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자유와 매임
2024.9.1. 주일오전예배
주님을 그리워하며 요한복음을 써 내려간 사도 요한 선생님은 요한복음 20장 그 부활의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의 무덤으로 찾아온 모습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부활의 새벽에 누구보다도 먼저 만나주신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주홍 글씨와 같은 꼬리표가 붙어있지요. ‘전에 일곱 귀신 들렸던 사람’ 그러나 우리 예수님을 만나므로 그 어둠의 멍에에서 벗어났고, 자유를 힘입고 주님께 매여 살아갔던 성도가 되었습니다. 오늘 저는 주님 모시고 ‘참된 자유와 매임’이라는 제목으로 잠시 주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서울 연세대학교 정문쪽 커다란 돌비에 그 대학의 교훈이 새겨져 있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장 32절 우리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그 진리는 상아탑에서 배우는 학문적인 진리가 아닙니다. 그 진리는 그리스도가 없는 종교적 진리에서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 죄악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십자가로 건너오셔서 우리 각자를 만나주신 그 인격적인 예수님이 바로 그 진리이십니다. 같은 장 8장 36절에는 거듭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저는 신학교 다닐 때 마틴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책을 읽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아주 작은 책인데 복음의 핵심이 담겨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우리 예수님께서 자유를 말씀하신 장소는 예루살렘 성전 안이었습니다. 그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물어봅니다. “우리가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왜 당신은 자유하라고 자유를 말하십니까?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의 실상을 정곡을 찌르듯이 말씀해주셨습니다. “너희 아비는 마귀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해야 하는데 아브라함처럼 나를 믿고 따르지 않고 너희들은 나를 죽이려 하니 마귀의 자식이 분명하다”고 주님은 그들의 실상을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예루살렘 성전까지 들어왔는데 마귀의 자식이라니요? 그런데 그것이 실상인데 어찌 합니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만 그렇겠습니까?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이 다 마귀의 자식이지요. 그들이 알든 모르든 간에 말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참된 안식, 참된 자유는 예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의 성도들은 조금 전에 우리 김목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복음에서 속히 떠나서 다른 복음을 좇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그들은 어리석게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율법은 주님 없이 내 스스로 의롭게 살아보고자 하는 노력인데 가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육체를 따르는 자는 육체의 열매를 맺고 성령을 따르는 자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우리에 대해서 관계없도록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를 우리는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는데요, 느헤미야가 12년간 유대의 총독에 있으면서도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고 형제의 길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바벨론에 잠깐 다녀온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옛 본성으로 돌아가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주님께 매여 살지 아니하면 우리의 육은 언제든지 곁길로 주님과 상관없는 어둠의 길로 돌아서기가 빠를 겁니다. 우리 자신을 늘 십자가로 쳐서 복종시키면서 주님께 속하고 주님께 사랑으로 매여 있는 그러한 중심이 참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시면서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와 어둠과 육체와 율법의 종으로부터 자유가 되었으나 우리가 참으로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과 상담하면서 지낼 때는 그 길은 쉽고 그 길에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가 자연스럽게 맺힐 것입니다.
신명기 15장에는 ‘귀 뚫은 종’이 나오지요. 육 년 동안은 그 빚을 청산하기 위해서 종살이를 했으나 자유롭게 되는 그 칠 년째에 그는 판단을 하고 선택을 해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종살이에서 속히 떠나고 싶었을 텐데 자기가 종으로 있었던 집의 그 집주인이 너무나 귀하고 인격적이고 사랑스러워서 그 집을 떠나게 된 날 “아니오, 나는 떠나지 않겠습니다. 내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서 이 집에 평생 종으로 매여 살겠습니다.” 하고서 귀를 문에 뚫게 되지요.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것은 억지가 아닙니다. 자유롭게 되었으나 주님께 사랑으로 매여서 사랑 가운데 주님의 종으로 섬기는 영광을 가지고 평생을 귀 뚫은 종으로 헌신하는 것과 같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의 말씀에 보면 베드로 사도가 잠시 안디옥에 머물던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 교회니까 이방인 형제들과 어느 날은 함께 식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으로부터 야고보 사도가 보낸 사람들이 그곳에 도착했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보낸 사람들이 그 방에 들어왔을 때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자리를 피하고자 했습니다. 그때 같이 있었던 할례 받은 유대인 형제들이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바나바도 거기에 유혹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이 그 모습을 볼 때 기가 막힌 것입니다. 아니 복음의 길에 서 있는 사도가 복음 진리에 확고하게 서 있어야지 그 형제들이 온다고 해서 이방인들과 식사하는 자리를 떠나다니 말이 되냐고 보는 데서 베드로에게 면책을 했습니다.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시원했을까요? 베드로가 해야 했을 처신은 이것이지요. “형제들 오시느라 수고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이 지역에 사시는 형제들입니다. 서로 함께 인사하시지요.” 그러면서 서로 연결해주고 격려해주면 얼마나 아름다운 형제 사랑과 사귐이 되었겠습니까? 복음이 생각 속에만 있고 내 마음이 주님께 민감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우리는 사도 베드로라 하더라도 주님의 마음과는 달리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외식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이 땅에 다가오신 예수님, 십자가로 다가오셔서 죄악 세상에서 우리를 건지신 예수님, 그 주님으로부터 우리는 진정한 어둠과 죄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선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에 머물면 안 되고요, 주님께 사랑과 감사와 믿음으로 매여 사는 것이 필요하지요. 오늘 성찬식의 의미처럼 우리 주님의 보배로운 피는 우리를 사망과 어둠의 죄 가운데서 벗어나게 해주셨습니다. 주님의 부활하신 몸, 그 살은 이제 주님께 참여하는 우리에게 사랑으로 매여서 주님의 신실한 종으로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복음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곧 나의 십자가, 예수님의 부활 곧 나의 부활이요 나의 생명, 지금 주님께서 다스리시는 주님의 보좌는 내가 가고 싶은 천국이고요, 그 보좌에 매여서 그 다스림 속에 살아가는 오늘의 길이 얼마나 소중한지요. 순간순간 다가오는 영적 어둠의 굴레를 이기기 위해서는 주님의 은혜 속에 살아가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이사야 10장 27절에 그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그 날에 그의 무거운 짐이 네 어깨에서 떠나고 그의 멍에가 네 목에서 벗어지되 기름진 까닭에 멍에가 부러지리라” 주님의 은혜가 기름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살아가는 그 삶이 기름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자유로운 영혼이지만 주님께 매여 살아가면서 성령님의 감동을 따라 삶을 꾸려갈 때 우리에게 어둠의 멍에는 부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언덕 위의 찬송 가사처럼 “보이는 줄 없지마는 온 마음으로 매여갑니다” 참된 자유, 강한 매임으로 이 9월을 시작하고 한 날 한 날 주님과 함께 안식과 자유를 가지고 기뻐하면서 주님의 신실한 종으로 살아보기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