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솟는다 열 사흘 둥근 달
지붕 낮은 집들이 강강수월래 손을 잡은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 처마 끝에
불러오는 배를 툭툭 치며
달이 굴러온다 팔월 열 사흘 둥근 달
골목 분식집 주인 내외가,
결혼 십 년째 아이 못 낳은 김씨 부부가,
자식들 대처로 다 내 보낸 쭈구렁 할머니가
탑돌이 절하는 이마 위로
달이 솟는다 쿵덕쿵덕 토끼가 방아 찧는 달
화왕산 자하곡 물소리가 씻어주는
마음 속 눈부신 기원들도 두리둥실 솟는다
솟구쳐서는 강강수월래 손을 잡고
아득아득 깊어 가는 시간 너머
못난 우리네 삶의 편린들 하나씩 닦아간다
그렇게 그렇게 애진 마음 비워내고
우수수 풀밭 지나가는 바람소리에서도
또닥또닥 염주 소리를 듣는
착한 우리네 이웃들의 환한 얼굴
어여쁘게도 추석 오는 하늘 점등하여
꺾인 허리도 일으키고, 캄캄세월 길도 밝히는
달이 굴러온다 술정리 동탑 위에
땀, 시경(詩經)
복숭아를 따는 아버지 굽은 등에
벌 한 마리 앉았다
몸에 복숭아 단내가 스몄기 때문이라는
아버지는 어느새 복숭아나무가 되어있다
덥다고 툴툴거린 내 말의 낙과들이
검은 풀 속에서 상해갈 때
왱왱, 아버지 땀이 쓴 시경을 읽는 벌 한 마리
기다려라, 요놈 제 일 끝낼 때까지
내 시선 붙잡으며 가만가만 흔들리는
아버지 얼굴에 소금기 허옇게 반짝거린다
팔십 평생 몸이 피운 꽃, 소금꽃
미물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꽃을 피운
농부의 땀은 곧 생명의 힘
바람 한 점 없는 칠월 건너가느라
숨찬 나무들에게는 꿀물로 스며들고
복숭아는 즐겁게 붉어지며 익어갔으리
햇볕 뜨거울수록 단내 물씬물씬
울울창창 나무도 신명나서
퍼져 앉은 내 어깨를 툭툭 친다
또 어디선가 벌들이 날아오고
복숭아밭은 시경 읽는 소리 가득하다
우포늪 물옥잠
저 보랏빛, 바람이 펼친 악보를 읽고 있다
수줍음 많던 우리 누이 여학생 때의
생각 골똘한 얼굴 같은 꽃, 오늘은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흥얼흥얼 콧노래하고 있다
이슬에 씻겨 멀리서도 눈부신 꽃잎
그 옆에서 냇버들 몇 그루 어깨 출렁, 논병아리는 쫑쫑쫑
쇠백로 한 무리도 덩달아 흥겹게 날아오른다
검푸른 물풀들 속에서
보랏빛은 짙어만 가고
늪 곳곳 신령한 빛의 제단인 듯 황홀한 가을이 밀려온다
잦은 장마에 시시때때 논 침수되고, 과수는 병들어
근심만 늘던 여름 잘 견뎌냈다고
그 제단에 바칠 가락 퉁겨보는 것인가, 저 보랏빛
첫 수확의 땀 쏟는 저기 저 대대 회룡 들판의
농부들 이마에까지 바람의 음계를 퉁겨보내고 있다
마음 속 어둠이며 대물림해온 서러운 것들까지
한껏 품어 보랏빛 꽃을 피운 우포늪 물옥잠
오늘만큼은 지치지도 말고 눈부시게 꽃잎 반짝이자고
빛의 제단에 온몸 바치는 여사제(女司祭) 같다
하늘도 청명, 손수건을 담그면 푸른 물 들 것 같은 지금은
천지사방 눈부신 제의의 시간
첫 수확의 두근거림 한껏 받든
물옥잠 꽃 속에는 황금사원에 가 닿는 빛의 통로가 있다
배한봉 약력
1962년 경남 함안 출생
1998년 『현대시』 등단
시집 『우포늪 왁새』, 『흑조(黑鳥)』
편역서 『우리말 부모은중경』
중학교 3학년 『우리말 우리글』교과서에 시 「아름다운 수작」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