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내가 전한 복음’이란 말은 ‘나에 의해서 전해진 복음’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은 사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천명합니다.
‘사람의 뜻을 따라’는 곧 유명한 사람의 말에 의해서라는 의미인데 바로 복음의
반대말입니다. 현대교회의 목회자들이 곰곰이 생각해 볼일입니다. 한국교회 목사들
중에 키르케고르에 빠져서 연구소를 차리거나 미국의 특정한 목사의 포럼을 갖는 모습을
보면서 이들이 과연 로마서를 알고나 있을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유언인 요한복음
14장에서 16장을 알고 있을까? 요17장의 대제사장이신 주님의 기도의 내용을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서울의 유명한 S교회의 원로목사는 큰 교회의
목회자일수록 복음을 전하지 못하더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본인도 수 십 년 동안
교회를 담임하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회중의 귀를 의식하여 기울어지더라고 말했습니다.
고인이 되었지만 그 아들이 지금 기독교를 비방하고 있으며 심지어 자신의 아버지는 기독교의
본질을 몰랐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 성도들의 귀를 의식하여 설교를 했다는
말은 자신이 복음의 진수를 모른다는 말이 됩니다. 복음을 안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12절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바울은 이 복음을 사람들에게 받은 것도 배운 것도 아니라고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사람들에게 전수 받은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다만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계시복음의 반대는 비유복음입니다. 말씀을 계시로 깨닫지 못할
때에는 둘을 견주어 비교 설명하는 것이 비유복음입니다. 알레고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비추어 보이십니다. 덮어두었던 것을 열어 보이는 시대입니다.
계시록도 아포칼립시스라고 하여 덮인 수건을 열어 보이시므로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예수님께서 요16:25절 ‘때가 이르면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계시복음이라고 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성경을 더
기록할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기록된 성경 곧 전파된 복음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계시가 진행되고 있을 뿐입니다. 계시는 단회적이며 점진적이며 영원한 겁니다.
어떤 사람들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직통으로 받았다는 소리는 잠꼬대일 뿐입니다.
계시를 받은 사람의 글이나 설교를 들으면 그와 같은 계시의 영이 전달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운 교회의 전승인 겁니다(엡2:20)
13절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기 이전의 바울에 대한 설명입니다. 철저한 율법주의자였습니다.
유대교에 있을 때의 행한 일이란 습관적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잔해하는
일을 반복했다는 말입니다. 이를 바울은 믿지 않았을 때(딤전1:13)라고 말합니다.
14절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바울은 동족이나 연갑자의 맨 앞장으로 조상의 유전을 지키기 위한 열정을 가졌습니다.
요즘 같으면 유대교와 그 전통에 대한 수구꼴통이라는 말을 들을 만합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수백 명이 가서 유대교를 공부하거나 선교를 한다고 외화를 낭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보면 미전도 종족입니다. 다만 그들 중에 남은 자들이
이방인의 구원이 충만해 지면 돌아오게 될 겁니다(롬11:25-26) 에스겔이나 다니엘이 예언한
것을 온 이스라엘 곧 그리스도 안에 부름을 받은 택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전체를 위한 것
이스라엘만의 예언이 아닌 겁니다. 예수님은 유다지파로 그들 가운데서 나셨지만 주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후 승천하신 다음에 보내신 성령은 예루살렘을 우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53장의 메시아의 예언을 거부하고 있으므로 성령이 안 계십니다.
다만 성경 속에 이스라엘이 등장하므로 성경의 시나리오대로 회복이 되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란을 중심한 저항의 축이 아무리 이스라엘을 공격해도 이스라엘은 끝까지 망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잘 나서가 아니라 성경이 이루어져야 되기 때문에 그들이 끝까지 존재할 뿐입니다.
15절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바울은 자신이 어머니 태로부터 택정이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은혜로 부르신 이로부터’ 예레미야도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1:5)
또 시139:13절은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발견된 자신으로 말미암아 소급해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 예정된 자신을 보고,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를 내다보게 됩니다.
16절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바로 이와 같은 계시를 받아야 합니다.
안에서 계시 역사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진리의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날에는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
하신 말씀이 바울의 복음을 통해 그 계시가 지금까지 계속 전달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자세히 보면 계시의 영이 나타나 로마서가 요한복음의 참고서임을 알게 될 겁니다.
안에서 계시하는 아들 예수그리스도로 인해 의와 거룩과 영광이 나타나고 빛과 생명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 갑니다. 성령의 가르침과 생각나게 하심입니다.
그리스도가 바울 안에 나타나신 목적은 바울로 하여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입니다. 바울이 말한 바로 그 신령한 은사입니다.
문제는 이 시대에 예수는 잘 아는데 그리스도와 생명의 성령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내 속에 계신 그리스도가 율법을 완성했고 완성해 가고 계십니다(롬8:3-4)
일차적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시고 그리스도 안에 영을 좇아 행하는 자들에게
율법의 요구인 사랑을 이루어가게 하십니다. 따라서 율법은 믿음을 완성치 못하지만
믿음은 율법을 온전하게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사실을 모르면 믿음과 행함의 함수는
풀리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살라고 해 놓고 그래도 행함은 있어야지 하고 갖다 붙이는
수준이 현실입니다. 그 믿음이 속에서 일하므로 행함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행하는 사람이 되어 간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자신 안에 계시할 때에 이 일을 행하라고 하시는 뜻을 알고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했습니다. 육신의 사람들은 말해 봐야 헛소리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17절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예루살렘도 안 갔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교단의 총회신학을 안 했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아라비아로 갔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구약의 율법을 예수그리스도란 안경을 끼고
다시 보게 되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아라비아는 시내산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시 다메섹을 돌아갔다고 진술합니다. 지금 구약학을 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망원경식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진행상황을 재미있게 중계를 하지만 그 속에 배어있는
그리스도를 모르기 때문에 신약 곧 새 언약과 연결을 시키지 못 합니다. 파노라마니
구속사니 크로스웨이 등 별별 성경공부를 하지만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초점이
맞춰지고 그 다음엔 다시 오신다 하는 내용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일어나는
현재구원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사실 성경은 한 몸과 같은 한 권의 책이므로
구약과 신약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위해서 그림자와 실체를 비교해서 설명할 뿐입니다.
구약에는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신약에는 오시고 성취하시는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구약학을 제대로 하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임재하신 새 언약을 제대로 파악하고 파노라마처럼 구약의 그림자를
설명하여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으로 인해 거듭나서 하늘에 앉히신
것까지 추적할 수 있어야만 구원에 이르는 성경해석자가 될 겁니다.
고린도 교회는 세상의 이방적인 생활의 요소가 가득한 교회였습니다. 반면에
갈라디아교회는 이방의 종교적인 요소가 침투했습니다. 요즘의 고급스러워진 교회처럼
육신적인 자랑이 가득했다는 뜻입니다. 현대교회는 물신(物神)이 최대의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가난하고 순수해져야 합니다. 육체는 풀과 같고
육체의 영광의 값은 풀의 꽃과 같은 뿐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는 헬라적인 요소 곧 우상숭배요소가 있고 갈라디아교회는 유대적인 율법의
요소가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좌경, 갈라디아교회는 우경이라고 보면 됩니다.
지금도 지성적 경건주의를 좇는 교회는 육신의 행위를 자랑하고 이를 지향하고 있고
감성적인 열광주의는 은사나 이적과 기사를 자랑하지만 사상과 삶의 모습은
이쪽이든 저쪽이든 달라지지 않습니다. 제자리에서 회전목마를 타고 있는 모양입니다.
교회가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는 고린도교회의 요소와 갈라디아교회의 요소가 철저히게
배제되어야 합니다. 1) 물질적인 요소 2)) 육신적인 요소입니다. 이 문제를 교회에서
아예 취급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 증거가 되어야 할 겁니다.
청부니 청빈이니 하면 인간은 벌떼처럼 달려들어 왈가왈부하고, 육신문제를 끄집어내면
송사와 변명을 논쟁을 지루하게 계속하게 됩니다. 물질적인 문제와 육신의 문제는
자신이 가진 신앙의 수준에 의한 양심에 의한 상식문제일 뿐 교회의 강단에서 전할
만한 내용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성숙해지면 다 저절로 해결이 됩니다.
교회가 사업을 크게 벌이고 이미지 제고에 마음이 바빠 강단에서 이런 문제를
다루다가 그만 습관적으로 반복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교회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로 인해 복음이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아니 복음을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건 기본적으로 이미 다 된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천천만만에 말씀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내 속에 계신 그리스도가 율법을 이미 완성했고,
여전히 지금도 완성해 가고 계십니다(롬8:3-4)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여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주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복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