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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역사정의실천연대 원문보기 글쓴이: 역사연대
박정희에 대해 할말 많습니다
박한용(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박정희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고민되신다고요. 한편에서는 700억원을 들여 박정희 기념관을 만든다고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친일파·독재자인 박정희를 기념한다는 게 말이 되냐며 반대하고 있으니, 박정희시대를 겪지 않은 어린 학생들이 혼란을 느낄 법도 합니다. 게다가 양극단으로 치닫는 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교육적 견지에서 어떻게 학생들에게 알려주어야 할 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라·········
사실 박정희는 단순히 친일파라는 잣대로만 평가하기에는 무리이죠. 일본군 하급장교였던 박정희는 이완용, 이광수 같은 거물친일파와 비교하자면 피래미급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물론 이 피래미들이 독립운동가와 조선민중에게는 가장 직접적으로 해악을 끼쳤지만 말입니다). 박정희는 오히려 해방 후 약 20년간 한국의 최고통치자로서 우리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친일행적은 박정희 평가에서 부차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친일파였다는 사실은 그의 삶과 사고방식 그리고 통치형태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그를 평가할 때 반드시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합니다.
우리 현대사 속에서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 근현대사를 어떤 기준에서 어떤 가치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정반대의 결론이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두환이 바라보는 박정희상과 선생님이 바라보는 그것이 차이가 날 수 있듯이 말입니다. 게다가 박정희를 평가하는 것은 사실 우리 현대사 전체를 검토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때문에 이 글을 어떤 결론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견해로 이해해 주시고 선생님의 생각을 가다듬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대통령이 되기 전의 박정희의 행적을 생각해 봅니다.
첫째 박정희는 친일파가 아닙니다. 일본제국주의 최후의 군인이었을 뿐입니다.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를 마치고 국민학교 교사를 하다가 혈서편지를 쓰고 인맥을 동원하면서까지 일본군에 입대하기 위해 악을 썼습니다. 가난, 무지, 철없는 만용, 강제 등의 이유로 일본군에 입대한 것과 전혀 다른 경우지요. 박정희의 교사생활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제는 조선인을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보내려고 아예 어릴 때부터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쏟았습니다. 혈기왕성한 식민지 청년들에게 총을 준다는 게 일제로서는 대단한 모험이었으니까요. 일제말 국민학교(초등학교)가 많이 설립된 것도 조선인의 지식을 향상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선일체사상’을 어릴 때부터 심어놓으려는데 본 뜻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국민학교 교사를 배출해내는 곳이 사범학교였죠. 일제시기 사범학교는 제국주의 선전의 교회였고 사범학교 출신 교사는 제국주의의 사상의 전도사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물론 사범학교 출신의 모든 조선인이 그 전도사노릇을 한 것은 아닙니다).
박정희는 만주국(일제가 세운 나라)의 만주군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그 덕택에 일본육사를 마치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습니다. 그곳에서 조선인·중국인 항일빨치산(게릴라)을 적으로 삼고 싸웠습니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 해방--박정희에게는 패전입니다--을 맞은 것이죠. 아시다시피 일본 군인은 군국주의로 일컫어지는 일본파시즘의 꽃입니다. 일제시기 박정희는 제국주의의 전도사이자 일본파시즘의 행동대원으로 살아온 셈입니다.
일설에 해방 후 박정희는 임시정부의 광복군을 찾아 왔다고 합니다. 그러자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탈출해 광복군이 되었던 장준하선생이 김구선생에게 박정희만은 받아들이지 말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고 합니다. 자발적으로 일본군이 되었고 마지막까지 일본군으로 살아온 박정희를 어떻게 광복군이 받아들일 수 있냐는 거지요. “박정희만은 안된다”라고 외친 장준하선생은 그후 박정희 유신체제에 항거하다 의문의 죽음을 당합니다.
둘째 박정희의 좌익경력 문제입니다. 박정희는 해방후 남로당에 가입합니다. 유사시에 군부 내의 좌익계를 이끌고 무장투쟁을 지도할 임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순사건 때 김창룡이 이끄는 육군방첩대에 의해 발각·체포되었고, 군부내 좌익의 명단을 불어 목숨을 부지 했습니다. 그가 살아남은 데에는 만주군 출신의 선후배--친일군맥--의 도움이 결정적으로 작용했습니다. 가치관을 떠나서 보자면 박정희는 숱한 동료의 목숨을 판 댓가로 자신의 목숨을 건지는 배신을 한 셈이죠.
이 사건으로 군대에서 쫓겨난 그는 6·25전쟁을 계기로 다시 군에 복귀했습니다. 그리고 5·16쿠테타를 일으키면서 혁명공약 제1조로 “반공을 국시로 한다”를 들고 나왔습니다. 극우로 다시 돌아선 겁니다. 일본군에서 좌익으로 그리고 반공투사로 이어지는 박정희의 끝없는 변신에는 이념이나 가치보다는 개인의 출세욕과 야망이 깔려 있었습니다.
셋째 박정희의 쿠테타문제입니다. 박정희는 ‘구국의 일념’으로 쿠테타를 한 게 아닙니다. 박정희는 일제시기 이미 ‘정치화’된 군인출신으로, 군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제국주의 파시즘은 군부 주도의 몇 번의 쿠테타 가운데 성립되었고, 대외침략 뿐만 아니라 국가의 모든 정책 또한 군부가 주도했습니다. 일제 파시즘 아래 성장한 ‘군인 박정희’는 군의 정치개입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실제 박정희는 4·19혁명 전 세 번이나 쿠테타를 준비했습니다. 4·19가 나자 그가 얼마나 우울해 했는지···· 그리고 4·19 이후 이른바 ‘혼란정국’을 쿠테타를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로 보고 결행한 것이죠. 박정희의 쿠테타가 성공하고 미국 정부가 이 군사정부를 승인-즉시 승인은 아니지만-한 데에는 남한을 강력한 반공기지로 만들려는 미국의 계산이 깔려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쿠테타를 할 당시 사회는 다시 안정을 찾고 있어서 쿠테타의 명분이 사라지고 있었다는 게 대다수 학자들의 의견입니다.
2. 박정희(정권)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박정희(정권)를 평가할 때 몇 가지 기준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쿠테타가 분명 잘못된 것이지만 이왕 정권을 잡은 이상 박정권이 해야 할-즉 박정권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해야 할- 역사적 과제는 크게 다섯가지였습니다. 먼저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되살리는 일입니다. 전후복구와 경제성장이지요. 둘째 민주적 가치를 회복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셋째 전쟁으로 빚어진 남북의 적대감을 씻고 새로운 통일방안을 마련하는 일입니다. 네 번째로 분단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나라의 자주성을 확립해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전쟁을 통해 반공애국투사로 변신해 우리 사회를 장악한 친일세력들을 척결함으로써 이승만정권, 장면정권이 남겨놓은 친일잔재를 없애고 건강한 새출발을 해야 했습니다.
박정희는 이 모든 문제에서 경제 문제를 빼고는 빵점-아니 마이너스-이었습니다. 경제문제도 사실 따지고 보면 박정희의 공이라 할 수 없거니와, 경제성장의 이면에 감춰진 어두운 그림자가 경제성장의 그래프보다 더 길게 늘여져 있었습니다. 선생님, 지루하지만 이 문제들을 함께 검토해보기로 할까요. 박정희 찬양의 유일한 ‘트레이드 마크’인 경제부흥론부터 들어가 보기로 하지요.
(1) 이른바 고도성장에 대해
첫째 박정희집권 시기 우리가 경제분야에서 빠른 성장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같이 검토되어야 하겠지요. 하나는 경제성장의 진정한 동력은 무엇이었나, 정말 “조국근대화의 위대한 기수”인 박정희의 지도력 때문인가 하는 점입니다. 또 하나는 박정희식 경제개발이 정말 바람직한 것이었나, 성장만큼 부정적인 유산을 남겨 놓았다면 성장만 놓고 평가할 것이 아니라 그 부정적 측면을 함께 평가해야 공정하지 않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이미 제2공화국 때 입안되었던 것입니다. 장면정권은 총투자액 400억원 규모의 ‘국토건설사업’이나 경제개발계획 등을 수립해 놓고 이를 추진하다가 쿠테타로 무너진 거죠. 당시 경제 위기가 워낙 심각했기에 박정희정권이 아닌 다른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경제개발계획은 당연히 추진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정희의 경제개발·조국근대화는 2공화국의 경제개발계획을 군대식으로 밀어 붙인 거지요.
한편 이 시기 미국도 북한의 사회주의체제에 맞서서 강력한 반공국가인 남한을 자본주의 쇼윈도우(전시장)로 만들기 위해 경제 지원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미국은 동북아시아에서 북한·소련·중국에 맞서기 위해 한국과 일본이 공동전선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박정희에게 한일협정을 강력하게 요구했습니다. 한일협정을 통해 한-일 공동반공전선을 구축하고 경제개발의 비용도 좀 챙기라는 게 미국의 요구였습니다. 그리고 박정권은 이를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해서 안보와 경제개발은 하나의 축에 묶여서 진행됩니다. “싸우면서 일하자”는 박정희식 경제개발 구호는 안보와 경제가 하나로 움직인 것을 의미합니다. 일제가 추진한 전시총동원체제에 가까운 경제정책이었죠. 그리고 점차 안보논리가 경제논리를 지배했고-안보를 위해서는 경제정의 같은 것은 무시해도 좋다는 식이죠-, 안보는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됩니다. 마치 북벌론이 송시열같은 노론지배층의 안보이데올로기로 작용했듯이. 이렇게 볼 때 박정희의 경제정책을 순수하게 경제 측면에서만 바라보는 것은 정말 위험한 시각입니다.
박정권이 경제개발계획을 준비하면서 맞닥뜨린 문제는 공장을 짓고 원료를 수입하는 등 경제개발의 착수금을 어떻게 마련하느냐 였습니다. 그래서 졸속적으로 이루어진 게 한일회담과 한일협정이었고, 이 한일협정을 통해 일본측이 제공한 유·무상 30억달러의 각종 ‘경제협력기금’이 경제성장의 착수금이 된 셈입니다. (우리측은 일제 식민지 지배에 따른 피해보상금이라는 의미에서 ‘대일청구권자금’이라고 부르지만, 일본측은 시혜의 의미가 강한 ‘경제협력기금’으로 부르기를 고집했습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박정권은 과거 일제가 저지른 범죄와 민중의 피해에 대한 최소한의 조사도 하지 않은 채 36년의 피해보상을 서둘러 매듭지은 것입니다. 이렇게 조약을 서둘게 된 데에는 한일협정을 빨리 체결하라는 미국의 요구에 떠밀린 상황도 있었죠(한일회담이 우리의 내재적 요구와 주체적인 태도로 진행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점도 때문입니다). 그 결과 지금도 정신대(일본군성노예)문제, 원폭피해자, 재일동포 지위 등 단 한가지도 해결되지 않이 지금까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물론 일본정부는 한일간의 ‘과거사’는 한일협정에서 다 해결했다고 오리발을 내밀고 있는 상황이지요.
또 하나 문제는 이때 한일협정의 성사를 댓가로 김종필은 거액의 정치자금을 일본으로부터 받아 이 돈을 공화당 창당자금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식민지 청산의 문제가 걸려있는 한일회담에서조차 한국정부가 과거에 대해 전혀 잘못을 느끼지 않는 일본으로부터 뒷돈을 받는 상황은 일본이 한국정부와 한국인을 우습게 보는 계기를 형성합니다. 그리고 한일회담을 계기로 과거 친일경력자들은 ‘일본통’으로 부상하면서 일본의 보수정객과 커넥션을 연결하면서 한일간의 부도덕한 뒷거래가 이루어집니다.
어떤 학자들은 박정권이 한일협정을 맺은 것을 잘한 일이라고 추켜 세웁니다. 이 때문에 경제성장이 가능했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는 중등학생 수준도 안되는 유치한 견해입니다. 박정권은 일제 36년의 지배에 따른 민중의 피해는 덮어둔 채 몇 푼의 돈을 받는 데 급급했습니다. 이는 한국정부 스스로 식민지시기 우리 민족이 입은 피해와 일제만행의 진상을 외면했고, 받을 돈도 제대로 못받았으니 무책임외교, 무능력 외교의 본보기일 뿐입니다. 게다가 공화당창당자금으로 뒷돈을 받는 작태를 벌인 점은 정권의 부도덕성, 반민족성의 싹을 보여줍니다. 미국의 요구에 떠밀려 졸속으로 추진한 점은 쿠테타로 권력을 잡은 불안정한 박정권이 미국의 요구대로 따름으로써 미국으로부터 쿠테타의 합법성을 구하려는 속셈 아니었을까요. 한일회담은 경제개발의 착수금의 문제를 넘어 박정권이 속성을 미리 보여주는 ‘오멘(불길한 징조)이었습니다.
박정희가 추진한 경제성장에는 월남전과 독일·중동의 해외 ‘인력수출’이라는 또 다른 성장요인이 있습니다. 일본의 전후 경제성장이 한국전쟁에 힘입었듯이 말입니다. 월남전은 쉽게 말해 프랑스-일본-미국의 식민지 상태를 벗어나려는 베트남민중의 민족해방투쟁입니다. 여기에 미군과 한국군이 침략자로서 들어간 것입니다. 아무리 돈이 탐나더라도 일제 식민지의 고통을 겪은 우리가 ‘미국의 꼬붕’으로 남의 나라 민족해방운동을 진압하러 가서야 되겠습니까. 더욱이 이때 간 한국인 사병들은 미국으로부터 미군에 준하는 고액의 봉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이들의 돈을 가로채고 보통의 한국군이 받는 일반 봉급-봉급이랄 것도 없습니다- 수준만 주었죠. 쉽게 말해 정부가 우리 군인들한테 가는 봉급의 대부분을 가로챈 것입니다. 그래도 되는 걸까요? 이게 탁월한 지도력인가요? 우리가 월남파병을 어린 세대에게 “경제성장의 동력”, “해외파병을 통한 국위선양”으로만 가르친다면, 현재 일본 우익이 식민지 침략과 ‘대동아전쟁’을 일본 경제를 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대화혼(大和魂)의 발휘로 가르치는 것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비판할 수 있단 말입니까?
박정희의 경제‘철학’-경제성장론의 핵심은 국가(정부)가 강력한 리더쉽을 발휘해 경제틀을 짜고 특정기업에 특혜를 주어 육성·지원하는, 국가주도의 경제성장론, 수출중심주의입니다. 흔히 개발독재--경제성장의 효율성을 위해 필요하다면 강력한 권력이 독재를 행사하는 것도 정당화되는--라고 하는데 최근 중국이 이를 주목하고 있답니다. 배울 게 따로 있지 참 갑갑한 노릇입니다.
박정희의 개발독재는 경제성장의 대가로 일인독재, 재벌의 정경유착과 부실경영, 한국경제의 미일의존성, 부와 소득의 불균형, 농업의 희생, 노동자들의 인간적 권리 말살 등 지금까지 심각한 후유증을 낳았습니다. 두어가지만 볼까요. 국가의 비호 속에 자란 재벌은 한편으로 국가의 지원 속에 성장을 거듭하면서 그 대가로 막대한 정치자금을 정부에 갖다 바쳤습니다. 보기를 들어 정부가 특정 사업을 설정하고 특정 기업에 사업권을 넘겨 주거나, 은행에 압력을 가해 특정 기업에 거액의 융자혜택을 줍니다. 그 기업은 그 대가로 거액의 뇌물(리베이트)를 정치자금으로 헌납합니다. 서로 공생관계이지요. 이를 정경유착이라고 합니다. 자칭 ‘박정희의 신도’라도 하는 전 중앙정보부장(국가정보원장) 이후락은 “떡을 만지다보면 떡고물이 묻기 마련”이라고 변명했지만 말입니다. 기업은 거액의 정치자금 때문에 공사비를 적게 들이다보니 부실공사가 나오는 거지요. 결코 기술 탓은 아닙니다.
부동산투기열풍은 거액의 정치자금을 마련하고 치부하는 상습수단이었습니다. 개발지역을 권력자들은 미리 정하고 이를 싼 값에 미리 사들입니다. 그 후 개발지역 발표를 해 땅값이 오르면 크게 이익을 남기는 거죠. 이런 이권 챙기기가 권력 차원에서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진 게 박정희정권 때입니다.
아울러 박정권은 저임금정책 장시간노동정책을 지지하고 노동자의 인간의 권리는 일체 박탈해--노동자가 자신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 권리조차 없었습니다--, 이 덕택에 기업은 노동자들의 피를 빨아먹으면서 성장했습니다. 70년대 한국 노동자들이 어떠한 상태에 살았는지는 7,80년대에 나온 노동자들의 수기 특히 전태일의 일기가 잘 말해 줍니다. 한번 읽어보십시오. 1987년 7,8월 노동자파업 때 가장 많이 나온 요구조건 중 하나가 “노동자도 사람이다. 머리를 기르게 해달라였습니다.” 경제성장의 진정한 주체인 노동자는 이런 대접 속에 살아 왔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재벌 때문에 겪는 국가적 위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들은 정치와 너무 깊이 결합되어 있어 구조조정이 불가능한 실정입니다. 다 박정희가 뿌려놓은 씨앗들이 자라난 거죠. 김영삼만 탓해서는 안됩니다.
아참, 저축문제를 뺄 수 없군요. 어럴 때 기억나시죠? 교실 뒤 빨간 막대그래프와 우체국 저금통장. 강제에 가까웠기에 논란은 되지만 저축 장려 그 자체는 저도 ‘자본의 원시적 축적’의 한 형태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1970년대 말 어느 여성노동자가 ‘저축왕’으로 뽑히어 새마을보고대회에서 발표를 하는데 그게 좀 문제가 있더라고요.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국민학교를 간신히 마치고 집안과 남동생의 학비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서울로 무작정 상경해 ‘식모살이’를 거쳐 공장에 들어간 일까지는 그당시 흔한 일입니다. 돈을 모으겠다는 마음으로 악착같이 저축을 했답니다. ‘세끼밥을 다 먹으니 저축할 돈이 없어서 처음에는 점심만 거르다가 마침내 또 한끼는 라면으로 줄여 십 년 까까이 돈을 저축했더니 돈이 좀 모이더라. 배가 고파 쓰러지기도 했지만 그 결과 오늘의 내가 있게 되었다.’ 그 여성노동자가 십년 가까이 저축한 돈은 요즘으로 치면 천만원이 훨신 못되는 것이었습니다. 노동자의 저축은 그렇게 오래 걸렸습니다. 잔인한 저축입니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저축을 할려면 한끼 정도 먹어야, 즉 영양실조에 걸릴 정도로 먹어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줄뿐더러, 박정희 집권 시기 정부와 기업이 이땅의 노동자를 얼마나 저임금으로 울궈먹었는가를 보여줍니다. 물론 이 여공의 발표를 들으면서 박정희는 눈물을 훔쳤습니다. 그러나 저임금정책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새마을운동은 단순히 경제적 측면에서만 바라보면 큰일납니다. 오히려 박정희를 지지하는 지역 기반을 농촌에 구하고 정치적으로 낙후한 농민들을 동원,통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마치 1930년대 조선총독부가 내세운 ‘농촌진흥운동’이나 ‘신촌(新村)운동’ 그리고 ‘농촌중견인물양성책’이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농촌주택을 시멘트로, 슬레이트로 바꾼 것도 당시 시멘트수출이 부진하자 내수시장(농촌)에서 시멘트 소비하기 위한 것 아니었을까요. 무엇보다. 농촌이 살기 좋아졌다면, 왜 수많은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야 했고, 농민운동은 박정희 때부터 타오르기 시작했을까요. 농협이 권력의 시녀로, 착취기구로 악명을 떨친 것도 새마을운동시대입니다. 새마을운동은 그 성과-농민의 삶이 향상되었다기보다는-사업 그 자체가 갖는 대내외의 거대한 선전·동원기능에 주목해야 합니다. 일제시기 일제 파시즘이 어떻게 국가와 농촌을 연결시키고 이를 파시즘의 동원메카니즘으로 활용했는지 살펴본다면, 새마을운동의 본질을 좀 더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새마을운동은 아직 연구가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이런 정도의 추측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무엇보다도 박정희는 안보와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인간의 모든 가치가 유보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을 오직 빵만으로 사는 동물적 존재로 돌려버렸습니다. 근로기준법은 있었지만, 실제 근로기준법이 보장한 8시간 노동제나 노동3권(단체결성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국가를 위해 산업전사로서 묵묵히 일만 하라는 것이죠. 어느 노동자 시인은 이렇게 갈파했습니. ‘그래 우리는 산업전사다, 산업현장에서 싸우다 죽으라는 소모품이구나.’ 박정희가 민주화를 훼손시켰지만 경제성장의 공로는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인간의 모든 가치를 희생해도 좋은가라는 논쟁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그가 이루어놓은 경제성장에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굴욕적인 한일협정이, 저임금 장시간 중노동에 시달린, “공돌이와 공순이로 천대받던” 노동자의 피와 눈물이 새겨져 있습니다. 고도성장의 금자탑 아래 월남전에서 쓰러져간 젊은이들의 피가 흥건이 고여있고, 고엽제 휴유증에 시달리는 수만명의 참전용사의 신음이 배여 있습니다. 한국 경제의 성장을 얘기한다면 그 공로는 마땅이 이들에게 돌려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 조차 받지 못한 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는 박정희에게만 비춰지고 있습니다. 경제성장의 공을 특정 개인, 지도자에게 돌리는 것은 영웅주의사관일 뿐만 아니라, 사실도 다릅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혹사당할 때 자칭 조국근대화의 선구자들은 그 성장의 과실과 훈장만을 따먹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오적(五賊)”이라고, 또 그들이 살던 동네를 “도둑촌”이라 부르지 않았습니까? 박정희가 서민적인 대통령이었다는 말은 노태우가 보통사람이라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박정희는 권력 초기는 텁텁한 막걸리로 시작했지만, 궁정동의 마지막 밤은 양주 ‘시바스 리갈’로 끝났습니다. 월남전 사상자 보상금 12억 달러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으며, 1980년 신군부가 다시 쿠테타를 하면서 발견했다는, 60억 달러가 넘는 스위스은행의 박대통령 비자금이야기는 도대체 무엇을 말해 주는 걸까요? 박정희 평가는 성숙해야 한다, 그러니 비판만 하지말고 경제성장측면을 같이 평가해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평가’라면 당연히 이렇게 되어야 하겠지요. “그래 박정희는 경제성장을 볼모로 너무나 많은 인권유린과 부정부패가 있었어. 앞으로 우리는 경제성장을 하더라도 그러지 말자.”
(2) 박정희와 친일파 문제
박정희의 집권은 친일파들이 권력의 심장부에 영구히 자리잡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박정희의 일제시기 행적과 맞물려 일제 친일잔재 세력은 그의 품안에서 조국근대화의 기수로 때로는 박정희 신도로 자처하면서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는 보호막을 안정적으로 갖게 되었습니다(물론 친일파가 살아남아 권력을 쥐게된 연원은 미국과 이승만정권에게 있습니다만). 그리고 이들은 친미파로 변신하고 자주국가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성과 주체성 마저 훼손시켰습니다.
이들은 일제시기 비민주적인 악법과 다양한 식민지적 제도와 관행을 그대로 남겨두었고, 특히 친일문제를 누가 거론하면 알게모르게 탄압을 해 과거 역사를 제대로 알고 바로잡는 계기를 원척적으로 봉쇄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역사학계에서 친일파연구는 거의 자유롭지 못합니다. 직장에서 쫓겨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입니다. 실제 작년인가 그런일이 일어났고요. 이 때문에 식민지 잔재는 박정희 때 오히려 강화되는 반면 친일문제는 기각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최소한의 역사의식과 가치관 마저 대중적으로 확립될 수 없게 된 거죠.
친일파들은 일제 시기 자신의 부일협력을 ‘계몽운동과 문명개화의 선구자의 고뇌’로 정당화했습니다. 해방 후 이승만분단독재정권에 충성한 것과 6·25전쟁에서 ‘타공전선’에서 활동한 것을 두고 자신을 건국운동의 애국지사, 반공애국투사로 자화자찬하기를 마지 않습니다. 그리고 박정희정권에 빌붙은 것을 조국근대화의 기수로 미화하고 있죠. 나아가 이들은 자신의 닮은꼴인 박정희를 최종적으로 부활·기념시킴으로써 역사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역사를 왜곡하는 공개적인 거대한 사기극이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거죠. 최근에는 자신들을 아예 21세기 미래의 민족지도자상으로 각인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의 경제발전을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근대화(황제께서 탁월해 자주적으로 근대화의 서막을 열었다)-->일제의 식민지근대화(일제가 근대화를 시켜줬다)-->개발독재/근대화혁명(급속한 경제살리기를 위해서는 독재도 때론 용인될 수 있다. 박정희는 독재자라기 보다 혁명가다)” 라는 기괴한 역사발전론으로 연결됩니다. 박정희평가는 이러한 노선에 있었던, 늘 양지만을 찾아다닌 이 인간군상들의 삶을 긍정할 것인가, 부정할 것인가 하는 20세기 한국의 아마겟돈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승리한 쪽이 21세기 우리 민족의 주도적인 가치로 자리잡을 것입니다.
(3) 유신체제 : 국가주의와 총체적 후진성의 구조화
독재정권은 나쁘다는 게 정치학의 상식이니까--요즘 우리 분위기를 볼 때는 정말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약간 다른 각도에서 유신정권을 평가해 보기로 하죠.
먼저 유신체제를 성립시킨 시월유신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시월유신은 박정희 일인영구독재를 위해 남북통일문제를 최악으로 활용한 희대의 사기극이었습니다. 박정희는 종신대통령을 해야 겠는데 명분이 없자, ‘경제성장의 완수’와 ‘남북통일문제’를 이용했습니다.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책임자인 이후락을 김일성에게 밀사로 보내 그 결과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합니다. 온 국민이 열광했습니다. 드디어 남북의 지도자가 무력대결을 버리고 평화적·자주적·민족대단결의 통일의 물꼬를 틔었다고 기뻐했습니다. 김대중대통령이 꿈꾸는 노벨평화상은 문제도 아니었지요. 그러나 100일 후 박정희는 통일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10월유신을 단행합니다. 북한도 발맞추어 주석제를 실시합니다. 통일은 철저하게 남북지도자의 권력유지에 이용되었고, 국민은 배신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봉건시대 왕보다 훨씬 강력한 권한을 가진 지도자가 남한에서 탄생합니다. 사실입니다. 박정희는 왕 이상이었습니다. 그후 남북은 오히려 7·4공동선언이 무색하게 적대적인 경쟁으로 치닫게 되었죠. 박정희는 반통일주의자였습니다.
시월유신은 일본제국주의의 군사적 국가주의(파시즘)의 1970년대 ‘한국식 업그레이드판’이었습니다. 한국사회에 국가주의를 구조적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이었죠. 이시기 박정희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여러 정책은 그 기본성격이 일본제국주의 시절에 그가 훈련받은 군국주의적(파시즘적) 사고방식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박정희는 한일회담을 전후해 자신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에 감동받은 바가 많으며 한국도 이를 모델로 ‘제2의 메이지유신’을 하는 심정으로 국가를 일으키겠다고 해 일본의 노정객들을 흐뭇하게 했습니다. 일본은 한반도에서 떠났지만 그들이 뿌려놓은 씨앗이 열매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시월유신으로 실현되었습니다. 이 부분을 자세히 살펴 보기로 할까요.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정도가 아니라 군국주의·국가주의로 우리 사회를 재조직해 총체적인 후진성을 구조화시켰습니다. 선생님도 잘 아시겠지만 우리는 조선 중세봉건왕조를 무너뜨리지 못하고, 즉 시민혁명을 거치지 못한 채 일제의 식민지로 노예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해방이 되어도 민주주의 훈련을 받지 못해 제대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어려웠죠. 해방 직후의 정치적 혼란과 이승만독재정권과 전쟁, 짧았던 장면정권을 거쳐 그나마 박정권 때라도 차근하게 민주주의를 실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정반대로 갔습니다. 박정희는 일제시기 제국주의 군인정신에 입각해 4·19의 성과를 짓밟고 일제의 국가주의를 자신의 독재를 유지하는데 철저하게 적용했습니다.
4·19 이후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라는 시집이 나온 적이 있습니다. 마치 4·19혁명을 시민혁명으로 기념한 듯한 느낌이 줍니다. 바야흐로 시민사회가 열릴 것이라는 기대가 넘쳤습니다. 문학에서 “시민문학론”이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5·16쿠테타와 박정희의 집권은 시민사회의 존립을 여지없이 부정했고, 이 이유와 다른 이유가 겹쳐 우리 사회는 정말 시민사회가 존재하는가 하는 회의로 빠지게 됩니다.
박정희는 민주주의 기초가 되는 개인의 존엄성과 자아의 확립 대신 국가에 대한 충성만을 개인에게 요구했습니다. 국가와 개인 그리고 국가와 개인을 이어지는 국가기구와 관변단체만 존재했지, 국가의 간섭에서 자유로운 개인, 시민, 또는 단체는 아예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민중이라는 용어는 인민과 마찬가지로 ‘빨갱이’취급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있다면, 더욱기 박정희의 눈에 벗어난다면 가차없는 박해만 존재할 뿐입니다. 그래서 ‘재야’라는 우리만의 독특한 저항진영이 형성되었습니다. 우리는 시민사회가 없었고 그러기에 시민운동도 없었습니다. 시민사회는 태어나기도 전에 박정희에 의해 무참하게 태아살해되었습니다.
또 박정희의 정책은 1930년대, 40년대의 일본파시즘의 그것을 본뜬 것이 매우 많았습니다. 유신이란 말은 일제가 메이지유신(일본의 근대화), 쇼와유신(일본군국주의의 확립)이니 하면서 단골로 쓰던 용어입니다. 새마을운동은 조선총독부가 추진한 신촌(新村)운동에서 따온 것입니다. 일제의 농촌중견인물양성책은 새마을지도자로 둔갑했습니다. 일제가 민족의식을 말살하기 위해 농촌에서 대대적으로 미신타파운동을 펼쳤는데, 박정희 또한 미신타파라고 해 그나마 남아있던 이 땅의 전통문화를 깨끗하게 청소해버렸죠. 반상회는 일제가 조선인을 감시하기 위해 조직한 애국반의 변형입니다. 국기에 대한 맹세는 일제시 전 국민이 일장기 앞에서 외던 황국신민의 서사의 변형입니다. 학생군사조직인 학도호국단과 교련도 일제 때부터 있었던 거지요. 총력안보도 마찬가지고... 너무 많아서 이 쯤 해두지요. 다만 일본이나 미국의 학자들이 박정희식 경제개발과 그 성장의 기원을 일제시기-1930년대의 공업화정책-로부터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은 일제에 의해 근대화되고 일본군인출신에 의해 일제시대의 경제정책을 담습해 고도성장을 이루었으니 식민지 체험은 유익했다는 외국학자들의 논리를 국내에서는 박정희 기념하기 운동이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박정희는 어린 세대-저같은 경우죠-마저 군국주의식 교육을 통해 성장기부터 비민주적으로, 국가에 절대 복종하는 부속품으로 만들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복장부터 제복입니다. 스포츠머리, 후크와 소매 단추가 달린 교복과 교모, 그리고 ‘바리깡’을 들고 완장을 찬 채-마치 내무반장처럼-복장검사를 하던 선생님, 머리가 길면 가차없이 바리깡으로 머리 한가운데를 박박밀어 머리에 ‘경부고속도로’가 생긴 일, 공포심과 복종만 조장하던 교련, 군대사열같은 애국조회, 국민교육헌장과 국기에 대한 맹세의 낭독, 철학이나 사회윤리가 아닌 국민윤리, 체육시간의 수류탄던지기, 학생회가 아닌 학도호국단, 봉건적 상하윤리인 충효교육의 강조를 통한 복종정신의 내면화, 아, 그리고 호국정신과 호국교재인 시련과 극복의 역사········ 이 모든 것들이 일제시기 교육제도가 꼭 맞아 떨어집니다.
일제가 떠났지만, 일제의 잔재 중 가장 심각한 부분은 조선인 자신이었습니다. 일제말기 국민학교교육을 통해 일제의 군국주의교육과 식민지교육을 받은 세대가 1970년대 쯤이면 40대로 성장하면서 우리 사회의 중견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이들의 의식과 생활은 일제의 조기교육이나 초기체험에 의해 본인이 의식하든 못하든 일본군국주의의 영향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박정희의 등장과 박정희식(군국주의적, 국가주의적) 통치정책이 의외로 국민 사이에 거부감 없이 자리잡는데는 이런 환경이 작용한 점도 있습니다. 이승만정권 때 제대로 일제잔재 청산이 안되면서 그것이 저류를 흐르다 박정희의 파쇼정책과 만나게 되면서 박정희의 지지기반으로 전화된거죠.
그런데 박정희는 죽고 나서도 국가교육제도-특히 국정교과서 체제-를 통해 자신들의 세대가 이어받은 일제군국주의 유산을 어린 세대에게 지속적으로 재생산시켰습니다. 아직도 국민윤리 등 국정교과서에는 박정희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의 십대들이 한편으로 발랄하고 개방적인--심하게는 몰주체적인--태도를 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강한 민족의식을 가진 모순적 현상도 민족주의로 착색된 박정희식 국가주의가 제도교육을 통해 재생산되고 있는 데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습니다. 아이엠에프 경제위기가 터지자 금발머리에 영어로 된 옷을 입고 가방에는 태극기를 붙인 이 기이한 풍경, 돈벌로 대만에 간 가수가 “조국의 명예와 국위 선양”을 떨치겠노라고 자랑스레 말하는 기막힌 상황은 민족주의 조차 희화화합니다. 박정희의 국가주의는 민주주의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의 혼란도 조장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 세대는 대학에 와서야 비로소 자치활동을 하면서 우리 스스로 민주주의 훈련을 쌓아야 했고 또 그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싸워야 했습니다. 박정희식 사고에 물든 기성세대의 편견과 무엇보다도 권력의 탄압을 받으면서 말입니다. 그 속에서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습니다. 지금 그나마 우리가 누리는 자유에는 여러분 선배들의 피가 묻어 있습니다. 박정희 시기 피의 역사도 기억해 주십시오.
(4) 박정희식 민족주의에 파탄난 민족문화
박정희의 문화정책은 또 어떠했던가요. 박정희정권은 근대화란 미명 아래 전통문화를 미신으로 치부하고 말살했습니다. 그러나 전통문화의 씨가 마른다는 비판이 일고, 외국인이 와도 보여줄만한 우리것이 없다는 위기감과 민망함이 퍼져나가자 박정희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족주의를 이용해 유신독재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통문화의 보존”을 외치며 몇몇 지방 민속문화를 “강제로” 보존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노랫말이나 행사의 절차까지 일체의 변형도 허용되지 않은 채 1년에 한번씩 서울 동대문운동장에 민속경연대회라는 이름으로 검열을 받는 동원문화로 남았습니다. 일종의 전통문화의 제식훈련이자 박제화과정이었죠.
박정희는 일본의 대중문화나 미국의 대중문화에 대해서는 금지 또는 적대시하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이걸 박정희의 민족주의의 발로로 보는 것은 박정희를 너무 모르는 소치입니다. 청와대에서 사무라이 영화를 즐겼고 술에 취해 흥이 나면 옛 일본가요를 흥얼거렸던 ‘제국주의 군인’인 그에게 ‘현대화된’ 일본 대중문화나 서구의 대중문화는 무엇보다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 독선에서 나온 것입니다. 특히 유신독재에 대항한 청년층이 서구 대중문화에 기울어지자 박정희는 더욱 서구문화에 반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박정희는 문화면에서 몇 가지 중요한 “구국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먼저 충효사상과 같은 중세 가부장제의 봉건윤리를 전통문화, 민족문화의 육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사회의 지배윤리로 강화시키려 했습니다. 마치 일본제국주의가 유교의 가부장제와 충효사상을 국자주의에 이용했듯이 그렇게 한 거죠. 이렇게 보자면 박정희의 민족문화 육성이란 사실 중세 가부장제의 유령을 국가주의 형태로 다시 부활시킨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박정희는 문화예술에 대한 윤리심의제도를 두어 자신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일체의 문화예술창작행위를 금지시켰습니다. 수많은 금지곡이 나왔죠. 김민기의 ‘아침햇살’은 발표 직후 가요계에서 우리 대중음악의 수준을 일약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명곡으로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금지되었습니다. 그 이유인 즉,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란 가사가 문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붉은’이 공산주의냄새가 난다는 거죠. 한돌의 “행복의 나라로‘라는 노래가 금지된 데에는 우리나라가 지금 행복한데 또 어디로 행복을 찾아간단 말이냐 하는 권력층의 불만이 작용했다고 합니다. 미니스커트와 장발 단속은 1970년대의 세계사적 코메디였습니다. 경찰이 자와 가위를 들고 다니다 장발청년을 붙잡아 즉석에서 머리카락을 자르고, 치마입은 처녀의 무릎에 자를 대고 치마길이를 재던 웃지못할 풍경이 연출되었습니다. 청년들은 이 때문에 우리 것을 더욱 촌스럽고 지겨운 것으로 생각하면서 간간히 들려오는 미국의 통기타와 생맥주와 청바지 그리고 포크송에 빠져들면서 급격하게 서구문화에 빠져 들었습니다.
1970년대는 박제화된 전통문화·봉건윤리인 충효사상·외국문화에 대한 대책없는 거부감·일제의 식민지문화유산을 틀어진 박정희와 그 숭배자(국가주의자)와 ‘우리 것 허무주의’ · ‘서구지상주의’의 청년문화가 대결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낡은 것’과 ‘남의 것’이 대결을 벌이면서 정작 민주적 가치 위에서 구성되어야 할 민족문화의 건설은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일본문화 개방을 우려하는 이유의 하나도 사실 우리가 일본에 줄 게 없기 때문입니다. 문화교류가 아니라 문화개방이라는 용어가 이 사실을 잘 보여 줍니다. 개성있는 민족문화를 창출할 수 있는 기회를 박정희가 막아버린 대가를 지금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겁니다.
정리하자면, 박정희의 유신독재는 민주주의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리 민족문화 조차 처참하게 일그러뜨렸습니다. 일제 파시즘의 식민지 복제판인 박정희는 민족문화의 육성이라는 명목으로 봉건적 충효사상을 부활하고 여기에 일제 군국주의의 규율을 결합시켜 자신에 대한 복종과 충성을 국민에게 강요했죠. 복종과 획일성, 개인의 자율보다는 집단의 규율만을 강요함으로써 일체의 근대정신이 파멸되었습니다. 일제 파시즘 아래서는 식민지적 노예생활을 통해, 박정희 아래서는 유신독재에 의해 우리 사회의 총체적 후진성이 자리잡았습니다. 그 속에 느닷없는 국제화·개방화를 맞으니 온갖 촌극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3. 글을 마치며
선생님, 어느덧 새벽이 되었습니다. 박정희가 집권했던 암흑의 20년을 얘기하다보니 캄캄한 밤을 새워버렸군요. 얘기를 마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김대중대통령 자신은 박정희를 용서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자신을 박해한 자를 용서하겠다니 왈가왈부할 일도 아니고, 때론 미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에 대한 국민의, 역사의 평가는 시작되지도 않았습니다. 논쟁이 되고 있습니다. 박정희에 대한 기념이 아니라 평가를 시작할 시기이지요. 국민의 세금으로 근거도 없이 100억원을 박정희기념사업에 내놓는 정부의 처사는 본말이 뒤집어진 거지요. 게다가 개인적으로 용서했으면 김대통령 개인 돈을 보내야 정상입니다. 가뜩이나 경제가 어려운 판에 국민의 혈세 100억원을 누구맘대로 박정희기념사업에 바칠 수 있습니까. 이만저만 월권이 아닙니다.
우리도 반성해야 겠지요. 춥고 배가 고팠지만 인정이 있고 이웃이 있던 우리들의 어린 시절의 향수, 저마다 소중한 추억을 박정희에 대한 향수로 바꿔서야 되겠습니까. 오직 ‘대망의 80년대’만을 기다리며 초인적인 인내력과 헌신적인 노동과 노예대접 속에서도 국가와 민족을 위한 길이라고 고난의 행군을 계속해 온 박정희시대의 민중들에게 조촐한 술 한상을 차리지 못할 망정 그 가운데 호의호식하던 박정희를 위한 잔치상이라뇨.
박정희논쟁은 몇 가지 점에서 주의해야 합니다. 먼저 박정희논쟁은 21세기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가치관에 대한 화해할 수 없는 두 세력-쉽게말해 ‘민족적’ 또는 진보적 세력 대 ‘반민족적’ 또는 반동적 세력 사이의 물러설 수 없는 이데올로기 대결입니다. 학문의 논쟁을 넘어선 건곤일척의 승부이지요.
또 하나는 박정희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를 끝없이 부활시키고 기념하는 세력들이 누군가를 정확히 인식하는 일입니다. 왜 그들은 박정희를 부활시켜야만 하는가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국민들 중 상당수가 정말로 박정희를 그리워 하고 그와 같은 지도자가 나오기를 염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21세기 새로운 자유와 해방을 추구해야 할 시점에 우리 국민은 거꾸로 파시즘을 동경하고 있는 것이죠. 왜 그럴까요? 선생님도 이 문제에 대해 저와 함께 고민해보시지 않으시렵니까? 우리는 죽은 박정희-과거- 때문에 싸우는 게 아니라 미래를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기에.
선생님 안녕히 계십시오.
『민』2000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첫댓글 인물에 대한 평가는 언제나 그렇듯이 역사가 평가한다고 생각합니다.
살아온 과거가 문제일수도 있겠지만
한인물이 이나라에 끼친영향과 그결과가 대단히 중요하다 생각됩니다.
박정희 전대통령은 극과극을 오가는일생을살은분이라고 평가하고싶습니다.
어느정도의 독재없이는 국민의결집을이루기힘든시기였고, 결과,, 광부 간호사서독 대규모취업,월남파병,경부고속도로,
양하대교,제철,조선,자동차,전자, 이모두가 야당의극심한반대가 있었지요.하물며 다리놓는것 까지도요.
그런대, 3선개헌까지야~ 그렇치만 유신이 치명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청렴하였기에 사리사욕이 없었다는것도 덕목이지요.
일제.. 그30년동안 공무원한사람 학교다닌사람들, 일제앞잡이 아닙니다. 어떻게던 살려는 민초일뿐이니..
나라을팔고 국민을 전쟁통에내몰은넘 빼고는 덥고넘어갈 문제인듯..오직 결과만을보고 판단하셔야 할듯합니다.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할수 없이 일본을 찬양한 생계형 친일파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런부류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자기가 자진해서 일본군에 들어갔으며, 일본천황에 목숨을 받쳐 충성을 할 것을 혈서까지 써가며 맹세한 아주 노골적인 친일파였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경제를 일으킨 업적은 무시할 없겠지만, 독립군을 향해 총을 겨누었던, 자기 스스로, 자진해서 일본군이 되었다는 사실은 용서할 수 없는 반민족행위인 것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것은, 박정희의 행적을 보면 기회주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때는 일본에 붙었다가, 해방후에는 좌파가 우세한 것같으
니 좌파에 붙었다가, 그러다 체포되어 사형당할 것같으니까, 동료들을 팔고 자기는 살아났습니다. 그리고는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보니 미국의 눈치를 안보면 정권을 놓칠것 같으니, 반공을 내세워 미국에 꼬리를 내립니다. 이런 것을 보면 우리민족을 생각했다기 보다는 자기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일했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새빛님글 원론은동감합니다.
하지만 경찰다르고 군인다릅니다. 물런 징집이아니고 장교니까 하시겟지만..
혈서..? 그당시 군인들 대부분부대 전체가 썻습니다.. 하사관들 까지요.
박정희을 두둔할려는건아닙니다..사실은 사실대로 알아야한다는것 뿐이지요.
그리고 반공..지금까지도 우파의 정권창출단골도구로 쓰고요.
지금의 북한식공산주의는 왕조식으로 변형된 생겨나서는안될 특이한 공산국가가 되버렷습니다.
그러니 반공은 아주중요하지만 정치에 이용한다는게 문제죠.
쿠데타.. 역사이래로 쿠데타는 있어왔습니다. 하지만 성공한대다가 지도자가청렴하고 국가경제을 부흥시켯으니
잘한결과지요. 미국..주의 해야할 나라입니다
결론은 민주국가에서는 100% 는 없다는겁니다.
소수가 자기의 의견을 관철시키려하면 혼란만 온다는겁니다.
또, 다수는 소수의의견을 정책에반영시켜야하고요.
그리고 더욱이중요한건 아주나뿐넘이 있는대.. 거기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조금나뿐넘 헷갈리는넘만 깐다면,, 그사람의 틔고싶은,인격의 이중성만 돗보일뿐이죠.
박한용씨는 전두환 추징금미납및대규모학살에 대하여, 이글에는 김영삼 IMF 에대하여 호의적인글인대 그본뜻,
이명박의 4대강에 대하여, 어떠한글들을썻는지,, 알고싶군요..
틔고싶은사람에게 호응하지마시고 혼자틔게놔두세요.
죄송하지만 저는 박한용씨를 호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박한용씨를 비롯해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주장하는 내용은 모두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5,60대 분들은 대부분 6,70년 친일파인 박정희정권시절에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왜곡된 역사교육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면 '흙'을 쓴 작가 이광수라는 사람을 아주 훌륭한 작가로 배웠지만, 실은 아주 거물급의 친일파였고, 이화여대 총장이였던 김활란도 악질적인 친일파로써 황국신민으로써 일본군으로 목숨을 바쳐 일본천황에 충성을 해야한다고 떠들어 댔습니다. 그리고 여자들은 정신대에 들어가야 한다고 선동을 햇습니다. 그리고 6,25전쟁의 영웅이라고 추켜 세우는 백선엽장군도
사실은 친일파입니다. 그는 만주 간도특설대라는 부대소속이였는데, 그 부대의 주임무가 독립군을 토벌하는 것이였씁니다. 즉, 우리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었던 것이지요. 이런 사람들들 우리는 훌륭한 사람으로 배웠지만, 사실은 우리민족을 사지로 내몰았던 민족반역자들 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박정희의 혈서를 쓴 내역을 좀더 설명하면, 원래 만주군관학교는 19세 까지만 지원을 받았는데, 박정희는 그당시 20세가 넘어서 지원자격이 안되기 때문에 입학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박정희는 혈서까지 써가며 입학시켜 달라고 애원을 하니 군관학교에서 아주 감동(?)을 받아 특별히 입학을 시킨 것이지요. 그렇게 까지 해가면서
일본군에 들어가야 합니까? 독립운동은 못할 망정, 독립군들의 적인 일본군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박정희가 청렴했다고 하셨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지금도 떠들고 있는 정수장학회가 어떻게 된것인 줄 알고 있는지요? 그것은 원래 한 민간인이 운영하던 어떤 장학회를 강제로 빼앗은 것입니다. 그리고 박정희가 죽은 후 알아보니 스위스은행에 비자금이 몇십억불 발견되었다는 것은 아마 모두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외에 여러가지 많지만 그만 생략할랍니다.
그리고 전두환,김영삼,이명박에 대해서는 보나마나 뻔합니다. 좋게 평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며칠 청평에 갔다왔습니다.
산속에서 맞이하는 빗줄기는 언제나 신선합니다. 오봉산 밑자락에서 한사흘 머물다 왔지요.
도가니님은 이여름내 한손으로 지내시니 더욱 힘드실거고 새빛님은 따님들과 어디로 떠나시는지요.
이여름 지날동안 조용하게 열안나게 처신할납니다.
글쎄요? 저는 요즘 몸이 별로 안좋아서 휴가를 가야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입니다. 일하기가 무척 힘들어서 그만 두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자니 가족들이 걱정이고...적어도 정년까지는 해야 하는데.
아마도 여름탓일겁니다. 찬바람이 불기시작하면 나아질겁니다.
누구나 요사인 일하기가 힘들지요.. 몸도 그렇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