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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드 말러의 음악과 정신세계
1860년 칼리슈트(보헤미아의 이글라우 시 근처) ~ 1911 빈) 지금의 체코 남서쪽 변방에 위치한 칼리슈트에서 태어났다. 말러 역시 오스트-헝가리제국의 유태인들이 겪어야 하는 비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19세기의 유태인 박해는 그의 집안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메테르니히가 발안한 악명높은 '가족법'에 따라 유태인 가정에서는 장남만이 결혼할 수 있었다. 이 법때문에 말러의 아버지 베른하르트도 공식적으로는 사생아였고, 따라서 당시로서는 엄청난 신분상의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정상적인 사회진출의 길이 막힌 베른하르트는 마음을 다져먹고 유태인에게 개방된 몇 안되는 업종의 하나인 주류업에 뛰어들어 경제 기반을 닦았다. 베른하르트는 대단히 엄하고 권위주의적인 가장이었지만 자식들 교육에는 열성이어서 어린 구스타프의 뛰어난 음악 재능을 알아보고 적극 밀어주었다. 6살 때 이미 그의 장래는 음악으로 결정되었고 그때부터 구스타프의 성공을 위해 온 가족이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베른하르트는 말러가 태어난 몇달 후 자신이 청년시절에 품었던 뜻을 상기, 말러의 재능을 신장시켜주기 위하여 이그라우시로 이사하였는데 말러는 이 곳에서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냈다.
유대인 혈통을 가진 그는 어려서부터 인종 차별에 시달렸고, 이것은 그의 성격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독일어를 쓰는 오스트리아에서 그는 소수민족의 일원으로 체코의 토착민들과도 어울릴 수 없었고, 오스트리아인에도 속할 수 없었다. 나중에 독일에서도 그는 보헤미아 출신의 오스트리아인, 유태인 양쪽 모두에게 이방인이었다.
또한 말러는 부모 사이의 갈등으로 고통받았다. 독학으로 공부한 거세고 활동적인 성격의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교양있는 집안 출신의 섬세한 여인이었으며 아내의 사회적 우위에 대해 열등감을 가졌던 그의 아버지는 폭력으로 그녀를 학대했다. 그 결과 말러는 아버지와는 소원했던 반면 어머니에 대해서는 강한 집착을 보였는데 이러한 점은 신체적인 면에서도 나타났다. 다리를 약간 저는 습관은 불구였던 그의 어머니를 모방한데서 생긴 것이엇다. 유년시절 그는 11명이나 되는 형제, 자매들이 질병과 죽음으로 시달리는 것을 보아왔고, 유전적으로 어머니의 약한 심장까지 물려받아 50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 불안정한 초기의 성장배경은 말러의 삶과 음악에 팽배해 있는 정신적 긴장, 회의주의, 빈정댐,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는 귾임없는 추구 등에 대한 설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난 그것만으로 그를 작곡과 지휘의 대가의 위치에 올려놓은 엄청난 정열과 지적인 힘, 목표에 대한 불굴의 의지를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그의 기질 중에 긍정적인 요소들은 의심할 것도 없이 육체적으로 대단한 정력가였던 부계혈통을 물려받은 것이었다. 선천적으로 심장에 문제가 있었음에도 그는 무자비할 정도로 철저한 음악감독이었고 수영을 매우 즐겼으며, 끈기있는 산악인으로서 지극히 활동적인 인생을 살았다.
말러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이고, 2세때 이미 수백의 민요와 병사의 노래등을 외웠다고 한다. 4세 무렵에는 근처 병영에서 들리는 군악과 체코의 노동자들이 부르는 노래에 매료되어 이를 아코디언과 피아노로 연주했으며 소품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자연의 소리와 더불어 군대음악과 대중음악은 커서도 그의 음악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6세때에 외조모집에서 피아노를 배우더니 흥미를 느끼고, 처음에 이그라우 가극장의 지휘자 빅토린에, 다음에는 브로시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10세때에는 이미 이그라우에서 피아니스트로 데뷔하였다.
1869-75년까지 이그라우의 김나지움에서 일반학과와 함께 음악교육을 받고, 그동안 71년 겨울에 프라하에 가기도 했고, 이 학교에서 문학도 가까이 하였다. 1894년 지방행정관 구스타프 슈바르츠는 15살 난 말러의 연주를 듣고 그의 가능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어린 말러의 재능을 키워주기 위해 아들을 정규 음악교육을 받을 수 있는 빈음악원으로 보내라고 베른하르트를 설득했다. 그것은 이그라우의 집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있던 아버지는 아들을 빈으로 보냈다.
청년 시절
1875년 말러는 빈에 가서 14세부터 18세까지 빈 악우협회 음악원에서 브람스의 친구이자 피아니스트인 율리우스 엡슈타인(Julius Epstein)에게 피아노를, 로베르트 푹스에게 화성을, 프란츠 크렌(Franz Krenn)에게 작곡과 지휘를 배우는 등 정규 음악교육을 받았다. 뛰어나게 비범한 재능을 보여, 1878년 7월 피아노연주와 피아노 5중주곡의 작곡으로 상을 받고, 우수한 성적으로 동음악원을 졸업했다(이때 작곡한 피아노곡들은 나중에 사실상 다 파기함). 1877년부터 1879년에 걸쳐서 빈 대학에서 철학과 미술사도 공부했다. 칸트, 쇼펜하우어, 헬름홀쯔, 니체 등의 서적에서 많은 영향을 받고, 또 자연과학에도 커다란 흥미를 가졌다.
이 시기에 말러는 바그너의 영향을 받아 , 자신의 사명이 극음악작곡에 있다고 생각하고, 2편의 오페라 작곡을 기획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단편들은 이무렵의 다른 많은 작품과 함께 냉철한 자아비판을 내린뒤 훗날 모두 불태워버렸다. 또 1877년, 대학에서 안톤 브루크너의 음악이론 강의를 들은 그는 이에 감격, 그뒤 두사람은 사제관계를 초월하여 친근한 우정으로써 맺어졌다. 말러의 첫 출판곡은 브루크너의 제3교향곡 <바그너>의 피아노용 편곡으로서, 여기에는 브루크너에 대한 우의와 후일의 교향곡 작곡가로서의 재능이 엿보인다. 이 교제로써 후기 낭만주의 교향곡의 진수를 배우고, 관현악법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다. 또, 가곡 작곡가 후고 볼프와도 친교을 맺고, 둘이 공동생활을 한 일도 있으며, 음악학자 귀도 아들러와 친교가 깊어진 것도 이 시절의 일이다.
음악활동의 시작
졸업후 바이올린 소나타와 오페라 <시바벤公>등을 썼으나. 생활고에 빠진 데다 엡시타인의 충고도 있고해서, 신경지개척도 겸해 1880년에 린츠 근교의 바트 할(할레 가극장)에서 여름시즌의 지휘자일을 맡았다. 그러나 이 일은 성미에 맞지않아, 가을과 겨울에는 빈에서 피아노 교수를 하는 한편, 작곡에 열중하였다. 음악극으로 기획되었다가 뒤에 칸타타 스타일로 변한 <탄식의 노래>는 이 무렵에 착수하였고, 미완성 오페라 <아르고船의 사람들>도 같은 무렵에 썼다.
<탄식의 노래>는 그 뒤 브람스가 주재하는 심의회(베토벤상)에 제출하였으나 즉각 거부되어 작곡가로서 한때 자신을 잃고, 작곡가보다는 지휘자로 입신하기로 결심하여 1881년 겨울 라이바하시립가극장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러나 1882-83년 겨울, 다시 빈에 돌아와 오페라 <뤼베짜르>를 시초로 계속 작곡을 하는 한편, 생활을 위하여 오르뮈쯔 가극장의 지휘자가 되고(여기에서 비제의 <카르멘>을 다룸), 이어 카셀시립가극장의 지휘자 자리를 얻은뒤, 자신의 작품도 공연했다. 이동안 빈의 카를 극장에서 이탈리아 합창단의 지휘를 맡은 일도 있고, 카셀에는 1885년 4월까지 취임하고 있었는데, 1883년에는 바그너를 숭배하는 나머지 바이로이트에가서 <파르지팔>을 들었다. 이 일은 말러에게 강한 영향을 주어 훗날 <부활>을 쓰는 원인이 되었고, <북유럽교향곡>의 단편을 쓰게끔 되었다.
카셀 시절에는 같은 오페라단의 젊은 여가수 요한나 리히터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말러는 자신의 사랑의 시를 음악으로 옮긴 <방랑하는 젊은이의 노래>의 첫 곡을 작곡했다.
이무럽 이미 지휘자로서의 명성은 명실공히 높아져, 1885년의 음악제에 합창지휘를 의뢰받을만큼 되었으나, 이로 인하여 카셀가극장의 감독 및 주임지휘자와 트러블을 일으키고 그 자리를 떠났다.
1885년 7월 라이프찌히 시립 가극장에서 1개월의 시험적 계약으로 일하여 인정을 받았다. 또한 1885년에는 유명한 바그너풍의 흥행사 안젤로 노이만(Angelo Neumann)의 인정을 받아 25세 때 일찍이 프라하의 독일 가극장 차석 악장으로 발탁되었다. 여기서의 바그너, 모짜르트,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등 뛰어난 연주에 의해서 말러의 명성은 부동의 것으로 확립되었다. 그러나 노이만과 격렬하게 대립한 뒤 1886년 7월 프라하를 떠났다.
그는 라이프찌히 시립 가극장으로 돌아왔으며, 이후 2년간 자신보다 조금 연상인 정지휘자 아르투르 니키슈 밑에서 일하게 되면서 두 사람 사이에 평생의 우정이 맺어졌다. 여기서 베버의 손자 카를 폰 베버 남작을 만나, 베버의 미완성 오페라 <세개의 핀토><3개의>의 보완을 의뢰받고 이를 완성, 1888년 1월 20일 라이프찌히에서 초연하여 만족스러운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엉뚱한 사건이 터졌다. 남작 부인 마리온과 뜨거운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 대가는 큰 것이었고, 애정 도피 행각은 막판에 가서 무산되었으며 절망에 빠진 베버남작은 오랬동안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이 연애사건은 말러에게도 상처를 입혔고 그 간접적인 영향으로 결국 라이프찌히를 떠났다.
1888년, 다른 곳에서 정지휘자 자리를 얻으려고 여름에 이탈리아에 가서 (그러나 정확한 기록은 없다) 이곳저곳과 교섭한 끝에 최후로 부다페스트 왕립 가극장의 정지휘자 자리를 획득, 1888년 10월에 부임하였다. 그는 이 혼란에 빠진 가극장을 감독 베니쯔키의 원조아래 개혁, 예술적 양심으로 오페라의 수준을 높이고, 경제적으로도 당면한 불황을 극복하였다. 여기서는 바그너의 4부작 <니벨룽겐의 반지> 중 처음의 두 곡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 베리스모 오페라의 대표작의 하나인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마스카니 작품)의 헝가리어에 의한 초연을 지휘했다. 그의 연출과 연주의 수준은 특필할 만한 것이었으며(특히 모짜르트의 작품), 많은 칭송자를 얻었는데 그 중에는 브람스도 있었다.
부다페스트의 청중, 오페라단, 음악비평가들과의 관계는 우호적으로 시작되었지만 곧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1889년 2월 아버지의 타계로 말러는 돈문제와 집안일로 큰 부담을 안게 되었다. 게다가 오패라단 안팎에 포진한 말러의 바판가들은 그의 혁신적인 작품해석에 적대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말러는 사실여부와는 관계없이 자격미달이라고 공공연하게 비판 받았다.
짧은 여름휴가중 <교향곡 제1번>을 완성(처음에는 '교향시'라 하여 발표함) 이곳에서 초연(1889.11.20 부다페스트 필하모니 관현악단)하였으나 실패하고, 이후 한동안 자작의 상연을 단념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로부터 얼마 후 사랑하는 어머니와 누이 레오폴디네의 죽음으로 말러의 생활은 엉망이 되었다. 슬픔을 주체하지 못한 말러는 이그라우의 집을 처분하고 어린 동생들을 새 집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1889년은 그에게 가장 불행한 해였다.
1890년의 두 만남
1890년 그의 생활은 한결 밝아졌다. 그해 가을 말러는 나탈리 바우어-레흐너와 만났다. 젊은 바이올리니스트인 레흐너는 말러와 만났을 무렵 결혼생활의 파경에 따른 고통에서 막 회복하고 있었다. 키가 후리후리하고 매력적인 그녀는 집중력과 호기심이 강했고 지나칠 만큼 헌신적이었다. 그녀는 말러와 가깝게 지내는 동안 그에 관한 자질구레한 것을 포함한 모든 정보를 일지에 기록했다. 그녀의 기록은 대단히 세밀하고 가치있는 것으로 말러라는 천재음악가의 진정한 면모를 후세에 더없이 훌륭하게 전해준다. 사실 말러는 그녀의 헌신과 끝없는 관심에 자주 화를 냈지만, 그녀의 인품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는 진정으로 레흐너를 좋아하여 여름이면 누이동생인 유스티네와 그녀와 함께 휴가를 보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의 감정은 레흐너만큼 깊지 않았다.
1890년은 또한 그가 처음으로 요하네스 브람스와 만난 해이기도 하다. 그해 11월 부다페스트 체류중 마지못해 말러가 지휘하는 <돈 지오반니>공연을 보러간 브람스는 말러의 천재적인 작품 해석력에 감동하여 연방 브라보를 외쳤으며 '완벽한 <돈 지오반니>를 듣고 싶으면 부디 헝가리의 수도에 가라'고 까지 말했다고 한다. 브람스에게 준 이런 좋은 인상은 후일에 말러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브람스는 말러를 작곡가로서는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이 시기의 말러의 생활은 감정면에서 매우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칸타타 <탄식의 노래>(1880), 가곡집 <방랑하는 젊은이의 노래>(1884), <교향곡 제1번>(1884-88)같은 그의 초기의 작품은 이 시기에 실패로 끝난 그의 세번의 연애에서 착상된 작품이다. 말러의 미인 가수에 대한 정열은 이미 물의를 일으키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 뒤 함부르크에서 지휘하게 되었을 때도, 그리고 빈에서도 똑같았다.
명예로 이르는 길
1891년에 극장감독이 바귀면서 배외주의(排外主義)와 독재로 알려진 벨라 지치(Bela Zichy)백작이 취임하자, 이 새로운 감독은 말러를 부다페스트에서 추방했다. 말러는 함부르크 시립 가극장의 정지휘자로 취임하기로 했다. 함부르크에서는 지식이 풍부한 많은 청중과 국제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성악진(聲樂陳)을 거느리게 되었으나 관현악단은 수준이 떨어졌고 연출은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곳의 극장 감독 베른하르트 폴리니(Bernhard Pollini)는 성악 외에는 흥미를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함부르크에서도 말러는 새로운 신봉자를 얻었다. 그가 상연한 작품의 작곡자들(마스네, 차이코프스키, 마스카니, 알르레드 브뤼노 등)이나 한스 폰 뷜로, 빌렘 멩겔베르크 등으로, 폰 뷜로로부터는 예약연주회의 지휘를 이어받았다(뷜로는 지휘자로서의 말러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했으나 작곡가로서의 말러에 대해서는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1892년은 그가 흠모해온 차이코프스키와 만난 특별한 해였다. 말러가 지휘한 오페라 <에프게니 오네긴>의 리허설을 감독한 차이코프스키는 초연을 관람하느라 체류일정을 연장하여 말러를 더욱 감격시켰다. 다음해에는 R.슈트라우스와의 우정도 꽃을 피웠다. 두 사람의 우정은 그후 오랬동안 지속된다. 슈트라우스는 말러가 꿈꿔온 대로 지휘와 작곡 양면에서 호평을 받아낸 사람이었다.
그는 6년 동안 함부르크에 머물면서 오페라극장측과 질적 수준을 놓고 끝없이 대립했고 혁신적인 방법을 경멸하는 독일 비평가들과도 충돌했지만 그가 당대의 일류 지휘자 반열에 오른 것은 이때부터였다. 이 함부르크 시대(1894-95)에 시타인바하에서 제2교향곡 <부활>을 완성하고, <어린아이의 이상한 뿔피리>에 착수하였는데, 뷜로가 1894년에 사망하자 말러는 당시의 착잡한 감정과 그 장례식의 인상을 제2교향곡 종악장에 곁들여 넣었다.
함부르크에서의 6년 동안 매년 여름을 잘츠부르크 근교의 아테 호반(아래 그림)에서 보냈던 말러는 이 사이에 <교향곡 제2번>(1888-94)과 <교향곡 제3번>(1893-96), 거기에 가곡집 <어린아이의 이상한 뿔피리>의 대부분을 작곡했다.
말러는 이미 지휘자로서의 명성이 퍼져 확고한 기반을 잡았으나, 그는 작곡가로서의 이름을 더욱 높이려고 노력, 마침내 1895년 3월 R.슈트라우스가 베를린 필하모니를 지휘하여 제2교향곡의 앞 3악장을 처음으로 연주하였다. 슈트라우스는 당시 말러에 대한 소수의 이해자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인물로서, 전해에 바이마르에서 제1교향곡을 지휘한 일도 있었다.
감정의 격발
그때까지의 시련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는 듯이 1895년초 말러 집안에 또 하나의 액운이 닥쳤다. 몇해 동안 가정이 비교적 평화롭다 싶더니 누이동생 유스티네와 에마가 함부르크의 말러 집에 와 있는 동안 남동생 오토가 라이프치히에서 의문의 자살을 한 것이다. 말러는 동생의 죽음에 깊은 충격을 받아 평생 동생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죽은 다음에야 말러의 미망인은 낡은 트렁크에서 오토가 쓴 3개의 교향곡과 가곡집을 찾아냈다. 구스타프는 차마 그것들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해 말 말러가 오페라극장의 젊은 신인가수 안나 폰 밀덴부르크와 느닷없이 격렬한 사랑에 빠진 것은 아마도 깊이 묻어둔 슬픔의 표출이었는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뜨거운 사이를 비밀에 부치려고 했지만 곧 단원들이 알게 되었다. 마지못해 결혼 직전까지 이르게 된 두 사람의 관계는 안나의 끈질긴 소유욕과 맺고 끊지 못하는 말러의 성격 떄문에 거의 1년이상을 질질 끌었다.
결국 1897년 말러가 새 일자리를 얻어 함부르크를 떠나면서 둘의 관계는 정리 되었다. 함부르크 시립 오페라 극장 감독 베른하르트 폴리니와의 사이가 악화일로를 걷자 말러는 1년 전부터 빈 궁정 오페라극장의 악장 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음악이 따돌림 받고(그의 <교향곡 제1번>초연 입장권은 1장도 팔리지 않았다) 단원들 앞에서 갖은 모욕을 받아야 하는 함부르크라는 도시를 빨리 떠나고 싶었다. 폴리니는 공들여 모셔온 지휘자가 사실은 무능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을 단원들 앞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1895년 12월 13일 말러는 제2교향곡을 완성하여 베를린에서 초연하고, 1896년 여름에 제3교향곡을 완성, 그러던 중 1897년 빈궁정가극장의 지휘자로 취임하는 것을 계기로 함부르크를 떠났다.
과거와의 결별
1897년 유별난 절차를 밟아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한 후에야 말러는 브람스와 그의 친구이며 음악평론가인 한슬릭의 후원을 얻어 빈 궁정 가극장의 지휘자가 될 수 있었다. 말러는 정통 유태교도는 아니었지만 반유태주의가 공공연히 횡행하는 빈에서 지휘자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카톨릭으로 개종해야만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신앙심은 깊었지만 결코 독실한 카톨릭신자가 되지는 못했다.
빈은 당시 세계 오페라의 중심지였으므로 빈 궁정 오페라극장의 악장직은 말러에게는 다시없는 영광의 자리였다. 빈에서 보낸 첫 시즌에서 그는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 말러는 헌신적인 노력과 지칠 줄 모르는 정열로 한물 간 것으로 여겨지던 정통 오페리를 상연, 청중의 관심을 되돌리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음악가 겸 극작가 말러가 상연한 작품(말러는 연출의 뼈대가 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이 직접 결정을 내렸다)은 지금도 역사상 화제가 되고 있다. 그는 당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내가 계란으로 바위를 쳤더니 그만 바위가 부서졌다네."
이 빈 시대는 대체로 10년쯤 계속되는데, 이 시기는 말러의 일생중 오페라 지휘자로서 가장 빛나는 시기였던 동시에 빈 오페라공연사의 황금시대이기도 하였다. 특히 무대장치가이기도 한 화가 알프레트 롤러(Alfred Roller)와 알게 되어 그 이후의 빈 시대 최후의 5년간은 무대표현에서 시각적, 연극적, 음악적 등 갖가지 요소의 통일적 융합이라는, 이전부터 자신의 예술상의 이상으로 하고 있던 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쉴 사이도 없이 상연을 거듭했다. 이 눈부신 협력관계는 빈 궁정 가극장에 진정한 황금시대를 가져오게 했는데, 그 발전 단계의 주요한 한 시기를 이룬 작품은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1903), 베토벤의 <피델리오>(1904), 모짜르트의 <돈 조반니>(1905)와 <피가로의 결혼>(1906), 글룩의 <아울리스의 이피게니아>(1907)였다.
좋은 평판을 얻은 말러는 1898년 봄 한스 리히터가 빈 필하모니 지휘자직에서 은퇴했을 때 그자리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리하여 말러는 1898년 이후 3년 동안 빈 필하모니 관현악단을 지휘하게되어 브루크너, R.시트라우스, 프랑크 등의 신작을 계속 공연하였다.
빈에서의 시련과 고초
그러나 초기의 성공 뒤에는 청중의 반응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가 위대한 고전작품에 가한 <수정>은 평론가들의 분노를 폭발케 했다. 처음에 말러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가 지휘한 공연들, 심지어는 전혀 삭제하지 않은 바그너의 전작 오페라(당시로서는 드문 일이었다)까지도 청중이 극장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빈에 있는 2개의 반유태성향 신문들이 악의적인 비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는 '난쟁이 유태인'이라는 비아냥까지 감수해야 했다. 뒤이은 소송에서 말러의 고용주들은 점잖을 빼면서 침묵으로 일관하여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뵈르터제 호수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면서 <교향곡 제4번>을 완성했고 프란츠 나발 같은 역량있는 가수들을 새로 영입했지만 그가 받은 수모는 감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1900-1901년 겨울에 사태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교향곡 제1번>의 빈 초연은 노골적인 야유를 받았고 그가 지휘한 오페라공연은 비평가들로부터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증오를 받거나 숭배를 받기는 했어도 사랑받는 일은 없었던 말러의 예술상의 광신적 행위는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었다.
말러는 시련에 처한 삶에서 오는 긴장으로 말미암아 그해 봄에 중병을 앓았다. 그에겐 긴 휴식이 필요했다. 그는 한여름을 뵈르터제 호수에 유스티네, 나탈리와 보내면서 건강과 창작력을 회복했다. 그는 <교향곡 제4번>을 수정하는 한편 <교향곡 제5번>의 두 악장도 썼다. 또한 아름다운 7곡의 가곡을 완성했는데 그중 5곡은 프리드리히 뤼케르트의 시를 가사로 삼았다.
새로운 연정
그러나 가을에 빈으로 돌아오자 또다시 그에게 무차별 공격이 퍼부어졌다. 그중에서도 <교향곡 제4번>의 뮌헨 초연에 대한 비평은 끔찍했다. 잔인한 비평가들에 의해 그의 작품은 완전히 '정신나간 음악'이라고 낙인 찍혔다. 우울하고 쓸쓸한 나날을 보내던 말러는 1901년 11월말 친구의 파티에 참석했는데, 그곳에서 23살의 알마 마리아 신들러라는 아리따운 아가씨를 만났다. 그는 뜨거운 연모의 정을 품었다.
시간이 지나도 그의 열정은 사그러들지 않았고 두 사람은 격렬한 사랑에 빠졌다. 12월말 그들은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고 약혼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약혼발표는 빈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말러가 이 도시의 가장 유명한 독신남성이었기 때문이다. 청중들은 오페라극장에서 그에게 축하연을 베풀어주었다. 서로에 대한 갈망으로 두 사람은 이듬해 동거에 들어갔고 알마는 임신을 했다. 서둘러 결혼을 해야 했던 말러로서는 아직 자신이 보살피던 누이동생 유스티네가 걱정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유스티네도 오랫동안 사귀어오던 바이올리니스트 아르놀트 로제와 약혼을 발표했다. 두쌍의 결혼식은 하루 간격으로 치러졌다. 구스타프와 알마는 1902년 3월 9일에, 유스티네는 그 다음날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으로 희생된 사람은 나탈리 바우어-레흐너였다. 말러와 나탈리의 관계는 완전히 끝나버렸다. 나탈리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알마는 유명한 풍경화가의 딸로서 작곡도 좀 하는 음악가였는데, 그 독점적이고 정열적인 성격과 만나는 모든 사나이들을 매료시키는 성향이 말러와의 부부 사이를 몇 번이나 위기에 빠뜨렸다. 그러나 알마의 아름다움과 쾌활한 정신은 동시에 말러의 성격을 바꾸게 했다.
이제 말러는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오페라극장에서는 열광적으로 지휘 활동을 했다. 여름에는 뵈르터제 호수의별장에서 작곡을 했으며 빈의 집에서는 평온하고 소박하게 살았다. 결혼한 첫해 두 사람이 받은 가장 큰 선물은 첫아이 마리아 안나의 탄생이었다(말러는 알마와의 사이에서 두 딸을 얻었으나 그중 둘째딸은 낳은지 얼마 안되어 사망하였고, 맏딸은 말러가 사직한 1907년 여름에 사망하여 말러에게 평생 씻지못할 깊은 충격을 주게된다.
처음부터 말러는 이 조용하고 말없는 아이를 애지중지 했다. 그는 사회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보다 딸과 함께하는 시간이 훨씬 즐거웠다. 결혼한 뒤로 말러는 점차 사교계로부터 멀어지더니 아예 바깥출입을 삼가하다시피 했다. 점점 은둔에 빠지고 독재로 흐르는 말러가 알마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다. 그는 완전한 복종을 요구했고 특히 작곡을 하는 시간에는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졌다. 알마는 전에 유스티네와 나탈리가 그랬고 그전에는 말러의 온 가족이 그랬던 것처럼 말러의 요구에 따랐다. 그러나 알마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알마는 높은 지성의 소유자였고 친구들도 많았다. 결혼 전에는 어엿하게 작곡도 했었다.
그녀는 서서히 친구들을 집안으로 불러들였다. 말러는 알마를 통하여 몇몇 저명한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콜로 모저(Kolo Moser), 칼 몰(Karl Moll, 알마의 양아버지) 같은 화가들, 극시인 게르하르트 하웁트만(Gerhard Hauptmann), 전위음악가인 두 명의 지도자 아르놀트 쇤베르크와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 등 - 과도 사귀게 되었다.
창작의 시기
말러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이 빈 시대에 여름 휴가를 마이어니히의 뵈르터 호반(아래 그림은 말러의 별장)에서 보냈는데, 여기서 제4번부터 제8번까지의 교향곡과 후기 가곡을 작곡했다(시간에 쫓기다 보니 시즌아닌 여름에만 작품을 썼음).
1904년 여름 알마가 둘째 아이를 가졌을 때 말러는 어둡고 비극적인 <교향곡 제6번>과 프리드리히 뤼케르트의 시에서 감동을 받아 작곡한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라는 연가곡을 완성했다. 그는 겉으로는 부족할 것이 없었지만 이 가곡은 깊은 내면의 동요를 암시하고 있었다. 알마는 이 아름다운 가곡을 마음편히 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끔찍한 운명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뒤에 아기가 태어났고, 아무일도 없었다.
말러의 음악 활동이 절정에 이른 1906년에 마침 빈에서는 모짜르트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는 각종 공연이 펼쳐졌다. 그해 말러는 모짜르트의 걸작 오페라 5편을 무대에 올렸으며 잘츠부르크에서는 왕실을 위해 <코지판 투테>를 특별공연했다.
말러가 주로 오페라 극장에서 지휘 활동을 했기 때문에 완숙기의 작품 모두가 교향악적인 작품이라는 사실은 의외로 받아들여진다(40곡의 가곡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리트가 아니라 불완전한 교향악적 악장들인데, 사실 그 가운데 몇몇은 교향곡 작곡을 위한 부분적인 기초로 사용되기도 했음). 그러나 부분적으로 리하르트 바그너와 프란츠 리스트 악파의 영향을 받은 말러의 음악적 목표는 개인적인 세계관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본질적으로 자전적인 것이었으며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는 오페라라는 극적 수단보다는 가곡과 교향곡이 적합했다. 즉 가곡은 개인적인 서정성을 갖추고 있고 교향곡은 (바그너와 리스트의 견해에 따르면) 주관적인 표현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작곡가로서 인정받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이며 1902년부터 약간씩이기는 하지만 자작을 독일 각지 및 오스트리아, 네덜란드에서 지휘하게 되었고, 네덜란드에서는 빌렘 멘겔베르크가 말러의 작품을 지지하여 그것을 다루어 주었다. 빈에서는 아침 9시, 극장에 가기전까지 작품의 세부적인 보필을 하는 등, 무리가 겹치는 다망한 생활로 인하여 차츰 건강은 쇠약해졌으나, 반면 작곡자로서의 명성은 각처에서의 연주가 잦아짐에 따라 급속히 높아지고, 악보도 계속하여 출판하게 되었다. 1906년 제8교향곡의 작곡을 착수한 이래로 작곡에만 전념할 뜻을 굳히고, 다음해 가극장과 필하모니 지휘자의 자리를 물러났다.
그러나 1907년 장녀인 푸치(Putzi)가 성홍열에 걸려 죽었을 때 말러는 이미 빈을 떠나 뉴욕의 오페라 극장으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있었다. 이무렵 말러 자신도 심장의 이상을 느끼기 시작하였고, 가급적 체력의 소모를 피하려 했는데, 마침 이때에 유리한 조건으로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으로부터 지휘자의 교섭이 들어왔고, 말러는 후일 2,3년 동안 작곡에 전념할 수 있는 경제적 기초를 만들기 위하여, 체력의 피로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승낙했던 것이다. 1908년 가을에 빈에서의 최후의 지휘를 마친 뒤, 시민과 각계 명사들의 빈에 정주하라는 간절한 권유를 뿌리치고, 쇤베르크를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전송을 받으며 12월 12일 그곳을 출발하였다. 10년 동안이나 빈 가극장에 들끓는 책모나 공격의 희생이 되었으며, 빈 시민의 그늘에서 싹터 오르는 유태인 배척의 기운에 고심해 오던 그였지만 그는 작별을 아쉬워하면서 고향인 유럽을 뒤로 하였다.
이후 여름 휴가를 토플라흐에서 지내는 것을 제외하고는 유럽으로 돌아오는 일이 없었으나 티롤 지방 남부의 두 피서지에서 교향곡 <대지의 노래>와 <교향곡 제9번>, 그리고 <교향곡 제10번>을 중간까지 작곡하게 된다.
1908년에는 <제8교향곡(1000인 교향곡)>을 완성하여 프라하에서 초연하였고, 같은 무렵 토플라흐에서 베토벤과 브루크너의 교향곡의 숙명적인 숫자(교향곡 작곡가는 9번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는 이른바 '9번 징크스')를 피하여 교향곡 제9번이라 하지 않고 <대지의 노래>라고 제목을 붙인 곡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뒤 과감히 미신을 버리고(또는 '9번 징크스'를 벗어났다고 생각하고), 1909년에 토플라흐에서 완성한 교향곡에 제9교향곡이라 명명했는데, 기이하게도 1909년에 착수한 교향곡 제10번은 완성되지 않고 스케치와 단편을 남긴채 말러는 이 세상을 떠났다. 1910년에 유럽 각지에서 자작의 교향곡을 지휘, 9월 12일 뮌헨에서의 제8교향곡의 초연은 공전의 대성공을 거두어, 말러의 교향곡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확고부동하게 굳혔으나, 제9교향곡과 <대지의 노래>는 그의 사후에 비로소 제자인 브루노 발터에 의하여 초연되었다.
뉴욕에서의 말러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바그너와 모짜르트의 작품의 밤(그 외에도 베토벤의 <피델리오>, 스메타나의 <팔려간 신부>, 차이코프스키의 <스페이드의 여왕> 등)을 지휘하여 청중을 열광적으로 감동시켰다. 그러나 2년 후에는 극장 감독이 독일인 콘리트(Conried)에서 당시 혈기왕성하며 야심에 넘치던 젊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를 새로운 지휘자로 데리고 온 이탈리아인 가티-카자차(Giulio Gatti-Casazza)로 바뀌자 그는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을 떠나게 된다.
그에 대한 경의로 뉴욕 필하모니 관현악단을 전면적으로 재조직함으로써 지휘자가 된 말러는 우선 최초의 시즌 동안은 45회의 연주회가 예정되어 있었고, 두 번째 시즌에는 65회의 연주회가 예정되었는데 48회째의 연주회를 마친 후인 1911년 2월 21일 병으로 쓰러지게 되었다. 그 무렵 말러는 어떤 비평가의 조직적인 공격을 받았으며, 뉴욕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감독위원회와도 격렬하게 대립하여 지휘를 계속해 나가기가 어렵게 되었는데, 그 뒤 처음에는 그저 후두염 정도였던 병이 악화되어 전신으로 퍼져 이 투병생활은 2개월이나 이어졌으며 파리에서 1주간의 치료를 받기 위해 뉴욕을 떠날 무렵에는 그 누구도 말러의 소생을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빈에서 죽으리라 마음억고 파리에서 빈으로 옮긴 며칠 후, 말러는 51회의 생일을 앞에 둔 1911년 5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유언에 따라 장례때는 추도문을 읽지 않고 음악도 없이, 빈 교외에 있는 사랑하는 딸의 무덤곁에 묻혔다.
비록 그가 죽은 뒤 50년 후에야 그의 음악이 인정 받았지만 말러는 이후 20세기 작곡기법에 있어 중요한 선구자로 인식되었으며 아르놀트 쇤베르크,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벤저민 브리튼 등과 같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지휘자로서의 말러의 제자에는 상술한 브루노 발터 외에 빌렘 멘겔베르크와 같은 대가도 있다. 또 미완성인 제10교향곡은 파기하도록 지시되어 있었으나. 미콜라이에 의해 완성되고, 1913년 초연되었다.
말러가 활약하고 있던 시대는 새로운 방향에 대한 강한 동경을 나타내면서 전진하는 바그너와 리스트에서 발단된 신낭만주의와 비교적 보수경향을 추구하는 브람스에서 나온 신고전주의와의 투쟁의 시대였다. 그리고 이 단계을 거쳐 근대 음악이 탄생하거니와, 이러한 과도기에 훌륭한 업적을 남긴 대표적 인물이 곧 말러였다. 즉, 고전음악의 원칙이 여전히 완강한 세력을 가진 중에서, 당시의 작곡자들은 어떤 점에서든 새롭고 그리고 시대풍조에 적합한 음악을 지으려 하였으나, 과도적인 시대이니 만큼 새로운 음체계의 발견에 까지 도달한다거나 또 새로운 음악을 위하여 형식이나 화성, 선율을 대담하게 혁신, 개척하는데 까지는 미치지 못하였고, 다만 옛것을 새로운 수단으로 확장, 충족시키거나 모험삼아 시도하는 정도에서 그쳤다. 말러는 이러한 때에, 한편으로 보수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타인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진보적인 경향을 보여준 것이다. 이 점에서 말러는 후기 낭만주의시대를 근대음악에 직접 연결시킨 인물, 다시 말해서 <과도기의 진보주의자>로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면 말러의 보수적인 태도란 어떤 것인가, 혹은 진보적 경향은 무엇인가.
구스타프 말러는 40곡 정도의 가곡(거의 절반 가량이 관현악 반주 딸림)과 칸타타 1곡, 그리고 11곡의 교향곡(<대지의 노래>와 미완의 <교향곡 제10번>을 포함)을 남기고 있다. 즉 말러의 창작은 가곡과 교향곡으로 대표된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게다가 그 교향곡은 모두 가곡의 체험에서 발전하여 이루어진 것들이다. 그의 교향곡들 중 성악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 여러 곡(1,5,6,7,9,10번) 있긴 하지만, 여기서도 슈베르트 등의 작곡가들이 즐겨 사용하였던 가곡형식의 선율을 우위에 두는 등의 가곡적인 성향을 엿볼 수 있다.
가곡에서 말러는 <탄식의 노래>와 <방랑하는 젊은이의 노래>등 자작의 낭만적인 시로써 작곡한 것외에는 거의 전부, 가사를 초기의 낭만적이고 또 민요적인 것에서 채택하였다. <어린아이의 이상한 뿔피리>, <죽은 자식을 그리는 노래> 등이 그 좋은 예이다. 교향곡으로서 의도한 <대지의 노래>만 하여도, 옛 중국의, 그러나 낭만적으로 독역獨譯된 가사에 의거하고 있다. 이와 같이 말러는 가사의 선택부터가 낭만적인 태도를 취하여 상당히 보수적이었다. 거기에 붙인 선율은 지극히 민속가요적이며, 율동도 민속적인 것을 채택하고 있다. 민속적인 감각을 율동과 선율의 기조에 깔면서 자유롭고 변화가 풍부한 가곡을 쓴 브람스와는 반대로, 말러는 신낭만주의의 영향에 의해 반음계적인 음을 채용하고는 있으나, 간명하고 단정한 민속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온 음계적 진행을 근본적 특질로 삼고, 도미난트 토니카의 소박한 인상을 주는 데에도 동시에 유효한, 4도의 진행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더우기 민속적인 율동을 고집하는 나머지 가사의 음률을 희생하는 일조차 있었고, 게다가, 이렇게해서 이루어진 선율 자체의 구성도 규칙적이어서, 참신성이 보이지 않는다. 이렇한 점에, 가곡 작곡가로서의 말러의 보수적인 태도가 있다. 왜냐하면 민속성을 추구하며 이를 충실하게 음악화하려는 것은 이미 초기 낭만주의시대의 유물이며, 율동과 고집과 구성과의 규칙화는 클래식 가곡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향곡에 있어서는, 말러는 낭만주의 시대의 작곡자로서, 개개의 악장에 표제적인 것을 부여한 일이 적지 않으나, 그것이 문학적 설명이나 기술記述 또는 구상화具像化되어 음악에 나타나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단순한 상징에 불과하다. 따라서, 곡 자체는 아직 자유로운 교향시적인 것이 못되고, 여전히 클래식 형식의 테두리에 머무르고 있었다. 가사가 있는 교향곡만 하여도, 성악에 대하여, 베토벤의 <제9교향곡>과 감각이나 용법이 본질적으로 다르기는 하나, 역시 고전적인 자세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보수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말러에게는 그것을 능가하고도 남는 진보적인 경향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가곡으로 말하자면, 우선 첫째로 그것은 반주에서 볼 수 있다. 그의 가곡의 반주는 거의 전부가 규모가 크고 정교하여, 노래로서는 나타낼 수 없는 색채를 보강하게 하고 있다. 그뿐아니라 대편성의 관현악을 반주로 사용할 때에는, 강렬한 음향을 내지 않고, 정결하고 대위법적이며 실내악적인 느낌마저 들게한다. 반주라는 것의 지위가, 말러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슈만의 가곡의 경우와 같은 의미가 아닌, 가곡중심으로 고조되어, 가창 선율의 중요성과 동등 또는 그 이상의 지위를 획득한 것이다. 이러한 관현악법의 정결성은, 또한 그의 교향곡에서도 볼 수 있다. 때로는 방대한 편성에 의하여 장대한 효과를 내는 적도 있으나, 그래도 가곡 작가다운 태도로 성부의 선을 명료하게 한다는 의도에서 현저하게 정결하다. 그리고 이 투명성에는 음색의 교묘한 대립법도 한 몫 거들고 있다. 이와같이 대규모적인 관현악법으로 맑은 색채를 낼 수 있었던 작곡자는 말러를 제외하고는 그때까지 전혀 없었으며, 그래서 근대 관현악법을 말할 적에, 말러의 이름을 뺄 수가 없는 것이다.
말러는 민속가곡을 존중하는 의도에서 온음계적인 기법을 따랐으나, 화성에서는 옛양식을 크게 개혁하였다. 온음계적 화성으로, 불협화음을 포함한 화음을 선적線的으로 사용하고, 거기에서 선율을 끌어내어 선적 대위법을 반전시켰다. 이에 수반해서, 걸림, 앞선음 그밖의 이른바 비화성음을 풍부하게 구사하며, 화음의 진행 자체를 놀라울만큼 대담한 터치로 다루고 불협화음정의 병행도 적극 채용하였다. 더우기 폴리하모니에서 아토나르의 음악을 암시하는 것같은 본질적으로 다른 2개의 화음을 동시에 결합하여 새로운 효과를 내는 방법도 사용하고 있다. 이 점에서도, <옛것에 의한 새로운 수법>이 엿보이는 것이다.
말러의 진보적인 경향은, <주제>의 설정, 전개부의 처리, 악장의 배치 그밖에 소나타, 론도 등의 전통적인 형식의 확대같은 데에서도 인정된다. 비근한 예로서, 가곡에서 명확한 반주형이나, 가창선율의 교향악적인 동기의 전개 및 처리, 간주에서의 전개적인 수법은 가곡을 교향곡의 수준으로 올리려는 노력의 표현이다. 또, 소나타 형식의 전개부를 두차례 제시 한다든가, 주제제시와 동시에 바로 그것을 전개부처럼 조심껏 다뤄서 처리한다든가, 모방 대위법이나 겹주제의 대위법적인 수법도 말러의 새로운 양식의 한 경향이다.
과도기의 진보주의자인 말러는 이러한 음악에다 소박과 단순성을, 낭만적인 서정성에다 기괴한 풍자를 곁들여 넣었으나, 해를 거듭함에 따라 생활환경에서 오는 심각한 절망감, 운명적인 비애에 현실성을 지니게 하는 방식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와같은 표현방식은 최후의 제9교향곡에서 완전히 승화되어 모든 고뇌와 세속적 환희를 멀리 초월한, 숭고할이만큼 초자연적인(종교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고독의 만족감으로 바뀌어져서, 슬픔을 극복한 고별로 옮아간다. 베토벤에서 베버, 바그너, 브루크너에 이르는 인물들의 강한 감화를 받으면서, 인간 말러는 그 음악작품에 있어서, 내용적으로는 역시 음악사상 특이한 지위를 보여주고, 후세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그는 작곡가로서는 오랫동안 과소평가되어 무시되고 논란되어 왔는데, 그 원인의 일부는 그가 연주와 창작이라는 양면의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무의식적인 기억과 위장된 <인용>, 스캔들을 야기시키는 <평범함>과 매우 감상적인 자기 만족을 끼워 맞춘 것이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실제로, 행진곡이나 렌들러 무곡 등의 서민적이고 단순한 리듬, 겉보기에는 <안이하게> 착상된 것 같은 선율뿐만 아니라 표현되는 기분의 갑작스런 변화, 조성의 파괴, 두드러진 대조, 거친 음향, 격렬한 색채감, <잡다한> 양식처럼 말러의 예술에서만 볼 수 있는 모든 것은 쇼크를 주고, 도발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비극적인 것과 그로테스크한 것, 정열과 해학적 어투, 숭고함과 저속함, 진지함과 해학, 민요적인 소박함과 정교한 서법,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신비주의와 냉철하고 비평적인 니힐리즘 등 몇 가지 근원적인 대립과 모순이 말러의 작품 중에서 지금까지도 확실히 두드러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과 역설이야말로 말러의 예술에 독창성과 풍부함을 부여하고 있으며, 그의 음악에 있어서 그 가장 깊숙한 곳에서 양식이 되고 있는 것은 말러 자신의 내면적 갈등과 바람, 형이상학적 이미지인 것이다. 말러에게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나 클로드 드뷔시 등 같은 시대의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향락적인 면이 추호도 없었다. 말러는 항상 음악을 '정신적인 것으로 이끌어 올리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래서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말러 속에서 '베토벤 이래 가장 형이상학적인 작곡가', 베토벤 이후 <후기 양식>에 이를 수 있었던 한 음악가를 볼 수 있다는 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말러는 확실히 음악을 변혁하려고는 생각지 않았으며, 새로운 음악 언어를 창조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러가 사용한 소박한 리듬과 온음계적 화성은 과거의 환영에 연연해 하는 것을 허용치 않았던 것이다. 쇤베르크나 그 제자들이 말러에게 바친 존경심은 단순히 말러의 인격만이 아니라 오히려 음악가로서의 말러, 새로운 음악의 선구자로서의 말러에게로 향해져 있었다. 자유로움을 획득한 새로운 폴리포니 서법, 음빛깔을 작곡의 패러미터로 하는 관현악법, 역사적인 음악 소재를 겹쳐 놓는 취급법, 소나타 형식에서의 축어반복적(逐語反復的)인 재현부의 삭제, 나아가서는 소나타 형식 그 자체의 거의 완전하다고 할 수 있는 배제 - 이것은 '끝없는 변형'(아도르노)의 발전과정에 있어서의 필연적인 귀결로써, 특히 말러 후기의 작품군을 특징짓고 있다 - 등 말러의 음악에는 현대를 향한 온갖 싹이 인정되고 있다. 또한 아도르노는 이미 알려져 있는 소재를 전개시키거나 이미 확립된 정식(定式)을 존중하는 대신 전혀 다른 에피소드와 종종 예상 밖의 일은, 전개의 급변을 사슬처럼 연결시켜 짜내는 현대적인 장편소설에 말러의 교향곡을 비유하고 있는데, 그의 교향곡을 일관하고 있는 인간 존재와 전체를 표현하려는 희망과 더불어 거대한 관현악 편성과 장대한 악곡 규모조차도 현대의 많은 작곡가들에 의해서 모방되고 있는 것이다.
말러가 음악가로서 표현한 위기나 분열, 갈등은 장르와 양식 사이에 있는 장벽의 제거, 형식의 붕괴, 전통적인 가치의 몰락 및 이들의 결과로서 생기게 되는 커다란 의문 등과 마찬가지로 이제 그대로 현대가 안고 있는 문제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말러야말로 프로이트나 카프카와 같은 시대에 속하며 피를 같이 하는 동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사람은 공교롭게도 보헤미아의 유태인들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금세기 초의 빈을 상설무대로 한 정신의 혁명극의 중심적인 출연 인물이었다
<추천 음반>
*교향곡 1번 <거인> - 1) 런던 심포니/ 호렌슈타인 - Unicorn 2012,
2) 컬럼비아 심포니/ 발터 - Sony M2YK 45674
*교향곡 2번 <부활> - 1) 필하모니아/ 클렘페러 - EMI 66897,
2) 오제, 베이커, 버밍엄 심포니/ 래틀 EMI 47962
*교향곡 5번 - 1) 뉴 필하모니아/ 바비롤리 - EMI 78974,
2) 빈필/ 번스타인 - DG 423608
*교향곡 8번 <천인 교향곡> - 1) 코넬, 로트, 런던필/ 텐슈테트 EMI 47625,
2) 프라이스, 블레겐, 빈필/ 번스타인 - DG 435102,
*교향곡 9번 - 1) 빈필/ 번스타인 DG 435378,
2) 베를린 필/ 카라얀 DG 410726
*대지의 노래 - 1) 페리어, 파차크, 빈 필/ 발터 Decca 414194,
2) 루트비히, 분덜리히, 필하모니아/ 클렘페러 - EMI 47231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 1) 피셔-디스카우, 베를린필/ 켐페 - EMI 747657,
2) 루트비히, 필하모니아/ 반데르노트 - EMI 69499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지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