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따라 걷는 길, 청량산 축융봉
1. 일자: 2023. 10. 28 (토)
2. 산: 청량산
3. 행로와 시간
[탐방안내소(11:18, 축융봉 3km) ~ (초반 0.7km 된비알) ~ 축융봉(12:44~53) ~ (청량산성) ~ 밀성대(13:30~14:00) ~ (입석) ~ 솟대와시인(14:42) ~ 청량사(14:55~15:25) ~ 청량사박물관(16:15) / 10.2km]
청량산을 여러 번 다녀왔지만 단풍이 절정인 이 시기는 처음이다. 길 막힘과 인파에 휩싸이는 게 싫어 단풍 절정기에 인기 있는 산을 찾는 건 자제했는데, 이번엔 마음이 동한다.
도립공원 입구에서 축융봉과 청량사를 거쳐 정상인 장인봉에 오른 후 하산하는 원점회귀 종주 코스를 염두에 두고 산행 신청을 한다. '그윽한 곳 찾아서 깊은 곳 넘고 험한 데 지나서 겹 재 올랐네' 로 시작되는 퇴계 선생의 '등산' 이란 시를 읽으며 토요일 아침을 기다린다.
< 도립공원 입구 ~ 축융봉 >
11:18, 축융봉으로 향하는 가파른 계단 앞에 선다. 처음 오르는 길이다. 예상은 했지만 초반 오름이 무척 가파르다. 1km를 걷는데 고도는 300m를 높였다. 극강이다. 자켓을 벗는다. 산악회 일행들이 흩어진다. 길이 순해 진다. 100m 단위로 거리 안내목이 서 있다. 과한 친절이다.
한 고비 호된 신고식을 경험하고 나니 '예뎐길'에 적응이 된다. 단풍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풍경은 여유의 산물이다. 1시간 쯤 걸었을까, 주홍빛 단풍이 빛에 반사되는 모습이 멋져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산수담님이다. 족히 5년은 더 되었나 보다. 반가웠다. 부인과 오셨단다. 안부를 묻고 축융봉까지 함께 걸었다.
축융봉에서 바라보니 청량산의 전모가 드러난다. 구름다리, 청량사, 두들마을 그리고 멀리 낙동강의 모습이 한 프레임에 들어온다. 둥근 암봉의 골격을 따라 울긋불긋 절정기의 단풍이 흰구름이 떠 있는 하늘 아래에서 빛을 발한다. 장관이다. 명불허전, 그 좋다는 청량산의 단풍을 제대로 목격한다. 가을 색의 향연이 나를 위해 펼쳐지는 공연처럼 느껴졌다. 황홀한 눈맛 만으로도 오늘 산행은 충분히 만족스러 우리라.
< 축융봉 ~ 청량사 >
가을과 단풍은 절정을 향해 가고 있다. 낙엽이 떨어진 숲길을 걸으며 문득, 내 나이가 이 계절 쯤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풍요롭고 원숙하게 익어 가고 있지만, 곧 다가올 겨울이 신경쓰이는 나이 말이다. 몇 년 전 왔을 땐 새로 축성한 산성 위 돌들이 흰색 일색이었고 새 것의 느낌도 강했는데, 오늘은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모습을 보니 더욱 그렇다. 내게도 곱게 세월의 때가 묻어나기를 바래본다.
청량산성 옆으로 긴 나무계단이 놓여 있다. 가을의 정취가 계단 위에 뒹구는 갈색 잎에서도 느껴진다. 밀성대, 정자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청량산의 암봉들이 좀 더 가까워졌다. 특유의 사납지 않은 골격미가 느껴진다. 사진을 찍고 정자에 앉아 요기를 한다. 정자에서 바라보는 청량산의 가을은 그 운치가 속된 말로 장난이 아니다. 산세와 암봉과 단풍의 어우러짐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지나는 이에게 사진을 부탁하고 뒷모습을 보니 축융봉 오름 길에서 지나쳤던 분이다. 길을 묻는다. 어디로 가냐 물으니 청량사를 지나 정상에 오르려고 한단다. 2시가 지났는데, 남은 3시간으로 장인봉을 오른 후 하산하려면 빠듯할 듯하다. 서둘러 갈 것을 제안한다. 때마침 넓어진 임도길을 씩씩하게 뛰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응원했다. 난 청량사까지만 가고 정상은 오르지 않을 작정이다. 마음을 정하고 나니 걸음은 더 느려진다. 그래 내 이름이 '느리게'이지 않은가. 낙엽이 쌓여가는 길을 따라 내려온다. 산에서도 이 여유가 좋다.
도로를 만나고 입석을 지나 청량사로 향한다. 가을 오후 햇살이 길에 떨어진다. 가을의 냄새는 메말라가는 숲에 내리는 햇볕의 냄새인지도 모르겠다. 좁은 오솔길을 따라 오른다. 올려다 보는 눈에 우뚝 솟은 암봉이 시선을 끈다. 연하봉인지 자란봉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암봉이 마치 뾰족한 죽순들이 둥들게 모여 있는 형국이다. 그 부드러운 우람함에 또 반한다.
청량정사 찻집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솟대와 시인', 예전 안에 들어가 차도 마시고 시인인 주인과 대화도 나누었던 인연이 있는 곳이다. 오늘은 입구에서 사진 한 장 찍고는 돌아선다. 머지 않아 청량사 입구에 도착했다. 이 절은 언제 보아도 시야가 확 트여 좋다. 축대 위에 놓인 범종루 뒤로 계단식으로 암자들이 위치해 있는 모습이 편안하다. 앉음새가 탁월한 사찰이다. 가을 햇살이 청량사에 곱게 내려앉는다. 부처님의 자비로움이 세상을 밝게 하시나 보다. 삼각대를 세우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붉은 단풍에 반해 연신 셔터를 누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 석탑을 향해 오르는데 누군가 웃고 있다. 산성 정자에서 만났던 처자다. 반갑게 인사했다. 시간이 늦어 정상은 포기했단다. 잘 했다 했다.
청량사가 매력적인 건, 석탑과 암봉이 조화를 이루며 만드는 풍경과 함께 석탑 앞에서 바라보면 사찰의 전체 모습이 조망된다는 데에도 있다. 암자들은 암봉 밑에 놓여 있으면서도 위태롭기는 커녕 편안한 안식을 준다. 놀라운 경험이다. 결국 산과 절의 조화이고, 그 조화가 편안함을 준다. 한참을 바라보았다.
< 청량사 ~ 청량사 주차장 >
청량사에서 충분히 재미나게 놀았다. 하산하려 길을 나선다. 찻집 위 작은 공터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멋져 걸음을 멈추는데 처자가 드론을 날리고 있다. 거듭되는 인연이 반가웠고 이 멋진 청량사의 가을을 하늘에서 찍으면 정말 이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론 촬영을 마치고 함께 하산했다.
가지 못한 장인봉을 못내 아쉬워 한다. 다녀온 산과 등산 장비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 여러 번의 우연이 연결되어서 인지 마치 오래된 산벗처럼 느껴져 편했다. 덕분에 그 지겨운 도로를 순식간에 내려온 느낌이다.
주차장에 도착했다. 밥을 먹자고 했고, 고등어 자반과 된장찌개를 곁들인 식사를 했다. 드론 이야기를 하다 유튜브 채널을 운영한다는 부끄럽게 하는 말을 듣고 나도 취산벽 카페를 알려 주었다. 산에서의 흔지 않은 인연이 반갑고 기뻤다.
< 에필로그 >
땅거미가 지는 오후 5시, 버스는 서울을 향해 출발한다. 사진을 정리하고 나니 어둠이 깊어진다. 동쪽 하늘에 보름달이 떠 있다. 스르르 졸음이 몰려온다.
가을이 먼저 간 길을 따라 걸었다. 축융봉에서 바라보는 청량산의 모습은 멋졌고, 청량사는 언제보아도 정감어린 사찰이었다.
가을의 정취를 느끼고 인연도 맺고, 기분 좋은 마음으로 집으로 향한다.
첫댓글 청량사 산행이 그 유튜버를 만났던 산행이었구나. 나도 내년엔 여기를 꼬 가봐야겠네, 단풍이 정말 끝내주네~~^^
예, 예년보다 덜 하다 하지만 명불허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