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경(膽然禪敬, 1903~1994) 스님 구도기>
천성산 내원사
한국처럼 여성들도 남성과 동등하게 수행할 수 있는 곳은
세계적으로 다른 종교는 아예 말할 것도 없고, 불교에서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남방불교에는 아예 비구니제도가 없으니 말할 여지가 없고,
한국 외엔 오직 대만에 비구니 제도가 있지만 그것은 근래에 생긴 것이고,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래에 여승제도가 존속해 왔다.
다만 비구니 전용 수행체계를 갖추게 된 것은
오로지 만공(滿空, 1871~1946) 선사의 미래를 내다본 혜안 덕분이다.
그 분이 처음으로 견성암(見性庵)에 비구니 선방을 여시고,
그곳에서 법희(法喜, 1887~1975)스님이 최초로 법을 인가받음으로써
근대 한국 비구니 선맥의 종조가 됐던 것이다.
그 다음이 문경 대승사 윤필암(潤筆庵)에 비구니 전용 선방이 개설됐다.
여기 소개하고자 하는 비구니 담연 선경(膽然禪敬, 1904~1994) 스님은
1904년 5월 충청북도 청원군 남일면 신송리 산촌에서 아버님 노씨, 어머님 고씨의 딸로 태어났으나
일찍 어머니를 여의어 어렵게 자라서
18살에 시집을 갔지만 못 생겨서 첫날밤에 서방으로부터 소박을 맞았다.
그녀는 병까지 얻게 돼 인생의 무상함이 절실해져 죽음을 각오했으나
깨달은 바 있어 불가에 귀의코자 했다.
1921년, 그녀가 18세 소박맞은 그 해 충남 공주 마곡사 영은암(靈隱庵)
명덕(明德) 스님께 나아가 머리를 깎고 그로부터 14년 동안 노스님을 시봉하며 중노릇을 했다.
그러나 제대로 선방에 들어 화두참선을 했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으나
그런 길이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예산 수덕사 견성암에 가면 비구니들도 참선을 공부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1936년 무작정 수덕사 견성암을 찾아가 처음으로 결제를 경험했으며,
그때 욕심을 내여 만공 선사 앞에 나아가 삼배를 드리고 화두(話頭)를 내려 주실 것을 청했다.
이에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만공 선사는
“머리도 모르고 꼬리도 모르는 주제에 네까짓 게 무슨 공부냐,
가서 일이나 하라.”고 일갈하면서 부엌으로 보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선방에 보내 공부를 시키면서 자기는 부엌데기로 부려먹기만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머리도 모르고 꼬리도 모르는 주제에 네까지 게 무슨 공부냐, 가서 일이나 하라’는 고함에
분한 마음이 맺혀 사생결단하고 혼자 참선공부에 전념했다.
그러다가 선경 스님은 수덕사 견성암에 이어
두 번 째로 비구니 선방을 연 문경 대승사 윤필암(潤筆庵)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이번에는 윤필암으로 향했다. 윤필암 본사인 대승사(大乘寺)까지 찾아가서
대승사 조실 스님에게 “화두를 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그러자 선경 스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대승사 조실 스님도
“네까지 게 무슨 공부냐” 하면서 역시 “일이나 하라”고 하더란다.
대승사 윤필암
그렇게 구박을 당하면서 사정사정을 해 겨우 윤필암 선방에 앉게 된
선경 스님은 시집가서 서방에게 첫날밤에 소박맞은 이래
절에서도 끊임없이 구박만 받는 것이 너무도 서러워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소리 내어 울면 천신만고 끝에 들어간 선방에서 남의 공부를 방해한다 해서
쫓겨날까봐 두려워서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손수건을 쥐어짜듯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렇게 일주일가량 눈물을 쏟은 뒤 문경 윤필암에서는
청안(淸眼) 스님 회상(會上)에서 정진하게 되자,
삼칠일이 지나도록 성성적적(惺惺寂寂)해 수마(睡魔)는 간 데 없고
오직 한 덩어리 의심만 나게 되었을 때
청안 스님이 큰 방에 다음과 글을 써 붙였다.
「밑 없는 철배(鐵船)를 타고 육지로 향해도 걸림이 없음을 알아라.」
이 글을 보는 순간 스님의 마음속에 있던 의심이
화로 불에 눈 녹듯이 스러지고 마음이 확 열리게 됐다.
‘밑 없는 철배는 마음이요, 마음은 본래 걸림이 없으니 육지를 간들
무슨 걸림이 있으랴’ 하는 생각이 들면서, ‘머리도 꼬리도 모른다.’ 하던
만공 스님의 말씀을 홀연히 깨닫게 됐던 것이다.
그해가 1938년, 스님의 나이 35세였다.
그렇게 윤필암에서 세 철을 나는 동안 스님은 줄곧 공양주 노릇을 하며
도반들과 용맹정진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큰 방에서 정진을 하는데 홀연히 전생의 일들이
환히 보였다. 숙명통(宿命通)이 열린 것이었다. 하얀 종이 같은 것에 까만 글씨가 나타났다.
하지만 일자무식인 선경 스님이 그 글자를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 때부터는 그 글자에 대한 의문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다고 한다.
하여, 저절로 그 글자가 화두가 된 것이다. 그렇게 화두에 일심을 모은 며칠 뒤
놀랍게도 그의 기억의 필름에 전생이 훤하게 비쳤다.
그녀는 전생에 속리산 법주사의 비구 스님이었으며, 아주 지식이 출중하고,
잘 생긴 비구 스님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의 용모와 지식을 뽐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네까지 게 뭘 알아!”라고 핀잔을 주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파계까지 했던 선경 스님의 전생인 그 비구 스님은 열반 직전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 모든 진리는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화두를 참구했었는데,
선경 스님의 기억 필름 속에 그 화두가 나타났다.
선경 스님의 이런 전생을 이미 내다봤던 만공 선사와 대승사 조실 스님은
선경 스님이 스스로 전생의 업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
전생에 그가 사용하던 말투대로 “네까지 게 무슨 공부야!”라며 힐난했던 것이다.
이처럼 전생에 속리산 법주사에서 형색과 인품이 뛰어난 수좌였으나
계행(戒行)을 지키지 못하고, 오만했던 전생의 업을 고스란히 물림을 받아
그 과보로 금생에는 키도 작고 얼굴도 못났으며,
가난한 집안에서 복락을 누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 배움과도 인연이 없는 여아로 태어난 것인데,
그나마 겨우 부처님과 인연이 닿아 비구니가 된 것이다.
그런 전생의 업보를 알게 되자 그 업보를 소멸하고자 더욱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다가
3년 뒤에 스님의 발길이 북쪽으로 향했다.
금강산을 두루 구경하고 보덕굴에서 칠일기도, 낙산사 홍련암 관음굴로 가서
이칠일 기도 끝에 선지식을 만나 탁마하라는 계시를 받고
오대산 상원사로 가서 방한암(方漢岩, 1876∼1951) 스님을 찾아 뵈웠다.
그리고 막상 상원사에서 동안거 결제를 하고 보니, 대중이 너무 많아 방이 좁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월정사 지장암에서 한 겨울 동안 공부하기도 했다.
이후 스님은 상원사를 떠나 다시 예산 수덕사로 돌아와 별좌(別座) 소임을 맡아보며
3년간 공부를 하다가 1959년경 동화사 부도암에서 일 년을 살면서 만행을 하다가
효봉(曉峰, 1888~1966) 스님을 친견하고 안목을 틔웠다.
이후 범어사 대성암으로 가서 한철을 난 뒤 천성산(千聖山) 내원사(內院寺)로 갔다.
스님은 1963년 60세에 내원선원에서 입승(立繩)을 맡아 일흔이 되던 해에 소임을 내놓았다.
도반들과 함께 천성산에 와서 참으로 환희심이 나는 것을 깨달았기에
스님은 이곳에 오래 살기로 마음을 정했던 것이다.
입승 소임을 맡으면서 당시 내원사를 들른 향곡(香谷, 1912~1978) 스님과
법거량를 나누었으며, 조실 경봉(鏡峰, 1892∼1982) 스님과도 법거량을 나누었다.
이는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말하는 것이다.
어느 해 섣달, 그러니까 향곡 스님이 열반에 들기 얼마 전에
내원사에 이르러 대중들에게 일렀다.
“만문수가 여기 나타났으니 진문수를 찾아내라.”
스님은 장삼을 입고 조실방에 찾아가서 아뢰었다.
“만문수, 진문수, 역대조사(萬文殊, 進文殊, 歷代祖師),
천하의 모든 노화상이 다 내 콧구멍에서 나왔습니다.”
향곡 스님이 되물었다.
“콧구멍이 어디 있는고?”
“본래 콧구멍은 없지만 어디라고 말할 수 없어서 그렇게 나왔습니다.”
스님이 이렇게 답하자 향곡스님이 이렇게 일렀다.
“참 공부도 많이 하고 애도 많이 썼습니다.
이제 놓으시고 젊은이들 탁마나 해주시오.”
그리고 1985년 무렵 다시 문경 대승사 윤팔암에 머물렀을 때의 일이다.
벽안의 한 여인, 정신적 방황을 거듭했던 프랑스 여인
마르틴 배췰러(Batchelor)가 어쩌다 한국에까지 와서,
1975년 한국에서 출가해 송광사의 구산(九山, 1909~1983) 스님 문하에서
10년간 승려생활을 하면서 선을 수행했다.
비구니가 된 배췰러가 10년을 수행생활을 한 후 윤필암에 와서
한동안 머물며 선경 스님의 제자가 되기도 했었다.
그녀는 1985년 유럽으로 돌아가 환속한 후 역시 한국에서 승려생활을 했던 남자를 만나
결혼까지 하고 저술활동에 주력했다.
저서로는 <Principles of Zen, Women on the Buddhist Path, Meditation for Life> 외에,
<범망경 보살계>를 영역한 <The Path of Compassion> 등 다수가 있다.
현재 프랑스에 거주하며, 남편 스티븐 배춸러와 같이 선 센터를 운영하면서
서양인들에게 참선수행을 가르치고 세계 곳곳으로 다니며 명상을 지도하고 있다.
법명 성일(性日)이었던 그녀가 출판한 책, <출가 10년 나를 낮추다>에
선경 스님의 일대기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소개하는 사진 앞쪽이 선경 스님이고, 뒷줄 왼편 첫째가 배췰러(성일 비구니)이다.
그 후 다시 내원사 선방으로 와서 오직 한마음을 밝히는 본분사와
수좌 제접(首座提接)에 힘을 기울이다가
1994년 공주 금강암에서 입적하니 법납 73세, 세수 91였다.
그리하여 자성불(自性佛) 선경 스님의 부도가 천성산 내원사에 모셔져 있다.
― 선경 스님의 선시 ―
1. 중생의 본심(本心)
중생의 본래 마음은 공(空)하여
중생이라는 자체가 없거늘
하물며 새삼스럽게 부처가 어디 있을까보냐.
2. 부질없는 알음알이
도를 닦아 성불 경지를 증득하느니
죄를 지어 무간지옥에 들어가느니
이 무슨 부질없는 알음알이인가.
3. 천수천안(千手千眼)
천 개의 눈을 가진 관세음보살
능히 볼 수 없는 것이요.
천 개의 손을 가진 관세음보살이
능히 만질 수 없는 것이니
천성산(千聖山)에 올라와
손뼉을 치고 가가대소(呵呵大笑) 하였네.
선경 스님이 불문에 들어올 때는 일자무식이었는데,
절밥을 먹기 73년이라, 들은 풍월만 해도 깊었으니,
큰스님들과 법거량도 하시고, 멋진 선시도 읊었어라.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