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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길 위에서 만난 시흥> 1편 '갯골길','옛길'에 이어
지난 해 <길 위에서 만난 시흥> 2편 늠내길 중'숲길'을 다루고 있는 책이 발간됐다.
그 책을 펴내는 데 참여하게 돼 글을 쓰게 됐다. 그 원고를 옮겨본다.
‘느림’에 들어서다
사람들이 길 위로 나서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누군가는 건강을 위해서, 누군가는 낯선 대상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서 길 위로 나서고 있다. 저마다의 이유와 사연을 안고 사람들이 걷기 시작했다. 제주 올레에서 시작된 걷기 바람은 전국의 각 지자체들이 앞 다투어 둘레길, 마실길, 골목길 사업을 내놓게 만들었다. 사라진 길을 복원하고, 끊어진 길을 잇고, 새로운 길을 내고 있다. 마을과 마을이 이어지고 골목과 골목이 이어지며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고 있다. 그 모두를 이어주는 ‘길’ 이 새로운 가능성으로 지금 주목받고 있다.
도심의 둘레길은 대부분 마을 뒷산 같은 나지막한 산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그 중 수도권에 위치해 있으면서 소박한 볼거리와 이야기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길이 시흥의 늠내길이다. 현재 늠내길은 숲길, 갯골길, 옛길, 바람길 등 네 코스가 마련되어 있다.
‘숲길’을 걷기로 했다. 시흥시청 정문을 나와 맞은편 버스정류장에서 대동아파트 방향으로 20M 지점에서 출발하는 ‘숲길’, 늠내길 제1코스가 시작되는 곳이다. 이른바 걷기 열풍에 힘입은 시흥의 둘레길이다. 이 길을 걷기로 마음먹으면서부터 ‘숲길’이란 단어를 입 안으로 굴려보았다. 머리에 떠오르는, 숲속으로 난 길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제치고 입 안에 솔향기가 가득 들어찼다. 시원한 바람 한 줄기도 빠르게 지나갔다. 뒤이어 나무가 무성하게 들어찬 숲과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길이 보였다. 숲이 품고 있는 소통의 공간 하나가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길이란 단어의 어원이 소통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희미하게 떠오르자 마음도 덩달아 둥실, 떠올랐다.
6월 중순 날짜가 잡히고 ‘숲길’에 대한 글을 쓰기로 한 사람들이 모였다. ‘숲길’이라는 단어가 던져주는 휴식과 느림 속으로 막 발걸음을 들여놓으려는데 갑자기 주황색 머리에 초록빛 몸통을 지닌 뱀 한 마리가 수로를 따라 스르르 지나갔다. 불쑥 나타난 그 여유로운 걸음걸이가 이곳이 오직 인간들만의 터는 아니지 않느냐는 듯 심상했다. 그때 누군가 앞쪽으로 보이는 청구·대동아파트(새재마을)가 산을 깎아 만든 동네라고 귀띔해준다. 그 말을 들으니 방금 지나간 뱀이 자신들의 영역을 점점 침범해오고 있는 인간들에게 자연을 숲을 단지 인간 중심으로만 보지 말라고, 다른 생명과 공생하는 것만이 인간들이 살아남는 길이라고 나름 작은 시위를 벌이고 사라진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태계가 파괴되면 인간의 미래 또한 보장할 수 없다는 경고를 받은 기분이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들과의 만남, 길이 우리에게 건네는 선물이다.
오르막이 시작되는 길, 개망초와 엉겅퀴가 수줍게 인사를 한다. 오랜 가뭄 탓에 너나할 것 없이 고개가 꺾이고 잎이 타들어가는 중에 건네는 인사라 더 반갑다. 혹독한 시련 앞에서도 꽃을 피우고 나비를 불러들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그들에게 일일이 악수라도 청하고 싶어진다. 그때 언젠가 본 다큐멘터리가 생각났다. 네팔의 어느 지방에 사는 농부가 몇 달째 계속되는 가뭄으로 인해 농사를 다 망치게 되어 한숨을 쉬며 집으로 돌아가다 망고나무 아래서 잠시 쉬어가는 어떤 할머니를 만났다. 농부는 할머니에게
“비는 내릴 기미도 보이지 않고 이 갈라진 땅을 보니 한숨만 나오네요. 반 년 농사를 다 망쳤는데 어떻게 해야 하죠? 정말 하늘에게 벌을 받고 있는 것 같아요. 전 정말 게으름 피지 않고 열심히 일했는데······.”
라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할머니가 빙그레 웃으며
“갈라진 땅을 보면 반 년 농사를 망쳐 가슴이 아프지. 하지만 수천 년 동안 일만 하던 땅이 잠시 쉬고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나아지지. 그동안 이 땅이 우리에게 주었던 것들을 생각해봐. 얼마나 힘들었을까…. 지금 논에는 아무것도 없어. 풀 한 포기도 말이야……. 땅은 오랜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야.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쉬고 있는 거지…… 하늘을 보면서 말이야.”
그 말을 들은 농부는 비로소 땅에 대한 고마움과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면서 담담한 목소리로 그날의 시간들을 들려줬다. 혹독한 가뭄 앞에 당연히 삶에 대한 조급함과 하늘에 대한 원망과 탄식이 먼저이리라 기대했었을까. 농부의 이야기 속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할머니의 대답을 듣고 그저 멍했던 기억, 그리고 뒤이어 떠오르던 질문은 좀체 지워지지 않는다. 할머니의 그 느긋함과 달관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이었을까?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은 그 지혜는 대체 얼마나 오래 묵힌 것일까?
입 밖으로 내어본 적 없는 그 질문은 살면서 어떤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거나 자신도 모르게 불평 불만을 터뜨리게 될 때마다 곱씹게 되는 물음표가 됐다. 요즘처럼 가뭄이 심할 때면 자신도 모르게 호들갑을 떨다가도 문득 떠오르는 그 순응과 초월의 말 한 마디에 슬그머니 입을 다물게 된다.
길 위로 나서지 않으면 일일이 눈 맞출 수 없는 꽃과 풀 나무들의 인사를 받으며 오르막길을 오른다. 소나무가 많은 숲길이다. 작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이어지며 솔향기가 객들을 맞는다. 키 큰 소나무와 키 작은 활엽수들이 나름의 규칙을 지키고 살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오래 전 직장생활을 할 때 주말마다 짐을 꾸려 산으로 떠나곤 했다. 오르기 수월한 산도 있었지만 꽤 험한 산도 있었다. 한 번으로 끝낸 산도 있었지만 여러 번 오른 산이 더 많았다. 그 당시 산을 오르면서 눈여겨 본 숲의 모습은 떼 지어 몰려오는 활엽수들에 의해 침엽수들이 점점 제자리를 잃고 밀려난다는 인상을 받았다. 머잖아 침엽수들 대신 활엽수들이 우리나라 산을 다 차지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아마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나무가 소나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변하지 않았는지 이 숲길에서는 나름의 조화가 잘 이뤄지고 있어 보기에 좋다고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 고개를 들어보니 군데군데 벌목한 자리가 보인다. 사람의 손이 다녀간 모양이다. 좀 전의 생각이 머쓱해졌다.
옥녀를 만나다
앞쪽으로 모범산이 보이는 작은 봉우리에 올랐다. 옥녀봉이라 했다. 아득한 옛날 옥황상제의 딸 옥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이 산 밑에 있는 삼신우물에서 목욕을 했다는 전설을 지닌 곳이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듣는데 갑자기 농밀한 어둠을 헤치고 흐뭇한 달빛을 거느린 여인 하나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검은 능선 위로 하늘거리는 옷자락을 날개처럼 펼친 여인이 이 봉우리에 내려앉는 모습이 머릿속을 꽉 채운다. 숨죽인 검은 나무들 위로 반짝이는 별들의 호기심도 따라온다. 키 작은 풀들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 삼신우물로 내려가는 치맛자락이 아련하다.
그 치맛자락이 일으킨 바람이 밤새 이슬에 젖어 축 늘어져 있다가 슬금슬금 몸을 일으켜 이마의 땀을 식혀주고 있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그 엉뚱한 생각을 깨우듯 누군가 마을 뒷산에 한두 개쯤 있는 봉우리들이 옥녀봉이라고 했다. 하긴 그녀가 어디 이곳으로만 목욕을 하러 내려왔을까, 싶었다. 그때 멀리 보이는 밤나무에게서 희미하게 밤꽃 냄새가 날아왔다.
밤꽃 냄새를 두고 세간에서는 동물의 정액 냄새를 떠올리게 한다느니, 조선시대엔 밤꽃이 필 무렵이면 부녀자들이 바깥출입을 삼가고 과부들은 잠을 설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지만 시골에서 자란 나는 이맘때쯤 산과 들에서 풍겨오는 그 은은한 냄새를 향기로 맡곤 한다. 그러면서 지금도 옥녀가 어둠을 틈타 이곳으로 목욕을 하러 내려온다면 세월의 무게에 주저앉았을 삼신우물은, 제 남아있는 물줄기에 저 밤꽃 향기를 풀어 그녀를 씻겨주지 않을까, 하는 즐거운 상상에 빠져본다.
그 즐거운 상상으로 가볍게 오른 두 번째 봉우리 역시 옥녀봉이라 했다. 좀 전의 옥녀봉에는 없던 표지판이 이곳에 있는 걸로 보아 여기가 진정한 옥녀봉인가보다. 잠시 쉬어가라고 평상과 운동기구가 놓여있다. 시청 0.4km, 작고개 1.78km라는 작은 표지판이 이 길을 만든 이들의 고민과 숲에 대한 배려가 담겨있는 것 같아 흐뭇하다. 숲의 주인인 나무와 산짐승들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조용하게 손님들을 안내하는 표지판은 소박한 이 길과 잘 어울린다.
길을 같이 걷는 일행 중에 이 길을 만들 때 참여한 이가 있어 그때의 이야기들을 드문드문 들을 수 있었다. 되도록이면 쓰러진 나무들이며 바위를 자연 그대로 살리면서 인공적인 요소를 최대한 배제했다고 한다. 자연을 자연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어진 길이 ‘숲길’이라는 것이다. 표지판의 안내를 받고 다시 걸음을 옮기면 이곳에서부터는 비교적 평탄한 길이 이어진다. 그 길 한가운데에서 만나는 뽕나무 한 그루. 불쑥 길을 막아선 뽕나무가 내미는 오디를 받아들다가 이젠 기억조차 희미한 어머니의 젖가슴을 더듬듯 유년의 따뜻했던 시간에 손을 넣고 싶어졌다.
어린 시절 내가 자란 시골에서는 집집마다 누에를 쳤다. 따로 잠실을 마련한 집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집에서는 일 년에 두 번, 봄가을로 방 안에 나무로 엮어 만든 임시 잠실을 마련해 누에를 쳤다. 안방과 사랑방을 누에들에게 내 준 식구들은 아랫방으로 밀려나거나 누에가 있는 방에서 웅크린 채 잠을 청하곤 했는데 난 늘 어머니와 함께 누에가 있는 방에서 잠을 잤다.
어머니는 밤에 잠을 자다가도 몇 번인가 일어나 층층으로 쌓아올린 선반의 누에들에게 뽕잎을 주고 다시 쪽잠을 청하곤 했다. 어린 나는 어머니의 뒤척임과 누에들의 뽕잎 갉아먹는 소리를 들으며 짧은 밤을 건너곤 했다. 쏴아쏴아, 비 내리는 소리가 밤새 귓가를 서성일 때도 있었고 먼 곳에서 걸어오는 아 카펠라 소리가 끝내 가까워지지 않고 멀어지기도 했다. 그 소리의 윗목에 젖은 잠을 눕혔는가 싶은데 금세 날이 밝아왔다. 아침이면 밤새 누에들이 뱉어낸 배설물로 축 늘어진 선반처럼 몸이 무거웠던 기억이 어제처럼 선명하다.
긴 밭이랑마다 넘실거리던 뽕잎들을 보고 있거나 막 젖이 불기 시작한 뽕나무에게서 이파리를 떼어낼 때면 뽀얀 점액이 입 안 가득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알 수 없는 충만한 기운이 몸을 꽉 채우는 것 같았다. 요란한 소리와 빛깔도 없이 마음이 잔잔하게 요동쳤다. 그 파문은 허공으로 고개를 휘휘 흔들어대는 누에의 고물거림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게 만들었다. 끊임없이 오물거리는 누에의 입이 풀어낼 가느다란 길 하나가, 아직 오지 않는 내일이, 미래가 손바닥 위에서 꿈틀거렸다. 그 꿈틀거림 위로 어머니 고단한 삶의 단내가 훅 끼쳐왔다.
마지막 잠을 다 자고 난 누에는 온몸을 틀어 이제까지 먹은 뽕잎들을 다 토해내듯 가는 명주실을 풀어냈다. 제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 고치를 만드는 누에를 보고 있으면 또 어쩔 수 없이 한 번도 우화(羽化)를 꿈꾼 적 없는 어머니가 겹쳐지곤 했다. 고치가 전부였던 누에, 자식들이 생의 전부였던 어머닌 끝내 그 고치를 벗어나지 못한 채 저 세상으로 걸음을 옮기셨다. 날개를 가진 적도 스스로를 위한 세상을 꿈꾼 적도 없는 번데기로 남은 어머니, 이젠 다만 아픈 존재로만 남아있다. 산길에서 만난 늙은 뽕나무에게서 유년을 떠올리다 우리나라 전국에 걸쳐 양잠을 한 시기는 언제일까, 궁금해졌다.
우리나라에 양잠이 시작된 것은 중국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東夷傳) 마한조에 ‘누에를 치고 비단을 짜서 옷을 해 입었다’ 하는 기록으로 보아 삼한시대 이전으로 짐작된다. 고구려 동명왕 때와 백제 온조왕 때 농상(農桑)을 권장하였다고 하며, 초고왕 때는 양잠법과 직조법을 일본에 전해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신라 박혁거세 17년(BC 40)에는 임금이 직접 6부의 마을을 돌면서 뽕나무 심기를 권장하였으며, 고려 때에도 태조, 현종, 명종 등이 누에치기를 권장한 기록이 남아 있다.
1970년대에 양잠이 전성기를 맞은 적도 있으나 지금은 노동력의 부족과 중국산의 등장으로 거의 생산기반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요즘에는 사람들이 견직물보다 누에의 산물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예전부터 약재로 쓰였던 누에똥과 번데기, 고치, 죽은 누에 등과 함께 뽕잎과 오디 등의 약효가 속속 연구되면서 ‘입는 양잠에서 먹는 양잠’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특히 웰빙 바람의 영향으로 누에와 뽕잎을 이용한 건강식품과 비누, 누에그라, 화장품 등 다양한 제품들이 주목을 받으면서 양잠산업은 21세기 새로운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거듭나고 있다.
뽕나무가 내미는 몇 알의 추억과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챙겨들고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지난 태풍에 의해 희생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아름드리나무들이 곳곳에 쓰러져 있다. 비바람의 무자비한 손길에 속수무책 당한 것들은 대부분 키 큰 나무들이고 키 작은 나무들은 그 시간을 잘 견뎌낸 듯 멀쩡하다. 바닥까지 오지 않는 햇빛을 두고 경주를 시작했을 나무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건강하게 숲이 유지되려면 큰 나무가 쓰러지는 게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생각은 자꾸 엉뚱한 곳으로 뻗어간다. 더 많은 햇빛을 제 몸에 들이고자 욕심을 부렸을 키 큰 나무들의 생에서 인간들의 모습을 본다. 남보다 더 많이, 남보다 더 큰 것을 가지기 위해 발버둥 치다 부러지는 생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쓰러진 아름드리나무들을 보면서 지금껏 살면서 욕심을 줄이지 못해 쓰러진 적 있는지 기억을 뒤적여본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일은 없지만 알게 모르게 그런 적이 있을 것이다, 중얼거리며 앞으로 삶의 태도를 어떻게 가져야 할지를 생각한다.
나무들은 스스로 수명이 다했거나 아니면 태풍 등의 힘에 떠밀려 생을 마감할 때 제 몸을 고스란히 숲에 내려놓는 존재다. 쓰러진 나무둥치 속으로 곤충이 들어와 양분을 빨아먹기도 하고 새들이 나무를 쪼아대 곤충의 애벌레를 잡기도 한다. 어떤 주검은 버섯을 키우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잘 썩어 다른 생명의 자양분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한 생명이 다른 생명들을 유지하게 한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쓰러졌을 키 큰 나무들 곁 씨앗 한 톨의 힘으로 일어서는 나무들을 본다. 생과 사가 함께 만져지는 곳, 탄생과 죽음이 부드럽게 서로를 토닥이는 곳, 누군가의 상처에 치유의 손길을 내미는 곳,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답을 주기도 하는 곳이 ‘숲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직접 걸으면서 마주치게 되는 자연과의 소통이 ‘숲길’을 걷게 하는 힘이 아닐까 싶다.
쓰러진 나무들 너머 몸을 바짝 낮춘 채 온몸으로 기어가는 덩굴식물들과도 눈이 마주친다. 살아남기 위해 의지할 누군가를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는 덩굴식물에게서 생존경쟁은 더 치열하게 느껴진다. 서로 얽히고설켜 어느 한쪽의 힘이 약하면 성장이 멈추고 고사하기도 하는 양육강식의 세계를 본다. 저 양육강식의 모습이 사람들로 하여금 갈등이란 말을 만들어내게 하지 않았던가.
갈등이란 칡과 등나무라는 뜻으로, 칡과 등나무가 서로 복잡하게 얽히는 것과 같이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 의지나 처지, 이해관계 따위가 달라 서로 적대시하거나 충돌이 일어남을 가리키지 않던가. 저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식물의 세계도 그런데 인간들의 세계는 말해 무엇 할까.
그러나 조금 달리 생각해보면 악착같이 나무를 오르고 땅을 기어가는 덩굴식물들의 모습은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일상의 고단함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 사회의 서민들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그 낮은 포복의 힘이 모이고 모여 우뚝한 권력 같은 아름드리나무를 쓰러뜨리기도 한다는 깨달음이 머리를 친다. 서민들의 생존경쟁이 이 사회를 움직이는 생명력이듯 저들의 생존경쟁이 곧 이 ‘숲길’의 생명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첫댓글 대한민국 곳곳에 이런 숲길이 있고.....자연이 사방에 있어 일상의 휴식을 삼을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합니다....
많이 걷고 많이 건강하고 자연의 이치를 배울 수 있었음 합니다~~~감사합니다....글이 또 엄마를 생각하게 하는군요~~~!
그후로도님께서 젤 멋지게 사시는거 같습니다..^^
그렇지도 못한데 그렇게 봐 주시니 그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