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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증 尹拯
윤증(尹拯. 1629 ~ 1714)은 조선 후기 정치사(政治史)에서 매우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를 그렇게 만든 가장 큰 요인은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분화(分化)이었다. 윤증(尹拯)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 1610 ~ 1669)에서 비롯된 송시열(宋時烈)과의 이런 저런 갈등으로 서인(西人)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고, 조선 후기의 정치사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윤증(尹拯)은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조선 후기 ' 산림(山林) '의 전형적인 삶을 보여주었다고 말할 만하다. 송시열(宋時烈)은 드물게 관직(官職)에 나아갔지만, 그는 평생을 벼슬하지 않았고 거의 모든 시간을 충청도(忠淸道) 일대에서 머물렀다. 서인(西人)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될 때 윤증(尹拯)은 소론(少論)의 영수(領首)로 추대되어 노론(老論)의 송시열(宋時烈)과 대립하였다.
그의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 또는 유봉(酉峰)이다.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외증손이고, 아버지는 선거(宣擧)이며, 어머니는 '공주 이씨(公州 李氏)'로 장백(長白)의 딸이다. 아버지 선거(宣擧)는 김집(金集)의 문인(門人)으로 일찍이 송시열(宋時烈), 윤휴(尹虧), 박세채(朴世采) 등 당대의 명유(名儒)들과 함께 교유하였다.
출생과 성장
윤증은 인조(仁祖) 7년인 1629년 5월 28일에 한양 정선방(貞善坊 .. 지금의 종로 3가 일대)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그의 자질을 보여주는 일화(逸話)가 몇 개 전하고 있다. 그가 7세 무렵 할머니인 '성씨 부인 .. 우계 성혼의 딸'이 손자들에게 가묘(家廟)에 참배하도록 하였는데, 끝나자마자 다른 아이들은 웃고 떠들어댔지만, 윤증은 두 손을 단정히 모으고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성씨 부인은 남편 윤황(尹煌)에게 ' 이 아이는 특별하다 '고 말했다.
10세 무렵에는 '영지주(詠蜘炷) .. 거미를 읊다'라는 시(詩)를 지었는데, 거미가 매달려 그물을치니 / 가로지른 다음에는 위로 아래로 / 잠자리에게 부탁하노니 / 조심하여 처마 밑에는 가지 말기를.. 이라는 내용이었다. 좌의정을 지낸 조익(趙翼)은 그 시(詩)를 보고 ' 이 아이가 뜻을 채워나가면 어짊을 다 쓸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부사(父師)를 시작으로 유계(兪棨)와 송준길(宋浚吉), 송시열의 3대 사문(師門)에 들어가 주자학(朱子學)을 기본으로 하는 당대의 정통유학을 수학하면서 박세당, 박세채, 민이승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대성하였다. 특히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는 많은 문인(門人)들 중 유독 뛰어나 고제(高弟)로 지목되었고, 서인계(西人系) 정통으로서는 주자(朱子)의 성리학(性理學)을 바탕으로 하는 의리지학(義理之學)을 체득하였다.
그의 스승 가운데 유계(兪棨)는 '윤증'의 대책을 보고 ' 양한(兩漢 .. 전한과 후한)의 문장이자 정주(程朱 .. 정자와 주자)의 의논 '이라고 격찬하였다. 그는 스승 김집(金集)을 정성껏 모셨으며, 그가 별세하자 기일(忌日)에는 항상 소식(素食)을 하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제사에는 반드시 참석하였다. 송준길(宋浚吉)과는 효종(孝宗) 3년인 1652년 1월에 회덕(懷德)을 찾아가 사제(師弟)관계를 맺었다.윤증의 삶과 가장 큰 관련을 가지고 있는 인물인 송시열(宋時烈)과 만난 것은 그가 28세 때인 1657년이었다. 그는 스승 김집(金集)의 권유로 회덕(懷德)으로 가서 22세 연상(年上)의 송시열을 스승으로 섬겼다.
높아지는 명망
윤증의 외형적인 삶의 방향은 매우 일찍 결정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생환(生還)한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의 행동 때문이었다. 인조(仁祖) 20년인 1642년 윤선거(尹宣擧)는 충청도 금산(錦山)에 정착하였고, 윤증(尹拯)도 과거(科擧)와 벼슬을 포기하고 아버지와 함께 거처하였다.
윤증(尹拯)은 18세 때인 1647년 10월에 '안동 권씨'와 혼인하였다. 장인(丈人)은 저명한 예학자이자 한성부 좌윤을 지낸 탄옹(炭翁) 권시(權翅)이었다. 윤증의 주요한 스승은 권시(權翅)를 비롯하여 김집(金集), 유계(兪棨),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 당대의 명사들이었다. 이것은 그의 자질 뿐만 아니라 아버지 '윤선거'의 위상과 평판을 보여주는 지표일 것이다.
윤증은 일찍이 과거(科擧)와 벼슬을 포기하였지만, 이미 20대 후반 무렵 상당한 명망을 얻었다. 그는 효종(孝宗) 9년인 1650년에 학문과 행실이 뛰어난 선비를 천거하라는 왕명으로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천거되었다. '명재연보'에 따르면 ' 이때부터 윤증(尹拯)의 명망과 실덕(實德)이 점차 높아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윤증의 일생은 징소(徵召 .. 벼슬을 권유하면서 부름)와 사직(辭職)의 과정이었다고 말할 만 하였다. 그는85세의 노령으로 별세할 때까지 공조좌랑, 사헌부 지평, 세자시강원 진선, 사헌부 장령, 집의 호조참의, 대사헌, 찬선, 이조참판, 우참찬, 이조판서, 좌참찬, 좌찬성, 우의정 등 수많은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한번도 나아가지 않았다.
백의정승 白衣政丞
윤증(尹拯)은 86세로 천수(天壽)를 다 할 때까지 38세부터 20여 차례에 걸쳐 벼슬을 받는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우의정(右議政)을 사양하는 상소(上疏)는 무려 18번이었다. 그의 말년은 벼슬과의 싸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의정까지 거부하는 그를 보고 당시의 인심은 그에게 '백의정승(白衣政丞)' 이라는 칭호를 붙이게 된다.
그리고 윤증(尹拯)은 인조(仁祖) 대에 출생하여 효종, 헌종, 숙종까지 네 명의 임금을 모셨지만, 왕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않고 정승(政丞)의 반열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정치적 영향력은 막강하였으며, 스승이자 최대의 정적(政敵)인 송시열(宋時烈)에게 맞선 유일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단 한 번 윤증(尹拯)은 벼슬을 받으러 서울로 올라오는 도중 과천(果川)에 머물며 뱍세채(朴世采)와 상의하였다. 결론은 벼슬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유(理由)가 있었다. 개인적인 사정 이외에 벼슬에 나아가서는 안되는 명분이 있다. 오늘날 조정에 나가지 않으면 모르되, 나간다면 무엇인가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러하다면 송시열(宋時烈)의 세도(勢道)가 변하지 않으면 안되고,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의 원한이 해소되지않으면 안되며, 또한 삼척(三戚 .. 김석주, 김만기, 민정중의 집안)의 문호는 닫히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역량으로 그것을 할 수 있겠는가 ? 우리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그는 되돌아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가 벼슬을 거부했다고 하여도, 그가 현실 정치에 전혀 무관심한 은둔자(隱遁者)는 아니었고, 오히려 뒤에서 영향력을 미치게 되며, 스승인 송시열과도 격렬하게 대립하여 송시열은 노론(老論)의 영수로, 윤증은 소론(少論)의 영수로 서로 반목(反目)하게 된다. 요즘 표현으로 소위 여권(與圈)의 분열이고 내분(內紛)이었다. 이를 두고 윤증은 스승을 배신(背信)하였다는 평가와 송시열에 대항(對抗)한 유일(唯一)한 인물로 상반(相反)된 평가를 받게 되었다.
딸에게 보낸 편지
너무나 심난하여 긴 사연 못 쓴다. 그 사이 눈이 내려 추운데 잘 있고 모두들 잘 계시고 교동 소식 또 들었느냐? 나는 집을 떠난 지 이레 만에 간신히 들어와 큰 탈 없고 아버님 기후 일양하시고 각처 무탈하니 다행하고, 용남이가 그 사이 죽었으니 참혹한 모양 측량 못 할밖에. 내 신세 괴이하다. 차마 제 어미 모양을 도무지 보기 슬프고 견딜 수 없어 훌쩍 어디로 가고 싶으나 그도 할 수 없고 답답하다.
위의 편지는 윤증(尹拯)이 1685년 그의 나이 57세 때 시집간 딸에게 보낸 편지이다. 윤증은 ' 탄옹 권시(炭翁 權翅)'의 딸과 결혼하여 딸 하나와 두 아들 행교(行敎), 충교(忠敎)를 낳았다. 편지의 내용으로 보면, 친정 아버지 윤증은 딸에게 너무도 심란한 자신의 상황을 전달하고 있다. 엄동설한에 집을 떠나 있는 처지에서 친가(親家) 노성 교동의 소식 여부, 아명(兒名)으로 추측되는 용남이라는 인물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충격을 입고 늙은 아비의 괴이한 신세와 슬픔을 써내려 갔다.
윤증 초상 일괄
윤증(尹拯)의 초상화 5점과 ' 영당기적(影堂紀跡)' 1점은 보물 제 1495호로 지정되어 있다. 초상화는 1744년에 당대의 어용화사(御用畵師), 장경주(張景周)가 그린 1점과 1788년 이명기(李命基)가 그린 2점이 있으며 나머지는 작가가 밝혀지지 않았다. 영당기적(影堂紀跡)은 초상화의 제작과 관련된 내역을 기록한 필사본으로 초상화의 제작연도와 작가, 모사(模寫) 과정을 알 수 있도록 해 주는 주요 자료이다.
崇禎紀元後再甲子四月摹 ..라는 묵서가 있는 측면전신좌상(側面全身坐像 .. 위 사진)은 1744년 작품으로, 영당기적(影堂紀跡)에 ' 崇禎紀元後, 再甲子四月, 影子移摹四本, 正面一仄面三, 畵師張敬周 ... 라고 밝혀져 있어 장경주(張敬周)의 작품으로 확인된다. 이들 초상화와 함께 전하는 영당기적(影堂紀跡)은 윤증 초상의 제작과 관련된 기록을 담은 필사본으로, 1711년 변량(卞良)이 윤증의 초상을 처음으로 그렸던 사례부터 1744년 장경주, 1788년 이명기, 1883년 이한철이 모사할 때까지 4번의 제작 사례를 기록하였다. 그 내용은 제작일정 및 제작된 초상의 수(數), 구본(舊本) 및 신본(新본)의 봉안과정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바람직한 현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학연(學緣)과 혈연(血緣) 그리고 지연(地緣)이 아직도 강고하게 남아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당쟁(黨爭)은 아직도 민감한 현재적 주제(主題)이다. 당쟁(黨爭)의 핵심적 국면을 형성한 윤증(尹拯)과 송시열(宋時烈)의 관계는 더욱 그러하다.
윤증(尹拯)의 묘(墓)는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향지리 산 11-11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숙종(肅宗) 40년인 1714년 그가 사망하자 숙종(肅宗)이 애도하는 조사(弔辭)를 지었으며, 1723년 9주기에는 승지가 파견되어 치제(治祭)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문성(文成)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묘소는 원래의 위치에서 이산(尼山) 두사촌(杜寺村)으로 이장되었다가 1765년에 지금의 위치로 다시 옮겨졌다고 한다. 숙종이 지은 조사(弔辭)는, 유림(儒林)에서는 그의 도덕을 존경하였고, 나 또한 그를 흠모하였네. 평생에 얼굴 한번 못보았는데, 죽었다는 소식들으니 더욱 한스럽도다 ..... 儒林尊道德, 小子亦尊欽, 平生不識面, 歿後恨彌深
윤증(尹拯)은 스승 송시열(宋時烈)을 배신하여 사림(士林)에 죄를 얻었다. 또한 유계(兪棨)가 지은 가례원류(家禮源流)를 몰래 그의 부친 윤선거(尹宣擧)와 함께 쓴 것으로 만들려 하였는데, 수 년 후 그 일이 탄로가 나서 유계(兪棨)의 손자 유상기(兪相基)는 화가 나서 윤증에게 절교(絶交) 편지를 보냈다. 윤증은 어렸을 때부터 유계(兪棨)에게 배웠는데, 일이 여기에 이르자 사람들은 윤증(尹拯)이 두 스승을 배신하였으니 그 죄(罪)를 더욱 용서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윤증. 죽음의 기록
위에 인용한 글은 윤증(尹拯)이 학질로 81세에 사망하였을 때 '숙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그의 졸기(卒記)이다. 즉 윤증은 스승을 배신한 배은망덕(背恩忘德)한 그리고 스승이 쓴 책(冊)을 자신의 부친이 쓴 책으로 만들려다 들통이 나 절교(絶交)를 당했다는 비양심적(非良心的)인 인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숙종(肅宗)은 윤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 유림(儒林)에서는 그의 도덕을 존경하고 나 또한 그를 흠모하였네, 평생에 얼굴 한 번 못보았는데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더욱 한스럽도다 '고 말하였다.
또한 윤증연보(尹拯年譜)에 의하면 그의 장례식에 조문(弔問)한 인사가 무려 2,300여 명이나 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야말로 조선의 이름께나 있는 인물은 모두 조문(弔問)한 셈이었다. 그것도 전국에서 ... 윤증에 대한 이러한 상반된 평가.. 어느 것이 옳은지는 모르지만 그의 생애가 논란의 한 가운데 있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숙종실록(肅宗實錄)의 기록은 믿을 것이 못된다. 실록은 윤증의 소론(少論)이 몰락하고 난 후, 노른(老論) 측 인물이 사관(史官)으로 기록하였음으로 ..
조선의 붕당정치(朋黨政治)는 일제강점기 식민주의 사학자(史學者)들에 의해 ' 당쟁(黨爭) '으로 폄하되었다. 식민사관(植民史觀)에 입각한 국사(國史) 교육은 광복이후까지 이어져 여전히 그런 시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인간의 역사는 대립과 투쟁 속에서 발전된다.
조선 중기 이후 노론(老論)고 소론(少論)의 갈등은 병자호란 이후 야기된 국제관계의 변화에 따른 송시열(宋時烈)의 숭명의리(崇明義理)와 윤증(尹拯)의 대청(對淸) 실리외교문제의 대립이었고, 호란(胡亂) 이후의 사회변동과 경제적 곤란은 주자학적(朱子學的) 의리론과 명분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역사적 명제를 제기시켰다. 윤증은 어진 스승을 배반했다는 패륜으로 지목받았지만, 그를 따르던 소론(少論) 진보세력(進步勢力)들은 그의 사상을 꾸준히 전승 발전시키면서 노론 일당의 전제체제 하의 건전한 비판 세력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윤증의 삶과 가장 큰 관련을 가지고 있는 인물인 송시열(宋時烈)과 만난 것은 그가 20세 때인 1657년이었다. 그는 스승 김집(金集)의 권유로 회덕(懷德)으로 가서 22세 연사(年上)의 송시열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주자대전(朱子大典)을 배웠다. 윤증(尹拯)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갈등이 촉발된 것은 44세 때인 1673년이었다. 회니시비(懷尼是非)라는 그 문제는 결국 노론과 소론의 분당(分黨)이라는 거대한 사건으로 이어졌다.
아버지, 윤선거
윤증의 생애를 이야기할 때 결코 두 인물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와 그의 스승이자 정적(政敵)이었던 '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이 그들이다. 아버지 윤선거와 스승 송시열은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한 동문이고, 친구사이이었다.
또한 윤선거(尹宣擧)와 그 아들 윤증(尹拯)의 관계도 보통의 부자지간(父子之間)은 아니었다. 윤선거는 윤증에게 학문의 길을 열어준 스승이자, 강화도(江華島) 사건이라는 평생 씻지 못할 치욕과 컴플렉스를 안겨 준 모순된 존재이었다. 또한 윤선거와 송시열은 ' 사돈지간 '이기도 하였다. 송시열의 큰딸은 윤선거의 형(兄) 윤문거(尹文擧)의 며느리, 즉 윤증의 조카며느리이었다. 당시의 결혼은 집안 간의 결합이었는데...
윤선거의 행적, 강화도 사건 .... 윤증이 9세 때 겪었던 병자호란은 그에게 큰 상처를 주었고, 향후의 가치관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는데, 그 원인은 단순한 부자지간이 아니라 그에게 학문의 길을 열어준 스승이기도 했던 부친 윤선거(尹宣擧)가 다음과 같은 내용인 '강화도사건(江華島事件)'이라는 평생 씻지못할 컴플렉스를 안겨준 때문이었다.
청(청)나라가 침입하자, 북방 기마민족(騎馬民族)은 수전(水戰)에 약하다고 판단한 윤선거는 부인(夫人)과 어린 남매를 이끌고 강화도(江華島)로 피난하였다. 인조(仁祖)도 강화도로 조정을 옮겨 장기 항전(抗戰)하기로 결정하고 봉림대군(鳳林大君)과 비빈(妃嬪)들을 강화도로 피신시켰지만, 정작 인조(仁祖)는 몽진(夢盡)하려다 길이 끊겨 할 수 없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는데, 이 바람한 무수한 이산가족이 생기게 되었다.
윤증(尹拯)의 조부(祖父) 윤황(尹滉)도 인조(仁祖)와 함께 남한산성에 고립되었기 때문에 윤증의 집안도 마찬가지이었다. 윤선거(尹宣擧)는 친구 권순장(權順長), 김익겸(金益兼)과 함께 청군(淸軍)이 상륙하면 의병(義兵)을 일으켜 순절(殉節)하기로 약속하였지만, 김포(金浦)를 거쳐 갑문(閘門)을 통해 상륙한 청군(淸軍)이 삽시간에 밀려들자 조선군은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때 순절(殉節)을 약속한 친구들은 정승(政丞) 김상용(金尙容)이 분신(焚身)하자 따라 죽었고, 부인 이씨(李氏)도 '적(敵)에게 죽임을 당하느니 스스로 자결하는 것이 낫다 '며 곧바로 자결하였지만, 오직 윤선거(尹宣擧)만은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 왔던 것이다.
이 사건은 훗날 '우암 송시열'의 지지세력이 '윤증'의 지지세력과 의리론(義理論)을 두고 회니시비(懷尼是非)의 논쟁을 벌일 때 '윤증'을 공격하는 무기가 되었는데, 송시열 측에서는 ' 윤선거(尹宣擧)가 적군에게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求乞)하였다. 봉림대군(鳳林大君) 사신(使臣) 일행이 성(城)에 들어오자 이름을 바꾸고 노비(奴婢)로 위장(僞裝)한 뒤, 돌아가는 사신(使臣) 일행에 붙어 몸만 살짝 빠져나온 모양새가 참을 부끄러웠다 '고 주장한 반면 ,
윤선거(尹宣擧)는 ' 권순장(權順長)과 김익겸(金益兼)은 남문(南門)을 지키던 정승 김상용(金尙容)이 분신자살(焚身自殺)하자 적과 싸우지도 않고 자결했고, 자신의 처(妻)가 죽은 것 역시 적에게 잡혀 능욕(凌辱)을당하느니 차라리 자결하는 것이 낫다고 여긴 탓이다. 미복(微服)으로 강화도를 탈출한 것은 교전(交戰)은 이미 끝났을 뿐 아니라 적에게 포위된 남한산성으로 급히 부친(父親)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였다'고 반박하였다.
한편 도중에 부친을 만난 윤선거는 부친을 버리고 생(生)을 포기할 수 있는 의리(義理)는 또 없었으므로 부친을 따라 이산(尼山)의 선영(先塋) 아래에 함께 가서 살면서, 과거(科擧)도 단념하고 재취(再娶)도 하지 않은 채 평생을 자숙하며 재야(在野)에서 지냈으며, 효종(孝宗)이 여러 번 불렀으나 끝내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윤증과 송시열 .. 사제간의 대립
윤증(尹拯)은 등과(登科)는 하지 않았지만 학행(學行)이 사림(士林) 간에 뛰어나 유일(遺逸 ... 명망이 높은 사람으로 초야에 묻힌 사람)로 천거되어 내시교관(內侍敎官)으로의 발탁을 시작으로 공조좌랑, 세자시강원진강, 대사헌, 이조판서, 우의정의 임명을 연속해서 받았으나 , 한 번도 조정에 나아간 적은 없었는데, 그 대신 정치적 입장은 중요한 사안이 생길 때마다 상소(上疏)로 피력하거나 또는 관료나 학인(學人)과의 왕복서(往復書)를 통해 나타냈으며, 이러한 그의 정치적 행위는 노소분당(老少分黨)과 그를 이은 당쟁(黨爭)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서인(西人)의 일방적(一方的)인 정국 전횡(專橫)을 견제하는 수단이 되었다.
윤증과 송시열의 정치적 대립은 16세기 이래로 변화해온 조선사회의 이해에 대한 시각의 차이에서 초래된 것으로, 밖으로는 병자호란 이후 야기된 국제관계의 변화에 따른 송시열의 숭명의리(崇明義理)와 윤증의 대청(對淸) 실리외교(實利外交)의 대립이었고, 양난(兩亂) 이후의 사회변동과 경제적 곤란은 주자학적(朱子學的) 의리론(義理論)과 명분론(名分論)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역사적 명제(命題)를 제기시켰다.
윤증은 많은 문제(門弟) 중에서도 특히 양명학(陽明學)의 대가인 '하곡 정제두(霞谷 鄭齊斗)'와 각별한 관계를 가졌는데, 두 사람 사이의 사상적 교류는 명재유고(明齋遺稿)와 하곡집(霞谷集)의 왕복서한(往復書翰)에서 실증되고 있듯이 송시열의 주자학적 조화론(調和論)과 의리론(義理論)만으로는 변모하는 정국(政局)을 바로잡을 정치철학이 되기에는 미흡하다고 판단하여, 그 대안(代案)으로 왕학적(王學的) 학문과 실학적 경륜을 담은 정치철학을 배태하고 있었다.
윤증(尹拯)이 스승 송시열(宋時烈)에게 ' 신유의서(辛酉擬書)'를 보내 스승을 '의리쌍행(義利雙行)'이라고 비난하였다가 노론(老論)으로부터 배사론(背師論)으로 지목받기도 했고, 또한 송시열의 주자학적 종본주의(宗本主義)와 이에 근거한 존화대의(尊華大義) 및 숭명벌청(崇明伐淸)의 북벌론(北伐論)을 정면으로 반박함으로써 회니시비(懷尼是非)의 발단을 이루었다.
회니시비 懷尼是非
널리 알려졌듯이 회니시비(懷尼是非) 또는 회니반목(懷尼反目)은 송시열과 윤증이 살던 지명인 회덕(懷德 .. 지금의 대전시 대덕구 일대)과 이성(尼城 .. 지금의 충남 논산시 일대)에서 따온 명칭이다. 그 발단은 1673년 11월, 윤증이 송시열에게 아버지 '윤선거'의 묘갈명(墓碣銘 .. 묘비에 새겨진 죽은 이의 행적과 인적사항에 대한 글)을 부탁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좀 더 깊은 곳에 있었다. 그것은 ' 백호(白湖) 윤휴(尹虧 .. 1617~1680)'를 둘러싼 견해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송시열이 예송논쟁(禮訟論爭) 과정에서 윤선거 부자(父子)가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고 '윤휴'를 감싸고 돌자, 이에 불만을 품은 송싱ㄹ의 지지세력이 윤증의 지지세력에 공격을 가함으로써 의리론(義理論)을 두고 양측이 벌인 논쟁을 일컫는 이름으로 '윤증'은 송시열의 교조주의(敎條主義)와 독선(獨善)을 공격하였고, 송시열계는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장파들의 경박(輕薄)함과 이단성(異端性)을 비난하였다.
한편 이 시비(是非)를 통하여 당대의 거물 송시열을 공개적으로 공박(攻駁)한 윤증은 소장층(小壯層)의 스타가 되어 소론파(少論派)의 지도자로 부상하였고, 서인(西人)세력이 구세대(舊世帶)인 노론(老론)과 신세대 소론(少論)으로 분열되는 빌미가 되기도 하였다. 어쨋든 송시열은 회니시비(懷尼是非)를 벌이면서도 '윤선거'와는 절교하지 않았지만, 윤선거가 독자적인 주자학 비판으로 인하여 송시열로부터 사문난적(斯文亂賊 .. 정통학문을 어지럽히는 이단이라는 의미)으로 맹공을 당한 '윤휴'와 가깝게 지냈기 때문에, ' 주자(朱子)에게는 아무런 오류(誤謬)가 없다'는 주자무오설(朱子無誤說)을 신봉하던 원리주의자(原理主義者)인 송시열은 '윤선거 부자(父子)'를 탐탁치 않게 보기 시작하였다.
부친의 사망 .. 치닫는 갈등
그러다가 윤선거가 1669년에 세상을 떠나자 송시열이 제문(祭文)까지 보냈으나, 윤선거 비문(碑文) 찬술(撰述)과 윤증의 배사론(背師論)을 둘러싸고 감정이 폭발하면서 송시열과 윤증은 돌아올 수 없는 강(江)을 건너고 말았다.
윤증(尹拯)은 박세채(朴世采)가 지은 행장(行壯)과 자신이 작성한 연보(年譜)를 송시열에게 보내부며 부친의 묘명(墓銘)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는데, 송시열은 그의 덕(德)을 기리는 구절에서 ' 망연(茫然)하여 할 말을 알 수 없다 '고 적은 뒤 ' 나는 다만 기술(記述)만 하고 짓지는 않았다 .. 아술부작. 我述不作'고 마무리하여 보냈으며, 그 후에도 윤증이 4~5년에 걸쳐 장문(長文)의 편지를 보내거나 직접 찾아가 개찬(改撰)을 청(請)했음에도 송시열은 비문(碑文) 요지에 전혀 손대지 않은 채 글자 몇 군데만 고쳐서 보냈다.
송시열이 작성해 보낸 묘갈명(墓碣銘)에는 송시열의 위와 같은 감정이 역력하게 묻어 있었다. 송시열은 윤증(尹拯)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의 생몰년대(生歿年代)를 간단히 적고 ' 나는 공(公)에게 견주면 뽕나무벌레와 고니 이상으로 현격한 차이가 있는 사람이어서, 그 내면의 깊은 부분을 엿보기에 부족하다. 더구나 덕(德)을 서술하는 글을 쓰려니 더욱 아득해 어떻게 말을 만들어야 할지 모르겠다 '라고 전제한 뒤 박세채(朴世采)의 행장(行壯)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 진실한 박세채가 참으로 잘 선양했기에 나는 따로 서술하지 않고 그대로 따라 이 묘갈명을 지었다'고 썼던 것이다.
그 후 다시 '신유의서 (辛酉疑書) '가 덧붙여지면서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증오(憎惡)가 싹텄는데,이 의서(疑書)는 숙종(肅宗) 13년인 1687년, 경신환국(更申換局)이 있었던 다음에 '윤증'이 송시열에게 보내려고 쓴 편지로서, 그 내용은 크게 나누어 송시열(宋時烈)의 학문은 그 근본이 주자학(朱子學)이라고 하나 기질(氣質)이 편벽(偏僻)되어 주자(朱子)가 말하는 실학(實學)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 송시열의 존명벌청(尊明伐淸)은 말로만 방법을 내세울 뿐 실익이 없다는 것이었다.
윤증(尹拯)은 이 의서(疑書)를 박세채(朴世采)에게 보여주었다가 보내지 말라는 남계(南溪)의 강권(强勸)에 의해 송시열에게 보내지 않았는데, 송시열의 손자이자 남계(南溪)의 사위이었던 송손석(宋淳錫)이 장인(丈人) 집에서 몰래 그 편지를 빼내어 송시열에게 전함으로써, 송시열은 크게 화를 내며 치를 떨면서 의절(義絶)하였고, 노론, 소론의 분당(分黨)도 가속도가 붙게 되었다.
우암 송시열을 영수(領袖)로 하는 노론(老論)과 윤증(尹拯)을 따르는 소론(少論)은 여러 면에서 의견을 달리하며 첨예한 대립을 보였는데, 송시열은 주자학(朱子學) 절대주의자(絶對主義者)이었으며, 숭명반청(崇明反淸)을 정치철학으로 삼은 반면, 윤증(尹拯)은 학문과 사상의 장를 도모하고 현실에 기초한 정치를 꿈꾸었기 때문이며, 결국 스승과 제자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怨讐)처럼 갈라서게 되었다.
신유의서 辛酉疑書
당쟁의 새로운 국면은 환국(換局)이었다. 첫 번째 환국(換局)은 숙종(肅宗) 6년인 1680년에 서인(西人)이 집권한 경신환국(更辛換國)이다. 그때 '윤증'은 51세이었고, 송시열은 73세이었다. 환국이 일어난 뒤 서인(西人)의 주요 대신인 김수항(金壽恒), 민정중(閔鼎重) 등은 '윤증'이 선비들의 추앙을 받고 있으니 조정으로 불러 경연(經筵)에 참석케 하라고 추천하였다. 윤증(尹拯)도 송시열(宋時烈)이 해배(解培)되어 회덕(懷德)으로 돌아오자 찾아가 만났다. 이런 일들은두 사람의 결별과 노,소론(老,少論)의 분당(分黨)이 아직 완전히 확정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환국(換國) 이후 두 사람과 그들이 주도한 당파는 남인(南人)을 처리하는 정치적 문제에서 이견(異見)을 보였다. 송시열은 대의(大義)를 철저히 따라 엄격한 처벌을 고수한 반면,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와 비슷하게 온건하고 절충적인 대응을 선호하였다. 이런 정치적 판단의 기저에는 주자학(朱子學)을 철저히 신봉하는 송시열과 실학(實學)을 중시하는 양명학(陽明學)도 인정하는 윤증의 학문적 차이도 자리잡고 있었다.
이듬해 윤증은 송시열에게 보내는 한 통의 편지를 썼다. 신유년(辛酉年)에 작성하였고 역시 보내지는 않았기 때문에 '신유의서(辛酉疑書)'라고 불리는 편지이다. '명재연보'에 실린 그 대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부자(朱夫子 ..송시열을 지칭)가 경계한 ' 왕도와 패술을 함께 쓰고 의리(義理)와 사리(私利)를 아울러 행사한다 .. 王覇竝用 義利雙行 '는 평가를 면하지 못할 듯 합니다. 근년 이래로 마음 속의 의심이 날로 더욱 커지기에 감히 한 번 생각을 다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삼가 살피건데, 문하의 기질은 강덕(剛德)은 많지만 그 쓰임이 천리(天理)에 순수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이 덕(德)의 병통이 되니 차므로 ' 사욕(私慾)을 이기기 어려움'이라고 말할 만 합니다. 사욕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그 병통을 바로잡아 그 덕(德)을 오넌하지 못하니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모두 이 병통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명재연보'는 ' 이 편지의 대의(大義)는 윤선거가 기유의서(己酉疑書)에서 충고하고 경계한 뜻을 거듭한 것으로 원인을 기질(氣質)의 병통으로 보느냐 본원적인 문제로 보느냐 하는 차이가있을 뿐'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그 편지는 박세채(朴世采)의 만류로 결국 부치지 않았다. '명재연보(明齋年譜)'에 따르면, 윤증은 매우 안타깝고 답답했지만 세도(勢道)에 허물을 끼친다는 말에 공감하여 결국 편지를 부치는 것을 그만 두었으며, 그렇게 결정한 뒤에는 그 편지를 깊이 감추어두고 자손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편지는 3년 뒤 송시열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1684년 송시열의 손자 송순석(宋純錫)이 박세채(朴世采)의 집에서 몰래 베껴 조부(祖父)에게 드린 것이다. 송시열의 답장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데, 마지막 구절은 날카로운 여운을 남기고 있다.
자네가 지적한 것은 모두 나의 실제 병통(病痛)이지만, ' 의리(義理)와 사리(私利)를 아울러 행사하고 왕도(王道)와 패도(覇道)를 함께 쓴다'는 대목은 더욱 지나치게 나를 인정해 관대하게 말한 것임을 알겠네. 그러나 그 편지를 읽은 뒤로는 마치 침(針)으로 몸을 찌르는 것만 같네. 비유하자면 환자(患者)가 고질병(痼疾病)이 악화되어 죽으려 할 때 갑자기 훌륭한 의원(의원)이 신단(神丹)의 묘약을 처방해주어 살길을 찾게 된 것과 같네. 그 훌륭한 의원(醫員)의 본심이 과연 환자를 사랑하는 뜻에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은혜는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같은 해 여름 최신(崔愼)이라는 인물이 이 '신유의서(辛酉疑書)'를 근거로 윤증이 스승을 배반하였다고 비판하였고, 김수항, 민정중 등 대신들도 윤증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송시열을 헐뜯었으니 다시는 '윤증'을 대우하는 예의를 적용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숙종(肅宗)은 윤허하였다. 명재연보에 따르면 '이때부터 시의(時議)가 시끄럽게 일어나, 위로는 대신(大臣)과 삼사(三司)부터 아래로는 향곡(鄕曲)의 어리석은 유생(儒生)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뜻을 받들고 눈치를 살펴 무리 지어 비난하고 헐뜯었다 '고 기록하고 있다. 신유의서(辛酉疑書)가 세상에 알려졌을 때 윤증은 55세, 송시열은 77세이었다. 당시 조선 정치의 중심에 있던 두 사람의 결별로 당쟁(黨爭)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궐리사 闕里祠
조선 선비들에게 교육과 선현(先賢)에 대한 제향은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국가기관인 향교(鄕校)를 '문묘(文廟)'라 한 것만 보아도 그렇다. 향교에는 공자(孔子)를 비로하여 안자(安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 등 4성(四聖)과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저명한 유현(儒賢)들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제향(제향)된 인물은 조선 말에 133인(人)에 달했다.
하지만 서원(書院)은 달랐다. 제향하고자 하는 인물과 그 지역의 인연을 들어 건립하였다. 어떤 인물을 모셨느냐에 따라 정치적인 성격도 판이하였고, 어느 학파가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서원의 위상(位상)은달라졌다. 노론(老論)이 집권했을 때에 노론계 인물을 배향한 서원은 국가의 지원을 받는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승격했지만 반대편의 남인계 서원은 남설(濫設)이나 첩설(疊設)의 폐해를 지적당하며 불이익을 받았다. '노론계 서원'이니 '남인계 서원'이니 하는 분류가 생긴 것도 이런 연유이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전국의 서원을 철폐하고자 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충청기호유교(忠淸畿湖儒敎)는 '율곡 이이(栗谷 李珥)'에서 시작되어 정치적으로는 서인(西人)의 성격을 띄었다. 서인(西人)은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되었고, 1700년대 이후 조선의 중앙정권은 서인 노론계가 장악하였다. 서인 노론계의 대표 주자는 '우암 송시열(于庵 宋時烈)'이다, 주자성리학(朱子性理學)을 앞세운 송시열은 전국 각지에 서원을 건립하고 율곡(栗谷)을 계승한 유현(儒賢)을 제향하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송시열과 그의 제자들이 공자(孔子)와 주자(朱子)를 앞세워 기호(畿湖) 유교권이 아닌 타 지역까지 기호(畿湖)계열의 서원을 세웠다는 점이다. 서원의 정치성(政治性)을 감안할 때 서인 노론계의 영향력이 약(弱)한 곳에 누구도 반대하기 어려운 공자와 주자를 내세워 정치적 외연(外延)을 넓힌것이다.
그 가운데 충청남도 논산(論山)의 궐리사(闕里祠)는 매우 독특한 성격을 가진 곳이다. 보통 공자(孔자)를 제향하는 서원은 공자(孔子)가 나고 자란 마을의 이름을 따서 '궐리사'라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궐리사는 논산과 진주, 오산 세 곳 뿐이다. 논산(論山) 궐리사는 노성면 교촌리에 있다. 이곳에 궐리사가 세워진 배경은 비슷한 이름 때문이다. 노성면(魯城面) 지역은 조선시대 니산현(尼山顯) 혹은 노성현(魯城縣)으로 불렸고, 니구산(尼丘山)이라는 산(山)이 있다. 노(魯)나라 사람인 공자의 이름은 '구 (丘) '이다. 노성현 니구산과 같은 글자를 쓴다. 게다가 니구산(尼丘山) 아래에 궐리촌이라는 마을이 있다. 공자(孔子)가 성장했던 고장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좀 더 속을 들여다 보면 논산(論山) 궐리사 건립에는 무서운 음모가 있다. 궐리사(궐里祠)는 노소(老少) 분당(分黨)과 갈등이 만든 정치적(政治的) 사찰기관(査察機官)이었다는 것이 학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궐리사(闕里祠)는 송시열이 윤증(尹拯)과 회니시비(懷尼是非)를 벌이면서 사이가 극에 달했고, 결국 서인(西人)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되면서 대립이 치열하였던 숙종(肅宗) 13년인 1687년에 건립이 추진되었다.
송시열은 궐리사 건립을 발의(發議)하면서 중국에서 가져온 공자(孔子)의 유상(遺像)을 봉안하려 했지만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사사(賜死)되면서 무산되었다. 궐리사는 이후 1716년에 송시열의 제자들의 손으로 세워진다. 그것도 소론(少論)의 우두머리 서원인 노강서원(魯江書원)과 윤증(尹拯) 고택의 코 앞에 지어진다. 현재의 위치는 1805년에 이전한 것으로 명재고택과 더욱 가깝다. 정치적 걸림돌인 소론(少論)을 감시하고, 소론의 영향력을 무력화(無力化)하려는 노론(老論)의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다.
이 고택은 부드러운 곡선의 노성산(魯城山)의 산줄기가 세 갈래로 흘러내린 가운데 능선 끝에 자리하고 있다. 동쪽으로 흘러내린 언덕 위로 보이는 지붕의 곡선(曲線)들이 안정감이 있다. 정면에서 보면 기와의 지붕 용마루 곡선이 산(山)의 곡선과 같은 반경으로 맞아 떨어져 부드러우면서도 자연스럽게 산과 하나가 되는 느낌을 체험할 수 있다.
가옥은 산 아래 높은 기단(基檀)을 만들고 그 위에 팔작지붕의 사랑채와 행랑채를 정면으로 배치하였다. 집 앞에는 커다란 연못과 바깥마당 그리고 정갈한 우물이 자리하고 있다. 연지(蓮池) 가운데에는 둥근 동산을 꾸미고 커다란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으며 연지 끝자락, 즉 명재고택 옆으로는 노성향교(魯城鄕校)가 자리하고 있어서 고전적이고 그윽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 가옥은 사랑채 정면과 동쪽편에 언덕을 이루고 그 위에 소나무를 심어 마을길에서 직접 보이지 않도록 꾸며져 있다. 그리고 동쪽 언덕 위로는 이 집의 역사를 내려다보은 듯한 세 그루의 커다란 느티나무 노거수(老巨樹)가 있어 여름이면 녹음이 마당 가득히 짙어진다. 또한 이 가옥의 뒷산 자락에는 곡선미가 아름다운 노송(老松) 숲이 집을 향하여 기울어져 있는 풍경이 장관을 이루고, 사방으로는 꽃과 나무들이 어우러져 계절따라 변한다. 이렇듯 명재고택은 나무들이 옹기종기 모여 새의 둥지처럼 자리하고 있는 아름다운 공간을 감상할 수 있다.
윤증고택(尹拯古宅)은 약한 구릉지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전면에 사랑채를 두고 후면에 안채, 후면 동쪽에 사당을 두고 있다. 전체적으로 'ㅁ'자형 양반주택이다. 주택은 크게 사랑채, 안채, 문간채, 사당(祠堂), 광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택의 전체적인 뱇형태를 볼 때, 살아채가 중심추게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처 있고, 사랑채 서편에 문간채가 이어져 안채 앞을 가로막으며 배치되었다. 사랑채 주변에는 담을 두지 않아 가옥 전체가 개방된 분위기이다. 사랑채는 2단으로 조성된 기단(기檀)을 만들고 그 위에 배치하였다.
명재고택의 특징은 호서(湖西)지방의 민가(民家)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별당을 생략하고, 대신 사랑채 공간을 조금크게 하여 별당(別堂) 기능을 수용한 것이다. 또한 사랑채의 입면(立面)구조는 팔작으로 처리하여 안채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가 가깝게 붙어 있고, 행랑채와도 연결되어 있어 입면구조를 아름답게 처리하기가 매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정면에서 보면 사랑채를 별도로 떨어진 듯 처리하였다. 사랑채와 안채의 배치는 떨어져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후면에 쪽마루를 설치하여 안채와 긴밀하게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중심축선은 이 두 건물을 비켜가고 각 건물의 세부는 비대칭(非對秤)으로 처리하여 상황조건에 충실하려는 주기론적(主氣論的) 이념을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건축공간의 배치에는 시대사상(時代思想)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의 유가(儒家) 사상은 주택공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전면에서 후면으로 종방향, 좌(左)에서 우(右)로의 횡방향에 따라 각 공간의 위계성(位階性)을 고려하여 건물들을 배치하였다. 이러한 배치계획을 실현하게된 배경에는 오행(五行) 음양사상(陰陽思想)과 같이 옛날부터 내려온 고대 동양사상, 당시 조선시대 사회사상, 풍수사상 그리고 대지(垈地)의 여러가지 조건이 고려되었던 것이다.
장(醬)을 담글 때 중요한 것은 물과 소금, 메주, 독이라고 한다. 이곳 '윤증고택'의 종가(宗家)의 장(醬)은 매우 유명하다. 단아한 한옥 마당에는 수백 개의 장독이 당당한 풍모를 자랑하며 줄 서있다. 물은 조상 대대로 먹던 우물에서 모터를 이용하여 퍼 올려 쓰고 메주는 가을에 농사지은 우리 콩으로 만든다. 소금은 몇 해 동안 간수를 뺀 서해안 천일염(天日鹽)을 사용한다.
씨간장, 씨된장
제료도 건강한데 이 댁의 장(醬)은 다른 집과 다른 점이 있다고 한다. 씨간장, 씨된장이다. '윤증'의 13세손이 윤완식씨는 ' 수 백년 이어온 전통입니다. 아주 오래 전 담근 장이 아주 좋았던 때가 있었어요. 한 270여년 전이지요.그때 그 장을 따로 보관해서 다음해 장을 담글 때 사용했어요. 해마다 그렇게 이어져 내려왔어요'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집 간장과 된장은 '전독간장' '전독된장'이라고 부른다 ' 전 '은 '前'이나 '傳'을 쓴다.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다는 뜻이다.
메주와 간장을 분리하는 기간도 다른 집과 다르다. 보통 장을 담그면 30~40일 지나 메주와 간장을 분리하는데 이 집은 약 4개월 넘어 분리한다고 한다. 메주 속에 있는 좋은 것들과 맛이 충분히 우러나온다는 것이다. 이곳 명재고택 사람들은 한국전쟁 때 딱 하루 집을 비운 것을 빼고는 늘 이 장을 지켜왔다. 나들이 다녀오면 깨끗하게 몸을 씻지 않고는 장독대 안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미신(迷信)이 아니고 잡균(雜菌)이 들어가는 것을 막는 선조들의 지혜이다.
천석꾼이었던 집안은 가을 추수한 나락을 곧바로 창고로 옮기지 않고 일부러 대문 바깥에 일주일 정도 야적해 두었다. 배고픈 마을 사람들이 밤에 몰래 가져가도 된다는 배려의 기간이었다.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 굴뚝이 높아야 연기가 잘 빠지는데, 이곳 명재고택의 굴뚝은 1m 정도 높이로 나지막하였다. 그 이유는 가난한 이웃을 의식했기 때문이란다.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의 부잣집 굴뚝 연기는 위화감 조성의 원인이었기에 인간에 대한 예의이었다.
살아남은 명가
윤증(尹拯)의 공동체정신은 양잠(養蠶)을 금지하였다.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치는 양잠(養잠)은 당시 고소득(高所得) 업종인데, 부자 양반인 윤씨 집안이 양잠에 진출하면, 가난한 백성들이 먹고 살 것이 없어진다는 이유라고 한다. 새로 부임한 벼슬아치는 지역 어른인 윤증(尹拯)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는데, 음식 대접을 받으면 동구 밖의 느티나무 근처에서 먹은 꽁보리밥을 토(吐)했다는 일화도 전하고 있다.
지금까지 고택이 존재한다면 그 집은 훌륭한 인물과 역사가 있는 집이다. 역사의 검증을 거쳐 살아남은 명문가(名門家) 집안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동학혁명(東學革命), 6.25전쟁 등 난리를 겪으면서 이웃사람들의 인심(人心)을 잃고 부도덕했던 고택들은 대부분 불에 타거나 훼손되었다. 명재고택의 안채 입구 처마에 불탄 흔적이 있었다. 전라도 고부(古阜)에서 탐관오리의 횡포에 반봉건(反封建), 반외세(反外勢)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기치로 시작된 동학혁명군이 한양으로 진격하는 길목의 양반집은 다 불태워졌다. 불붙은 명재고택을 지킨 것은 주변의 은혜를 입은 백성들이었다.
인의예지(仁義禮智)와 청빈을 실천한 윤증은 자기관리에 철저하였고, 서민들의 생계(生計)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집안을 단속하였다. 문중(門中)의 자제를 교육하는 사립학교인 종학당(宗學堂)에서 인재 양성에 힘썼고, 후손들이 허례허식에 빠지지 않게 하려고 제사, 가례(家禮) 등에 검소함을 강조한 유훈(遺訓)을 남겼다.
섬돌에 신을 벗고 대청마루에 올라서서 툇마루 끝의 누마루 쪽을 바라보면 검정색을 칠한 편액(扁額)에 연두색 당채로 ' 도원인가(桃源人家)'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그리고 누마루 정면에는 '이은시사(離隱時舍)'라는 편액이 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떠나고 은거(隱居)할 때를 잘 아는 사람이 사는 집이라는 이미로 현재 사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욕심에 빠져 자기가 맡은 일에 충실하지 못하다가 끝날 때 뒷모습이 깨끗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좋은 교훈이 되는 편액이다. 도원인가(桃源人家)는 누마루 앞의 석가산(石假山)과 연지(蓮池), 집 주변 소나무들의 수려한 경관이 무릉도원 같다는 표현으로 집 주위의 경관이 그만큼 아름다운 집이다.
동측으로는 정면 1칸, 측면 2칸 크기의 대청마루를 두고, 가운데 두 칸에는 온돌방을 배치하였다.온돌방 전면에는 대청마루와 연결되는 툇마루를 두고 후면에는 추녀 밑에 쪽마루를 꾸며 놓았다. 서쪽 편 한 칸은 큰사랑방 툇마루에서 두 칸의 청판 꾸밈 머름대를 두었다. 누마루 바닥을 높이 들러 올려 하부에 함실아궁이를 두었으며, 정침 방향인 뒤편으로 사랑 부엌을 배치하였다. 큰사랑 안채 쪽으로 이어 두 칸은 작은 사랑방으로 꾸며져 있다.
석가산 石假山
윤증고택의 경우, 앞쪽에 네모진 연못을 파고 그 곁에 석가산(石假山)을 조성하여 놓았다. 모두 부귀(富貴)와 안녕을 얻기 위한 풍수적 장치이다. 풍수(風水)는 물을 재물로 보아 귀하게 여긴다. 그렇다면 집 앞에 연못만 조영하면 재물운(財物運)이 커질까 ? 물론 그렇지 않다. 연못의 크기와 깊이가 주변 산세(山勢)와 조화를 이룰 때 시너지 효과가 생긴다. 조화롭지 못하다면 오히려 흉물로 돌변하여 사람을 해친다. 산(山)은 고요하니 음(陰)이고, 물은 움직이 양(陽)이니 음양(陰陽)의 조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집을 출입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한 갈래 길은 직선으로, 사랑마당 옆 우물과 연지(蓮池) 사이를 통해 안채로 가는 길이다. 또 한 갈래 길은 사랑채로 향하는 길로 두 길 사이를 구분하는 것은 아주 커다란 배롱나무인데, 세월의 나이를 먹어 잘 자란 나무가지를 늘어뜨리며 아치를 이루었다. 더욱이 사대부집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높은 솟을대문에 정려(旌閭)가 없는 것이 이 집의 특징이다. 이 커다란 배롱나무는 담장과 대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한편 집안의 풍경은 언뜻 보면 대문이 없기 때문에 연못이 윤증고택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있다.
노성면(魯城面)에는 조선 중기 윤씨(尹氏) 집안에서 세운 종학당(宗學堂)이라는 사립학교(私立學校)가 남아 있다. 파평윤씨들이 내(內), 외(外), 처(妻)가 3족(族) 자제들을 자체적으로 교육시키기 위한 학교이었다. 일종의 문중(門중) 사립학교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 종학당은 조선시대 관(官)에서 세운 향교(鄕校)도 아니었고, 사립학교인 서원(書院)도, 서당(書堂)도 아니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이러한 문중(門中) 사립학교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윤씨 집안에만 남아 있는 사례이다. 교육과정을 보면 중, 고등학교 과정은 물론 대학(大學) 과정까지 포함하는 귬이다. 종학당에 입학하면 중학교에서 대학(大學)까지 자체적으로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네 명의 왕(王)을 거치면서도 왕(王)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않았으며, 그러나 역대 앙으로부터 20여 차례나 벼슬을 받았으나 모두 거절한 ' 명재 윤증 (明齋 尹拯) ' .. 우의정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18번의 상소(上疏)로 끝내 거부한 그에게 당시 주위에서는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고 불러 칭송하였다. 벼슬을 거부한 윤증이 고향에서 한 일은 무엇인가 ? 그가 가장 역점을 두었던 것은 교육이었으며, 윤증의 후진(後進) 교육은 이곳 종학당(宗學堂)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종학당(宗學堂)은 윤증의 집안인 파평 윤씨(坡平 尹氏) 노종파(魯宗派)에서만 발견되는 독특(獨特)한 사설 교육기관이다. '파평 윤씨'들이 설립한 자신들만을 위한 일종의 사립학교(私立學校), 이왕지사 종학당(宗學당)을 설립하였다면 널리 후진(後進) 양성을 위한 기관으로 활용되지 않아 가문(家門) 중심적인 폐쇄성(閉鎖성)으로 비판의 여지는 있지만, 하여튼 이 종학당을 통하여 '파평윤씨' 노종파(魯宗派)는 기호지방(畿湖地方)에서 명문세족(名門世族)으로 널리 알려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종학당의 설립
종학당(宗學堂)은 윤증(尹拯)의 중부(仲父 ..큰아버지)되는 ' 동토(童土) 윤순거(尹舜擧) '가 문중의 힘을 모아 1618년에 세웠다. 윤순거(尹舜擧) 역시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고, 뒷편에 남아서 주위 공동체의 배려에 힘을 쏟은 인물이었다. 종학당 설립은 윤순거(尹舜擧)가 했지만, 학문적인 교육은 그의 동생이었던 '노서(魯西) 윤선거(尹宣擧)'가 주로 담당하였다.
윤선거(尹宣擧)는 윤증(尹拯)의 아버지로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비록강화도를 탈출하여 지탄의 대상이 되었고, 이 사건은 아들 윤증(尹拯)에게 인생의 멍에가 되지만, 송시열(宋時烈)의 친구이면서도 학문적인 논쟁을 벌였던 인물이었다. 그 아들 윤증(尹拯)에 이르러 종학당의 교육은 더욱 탄탄한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종학당 설립자 윤순거(尹舜擧)는 문중에서 십시일반으로 돈을 거두어 학교 후원재단인 '의전(義田)'을 만들어 놓기도 하였다. 재정적인 뒷받침을 하기 위한 장치이었다. 학생들의 수업료는 매달 쌀 6말이었고, 선생 봉급은 매달 쌀 7말, 학장의 봉급은 쌀 9말이었다.
이곳 종학당에서 45명에 이르는 과거(科擧) 급제자 등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면서,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을 배출한 연산(連山)의 '광산 김씨(光山 金氏)'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을 배출한 회덕(懷德)의 '은진 송씨(恩津 宋氏)' 그리고 이곳 노성(魯城)의 '파평 윤씨(坡平 尹氏)' ... 이 세 집안이 솥단지의 세 다리처럼 정족적(鼎足的) 형국을 이루었던 것이다. 17세기 이래로 조선사회를 움직였던 주류(主流) 세력이 영남(嶺南)보다는 기호지방(幾湖地方)의 양반들이었음을 감안할 때 이 세 집안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명문세족(名門世族)이었던 것이다.
종학당(宗學堂)이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 현실적인 계기는 과거급제자(科擧及第者)를 다수 배출한 점에 있다. 종학당은 1618년 개교(開校) 이래 1910년 한일합방으로 강제 폐쇄될 때까지 292년 동안 유지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배출된 문과(文科) 급제자가 42명이었다. 종학당 설립이전에 급제한 '파평 윤씨' 5명을 포함하면 총 47명이다. 조선시대에 문과(文과) 합격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집안은 앙족인 '전주이씨(全州李氏)이고, 그 다음이 '파평윤씨'로 모두 460명을 배출하였다. 전국의 '파평윤씨' 가운데 이곳 논산(論山)의 노성(魯城)에 살았던 윤증(尹拯)의 집안 사람들이 10%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백록당 白鹿堂
백록당(白鹿堂), 즉 오가백록(吾家白鹿)이다. 우리 집이 곧 백록(白鹿)이라는 의미이다. 중등(中等) 과정을 마치면 이곳 '백록당'으로 올라와 본격적인 과거(科擧)시험을 준비하던 곳이다. 즉 대학과정인 셈이다. 백록(白鹿)은 중국의 주자(朱子)가 살던 곳의 지명이 백록동(白鹿洞)이고,주자(朱子)가 직접 가르치던 서원(書院)의 이름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이었다. 학문의 본향(本鄕)임을 자부하고 있는 이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