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중동이야기] 고야마 시게키
셈족의 민족 이동과 셈어
셈족은 방주로 유명한 노아의 아들 셈에서 유래한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노아에게는 세 아들 셈, 함, 야벳이 있었다. 창세기에는 셈의 후예가 서아시아 일대에, 함과 야벳의 후예는 각각 아프리카 대륙과 에게 해 도서 지역 등지에 흩어저 정착했다고 기록돼 있다.
셈어란 셈의 후예인, 서아시아 일대에 거주하는 여러 민족의 언어를 총칭한다. 이 지역의 대다수 언어는 목 입구나 구강 상부에서 소리가 나는 후두음과 구개음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독일의 역사학자 A. L. 폰 슈레처는 1781년 이들 언어를 ‘셈어’라고 정의했다. 이후 셈어나 셈어족이라는 언어가 정착됐으나 여기서는 단순히 셈어인 또는 셈족이라고 하겠다.
인류 최초의 문명인 남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를 멸망시킨 아카드와 아모리인 바빌로니아, 북메소포타미아의 아시리아, 그리고 신바빌로니아의 칼데아 등은 모두 셈족이다. 이들 셈어는 크게 나누면 아카드어로 대표되는 동북 셈어, 가나안어와 아람어로 대표되는 북서셈어, 현대 및 고대 아라비아어인 남셈어로 나뉜다. 이 중 북서셈어의 가나안어에는 페니키아어와 우가리트어, 히브리어가 있다. 또 아람어에는 아모리어와 고대 시리아어가 포함된다.
지금까지 히브리어와 아라비아어를 제외한 셈어의 대부분은 사어가 됐다. 이미 지구상에서 사라진 몇몇 언어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페니키아어는 기원전 3000년부터 기원전 8세기 사이에 걸쳐 레바논을 중심으로 번창한 도시국가 민족의 언어며, 우가리트어는 기원전 15~13세기에 번성한 북시리아 해안 도시국가의 언어다. 이 두 언어는 알파벳 발명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1975년 북시리아의 알레포에서 남서쪽으로 약 60킬로미터 떨어진 텔마르디흐에서, 에블라 왕국에서 사용한 에블라어가 쓰여진 쐐기 모양의 점토판이 대량으로 발굴됐다. 이는 이미 기원전 2400년경 아카드 왕국보다 먼저 셈어를 주언어로 사용했던 왕국이 이곳에 존재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지역의 역사는 훗날 다시 쓰일 가능성이 높다.
또 아람어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우르 제3왕조를 무너뜨리고 바빌론 제국을 세웠으며, 아시리아를 멸망시키고 칼데아 왕조를 일으켰던 아모리인들이 아람어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구약성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아시리아가 유대 왕국인 예루살렘을 공격했을 때 유대 왕국의 사제들이 아시리아의 지휘관을 향해 “아람어로 말씀해주시오. 우리는 아람어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열왕기하 18:26)라고 했다. 이는 신아시리아 제국 시대(기원전 1000년경~612년)에 아람어가 이미 이 지역의 지배적인 언어였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아람어는 아모리인의 나라가 붕괴한 뒤에도 서아시아 일대의 국제어로 사용됐으며,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이를 공용어로까지 이용했다. 이런 상황은 아라비아어가 확산된 7세기까지 이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국어도 아람어며, 예수가 이 언어로 포교 활동을 한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아람어와 <구약성서>의 연관성은 따로 언급할 만하다. 아브라함이 신의 부르심을 받은 하란도 아람인의 영토였으며,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족장으로 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이들 부족의 언어도 아람어였다.
<구약성서> ‘신명기’의 신앙고백에 이런 말이 있다.
“제 선조는 떠돌며 사는 아람인이었습니다. 그는 얼마 안 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이집트로 내려가 거기에 몸 붙여 살았습니다”(신명기 26:5).
여기서 선조란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을 말한다. 그들이 아람인이었다는 사실을 이만큼 확실히 밝힌 대목은 없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그리고 그의 아들 야곱도 모두 하란의 아브라함과 형제였던 나홀의 가계로부터 아내를 맞았다. <구약성서>는 나홀의 딸로 ‘아람인 브두엘’, 브두엘의 아들 ‘아람인 라반’ 이라는 식으로 일일이 그들이 아람인이었음을 명시했다. 여기에는 멸망해가는 아람인에 대한 향수와 긍지가 담겨 있다.
그런데 이들 셈족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통상 아라비아 반도 남서부의 한 지역이 셈족을 메소포타미아나 시리아, 팔레스타인에 걸친 ‘비옥한 초승달 지대’(Fertile Crescent)로 퍼져나가게 한 원천지로 알려져 있다.
통설은 다음과 같다. 중동의 민족 중 셈족은 아라비아 반도의 남서부라는 폐쇄된 지역에 오랜 세월 모여 살며 독특한 언어 세계를 유지해왔는데, 이들이 어느 한 시기부터 이 지역에서 북부 또는 북서 지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아라비아 반도 남서부는 과거 ‘행복의 아라비아’라고 불렸는데,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불모지가 아니었다. 이곳은 오늘날의 예멘 남서부다. 그렇다면 왜 이런 아라비아 반도의 작은 지역이 민족 이동의 진원지가 된 것일까. 고대의 농업이나 방목은 결코 방대한 평야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당시 생산력으로는 넓은 평야에서 생활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다. 오히려 어느 정도 산악분지가 섞여 있는 지역이 거주지로 적합했다. 하지만 산악분지의 생산성은 당연히 한계가 있었으며, 먹여 살릴 수 있는 인구 역시 제한됐다. 따라서 인구가 일정 한도를 넘으면서 자연스럽게 인구 이동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셈족의 민족 이동은 그저 그런 규모가 아니었다. 이들은 기원전 3500년경부터 주기적으로 북쪽 지방으로 인구를 이동시켰다. 그렇다면 ‘폐쇄된 지역’에서 인구가 늘어난 결과 이 같은 대규모 인구 이동이 이뤄진 것일까.
답은 당연히 ‘아니오’일 것이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인가. 거꾸로 그곳은 ‘폐쇄된 지역’이 아닌 ‘열린 사거리’가 아니었을까. 즉 아라비아 반도의 이 지대는 역사의 어느 시기, 특별한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 이동의 집결지이자 출발지로 추정할 수 있다. 사실 최근 학설은 셈어의 기원이 북서아프리카에 있다고 믿고 있다.
이에 따르면 셈족과 함족은 북서아프리카를 출발점으로, 함족은 북아프리카의 넓은 지역을 점거했고 오랜 기간 다른 문명과 접촉하지 않은 채 그 지역에 머물렀다. 반면 셈족은 동쪽으로 이동해 큰 그룹이 이집트에 이주했지만, 그 일부는 기원전 4000년경 아라비아 반도를 경유해 서남아시아에 도달했다고 한다. 셈족의 기원을 아프리카로 보느냐 마느냐는 나중에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메소포타미아에 민족 이동의 거센 파도가 밀려든 것만은 확실하다.
학자들은 지금까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문명인 우르 제3왕조가 붕괴한 원인으로 유목민의 침입 또는 이동을 꼽는다. 그들은 셈족으로, 아모리인으로 알려져 있다. 아모리란 서쪽이란 뜻으로, 사람들은 그들을 ‘서방인’이라고 불렀다. 셈족의 첫 번째 이동은 기원전 3000년 말부터 기원전 2000년 초 무렵으로, 데라와 그의 아들 아브라함 족장들의 이동과 이 셈족의 침입이 겹치는 부분이 있다. 이 사실은 1933년 처음 발견돼 1975년까지 발굴된 유프라테스 호반의 고대 도시 마리에서 나온 출토품과도 일치한다. 이 셈족의 도시 마리에는 기원전 4000년부터 사람들이 정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특히 기원전 19~18세기의 바빌론 왕조 시대의 기록이 주목받고 있다. 이곳에서 발굴된 어마어마한 양의 쐐기 모양 점토판(마리 문서)에 기록된 인명과 도시명, 사회적 습관이나 풍습은 성서에 묘사된 족장시대의 그것과 매우 유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누리던 이 마리 왕국(기원전 2000-기원전 1700)도 기원전 1697년 바빌론의 함무라비 대왕에 의해 멸망돼 이후 잊혀진 땅으로 변해갔다.
셈족의 두 번째 대이동은 기원전 14-13세기에 걸쳐 이루어진다. <구약성서>는 동요르단 국가들을 형성한 에돔인, 모압인, 압몬인, 더 나아가서 고대 이스라엘인 등이 팔레스타인의 비옥한 땅에 침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