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은 무엇인가? 긍정적 사고를 하고 건강한 신체를 갖고 있으며 정직하고 성실한 인간. 과연 이것이 정답일까? 나는 과감하게 No라고 대답한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은 교과서에나 나오는 그런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라 도덕적인 사람의 요건이 나와있는 교과서를 잘 외우는 사람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한 사람의 올바른 인격보다는 그 사람의 배경이 되는 학벌이 주요 평가 지표가 된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그 사람의 간판만으로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계속되었던 우리 사회의 원리이자 관행이었다.
서울대 출신 국회의원이 전체의 50%을 차지하는 나라, 기업체의 사원 모집에 대졸자가 아니면 누구도 지원할 수 없는 나라, 자기 학교 후배가 아니면 거둬들이지 않는 사람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학벌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어떻게든 차별화 시켜 놓는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것들이 얽히고 섥혀 있건만, 수능 시험의 1,2점 이라는 너무나 단순하기 그지없는 차이가 이 복잡한 모든 것을 뒤집어 놓을 정도로 그렇게 위대한 것이었던가?
새 정부가 출범하면 언제나 그렇듯, 우리 사회의 교육 문제를 거론하며 새로운 교육부 장관을 임명하고 새로운 교육 입법을 마련한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육은 불타는 교육열과는 상반되게 그 질적인 측면에서나 만족도에서 선진의 수준에 이르지 못 하고 있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끊임없이 시도하고, 그러나 우리 교육은 언제나 그 전철을 반복해서 되밟고 있는 실정이다.
챗바퀴 돌 듯 그 질곡을 벗어나지 못 한 채 난항을 거듭하고 있는 우리 교육과 갈수록 그 골이 깊어지는 우리 사회의 병폐, 대학의 서열화.
이 두 난제를 풀어나가기 위한 해결책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본론>
1. 현 교육에 관하여
1) 현 교육의 문제점
우리 교육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누구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이 우리는 대학이라는 곳에 얽매여 어떻게든 그곳에 들어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따라서 모든 교육은 입시를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따라서 개인의 특기나 적성을 살릴 수 있는 기회는 애시당초 주어지지 않았고 누구나 똑같은 교과서와 획일적인 내용을 암기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중간과 기말 고사를 비롯해 매달 치러지는 모의 고사까지 일년동안 방학을 제외한 거의 매달동안 시험에 시달려야 했다. 시험 결과는 그 점수를 일렬로 배열하여 학생들을 무한 경쟁으로 내몰았다. 결국 학교라는 공동체는 사회화와 전인적인 인간을 양성한다는 본연의 의무를 서서히 잃어갔고 일등과 꼴찌의 계급아닌 계급이 지배하는 노예사회가 되어버렸다. 학교 밖에서는 과외 열풍으로 최고 몇 백씩하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기 위해 학부모는 팔을 걷어부치고 과외비 마련에 애써야 했다. 이런 과외 열풍 또한 빈부의 차를 드러내어, 실로 과외비 지출이 많은 학생의 경우에 대학 합격률이 높은 경향을 드러내었다.
말을 깨치기 전부터 영어를 가르치려드는 섣부르기 짝이 없는 부모부터, 교육열로 말하자면 우니 나라는 가히 세계적인 수준이다. 그 자체로는 큰 자랑거리라고 할 수 있겠으나, 교육의 내용이나 입학전형 과정에서 노출되는 크고 작은 오류들에 대해서 철저하게 반성해야 할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① 획일화에 빠진 교육
분명히 우리 나라는 교육의 평준화가 잘 되어 있는 나라이다. 이것은 자랑할 만하다 평준화를 위해 국가가 노력하는 모습은 여러 면에서 볼 수 있다. 사립 초등학교가 ‘있는 집’ 또는 ‘가진 집’의 독점물이 되지 않도록 입학 기회를 평등화하기 위해 ‘제비뽑기’를 한다. 학구제를 설정하여 이름 있는 학교로 학생들이 집중 지원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교사들의 이동이 정기적으로 있어 우수교사들이 한 군데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으므로 교사평준화가 수월하다. 공립학교나 사립학교간의 학교 차가 없다. 사립학교라고 더 유명해지지 않는다. 지원만 하면 사립학교 교사가 공립학교 교사도 될 수 있다.
수업료도 사립학교라고 해서 더 비싸고 공립학교라고 해서 더 싸지도 않다. 적어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서는 그렇다. 아마도 이렇게 수업료를 받는 나라는 별로 없을 것이다. 대개는 사립학교 등록금이 공립학교보다 많은 것이 통례이다.
국공립학교와 사립학교에서 학생들이 배우는 교육과정도 다르지 않다. 과목도 같고 수업시간표도 별 차이가 없으니까 아마도 수업시간을 알리는 벨소리도 일정시간에 동시에 울릴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나라가 언제쯤이면 획일 교육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이다. 개성이 존중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우리는 획일주의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안다.
중국 음식점에 가더라도 모두가 자장면만 찾지 않는다. 물만두를 찾는 사람이 있고 잡채밥을 주문하거나 볶음밥을 찾기도 한다. 은행에 돈을 예금하더라도 상품에 따라 이자율이 각각 다르다. 한 은행에서도 그렇지만 은행간 상품에 따른 이자율의 차이는 대단하다.
그런데 학교는 어떠한가? 개인이 가고 싶은 학교가 다양하게 있는가? 특기생으로 키우고 싶은 학부형들의 바램을 만족시킬 만한 학교가 있는가? 국내에는 물론 없다. 그렇다고 모두 국외로 자녀들을 보내 교육시킬 수도 없다. 외국 교육이 국내 교육보다 더 우수하거나 우수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문제는 학부형들이 원하는 교육상품이 국내에서는 제공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더 좋은 교육상품을 고르자면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거나 과외를 시킬 수 밖에 없다. 여유가 있는 학부형들은 아이들을 전문 입시 학원에 보내거나 실력있는 교수에게 특별지도를 받게 한다. 고등학교가 지금 사정에 맞는 ‘교육 상품’이라면 왜 밤늦게까지 모든 자녀들을 학원으로 보내겠는가?
그것은 우니 나라 교육이 너무나도 구시대적인 획일주의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공사립학교의 다양성 및 교과과정과 교수 방범의 독창성도 인정되지 않는다. 학생이 가고 싶은 학교가 다양하게 있기만 해도 우리 나라에서 ‘학원’이 유행할 이유가 없다.
민주주의 교육은 평준화로 끝나서는 안 된다. 교육의 수월성이 보장되는 학교제도가 정착되어야 한다. 수월성이 보장되는 학교에서는 빈부격차를 운운하는 호된 사회적 비난을 받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학교에서는 능력은 있지만 비싼 수업료를 부담할 수 없는 학생들을 위하여 충분한 장학금을 제공하면 된다.
교육과 사회는 획일적인 단선형 생활방식에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복합형 생활 환경에서 이뤄지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② 입시 위주의 교육
지금 고등학생에게 왜 학교에 다니는지 그 이유를 물어보자. 아마 대답은 천편일률적일 것이다. 하나같이 ‘대학에 가기 위해서’라는 대답을 했을 것이 불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이상하리 만치 대학에 목숨을 건다. 한해에도 수 십여 명의 학생이 수능 성적을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아직도 밤늦은 시간까지 책상 머리에 불을 밝히고 있다. 입시 학원은 남는 장사라는 소문은 틀린 말이 아니며, 방학이면 방학 나름대로, 새학기면 새학기 나름대로의 프로그램으로 학생들을 맞이한다. 매해 입시철이면 각 대학의 경쟁률과 입시 요강이 뉴스의 톱을 장식하고 수능 시험 당일에는 모든 기관이 시간을 늦추어 시작한다.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대학생이 되기 위하여.. 과연 이들은 왜 대학에 이렇게 목을 매는 것일까? 단순한 지성인이 되기 위해서? 말 그대로 높은 학문을 익히고 교양까지 연마한 인텔리가 되기 위해서라면 이것은 거짓임에 틀림없다.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먹고 사는 것조차 암담한 우리 사회의 이상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이다.
대학생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 고등학교는 또 얼마나 극심한 고통을 치르고 있는가? 그리고 그 고통을 직접 받아내는 우리 학생은 또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대학의 문턱에 들어서는 일, 그것은 대학의 문턱을 넘어서는 일보다 수십배 아니 수백 배로 힘든 게 우리의 실정이다.
③ 과외 지상 주의
우리 모두는 과외의 심각성에 대해 너무나 잘 안다. 그러면서도 왜 과외는 없어지지 않는가? 내가 아는 S대학 학생은 법대생이다. 이 친구도 과외 공부를 가르친다. 그런데 이 친구는 자가용 한 대를 사서 학교까지 끌고 다니고 가끔 자신의 부모와 동생을 데리고 교외로 유명 음식점에 가기도 한다. 이 친구의 월수입은 국립대 시간강사보다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가끔 신문에 보도되는 일이지만 정부는 과외를 근절시키기 위해 과외를 하는 현직 교사들을 색출하여 엄중하게 다스려 일벌백계주의로 나간다고는 하나 아무리 그래도 과외가 근절되었다는 기쁜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외국에서는 교육학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단선형 또는 복선형 학제라는 것으로 구별한다. 복선형은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의 자녀들이 가는 학교로 그 체제가 각각 다르게 분리되어 있는 학제를 말한다. 단선형은 민주적인 학제로서 모든 아이들이 한 가지 학교 체계로 통한다. 물론 우리 나라 학제는 단선형으로 사회계층을 구별하는 비민주적 학제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단선형 학제의 이상을 100%살린 제도로 고등교육기관까지 가는 문이 너무나 확 뚫려있다. 그 덕택으로 우리 나라 고등교육기관에 재학중인 학생의 총인구에 대한 비례는 일본의 2.5%보다 많은 4.45%이다.
그러나 이런 단선형 학제가 여러 가지 예상치 않은 결과를 초래했다. 그 중의 하나가 한국 특유의 교육제도이다. 학교, 학원, 과외로 이어지는 교육체계는 한국식 단선형 학제라고 까지 표현할 수 있는 세상에 보기 드문 학제를 조성하였다. 한국식 단선형 학제는 학교의 삼중구조를 이루면서 정규적인 학교 교육의 약화로까지 발전하였다.
한국의 단선형 학제는 교육 기회를 평등화하는 데 큰 공을 남겼다. 그 대신 교육의 질은 저하되었다. 한국 교육의 질을 저하시키는 원인 중에 학원과 과외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오죽하면 ‘학원식 교육’이라고 하지 않는가? 학원과 과외는 교육 전문가에 의해 운영되지 않는다.
학원과 과외공부에서는 입학자격이나 졸업자격도 안 따진다. 이것이 개인적인 학습활동일 때는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이것들이 제도화된 교육기관으로 행세하게 되면 큰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다. 학생들이 한국식 단선형 학제를 통해 고등교육기관에 오르는 통로를 넓힌 것은 좋았지만 망국적인 사교육비 지불은 경제와 사회 및 학교 질서를 무참히 파괴하고 있다. 그리고 교육의 질조차 떨어뜨리면서 위태로운 사회질서를 조성하고 말았다.
과외를 줄이고 대입경쟁을 줄임으로써 교육질서를 바로잡자고는 외치지만 사태가 진전될 기미는 영 보이지 않는다. ‘과외는 왜 시키나요?’라는 물음에 학부모는 이렇게 말한다. ‘남이 다 하니까요.’ 이 말은 학교 교육을 믿지 않는 학부모들이 하나둘씩 학교를 떠나서 자기 아이들을 학과공부와 특기교육을 위해 과외를 시킨다. 이 풍조가 이제는 한 아파트 단지 어머니들에게 유행처럼 만연되고 심지어는 전국 각지에까지 퍼져나갔다.
과외나 학원을 퇴치하고 삼중구조의 한국식 단선형 학제를 극복하려면 무엇보다도 학교 교육의 질을 높이는 길밖에 없다. 과외와 학원이 제공하는 기능을 학교가 흡수하는 것이다.
각급 학교의 교육의 질이 향상되면 입시 위주의 교육이나 입시경쟁도 그 모습을 달리할 것이다. 우리는 정규학교 교육을 강화하고 향상하는 방법을 찾아서 이를 달성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과열 과외와 늘어나는 학원을 막는 길은 오직 이 방법 뿐이다. 그것은 우리의 정규학교 교육을 교육 원리에 따라 정상궤도에 올려놓는 것이다.
2) 현재의 교육 개혁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항상 내거는 공약이 있다. 그것은 바로 교육 개혁이다. 지금껏 수 차례 그 모습과 내용을 달리해온 교육 개혁은 어느 덧 7차에 접어들었다.
현 정권의 교육 개혁의 목표는 이른바 ‘신지식인’으로 대표되는 세계화, 정보화 시대에 걸맞는 노동력의 형성이다. 즉 자본이 필요로 하는 노동력 확보와 수월성 추구를 교육의 중심 목표로 추진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학교 구조 개편을 진행시켜 왔다. BK21 정책, 대학의 구조개편 등을 통해 고등교육의 신자유주의적 개편을 추진하였으며 7차 교육 과정과 자립형 사립학교 도입을 통해 초중등학교에 대한 개편을 본격화하고 있다.
2. 한국의 대학에 관하여
1) 현 대학 교육의 문제점과 그 개혁의 방법
배움의 전당, 수준 높은 지식을 배우는 인텔리들이 모여있는 곳. 대학이라는 곳은 바로 이런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대학은 ‘우골탑’이라는 그 이름과는 걸맞지 않게 그 의미가 지나치게 훼손되었다. 이제 대학은 신성한 지식 연마의 장이 아닌, 단순히 취업을 위한 필수 조건이 되었으며, 대학도 대학 나름이라는 고리타분한 사고 덕분에 자신의 적성과는 상관없이 대학의 간판만을 고려해 들어간 학생들로 가득하다. 결국 우리 대학가는 매년 수 백대 일을 자랑하는 편입시험으로 술렁이고, 졸업 시즌이면 대졸자의 취업 경쟁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르고 있다.
현 우리 대학 교육에 어떠한 문제가 있는 것이며 그 문제를 걷어내는 해결책에는 어떠한 방법이 있을까?
① 대학이라고 해서 모두 대학인가?
우리 나라 대학 교육의 경우 양적인 면에서는 가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2000년을 기준으로 4년 제 대학이 192개, 전문대가 158개이다. 대학생 수는 인구 1만 명당 495명으로 미국의 540명 다음으로 많다. 그러나 질적 측면에서는 세계 최고와 상당히 거리가 있다. 국내 최고의 대학이라는 서울대조차 종합적인 평가에서 세계 100위권 안에 들지 못하며 과학 논문 인용색인에 등재된 국내 대학 전체 논문수가 일본의 6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현재 고등학교 전체 졸업자의 고등교육기관(전문대 이상) 진학률은 70%정도. 오는 2003년에는 대학 지원자 수보다 대학입학정원 수가 더 많은 교육 공급 초과 현상이 일어날 전망이다. 대학이 가만히 앉아서 학생들을 받아들이던 좋은 시절은 지나간 것이다. 이제는 대학도 무한 경쟁 속에서 튀어야 살아남는다.
바야흐로 한국은 대학 교육 평등의 나라이다. 그러나 대학이라는 교육 기관은 전문대학과 개방대학과는 엄연히 다르다. 이것은 대학의 전통과 권위를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더욱 중요한 일이다.
우리 나라에서 대학은 온 국민의 선망의 대상이다. 근로 청년들에게 면학의 기회를 주고자 개방대학이라는 학교를 열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개방’이란 말이 주는 인상이 싫어서 산업대학이라는 명칭을 선호하는 것 같다. 앞으로는 산업이라는 글씨도 없어지고 그냥 대학으로 이름을 붙여주기를 원하는 것 같다.
교육부의 인가 없이 각종 학교라는 자격으로 고등교육기관 역할을 하는 학교들도 불원간 교육부인가를 받으면 대학 간판을 달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국가적 견지에서 보았을 때 ‘학술연구의 전당’이란 위치와 기능을 이어갈 참다운 대학은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카데미즘의 문제이다. 우리 나라도 이제는 노벨상을 수상할 만한 인재가 나와야 한다고 하는 데 이들을 어디서 어떻게 배출할 수가 있느냐가 걱정이다. 대학은 학자들의 집결지이다. 예전에는 우리 나라에서도 성균관이란 배움의 장소에 학자들이 모여 학문을 연마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와 전통을 오늘에까지 계승 전파시키지 못하고 서양의 대학제도를 받아들였다. 고등교육 기회의 확장과 민주교육의 발전에는 커다란 업적을 올렸지만 동양이다 서양의 전통적 ‘학문적 전당’을 수립하는 데는 그다지 자랑할 만한 업적을 내지 못했다. 오히려 우리는 대학과 일반 고등교육기관을 혼돈하여 대학을 직업교육기관으로까지 전락시키고 말았다. ‘학문의 전당’이라는 명예와 권위는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하나라도 좋으니 미국의 시카고 대학과 같은 ‘학술의 전당’이 우린 나라에도 생겼으면 좋겠다는 희망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명예로운 대학들이 하나둘 늘어나서 진정한 면학 분위기를 조성해 주었으면 하는 염원이다.
1891년에 설립되어 실제로는 1892년 10월에 개교한 시카고 대학이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된 것은 그 대학의 연구소 활동 때문이었다. 고대 문명 연구의 선봉자 역할을 한 동양 연구소(Oriental Institude), 여키스(Yerkes)천문대, 존 두이 박사의 실험학교, 대학 병원, 금속연구소, 원자력 연구소 등이다. 또한 이 대학의 출판국에서는 이름 있는 학술지와 연간 평균 50권 이상의 책을 출간하고 있다. 시카고 대학이 특히 학술의 전당으로 이르이 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관한 기본 연구가 시카고 운동장에 설치된 건물에서 이루어졌는데, 시카고 대학은 원자력 연구를 위하여 미식축구의 서막을 올렸다 장소이기도 한 운동장조차 희생물로 삼았던 것이다. 시카고 대학은 개교 당시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이름난 교수들을 끌어모았다. 이들 중에는 대학 총장을 지낸 9명의 유명 교수들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시카고 대학은 개교 초기부터 ‘학술의 전당’으로서 이미 이름이 나 이었던 것이다.
대학이라는 곳은 엉터리 ‘우골탑’이 아니다. ‘상아탑’이라고 까지 칭송되는 대학은 고귀하고 일면 거만하기까지 한 풍채를 지니고 있다. 영국에는 12세기에 개교한 옥스퍼드 대학과 캠브리지 대학 등 유명한 대학들이 있다. 그런데 산업사회 발전으로 대학 수와 학생 수를 늘려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래서 설립된 새로운 대학이 ‘대학교 대학 (University College)’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대학들이 1879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영국과 그 식민지 국가에 많이 설립되었다. 이 대학의 특징은 학위를 주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옥스퍼드나 캠브리지 대학에서도 이와 같은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일종의 ‘신흥대학’을 지방도시에 설립했다. 그러나 학위만은 본교에서 수여하게 되어 있다. 영국의 ‘대학교 대학’중에는 20년 또는 그 이상 본교의 감독을 받다가 독립된 대학들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이것은 해방 직후 일제 시대 때의 전문학교를 4년 제 대학으로 승격시킨 사실과 전문학교 2년 생을 그대로 대학 2년 생으로 승격시킨 사실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대학 운영이다. 우리 나라는 한국적인 풍토에서 한국적인 방법으로 여태껏 대학 운영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육의 전통과 노하우가 없는 나라에서는 성인 교육의 민주적 물결로 말미암아 대학 교육 자체의 질이 저하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 대학 입학 전형 과정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는 것은 그것이 대학에 관계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590개의 많은 고등교육 기관 중에서 세계적으로 알려질 만한 ‘대학다운 대학’이 있기를 바라는 심정이다.
② 대학도 경영이다.
‘고귀한 교육 업무에 충실해야 하는 곳, 상업적인 영리 추구는 어울리지 않는 곳’ 지금까지 우리가 ‘대학’이라는 교육기관에 대해 갖고 있었던 기본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이제는 대학을 ‘운영’하는 것보다 ‘경영’해야 하는 시점이다.
우선 대학은 영리혐오증에서 벗어나 스스로 ‘대학주식회사’로 변신해야 한다. 교육계에 시장원리는 도입하는 것에 대해 교육계는 적지 않게 반발한다. 학교 경영 혁신 수단으로 채택된 업적 평가나 특별상여금은 대부분 ‘나눠먹기식’ 중심으로 집행된다. 우수한 교사나 그렇지 못한 교사간에 차이를 두지 않고 사이좋게 나누어가지는 교사공동체는 자유경쟁, 이윤추구 등의 행동규범을 배격하게 마련이다.
미국, 유럽에는 회사의 형태를 지닌 대학이 많다. 그 중에는 이익을 많이 남겨 그 대학의 주식이 월가에서 주목받게 된 경우가 흔하다. ‘고귀한 학문의 상아탑은 상업주의와 구분돼야 한다.’는 의식이 팽배한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다. 그러나 사고를 조금만 전환해보면 이는 그리 문제될 게 없다. 하버드 대학이나 스탠포드 대학도 여러 가지 영리 활동을 하고 있고 이를 통해 학교 재정을 충당한다. 물론 대학교육의 공공서이 존중되야 함은 기본 전제다. 하지만 공공성을 준수한다는 것이 비효율적인 대학경영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대학이 지출을 초과하는 수입원을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대학교육의 질을 보장하는 중요한 변수이기 때문이다. 대학이 창출해내는 지식의 미래가치가 높다면 주식 시장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을 것이고 이는 다시 대학의 발전을 위한 재원으로 사용된다.
이를 위한 전단계로 대학운영에 기업경영 방식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교수는 학문에 전념하는 한편 총, 학장은 전문경영인으로서의 역할을 더욱 확대해야 한다. 능력과 성과에 따른 보상제도를 운영하고 일방적으로 지식을 만들어서 내놓는 대학이 아니라 소비자, 즉 학생, 학부모, 기업의 욕구에 맞는 지식을 제공해 경쟁력을 갖춰나가야 한다. ‘팔릴만한’ 지식을 생산하고 스스로 재원을 충당한 수 있는 재정 구조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학과, 학부, 프로그램 단위로 벤처기업을 하나씩 설립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말로만 공공성을 외치고 지출에 못 미치는 수입에 허덕일 경우 대학은 본연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영리 행위가 대학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지만 목적을 이행하기 위한 영리 행위는 활성화되어야 한다.
2) 대학의 서열화
살면서 누구나 하는 거짓말이 있다. 철부지가 “엄마 아빠 똑같이 좋아!”라며 떠는 아양, 사랑에 달뜬 연인들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죽을 때까지 너만을 사랑해”라는 속삭임, 늙어서 내뱉는 “빨리 죽어야지..”라는 한탄.. 처음 입에서 새어나오는 속내와는 다르거나 그때는 진심이었더라도 결국 지킬 수 없게 되는 말들이다. 아이는 자신의 변덕을 주체할 수 없고, 사랑은 결코 영원하지 않으며 죽음 앞에서 초연한 인간은 정말 드물다. 어쩌면 “학벌 따지지 않는다” “학력 차별하지 않는다”하는 말도 그런 거짓말에 속할지 모른다.
얼마전 경기도 광주의 한 입시 학원에서 큰 화재가 발생했다. 뉴스에서는 이 화재의 원인을 모두 시설 변경을 불법으로 한 학원장에게 넘겼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밤늦은 시간까지 학생들을 붙잡아 놓을 수 밖에 할 수 없었던 우리 사회의 풍조 탓이기도 하다. 좋은 대학을 가야 성공을 하고 인정을 받을 수 있어서. 죽도록 공부해서 부모님의 얼굴에 미소를 띄워주고 싶어서. 학생들은 하루 20시간 이상을 입시라는 전장에서 사투를 벌였다. 학벌이 인생을 좌우하는 현실에서 당사자들에게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대학의 서열화는 지배와 종속으로, 참여와 배제로 귀결되는 정치판에서의 지역주의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으며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기에 더욱 문제가 된다. 더군다나 우리 나라에서 보여지는 대학의 서열화 현상은 뚜렷한 근거도 없다. 시설면에서나 학생, 교수들의 능력과 연구실적에 있어서 각 대학들은 너무도 비슷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대학 내에서는 그나마 청년의 순박한 양심과 지성인임에 대한 인식으로 서열이 느슨했지만 사회로 나오면 자신들의 연줄을 찾아 성벽을 쌓고 만다. 이렇듯 대학 서열화는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하여 구조적으로 피지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하며 피지배 대학 출신들을 자포자기적 인생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3. 교육개혁으로 대학의 서열화를 막을 수 있는가?
우리 대학에 교육개혁이란 용어가 대학가의 정책이슈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닌 것 같다. 대학은 바뀌어야 한다. 대학은 변해야 한다. 우리의 대학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높은 것을 볼 때, 분명하지는 않지만 대학 또는 대학 교육이 이대로는 안되며 어떻게든 변해야 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한 것 같다.
우리 나라처럼 교육 개혁 정책 또는 교육 개혁을 위한 학술 논문이 많은 나라도 드물 것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석학들, 교육관계 원로들 그리고 정책을 입안하는 정부 당국자들이 제안한 헤아릴 수 없는 정책 대안과 개혁안은 다 어떻게 되었으며, 왜 우리 대학은 아직까지 교육 개혁이라는 과제에 대한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정부는 정부대로, 학교는 학교대로, 교수는 교수대로, 학부모 및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제각기 나름대로 수많은 제안과 대안을 제시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으며, 이와 더불어 제시된 수많은 정책 대안들이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는 것이 우리 교육을 바라보는 일반적인 견해라고 볼 때, 과연 제대로 된 명확한 정책 대안이 없어서인가? 사회의 구조가 변화하고, 산업이 재편됨에 따라 학교교육 또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시대적인 요구이며, 사회적인 요구로 개혁이라는 용어를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하나의 흐름으로 봐야 할 것이다.
- 교육 개혁을 통한 대학 서열화 폐지의 가능성
과연 이것은 가능한 일일까? 사실상 이제껏 수많은 교육 개혁이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어떠한 개혁을 실시하더라도 결국 고3이 되면 입시를 걱정해야 하는 현실에서 진정한 교육 개혁은 그 자체로도 요원한 일이다. 수 십년간 고착화된 대학의 서열화가 개혁을 막고 있는데 과연 개혁이란 이름이 그 높은 벽을 넘을 수 있는 것일까?
1) 학부제 도입
교육부는 ‘수요자 중심’ 논리와 대학의 경영 합리화를 앞세워 학부제 도입을 사실상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대학원 교육이 전제되지 않은 학부제는 사상누각이며, 특히 교육분야의 수요자 중심 논리는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우리 나라 대학의 경쟁력이 약한 것은 학부제가 실시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전국의 대학들이 수직적인 줄서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대학간의 의미있는 경쟁을 위한 인센티브가 없는 상황이다. 대학간의 경쟁이 필요하다는 것을 교육부도 알기는 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국내 대학간 평가 및 순위 매김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국내 10여 개 상위 대학 대학원을 미국의 최우수 대학과 비교한다는 것이 교육부의 입장이다. 이는 ‘국민의 정부’ 아래 교육부의 발상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렵다. 평가가 무의미할 정도로 국내 대학들의 순위는 이미 고정불변이며 앞으로도 조정될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또한 나머지 대학들은 모두 외국인이 다니는가? 대학원 중심 대학은 학부 정원이 대학원 정원을 결코 능가하지 않는 것으로 우리 나라 대학에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본교 출신 대학교수 채용비율을 쿼터제로 제한한다는 계획은 대학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동종번식의 정도는 서울대가 제일 심하고 대체로 연세대, 고려대가 그 다음이다. 대학들이 전반적으로 평준화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평준화한 몇 개의 그룹을 형성하고 있지 않는 현실에서 하버드대나 스탠퍼드대는 국내의 대학교수 채용 관행에 있어 결코 모델이 될 수 없다.
만병의 근원은 하나다. 대학과 학생 공히 1등부터 꼴찌까지 한 줄로 평가하고 배치하는 현 상태의 대학 구조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교육개혁은 성공할 수 없다. 교육여건과 교수수준의 상대적 평준화에 걸맞도록 대학간의 현행 엉터리 서열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2) 무시험 전형 제도
과거 김영삼 정부는 ‘21세기의 새지평 교육개혁’이란 저서를 통해서 “신교육체제는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이른바 교육 기회에 있어서 ‘열린 교육 사회’ ‘평생학습사회’의 구축을 지향한다”는 교육이념을 천명한 바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교육을 받을 수 있게’하는 사회가 두렵다는 생각이 든다. 학교 체제는 ‘열린 교육 사회’만 지향해서는 안 된다. ‘닫힌 교육 사회’도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닫힌 교육 사회’란 학교와 학교간의 매듭을 건너가는 절차와 과정에 있어서 엄격한 선발기준이 있어서 엄격한 선발기준이 있어야 하고 교육 자체도 질을 엄수해야 하는 것이다. 교육은 열려 있기만 해서는 안된다. 닫혀있는 모습도 엄연히 있어야 한다.
1998년 7월 3일 전국 187개 4년 제 대학 총장들은 전북 원광대에서 한국대학교 교육 혐의회 주최 전국대학총장 세미나를 개최했다. 그 세미나에서 “대학간의 획일적 서열화를 막기 위해 수능 성적이나 교과성적 이외에 다양한 방법을 통한 학생선발을 하기로 하고 이로 인해 추천이나 사회봉사활동 등 일정한 증명 또는 학교 성적으로 뽑는 무시험 전형 선발 인원을 대학 인원의 20%가 넘도록 하고 연차적으로 40%까지 확대키로 했다.”
어쨌든 우리 나라는 학교 차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그 관계자들은 대단히 예민하다. 자기 대학이 2류다, 3류다 하는 말을 듣기 싫기 때문이다. 이것은 187개 4년제 대학총장들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래서 전에는 전국학력고사의 성적분포를 대학별로 신문에 보도하는 것을 반대했다. 아주 싫어했다. 우리 나라에서 서울대에 지망하는 학생들의 학력고사 성적이 절대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알고 있다. 서울대 다음에는 어떤 대학이고, 그 다음은 어디라는 것도 다 안다. 그러나 2위로 되어있는 대학마저 ‘대학서열화’를 아주 싫어했다.
그래서 이번에 발표된 내용이 ‘무시험전형제’이다. 그러나 ‘추천이나 사회봉사활동 등에 대한 일정한 증명 또는 학교 성적으로 뽑는 무시험전형제가 어떻게 대학 서열화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간다. 무엇보다도 무시험전형 지원자들 스스로 대학간의 차이를 인식하고 자기에게 알맞은 대학을 선택시 원서를 내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아마도 대학총장들은 지원학생들이 대학의 서열화는 인정한 망정 이것을 입 밖으로 내지는 말라는 주문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생각하는 대학총장님들이 많이 계시다면 참으로 슬픈 일이다. 대학교육에 ’열린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닫힌 면‘이 존재한다는 엄연한 ’사회적 사실‘을 그분들은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사회계층의 차가 어는 곳에서든지 존재하듯이 대학에도 학교 차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일류다 이류다 하는 평가가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일류대학이나 이류대학이나 똑같이 생각해 달라는 것은 어떤 이상경을 꿈꾸는 것이다. 일류와 이류 또는 삼류 대학이 있다는 이야기는 각 대학이 스스로 질을 높여서 상향 이동하는 선의의 경쟁을 할 수 있는 사회도 있다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대학의 질’에 있는 것이다.
3) BK21과 대학 서열화
BK21 (두뇌한국 21사업)는 21세기 지식 기반 사회의 도래에 대비해 정부가 향후 7년간 매년 2000억 원씩 총 1조4000억 원을 대학에 투입, 창의적 두뇌를 양성하겠다는 야심찬 사업이다. 두뇌한국 21사업이 그 동안 정부가 대학을 지원해왔던 방식과 다른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서울대, 포항공대, KAIST 및 사립대학 중 극소수를 선정해서 이들을 집중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연구중심 대학으로 육성한다는 구상이다.
이는 우리 나라 박사학위 소지자의 76%가 몰려있는 대학이 정부가 투자하는 연구비의 10.6%만 지원받고 있는 현실을 타파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우수인력을 양성할 수 없다는 절박한 인식에 따른 것이다.
2000억 원이란 돈은 이제까지 대학교육 역사상 한 번도 거론된 적이 없는 어마어마한 액수이다. 이런 엄청난 규모의 돈을 건국이래 처음으로 대학에 투자하는데, 그것도 극소수 선택된 대학에만 집중적으로 지원하겠다고 하니 각 대학 당국은 신경을 곧추 세우지 않은 수 없는 형편이었다. 교육부는 매년 투자되는 2000억 원의 예산 중에서 기초과학, 응용과학, 인문사회 분야의 3개 분야로 나누어서 각각 500억 원씩 총 1500억 원을 투자하고 나머지 500억 원은 지방대학에 배정해서 산업계와 연계된 인력을 양성하도록 할 방침이다. 이 500억 원은 집중지원 분야에서 배제된 대학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분야 구별 없이 균등 배정되도록 했다. 교육부 관점에서 본다면 이 사업은 나름대로 합리성과 공평성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업에 대한 반발의 목소리가 드높았다. 이 엄청난 돈을 극소수 대학에만 투자하면 대학들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더욱 심화된다. 대학 교수들의 절대 다수는 ‘지금도 연구비가 형편없이 모자라는 상황인데 최상위 대학 몇 개만 선정해서 집중적으로 지원한다면 나머지 대다수 대학들은 그나마 모자라는 연구비마저 박탈당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교육부는 이 사업에 투자되는 2000억 원의 예산이 새로 확보되는 것이라고 강변하지만 이제까지 다른 명목과 다른 경로로 지급되던 연구비의 일부가 이 사업으로 전용될 것은 확실해 보인다. 이렇게 되면 매년 2000억 원씩 지원되는 예산 중 대학원 중심대학 육성 사업에 할당된 1500억 원을 나누어 갖는 서울대 등 극소수 대학에는 엄청난 경제적 혜택이 돌아가지만 나머지 대다수 대학들은 오히려 연구비 부족현상이 심화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특혜 지원은 대학간의 공정경쟁을 헤치고 우리 사회의 고질인 대학 서열화를 더욱 심화시킬 뿐이다.
<결론>
모든 대학이 일렬로 줄서기를 하고 있는 우리 나라의 대학들과 그 줄의 맨 앞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밤낮없이 공부에 시달려야 하는 우리 학생들. 그래서 인지 우리에게 공부라는 단어는 친숙하고 즐겁게 다가서지 않고 지겹고 짜증나는 것이 되어버렸다. 시험 성적을 기준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줄 세우는 우리의 현실 뒤에는 ‘용의 머리’에 올라서기 위한 치열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입시 경쟁은 극소수 명문대 입학을 놓고 벌이는 타인과의 싸움이며 이 싸움은 승자와 패자가 확연히, 그리고 거의 영영 갈리는 단판 승부이다. 명문대 배지를 달았느냐 못 달았느냐로 한 사람의 신분이 평생 결정되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계급적 질서로 굳어진 ‘대학 서열화’는 학생과 학부모를 무한출혈경쟁으로 내몰고 있다. 우리 나라의 모든 대학은 서울대를 중심으로 거의 획일적으로 서열이 매겨진 상태이며 출신 대학의 서열은 곧 자신의 등급과 직결되므로 수험생들은 한 단계라도 더 높은 대학에 가려고 무한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껏 수많은 교육 개혁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대학 서열화라는 근본 원인을 놔둔 채 입시의 절차와 방법에만 손을 댔기 때문이다.
대학을 평준화해 모든 대학이 동일선상에서 경쟁하도록 한다면 이러한 경쟁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물론 대학 평준화란 발상이 우리의 현실과 어긋나는 발상이긴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이 과격한 발상이 성공한 예가 있다. 중학교 무시험 제도의 도입과 고등학교 평준화가 바로 그것이다. 대학의 경우와 그 수준이 다르긴 하지만 우리는 그 반례를 프랑스와 독일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나라들에서는 대학 입학 자격시험에만 합격하면 어느 대학이든 골라서 갈 수 있다.
만일 이 방안이 실현만 된다면 우리 사회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학생들이 과중한 입시 부담에서 벗어나 고등학교 시절을 창의적인 경험에 투자하면서 인간답게 보낼 수 있다. 대학들은 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 지금까지 고득점자를 싹쓸이 하고 정부와 사회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으면서도 자기개발에 게을렀던 명문대의 각성을 유발하게 되고 이들의 기세에 눌려 있던 다른 대학들도 학교 발전에 힘을 쏟을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서울대 패권주의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의 학벌주의 병폐도 자연스럽게 치유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대학의 서열화가 없어지지 않는 한 어떠한 교육 개혁도 성공할 수 없다. 교육 개혁을 통한 대학 서열화의 폐지란 불가능한 일이다. 대학 서열화가 사라진 후에라야 우리 교육에서 커다란 변화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많이 썼다. 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