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4.6)
대림 제 2 주일인 오늘은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 결정에 따라 인간 존중과 인권의 신장을 위한 교회의 역할을 강조하며 복음의 정신에 따라 존엄한 인간의 권리를 위해 교회가 노력해야 함을 다시금 기억하는 인권주일이기도 합니다. 이 같은 오늘 우리에게 들려지는 하느님의 말씀은 이제 곧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의 시기를 보내는 우리에게, 우리가 기다리고 고대하는 그 대상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그리고 이를 기다리는 우리들의 구체적인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우선, 오늘 제 1 독서의 이사야서의 말씀은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통해 바빌론 유배라는 시련과 고통의 시기를 겪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지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고향으로부터 떠나와 낯선 바빌론에서 유배라는 고통의 시기를 견뎌야만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을 통한 구원의 약속은 그들이 그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이자 희망의 원천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이사야 예언자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간절히 원하고 바라던 희망의 약속을 다음과 같이 전해줍니다.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이제 복역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이사 40,1-2)
예언자가 전하는 이 같은 하느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들이 겪고 있는 모든 시련과 고통의 종지부를 찍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새로운 희망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와도 같았을 것입니다. 이제 모든 고통과 절망은 끝이 났다고, 이제는 기쁨과 희망만이 가득할 것임을 약속하는 이 예언자의 말씀은 분명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희망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언자는 이와 같은 희망의 약속이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이야기합니다. 이 희망의 약속을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한 자세를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다.”(이사 40,3-5)
고통과 절망이 사라지고 기쁨과 희망이 가득한 구원의 은총을 주시기 위해 오시는 그 분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 곧 이사야 예언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 분이 오실 길을 닦고 곧게 내는 것, 이를 통해 오시는 그 분을 합당하게 맞이하고 준비할 때, 예언자가 약속한 그 모든 희망의 약속이 완성되며 주님의 영광이 온 천하에 드러나게 될 것임을 예언자는 분명히 전합니다.
이 같은 오늘 제 1 독서의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의 의미는 오늘 복음의 말씀으로 그대로 이어집니다. 마르코가 전하는 거룩한 복음의 시작인 오늘 복음 말씀은 바로 오늘 제 1 독서인 이사야서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며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 분의 길을 곧게 내라고 명하는 구약의 예언자 이사야의 명을 실제 삶으로 실천하여 그 말씀의 완성을 이루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전합니다.
마르코 복음사가가 분명히 이야기하듯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 분의 길을 곧게 내라는 이사야서의 말씀에 따라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서 모든 이에게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합니다.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른 채, 메뚜기와 들 꿀만을 먹으며 광야에서 큰 소리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요한의 모습을 보고 많은 이들이 그에게 다가와 그가 행하는 물의 세례를 받습니다. 그의 모습과 그의 입에서 선포되는 말씀 안에서 예부터 약속된 구원의 희망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이야말로 우리에게 약속된 하느님의 구원을 가져다 줄 하느님의 사람임을 많은 이들이 보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대단히 인상적이게도 바로 그 순간, 자신의 본질과 한계를 분명히 드러내며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의 궁극적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르 1,7-8)
마르코 복음사가가 분명히 이야기하듯 세례자 요한의 선포에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왔다는 내용을 살펴보았을 때, 세례자 요한이 그 당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던 이들에게 미친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 중 대다수의 사람들은 요한을 약속된 메시아로, 이 사람이야말로 하느님의 구원의 약속을 이루어줄 하느님의 사람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그와 같은 기대와 관심 속에서 세례자 요한이 인간적으로 느꼈을 감정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자신이 메시아가 된 것과 같은 기분으로 모든 이로부터 기대와 칭송을 받는 그 순간, 인간적으로 그 찰나의 순간을 누리고 향유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법도 하건만,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본질과 한계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이제 곧 내 뒤에 오실 그 분, 나는 그 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는 말로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신발 끈을 푸는 것은 당시 노예가 주인을 위해 하는 일로서 요한은 바로 이 표현으로 자신은 오실 그 분의 노예 자격조차 안 되는 보잘 것 없는 사람임을 드러냅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이 하는 이 모든 일의 궁극적 목적, 곧 물로 세례를 주는 나의 모든 행위는 내 뒤에 오실 그 분이 베푸시는 거룩한 성령의 세례를 위한 준비일 뿐임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이로써 세례자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이야기한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일, 곧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고 사막에 길을 곧게 내라는 명령의 완성을 이루고 이를 통해 주님의 영광의 날을 준비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제 1 독서의 이사야 예언자가 예고하였으며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이 실제 자신의 삶으로 그 모범을 보인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 준비한 주님의 영광의 날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가 대림시기를 지내며 우리 스스로 준비하며 기다리는 그 영광의 날, 주 하느님의 권능이 온 누리에 떨쳐지며 당신의 팔로 왕권을 행사하게 되는 그 날이란 어떤 날을 뜻하며, 그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을 오늘 제 2 독서의 베드로서의 말씀 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제 2 독서의 베드로 서간의 말씀은 이제 곧 올 주님의 날을 합당히 준비해야 함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다리고 고대하는 주님의 날이 바로 새로운 창조를 통한 새 하늘과 새 땅임을 다음의 말로 천명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 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2베드 3,14)
베드로 서간이 말하는 이 새 하늘과 새 땅의 개념은 이미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예고된 것으로서 새로운 창조를 통해 오게 될 새 세상, 예전의 것들은 모두 사리지고 하느님의 새 창조를 통해 슬픔과 좌절이 아닌 즐거움과 기쁨이 가득한 세상, 더 이상 우는 소리와 울부짖는 이들의 소리가 아닌 즐거움과 기쁨에 찬 환호의 소리가 가득한 세상, 하느님의 축복으로 늑대와 새끼 양이 함께 풀을 뜯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는 하느님이 만드시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대림의 시기를 보내며 우리가 기다리고 준비하는 모든 것의 본질이 바로 이 새 창조를 통한 새 하늘과 새 땅이며 주님이 오시는 길을 준비하며 우리가 기다리는 새 세상이 바로 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사랑하는 송동 교우 여러분, 한국 교회는 대림 제 2 주일인 오늘을 인권주일이자 사회교리 주간으로 지냅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모든 인간은 사회적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하느님이 주신 거룩한 존엄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로써 모든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받아야 함을 교회는 믿고 또 그렇게 가르칩니다. 또한 교회는 이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모든 노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하며 인권이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에 누구보다 앞장서 // 소외받고 가난한 이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합니다.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약자를 위해, 부당하게 사회적 지배층으로부터 기본적 권리를 박탈당하는 현실에 대항하여, 불의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가 침묵할 때, 교회는 소외 받는 한 사람을 위해 불길로 뛰어들고, 인권을 유린당한 한 사람을 위해 길거리로 나서야 하며, 불의에 항거하고자 모든 이가 거부하는 현실로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를 통해 모든 이들이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소외되거나 박해당하는 일 없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의 상급인 기쁨과 즐거움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세상, 그래서 모든 이들이 하느님 사랑의 빛으로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의 향기로 가득 찬 세상, 그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을 통해 하느님이 우리에게 이야기하시는 // 오시는 그 분을 합당히 준비하는 자세이며, 바로 이를 통해 올 새 세상,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로 오게 될 세상이 바로 오늘 말씀이 전하는 새 하늘 새 땅일 것입니다.
2014년, 우리를 찾아온 벽안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는 말씀을 통해 고통에 신음하는 이웃형제들을 위한 사랑의 마음을 갖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이며 사랑의 실천의 완성임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이 세상에 오실 메시아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 대림시기, 사랑을 전하기 위해 그 사랑을 통해 온 세상이 사랑으로 일깨워져 사랑으로 가득 찬 세상이 되어 하느님의 사랑의 새로운 창조를 통해 사랑이 가득한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는 여러분 모두가 추워지는 날씨 속에서 소외된 채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이웃 형제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의 삶의 자리가 곧 새로운 창조를 이루는 장소가 되어 // 오시는 메시아 예수님을 합당히 준비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4.6)
|
첫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