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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누가복음 18장 9-14절
하나님 앞에서의 의
지난 시간에 이어 오늘 본문 역시 기도라는 경건의 형태를 가지고 비유로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여기 보면 두 사람이 나오는데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그런데 이들 기도를 비교하시면서 이런 전제를 두고 말씀하십니다. 9절을 보시면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그러니까 지금 주님께서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있는 그릇된 자기 신뢰와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교만을 염두해 두시고 이 비유를 들고 계십니다.
그런데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것과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서로가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릇된 자기 신뢰, 그것도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은 부분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을 다른 사람 위에 두는 교만함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의로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하여 판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의 의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의에 대한 그릇된 자기 신뢰는 반드시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교만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것과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교만은 불가분의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난 시간에도 살폈듯이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될 자세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하나의 경건의 내용이며, 그런 차원에서 항상 기도하라 말할 때 그 핵심은 범사에 그를 인정하는(잠3:6) 삶의 내용이라 말할 수 있었던 겁니다. 비록 우리의 모든 원한을 다 풀어가면서 사는 삶이 아니라 할지라도, 또한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선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로 있다는 걸 알고, 하나님만을 믿으며 사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야 할 신앙의 내용이었던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 대해 경고하고 계시는 것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또한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모습이지만, 다시 말해 두 사람 다 기도하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서 있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양상의 대조적인 내용으로 펼쳐지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만 하면 다 된다가 아니라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어떤 자인지를 확인하도록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선 10절을 보시면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그러니까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는 것은 적어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있다는 외적 표시가 있다는 말입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다른 한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둘 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자인 겁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기도 자세나 그 내용을 보면 매우 대조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바리새인의 경우 11절 이하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18:11-12) 여기서 바리새인은 자신의 의로움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남의 것을 착취하고 불의를 행하며 살아가나 자신은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하였습니다. 특별히 세리와 비교함을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서 소망 없는 자로 버림받은 죄인과 같지 않음에 대해 감사했으며, 이런 죄인과는 달리 의롭게 산 것에 대해서 감사하였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은 그만큼 경건의 훈련을 하고 있다는 것인데, 바리새인은 자신의 의로움뿐만 아니라 경건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반면 세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18:13) 바리새인의 기도를 통해 어떤 모양의 죄의식도 찾아볼 수 없고, 하나님께 빚진 자의 모습이나 태도를 찾아볼 수 없다면 지금 세리의 기도는 전혀 반대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의식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없음을 알고 자신의 죄를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수치와 비천함을 깊이 의식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감히 눈을 들어 바라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다만 자신이 가슴을 치며 하나님께 범한 죄악과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된 자기 모습을 슬퍼하고 안타까워하고 뉘우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리는 한 마디로 이렇게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한두 가지 죄를 지은 것으로 말하지 않고 자신의 존재됨이 ‘죄인 된 존재’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보시면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눅18:14a) 그러니까 바리새인의 기도는 배격하시고 세리의 기도는 받아 주셨다는 겁니다. 왜 바리새인의 기도는 배격하시고, 세리의 기도는 받아주시는가? 일반적으로는 바리새인은 교만했기 때문에 배격하신 것이고, 세리는 겸손했기 때문에 받아주셨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이후에 나오는 말씀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19:14b)는 말씀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합니다. 교만한 자는 낮아진다는 것이고, 겸손한 자는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사실은 단순히 교만했다, 겸손했다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는 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즉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문제, 다시 말해 윤리적인 차원에서 겸손했기 때문에 의로워지고, 윤리적인 차원에서 교만했기 때문에 의롭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겸손과 교만을 말할지라도 단순히 윤리적인 차원 이상의, 그리고 그것보다 앞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를 드러내고 계시는 비유인 것입니다.
여러분, 의롭다 함을 받는 것, 소위 칭의라고 말하는데, 이 칭의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적어도 바리새인에게 있어 의의 근거는 바로 자기 자신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리와 같지 않음도 감사했습니다. 그는 이레에 두 번식 금식을 하는 자였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바리새인의 의의 근거는 바로 남과 다르며, 남보다 훨씬 낫다는 교만함이었습니다. 물론 그가 그 스스로를 교만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의 공로가 바로 자신의 의를 결정짓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세리에게 있어 의의 근거는 자기 자신에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백하길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기도하였던 겁니다. 내가 내 것을 가지고 의롭다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요, 거저 긍휼이 여김 받기를 바라는 마음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바리새인 역시 기도하는 자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그가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 없이 그 스스로가 의롭게 되었다, 경건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무언의 고백과도 같은 겁니다. 심지어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면 비록 그 내용에 있어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하지만, 비교를 통해 감사한다는 것은 그가 그 스스로, 하나님 없이도 감사의 내용을 이룰 수 있는 자는 아니란 것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바리새인의 의는 좀 더 엄밀히 말해 이중적인 의미가 들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자기의 모든 의와 경건이 하나님의 순전한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고 자신을 타인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을 의롭다 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칼빈)입니다. 한편으로는 은혜라 말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고 있는 것!
물론 오늘 비유 자체만을 보면 우리는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너무도 극명하게 대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 신앙의 현장으로 들어오게 되면 이 문제가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니란 것을 아셔야 합니다.
누가복음 12장으로 가시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1절부터 보시면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눅12:1-3)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 바리새인의 경우 그 교만함을 쉽게 파악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외식하는 자로 있을 때가 많습니다. 외식이란 뭡니까? 바로 겉과 속이 다른 것, 그래서 감추어져 있으며,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실제 신앙의 현장에서는 저들의 외식에 거의가 속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참으로 의로워 보이고, 경건하게 보입니다. 적어도 예수님께서 오셔서 가르치시고 증거 하시기 전까지는 바라새인이 의의 표준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물론 백성들이 바리새인을 얼마나 존경했는지에 대해서는 그렇게 긍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권위 있다고 말할 때 어떤 면에서 바리새인의 가르침은 권위가 없는 그런 가르침이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의의 표준, 의기 기준은 바리새인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 속에 이중적인 마음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1장 39절에도 보시면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어떻게 보면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서의 바리새인의 기도는 참으로 외적인 의미에서 사실 그대로를 아뢴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의의 기준답게 겉으로 볼 때는 토색, 불의, 간음을 하지 않았으며, 멀리 서서 기도하는 세리와도 같지 않았습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할 뿐만 아니라 자기 소득의 십일조를 철두철미하게 드리는 자였습니다. 안하고 그렇게 말한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행하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 여기에 속습니다. 바리새인은 의의 기준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지적하시는 것은 비록 사람들이 겉을 보고 의롭다, 경건하다 말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 의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예수님 당시 세리라고 하면 로마의 조세나 관세를 거두는 수금원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자기 이익을 위해 수금액의 얼마를 덧붙여 착취하였던 자였기 때문에 지금 비유 가운데 소개되고 있는 이 세리 역시 다르지 않는 자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가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며, 죄인이라고 기도하는 것은 자기에게 있어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의의 근거가 될 만한 어떤 것도 찾을 수 없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동일하게 말하지만 거기에 인간의 공로나 그와 같은 불순물이 조금이라도 들어간다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그런 의가 아니란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런 의는 바리새인의 기도에서 나타나는 의요, 결코 주님이 의롭다 말할 수 있는 그런 의가 아니란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 된 자의 마땅한 자세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깨달았을 때 열매로서 나타나는 자신의 공로조차 의지하지 않도록 하는 것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하심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겨 전폭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참된 겸손입니다. 있는데 없는 척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없는 걸 알고, 아니 있더라도 주께서 주셔서 있는 줄 알고 주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 이것이 참된 겸손입니다.
반면 교만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면서도 거기에 인간의 공로를 들이대는 것, 쉽게 말해 하나님의 은혜의 100을 조금이라도 감(減)하는 것 자체가 바로 인간의 교만입니다. 실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교만한 자라고 말하는 것은 비록 윤리적인 면에 있어서는 매우 겸손한 사람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그 복음의 내용을 저버리기 때문에 성경은 믿지 않는 모든 자를 향하여 교만한 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 온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감한다면, 오히려 인간의 공로를 말한다면 그것 역시 교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하나님께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통해 알리시고 계신 의란 우리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요, 우리에게 조금의 자랑꺼리도 없다는 것을 알며,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 하나님의 은혜로 죄인 됨을 깨달아 자신의 죄를 고백하여 불쌍히 여겨 달라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는 자가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될 자세요, 마땅한 바인 겁니다.
종교개혁의 역사를 보면 이 문제와 관련하여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뭔가 하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종교개혁 하면 떠 올리는 ‘이신칭의’에 관한 것(JS 설교 참조)입니다. 일단 이신칭의란 말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말 안에는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구원에 관한 두 가지 내용을 거절합니다. 하나는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거절하고, 다른 하나는 믿음과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거절합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유명한 모토 중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라는 것이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것은 ‘오직 믿음’이라고 말할 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믿음 자체’가 우리를 의롭게 하거나 구원하는 것은 아니란 걸 아셔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쉽게 사용하는 말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고 할 때 우리 안에 넌지시 들어온 것이 무엇이냐 하면 믿기만 하면 구원이 보장된다는 식의 논리로 많이 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은 어떤 차원에서의 믿음이냐 하면 대부분 내 쪽에서의 믿음, 내 결정, 내 판단과 같은 뉘앙스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믿음’하면 언제나 믿는 자 쪽에서부터 생각하는 습관이 있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일차적으로 믿음이라고 말할 때는 에베소서에서 증거 하는 것처럼 ‘선물’(엡2:8)이라는 쪽에 강세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을 선물이라고 말할 때 어떤 자에게 이 선물을 주느냐 하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행13:48),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기 백성들에게만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신다는 것이 더 근원적인 의미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믿음이란 것은 믿는 조건으로 의롭게 되고, 믿는 조건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조건이 아니란 것입니다. 이미 믿음 자체가 선물이고, 그 선물도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한 자에게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 자체가 원인이 될 수는 없는 겁니다. 혹 원인이라고 한다면 형식적 원인 혹은 도구적 원인이라는 말은 사용하지만, 그때도 주의해야 할 것은 결코 사람의 행위라는 차원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뭐냐? 하나님 편에서 어떤 사람을 구원하실 때 그 사람의 행위가 아니란 차원에서 그 믿음을 수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수단이 되어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고, 믿음이 수단이 되어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일차적으로 정리해야 되는 것은 의롭다 함에 있어 ‘믿음을 통해서’, 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사용하지만, ‘믿음 때문에’라는 말은 거절해야 되는 말임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 때문에’라는 말은 원인을 말하는 것이고, ‘믿음을 통해서’나 ‘믿음으로 말미암아’는 수단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수단도 최종적인 것은 아니란 것 아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런 수단을 선물로 주시며, 영원 전부터 선택해 주신 자에게 그것을 주시기 때문에 궁극적인 의의 근거는 하나님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차원에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51편 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물론 밧세바와 동침한 것으로 나단 선지자에게 책망을 받아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합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그런 회개조차 자신이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그럼 언제 의로운가? 지금 다윗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주께서 말씀하실 때 의로우며, 주께서 판단하실 때 순전하다는 겁니다. 의의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느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기로 판단하시느냐에 있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4장 4절도 보시면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일반적으로는 자책할 것이 없으면 꽤 괜찮은 사람, 의인이라 말할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선 이것조차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합니다. 오히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롬3:23)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판단하신다면 그런 의롭지 못한 자도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결국 성경이 말하는 의란 내 쪽에서 어떤 근거를 가질 수 없는 것, 오로지 하나님만이 궁극적인 원인자로 계시며, 그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판단하지 않는 이상 어떤 것도 우리를 의롭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지금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통해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그럼 질문 하나를 하겠습니다. 지금 세리의 기도를 보면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데, 세리가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이런 기도를 했기 때문입니까? 당연히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기도했기 때문에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빌립보서 표현대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그 안에 두고 행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빌2:13). 그 결과 자신이 무(無)와 같은 존재인 것을 안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없는 존재와 같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리의 기도는 자신이 죄인됨을 고백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은 것으로 말씀하고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죄인됨을 통해 그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을 그의 고백을 통해 알리고 있는 것 뿐인 것입니다. 회개가 앞서는 것이 아니라 그때도 여전히 무엇이 앞서느냐? 하나님 앞에서 그 죄를 깨닫고 회개할 수 있도록 하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 그 은혜가 앞서는 것입니다. 이걸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오셔서 마지막 절을 보시면 주님은 바리새인보다 세리가 더 의롭다고 말씀하시고 난 뒤 이렇게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18:14b) 지금까지 살폈던 것처럼 이 말씀은 단지 윤리적인 차원에서 ‘겸손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자기 공로, 자기 의는 주 앞에서 버려야 할 것으로 말씀하는 부분입니다. 자기에게는 아무런 공로가 없고, 어떤 의도 찾아 볼 수 없다는 주의 말씀 앞에 자신을 낮추는 것이 당연한 모습으로 있는 자, 그런 자를 하나님께선 높여주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쌍할 수밖에 없는 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결코 죄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 그래서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는 자! 그러나 그렇게 구하는 것도 원인이 될 수 없고, 오히려 그렇게 구하는 것조차 하나님의 앞선 역사가 있다고 믿는 자! 이런 자를 하나님은 높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의미에서 세리의 모습은 소위 우리가 말하는 인본적인 의미에서 겸손이 아닌 겁니다. 오히려 이 세리의 자세는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마땅한 자세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같은 누가복음 본문을 통해 알리시는 말씀이기도 한데, 누가복음 17장 7절 이하를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17:7-10) 여러분, 우리는 명령을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도 그 행한 바가 자랑이 될 수 없는 자란 걸 명심하셔야 합니다. 오히려 명령을 받아 행했다면 그것은 우리의 마땅한 자세인 것이지, 순종했다고 자랑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것입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이것은 단지 내가 겸손해야지 하는 결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실 앞에 우리 자신을 내려놓아야 하는 문제입니다. 칼빈의 말을 빌면 인간에게 있어 교만처럼 치명적인 질명도 없고, 교만처럼 사람들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것도 없습니다. 얼마나 뿌리 박혀 있는지 어떤 수단으로도 추방되고 근절되지 않는 것이 교만입니다. 그런데 이런 교만이 사람들 앞에서만 행하고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까지 교만을 떨고 있다는 겁니다. 바리새인이 바로 그런 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지만 동시에 자기의 공로를 말하는 것, 구원을 말할 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래도 뭔가 행위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것. 혹은 하나님께서 하시긴 하지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어느 정도 반응이 있어야 하나님도 하실 거 아니냐는 식의 말들은 다 바리새인의 기도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지만 여전히 그 가운데서 ‘나’란 존재가 증명되어야 안심을 하는 것, 바로 바리새인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셔야 합니다. 단지 오늘 본문의 문자적 의미처럼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 앞에 어떤 공로도 돌릴 수 없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지금 세리의 경우는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 죄인이라 고백하고 있지만 이것조차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시는 않으면 고백할 수 없는 내용인 것입니다.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고, 다른 사람보다 괜찮은 장점을 주셨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물이지, 다른 사람과 비교해 그것이 나의 우월함이라고 생각하지 마셔야 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욥1:21) 이 말씀은 정확하게 맞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내 손에 있지만 하나님께서 가져가기로 하신다면 우리의 건강, 우리의 물질, 우리의 자녀 어느 것 하나 우리 스스로 지켜낼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저 베푸시는 은혜로 살아가는 자들이지, 본래 뭔가를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닌 겁니다.
소위 자신감이라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을 뒤로 밀쳐 버리는 경우도 있는데, 조심하셔야 합니다. 자신감을 가지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나, 그런 자신감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더라도 할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되면 거기에는 바리새인과 같은 자기 의, 자기 교만이 들어 있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말씀을 맺겠습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사람은 자신의 공로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공로를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지만 거기에 내 공로를 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와 멀어지는 것이며, 신앙과 삶 가운데 ‘나’라는 존재가 증명되면 증명될수록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재미난 것은 실제 신앙의 현장 속에서 이런 바리새인과 같은 내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그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사람들끼리 비교합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 서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지 마셔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로 없이 하나님 앞에 받아질 수 없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은혜 없인 하나님께 나아가지도, 하나님을 찾지도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 말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라라” 단순히 윤리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억지로라도 낮추면 높아진다는 게 아니라, 우리의 실상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낮출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그런 우리를 높여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무와 같은 우리를 유로 만드시는 겁니다. 이 사실 앞에 우리의 마땅한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부디 모든 것에 대하여 감사하시되, 오직 그분의 영광만을 위한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