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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계신 곳을 도량이라고 합니다. 도장道場이라 쓰고 도량이라 읽습니다.
그러면 도량은 어디인가? 다시 말해서 부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 부처님은 시방삼세에 항상 계십니다. '시방삼세十方三世 제망찰해帝網刹海 상주일체常住一切 불타야중佛陀耶衆' 이라고 예불합니다. 시방삼세가 부처님 도량인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동. 남. 서. 북, 사이 간방, 그리고 상방. 하방의 시방입니다. 시방삼세가 부처님이 항상 상주하는 도량입니다.
그것이 근본도량입니다. 부처님이 최초에 성불하신 보리도량, 즉 깨달음을 얻으신 보리菩提도량, 설법하신 설법說法도량, 공덕으로 이룩하신 극락極樂도량, 늘 만족을 얻는 도솔兜率도량 등이 다 불도량입니다. 극락세계에 가는 것은 왕생往生이라 하고, 도솔천에 가는 것은 상생上生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대승불교이기 때문에 대승경전, 특히 『금강경』.『화엄경』.『법화경』의 세 경전을 중요시합니다. 그런데 『금강경』을 설법한 도량에는 보살 이름이 없습니다. 『금강경』을 처음 시작할 때 보면 수보리와 1,200인의 대비구 대중이 나오고, 문수. 보현. 관음 등의 보살 이름은 없습니다. 보살을 위한 설법이지만 보살 청중이 없습니다.
『금강경』을 설하시던 설법도량에는 보살이 없기 때문에 한국에서 사찰도량을 건설하는데는『금강경』이 표준이 안 됩니다. 『화엄경을』을 보면 화엄도량에는 처음에는 보살과 화엄성중만 있고, 십대제자 아라한이 없습니다. 「입법계품」에는 성문대중들이 보살들과 함께 기원정사에 있기는 하지만 부처님의 사자빈신삼매 경계를 전혀 보지 못하고 이해도 못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문수보살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 남쪽 인간계를 향하자 따라 일어나게 됩니다.
『법화경』은 영축도량 기사굴산에서 설법하셨습니다. 『법화경』「서품序品」에 보면 참가한 청중이 다 나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의 주불이시고, 문수. 보현. 미륵. 관음 다 나옵니다. 그리고 아라한의 이름과 천룡. 야차. 건달바. 아수라. 긴나라. 마후라가. 인. 비인 등 팔부신장이 다 나옵니다. 그래서 한국불교에서 도량을 세울 때는 『법화경』을 규범으로 삼습니다. 부처님을 모시고, 양쪽에 보살님 모시고, 그 다음에 아라한 모시고, 마지막에 신장님을 모시는 것이 법화규범입니다.
『금강경』을 규범으로하면 부처님과 수보리와 비구들만 있고,『화엄경』을 규범으로 하면 아라한은 없고 보살과 신장들만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국불교에는 법화가 도량의 기본이고 규범입니다. 그래서 삼존불을 모실 때도 『법화경』에 의해서 삼존불을 모시고, 옆에 나한. 보살. 신장을 모십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도상화 해서 모시는 게 후불탱화입니다.
후불탱화는 다 설법회상도說法會上圖, 즉 설법하는 모임의 그림입니다.
한국불교의 후불탱화는 전부 영산회상설법도靈山會上說法圖입니다. 영산회상에 보면 보살, 나한, 신장이 다 있습니다. 간혹 '화엄칠처구회도華嚴七處九會圖' 라고 일곱 곳에서 아홉 번 법회를 연 회상도가 있는데, 그것은 몇 군데밖에 없습니다. 그 외에는 영산회상도입니다.
그리고 밖에는 쌍탑을 주로 모시는데, 석가탑과 다보탑도 『법화경』식입니다.
『법화경』「견보탑품見寶塔品」에 다보탑. 석가탑 이야기가 나옵니다.
쌍탑을 모시는 것이『법화경』규범입니다. 이것이 한국불교 도량 건립의 규범입니다.
그러면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하는 방법은 어떻게 하느냐? 예경禮敬은 전부 『화엄경』에 의해서 합니다. 건립규범은 『법화경』이고, 예경 의례는 『화엄경』에 의거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영산회상이나 기원정사만 도량이 아니고, 시방삼세 제망찰해 일체 법계가 도량입니다. 이렇게 '법계法界가 곧 불도량佛道場이고, 불도량이 곧 법계' 라는 것이 화엄도량입니다. 형상으로 사물법상을 세울 때는『법화경』규범으로 세우지만, 예경을 할 때는 전부 화엄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불교의 의식은 전부 화엄의식입니다.
그래서 불상을 모실 때도 모시는 의식은 화엄으로 봉안합니다. 불상을 봉안하는 것을 점안點眼의식이라고 합니다. 삼존불을 모실 때에도 점안의식은 전부 십불十佛, 십안十眼의 화엄으로 하는 것입니다.『금강경』은 오안五眼만 말했는데, 『화엄경』에는 십안, 무진안無盡眼으로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점안의식에 십안, 천안, 무진안으로 합니다.
그러니까 삼존불을 모셨다 하더라도 그 내용을 보면 시방법계에 항상 계시는 부처님으로 봉안합니다. 이것이 한국불교의 예경의식입니다.
그러면 법계도량의 화엄 십불은 어떤 부처님이신가?
① 성정각불成正覺佛은 정각을 이룬 부처님입니다.
② 원불願佛은 일체 중생을 다 성불시키려는 부처님입니다.
③ 업보불業報佛은 일체 업보를 다 드러내는 부처님입니다.
부처님 상호는『법화경』에서는 32상相 80종호種好를 보이고 있습니다. 32상 80종호는 요즘과는 안 맞는 부분이 있습니다. 『법화경』식으로 하면 여자가 성불하려면 먼저 남자가 되는 통과의례를 거쳐야 합니다. 『법화경』에 "홀연지간忽然之間 변성남자變成男子" 라고 했습니다. 여자의 몸 그대로는 성불할 수 없고, 홀연지간에 남자로 변성합니다.
이것이 변성성불變成成佛입니다. 32상에는 '마음장상馬陰藏相'이라는 게 있습니다.
부처님은 남자 모습이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고 말처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것이 음장陰臟입니다. 마음장상은 남자의 모습입니다. 여자가 성불하려면 마음장상이 없으니까 남자의 몸으로 바꾸어서 성불한다고 설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화엄경』은 그렇지 않습니다.『화엄경』에서는 부처님이 일체 중생의 몸으로 다 나타납니다. 모든 중생이 업業을 지어서 업을 받는 업보業報의 몸으로 다 나타나는 게 화엄의 부처님입니다. 32상 같은 것은 전혀 상관없는 세계가 있습니다.
화엄신앙을 해야 남녀가 평등합니다.
④ 주지불住持佛은 머무는 것이 다 부처님입니다.
⑤ 열반불涅槃佛은 열반에 드는 것이 다 부처님입니다.
⑥ 법계불法界佛은 법계가 그대로 부처님입니다.
⑦ 심불心佛은 마음이 그대로 부처님입니다.
⑧ 삼매불三昧佛은 삼매가 그대로 부처님입니다.
⑨ 본성불本性佛은 본성이 그대로 부처님입니다.
⑩ 수락불隨樂佛은 중생이 좋아하는 것을 따라서 모두 나타나는 것이 다 부처님입니다.
이처럼 화엄불은 법계가 도량이고, 도량이 바로 부처입니다. 마음과 경계, 심성과 국토가 다른 게 아닙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인식과 존재인데, 인식 따로 있고 존재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찻잔이라는 존재가 있고, 이것을 알아보는 것은 나의 인식입니다. 그러면 내 감각이 없는데 찻잔이 존재하느냐? 또 찻잔이 존재해서 내 감각이 있는 것이냐? 그런데 부처님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존재와 인식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도량이 바로 부처이고 부처가 도량입니다. 법계가 바로 부처이고 부처가 바로 법계입니다. 법계가 부처님의 깨달음인 정각正覺이고, 정각이 법계입니다. 이것이 정각도량입니다. 온 우주가 부처님의 정각도량이고 정각이 우주입니다. 이것이 해인도량입니다.
해인海印, 즉 바닷속에 있는 모든 영상 그림자 그대로 정각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정각세계에 중생세간衆生世間. 국토세간國土世間.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전부 정각 속에 나타나는 세계입니다. '정각이 법계이고, 법계가 정각이다.' 가 핵심입니다. 깨달음을 얻으면 내가 바로 법계가 됩니다.그래서 중생이라는 것은 나와 이 세계를 분리하는 분별이고, 정각은 원융해서 둘이 없는 것입니다. 다 도량불인데 중생이 미혹해서 이것을 나눕니다. 삶과 죽음이 있고, 인식과 존재가 있고, 깨달음과 대상이 있습니다. 깨달으면 나도 없고 나 아닌 것도 없어져서 원융하게 됩니다.깨닫기 전에는 둘이 있어서 분별합니다. 분별이 번뇌입니다.
번뇌는 항상 분별하는데, 깨달으면 둘이 없어집니다. 그러면 하나냐? 하나라고 하면 벌써 하나 아닌 게 있으니 하나도 아닙니다. 원융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융무이상圓融無二相으로 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무를 계속 비비면 불이 나고, 불이 나면 나무가 탑니다.
그러면 둘이 없어지는데, 그러면 하나가 있느냐? 하나도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원융무이입니다. 이런 것이 정각도량입니다.
통도사 극락암에 극락영지라는 연못이 있습니다. 그 연못에 영축산 산그림자가 비칩니다.
경봉 큰스님이 그곳을 지나가시다가 "저 연못 속에 산이 비친다." 는 말씀을 가끔 하셨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그냥 지나가시지, 왜 저런 말을 하시나?" 했는데, 거기에는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지수池水, 연못물에 영축산 그림자가 비친다는 말입니다.
그림자를 볼 때 물은 안 보입니다. 그런데 연못의 물을 빼 버리면 그림자는 없습니다.
그림자를 볼 때는 산 모양만 뚜렷하게 보이는데, 사실은 그게 산이 아니고 전부 물인 것입니다. 알고 보면 그 그림자 하나 하나가 물입니다. 물을 떠나서 영상은 하나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화엄경』에서 중생. 국토. 불보살이 다 본각대지本覺大智, 즉 본래 깨달은 큰 지혜의 물속에 비친 그림자입니다. 삼종세간이 전부 지혜의 그림자인 것입니다.
본각대해本覺大海에 비친 그림자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지영智影이라고 합니다.일체 존재, 일체 법계가 지수智水에 비친 지영입니다.저기 저 허공도 나의 본각대지에 비쳐진 그림자입니다. 그러니까 본각대지가 없으면 허공도 없습니다. 우리 몸도 지혜의 물에 비친 그림자[身爲智影]이고, 허공도 지혜의 물에 비친 그림자이고, 국토도 지혜의 그림자입니다. 이것을 해인삼매海印三昧라고 합니다.그런데 우리는 본각대지는 모르고 단지 그림자만 봅니다. 물속에 비친 그림자만 볼 줄 알고 물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물에 비친 그림자에 속아서 그림자만 좇아 다닙니다.이 그림자에 속아서 지혜의 물을 잃어버리는 것이 중생입니다. 그릇을 보고 그릇인 줄 알지만 그릇이라고 느끼는 지혜를 잊어버린 것입니다.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 본래 지혜에 가느냐? 반야바라밀 수행으로 들어갑니다.본래 지혜에 못 들어가게 하는 장애를 극복하려면 반야바라밀 수행이 필요합니다.반야바라밀 수행이란 첫째로 관조觀照, 즉 관찰을 합니다. 일체 경계, 모든 사물, 산하대지, 우주만물 등을, '이것은 무엇인가?' 하고 경계를 관찰합니다. 경계를 관찰하면 색즉시공色卽是空을 알게 되는데, 이것이 관조반야觀照般若입니다. 대상을 자세히 관찰하면 그것이 공한 줄을 알게 되는데, 이것이 택법관공擇法觀空입니다. 반야지혜를 자꾸 닦으면 일체가 공함을 알게 되는데, 이것이 관공반야觀空般若입니다.
이렇게 공을 보면 경계를 탐하거나 구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경계가 공한 줄을 모르니까 경계를 탐하고 경계를 구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평생 구하는 것이 사람, 재산, 명예, 권력입니다. 그런데 그 경계가 다 불생불멸이고 자성이 없고 공한 줄 알게 되면, 그 경계를 구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경계가 공함을 보게 되면 경계를 좇아가던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예를 들면, 도둑이 물건을 훔치러 어느 집 방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방 안에 아무것도 없고 완전히 빈 방인 경우, 이것을 도둑이 빈 방에 들어갔다고 적입공실賊入空室이라고 합니다.
아무것도 없으니까 도심소멸盜心消滅이라, 훔칠 마음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경계도 공하고 마음도 공한 것이 원명圓明입니다. 또 경계도 공하고 마음도 공한 상태를 적광寂光이라고 합니다. 이 원명적광의 세계가 정각입니다. 분별 번뇌는 사라지고, 원명적광의 정각이 드러나는 것이 시성정각始成正覺입니다. 그 세계가 법계도량입니다.
부처님의 정각도량은 적광원명입니다. 경계를 좇아가고 경계를 분별하는 그 번뇌가 고요해진 상태에서 드러나는 지혜가 원명지혜입니다. 원명지혜로 가기 전에 관조지혜가 있습니다.
관조에서 원명으로 가는 것이 반야바라밀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관조가 다 끝나서 그냥 무가애 일체지가 형성된 지혜의 세계입니다. 이것이 불도량입니다.
불도량이 되면 모든 것이 해인도량입니다. 모든 것이 정각지혜에 비추어진 그림자입니다.
정각을 떠나서는 그림자가 없습니다. 잘 닦으면 반야지혜를 점점 끌어냅니다.
중생은 자성청정심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을 끌어내지 못했을 뿐입니다. 이 끌어내는 수행을 발심수행이라고 합니다. 자성청정심을 그대로 가지고만 있으면 범부이고, 이것을 부분부분 자꾸 끌어내면 보살이라고 합니다. 하나하나 닦아가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보살수행은 보시와 지계로부터 나옵니다. 물질을 보시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원력을 세워서 하면 지혜가 됩니다. 퇴비는 다른 아무 데도 못 쓰는 것이지만 과일 나무에 주면 좋은 과일이 되는 것처럼, 내가 재물을 가지고 있다가 버리면 그만이지만 그것을 좋은 공덕으로 쓰면 지혜가 됩니다. 이것을 보시라고 합니다. 계율은 나도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불자들은 나도 이롭고 다른 사람도 이롭게,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마음을 잘 써야 합니다.
어떤 할머니가 아들네에 갔다가 아들이 집안일을 하는 것을 보고 기분이 상해서 딸네로 가 버렸답니다. 딸네 가니까 사위가 청소하고 부엌일하는 것을 보고 기분이 좋아지더랍니다.
심보를 그렇게 쓰면 안 됩니다. 사위가 딸을 도와 집안일 하는 것은 기분이 좋고, 아들이 며느리를 돕는 것은 기분이 나쁘다면 장애 때문에 성불하기 어렵습니다.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마음을 쓰고, 물질을 공덕으로 잘 써야 성불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자성청정심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런 좋은 마음을 자꾸 끌어내어 닦아 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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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정토 극락도사 아미타불()()()

첫댓글 우리는 자성청정심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런 좋은 마음을 자꾸 끌어내어 닦아 가는 것이 수행입니다....감사합니다 무량공덕이 되소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극락도사 아미타여래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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