 'A급 전범 은 연합국이 일방적으로 규정한
것일뿐, 일본 국내법상으로는 범죄자가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등 일본 군국주의의
정당화를 주장하였고 일본 정부는 민관합동기구가 결정한 일일 뿐이라고 발뺌하였습니다.
1985년에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中曾根康弘) 가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공식 참배하였고, 2000년에는
이시하라 신타로 (石原愼太郞) 도쿄도 지사가, 2001년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小泉純一郞) 총리가
공식 참배하는등 일본 군국주의 망령을 부활 시키고 있어 주변국뿐 아니라 국제적인 비난을 받습니다.
2001년 야스쿠니 신사에는 246만명의 전몰자 가 안치되어 있고, 일본 육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무라 에키지의 동상, 대형 함포 등 각종 병기, 자살특공대인 가미카제
(神風) 돌격대원 동상, 전함 야마토의 특대형 포탄, 군마와 군견의 위령탑, 제로센
(0戰) 전투기 등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쟁 유물과 전범 동상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야스쿠니신사의 상징인 흰 비둘기 가 평화를 의미하는 것과는 반대로, 전시물들은
전쟁과 전투의 의미를 부각 시키고 있어 실제는“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전범자”
들을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 하는 곳으로 역할하고 있으며, 그외 전쟁박물관
으로 활용되는데.... 실제 신사로서 일반적인 종교시설과는 구분이 되는 곳 입니다.
2013년 12월 26일 일본 총리인 아베가 공식적으로 신사를 참배 하여 또다시 국제적인
비난 을 받았으며, 이를 두고 마치 독일 총리가 히틀러의 무덤 에 참배를 한다면
그것이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행위이며 아베 총리의 오만과
무지를 비난하는 여론이 확산되었지만... 일본은 전범들을 영웅으로 추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야스쿠니 신사의 이름이 처음에는 초혼사(招魂社 쇼콘사) 였는데, 이는
조슈번(야마구치현) 수도 하기시에 있는 초혼사(招魂社)인 사쿠라야마 신사가 전신
으로 이토 히로부미 등은 메이지유신 성공후 요시다 쇼인과 다카스키 신사쿠등의
영령을 도쿄로 모셔와서 만든게 야스쿠니 신사로 "초대 신관도 조슈번" 사람 이었습니다.
조슈번(야마구치현)의 선각자 요시다 쇼인은 존왕양이(尊王攘夷) 론의 주창자로 고향인 하기시에
쇼카손주쿠 松下村塾(송하촌숙) 서당을 열고 "맹자" 를 강의해 90명의 제자를 기른후, 에도
봉행소에 출두해서 에도막부를 뒤집어 엎는 거사를 모의했다고 자진해 말하고 29세에 처형됩니다.
조슈번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은 메이지유신을 이루는데 70% 가 도중에 죽었으니 "뜻 있는
선비는 자기 시체가 도랑에 굴러다닐 것을 잊지않으며, 용감한 선비는 자기
머리를 잃을 것을 잊지않는다" 는게 맹자의 가르침이니 그럼 죽을 자리를 잘 선택하라는 말?
요시다 쇼인은 1854년 미국의 페리제독 이 일본 우라가만에 왔을때 선진문명을 배우
겠다는 열의로 새벽에 배를 지어 미국 군함 쿠로후네에 올랐다가 거절당하고는
막부에 자수해 극형을 받을 위기를 스승 사쿠마 쇼잔이 연루된걸 안 막부가
문제를 만들지 않기 위해 방면했는데, 또다시 막부에 자수해 사형 을 당한 이유는.....
그것은 자신의 죽음으로 유신의 씨앗이 되려는 것이니.... 두꺼비가 능구렁이
를 도발해 삼켜져서는 그 뱃속에 들어가 죽어 자기 새끼를 낳고,
새끼는 구렁이 뱃속부터 파먹으며 밖으로 나온다는 일화를 연상하게 됩니다!
“선비란 최선을 다하고는 자신의 죽을 자리를 알아야 한다” 라는 요시다 쇼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 다카스키 신사쿠는 200명으로 거병해 4천 조슈번병을 격파해 조슈번을 장악한 후에,
도사번의 사카모토 료마가 힘써서 같은 하늘을 이고 살지 못할 철천지 원수 사쓰마번
과 동맹을 맺고는 무기를 조달해 5천 병력으로 10만 도쿠가와 막부군의 2차 침입을
격퇴 하고는 1868년에 무진 전쟁을 일으켜 메이지 유신을 성사시키는 도중에 죽게 됩니다.
요시다 쇼인은 1년반 동안 90명 제자를 길렀는데 살아남은 30% 정도 제자들 중에 총리
가 된 자는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쓰라 다로, 데라우치 마사다케
이고 그외에도 대신은 이노우에 가오루, 고무라 주타로, 소네 아라스케 등이며....
조선주둔군 사령관은 하세가와 요시미치, 야마가타 아리토모, 데라우치 마사다케 에
주한공사는 이노우에 가오루, 미우라 고로 등이고 육군대장 등 장성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메이지 유신 후 조슈번에서는 에도 막부를 타도하는 가운데 죽은 요시다 쇼인과 다카스키
신사쿠 외에도 지사들과 무사들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하기시에 초혼사를 세웠으니
그 후손으로 야마구치현(조슈번) 출신의 총리 아베 신조(安倍晋三) 는 2013년 8월
13일 야마구치현 하기시의 “쇼인신사 (松陰神社)” 를 참배 했으니 크나큰 충격이었습니다.
아베 신조의 외고조부 오오시마 요시마사 는 요시다 쇼인에게서 정한론(征韓論) 을 배운
조슈번 하기시 출신으로, 동학농민 봉기시인 1894년 4천 병력으로 제물포항을 통해
서울로 들어와 경복궁으로 쳐들어가 고종을 포로로 잡아 친일내각을 세우는데, 강화도와
제물포 및 서울의 조선군은 겁에 질려 일본군을 저지하지 못하고 병영 문을 걸어 잠급니다.
조선군에게 중요한 것은 삼시세끼 밥 과 봉급을 타서 부모와 처자식을 봉양하는 것이니...
다음해 일본군이 경복궁으로 쳐들어가 궁녀들을 패대기쳐 죽이고 순종을 발로차서
짓이기며, 명성황후를 칼로 난도질하고 시체를 불태워 죽일때도... 서울의 자기 병영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는 병영을 나올 엄두를 내지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밥만 먹었으며....
전쟁은 커녕 작전명령서를 발급해 일본군과 공식적인 전투를 단 한차례도 치르지 못했다는?
갑오경장을 지휘한 조슈번 이노우에 공사 후임 조슈번 미우라 공사는 낭인 30여명을 동원해
1895년 8월 20일 경복궁 담을 넘자..... 겁에 질린 수비병들은 총을 던지고 군복을 벗어
던진채 도주하니, 건청궁에 침입해 궁녀복으로 변장한 명성황후를 찾기위해 궁녀들을 섬돌
에 패대기쳐 죽일 때..... 조선군 훈련대 친일파 우범선, 이두황, 이진호 3명의 대대장이
지휘한 신식군인 천오백명은 담장 밖에 부동자세로 시립해 여인들의 단말마 비명을 견뎠습니다.
오오시마 요시마사 는 서울에 4천명을 주둔해 조슈번 이노우에 공사가 친일정권을 세우는
사이, 4천명의 일본군을 이끌고 아산으로 내려가 7월 29일 청나라 엽지초군 3,500명
을 공격하니 피습당한 청군은 500명의 전사자와 300명의 포로 를 내고 달아나는데
일본군 피해는 불과 80명 으로..... 당시 양국간 전투력에 엄청난 차이 가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군은 서울 시내에서 엄청난 규모로 화려한 개선식 을 거행한 후에, 아베 신조 총리의
외고조부 오오시마 요시마사가 지휘하는 일본군은 서울에서 평양으로 진격해 9월 15일
15,000 명이 수비하는 청군을 공격해 현무문을 부수고 다음날 평양성을 함락 시키는데
청군은 평양에서 2,000명의 전사자와 600명의 포로 를 내고는 압록강을 건너 달아 납니다.
그새 일본군이 증원되어 1군 사령관은 역시 조슈번 쇼카 손주쿠 요시다 쇼인의 제자인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맡아 청군을 추격하여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진격했으며...
2군은 사쓰마번(가고시마현) 오오야마 이와오가 지휘해 만주 여순 반도에 상륙해서
금주와 여순을 점령하니 청일 전쟁은 조슈번의 이토 히로부미가 이홍장과 마무리 합니다.
옛 조슈번으로 지금은 야마구치현 출신 국회의원 아베 신조(安倍晋三) 는 그 이름
자 신(晋 진)을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晋作)의 신(晋 진) 을 따서 지었으니...
요시다 쇼인과 신사쿠 에 외조부인 2차대전 전범 기시 노부스케 총리가 멘토 이니
이런 역사적 유래가 있는지라 아베 총리는 일본의 옛 영광을 재현 하려는가 봅니다?
2019년에 아베 신조 총리는 재임기간 2,887일을 돌파해 일본 최고 장수 총리가 되었는데
현재까지 최장수 총리는 가쓰라 다로고, 3위는 사토 에이사쿠, 4위는 이토 히로부미
인데.... 네명 모두 조슈번(야마구치현) 출신입니다. 다른 번은 총리를 단 한명도
배출하지 못한 번이 70% 가 넘는데 조슈번은 무려 8명의 총리를 배출한데다가 1~4위 라?
최장수 총리 가쓰라 다로는 조슈번 하기시 요시다 쇼인의 제자니 청일전쟁때 3사단장 으로
중국의 영구를 점령했으며 1905년 루즈벨트 대통령의 특사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 와 만나
필리핀은 미국이 차지하고 조선은 일본이 차지한다는 태프트-가쓰라 협정을 맺은 장본인
인데..... 훗날 태프트가 대통령이 되자 일본은 벚꽃 3천그루를 워싱턴에 심으니 최대 축제라?
1983년 9월 1일 대한항공 KAL 007 기가 미국의 앵커리지를 경유해 서울로 오던중 몇시간
동안이나 소련영내를 침입해 비행하다가 소련 전투기 미사일에 격추된후 유족들이
배를 타고 왓카나이 소야곶 앞바다에서 꽃을 던지며 "추념식" 을 가질때..... "망자를
소리쳐 부르며 울부짓다가 갑판을 데굴데굴 구르며 통곡하는 여인들은..... 한국인" 입니다.
반면에 "검은 옷을 입고 단정한 자세를 유지하며 소리내어 울지도 않고 슬픔에 북받쳐서
손수건으로 눈물만 꼭꼭 찍어내고 있는 흐트려지지 않는 엄정한 자세의 여인 들은
일본인" 이라.... 일본인들은 사무라이 문화이니 무사도에서는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에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밖으로 드러내 보이는걸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것일까요? 체면 치고는?
이형근 육군대장은 1945년 일왕(천황)이 항복 방송을 했을때 마침 아나미 육군장관의 집
을 방문했는데 이날 아나미는 할복 을 했으니... 할복은 칼로 배를 옆으로 그은후 다시
올려서“ㄴ" 자로 그어 창자를 쏟아내어도 바로 죽지 않으니 너무나도 고통스러운지라
가이샤쿠 (介錯 개착) 라고 해서 뒤에서 장검으로 목을 쳐 주는 사람 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날 아나미 는 일본 패전에 책임을 지고 그 고통 까지도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
으로 혼자서 할복을 했는데, 이것을 안 부인이 달려 가려고 할 때... 마침 이형근
대장이 방문 했으니 부인은 자기 집을 찾은 손님의 아침 식사를 제대로 차려준 후에야
남편에게로 달려갔으니..... 이것이 바로 “일본인 무사 아내의 마음가짐” 이라고 합니다?
군번 1호 참모총장 이형근 은 아나미 할복 다음날 황손 英王 李垠(영왕 이은) 을 찾아가니
“조선이 왜 망했느냐. 文弱(문약) 해서, 尙武(상무) 정신이 없어 군대를 키우지 않았기
때문에 망한 것이다. 그러니까 귀관들은 돌아가면 군대부터 키워주기 바란다.” 라는
말을 듣고 귀국해 1945년 12월 5일 군사영어학교 1기로 입학해 46년 1월 15일 졸업하면서
2연대장에 취임하는데... 군번 1호를 뺏긴 1연대장, 2대 참모총장 채병덕 과는 원수가 됩니다.
이형근은 이은 공을 찾아가도 일본말만 하고 냉랭하게 대하니 기분이 나빴다는데 그날 처음으로
한국말을 하면서 첫 마디가 군대부터 키워라? 고종은 일곱 부인에게서 9남 4녀를 생산했으나
성년이 된건 의왕과 순종, 영왕에 덕혜옹주 넷 뿐인데, 영친왕은 11살에 이토 히로부미 손에
끌려 일본에 간후 황족 마사코(이방자) 와 결혼해 아들 진을 안고 귀국했다가.... 젖먹이는
창덕궁에서 조선인들에게 독살당하고 10년 후에야 차남 구를 얻으니 조선인들을 의심한게라?
이토 히로부미 는 하기시에 있는 다카스키 신사쿠의 묘지에 그를 기리기 위한 묘비명을 짓고
그후 조선으로 해서 중국으로 건너가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해서 죽었는데,
우리 한국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악한의 비참하고 불쌍한 최후” 이지만.... 일본에서는
“이토 히로부미는 진짜 행운아” 라며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로 부터 부러움 을 샀다는데,
자기집 안방에서 편안하게 죽는게 행복인 한국과 달리 일본은 전쟁터에서 죽는게 영광 이라?
조선의 사대부 선비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객사(客死) 이니.... 자기집 안방에서 자식과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는게 최고의 행복 인데..... 일본의 무사들은 조선인들처럼
안방에서 죽는 것을 가장 수치스럽게 생각하니, 중국의 고사 처럼 장군은 전쟁터에서
죽어 자기가 타던 말가죽에 시체를 싸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을 최고의 명예 로 압니다.
왜국은 BC 3세기 부터 AD 3세기 까지 한반도 남부 (영산강 유역에서 경남 도서 지방)
에서 벼 농사와 청동기(후기에는 철기) 문화를 가지고 건너간 사람들이 “야요이문명”
을 이루어, 일본 원주민으로 벼농사를 모르던 수렵과 채집, 어로로 생활하던 신석기
문명의 조몬인들을 흡수해 혼혈하니 왜인으로 그들이 세운 부족국가가 왜소국들입니다.
4세기에 김해가야 왕이 건너가 통합하고 392년 부터 왜병들을 이끌고 한반도에 돌아와
김해 및 아라가야와 연합해서 신라 수도 서라벌을 포위했다가, 400년에 고구려군
5만의 남하로 패해 달아나 오사카에 야마토 왕조를 세웠으며 이후 백제인들이 건너가
일본 조정을 장악한줄 아는데, 세월이 흐르니..... 한국인과 일본인은 이렇게나 다릅니다?
장차 1905년 처럼 제2의 가쓰라-태프트 협정을 맺은 일본이 미국을 등에 업고 침략해 온다면
우린 "일본 및 미국 두나라와 전쟁" 해야 하는데, 어찌 대비해야 할지를 생각하면서 야스쿠니
신사를 뒤로 하고 걸어 나오니... 이제 도쿄 벚꽃 4번째 후락원(고라쿠엔) 과 5번째 묘가다니
역의 분쿄 文京(문경) 벚꽃 을 보아야 하는지라 지하철 구단시타에키 九段下駅 로 내려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