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 2권. 필사본.
규장각에 〈경국육전〉이란 책명으로 별도로 전하고,
같은 내용이 〈삼봉집〉에 수록되어 있다.
유가의 이상제도인 〈주례〉의 체제를 본떠 6전으로 구성했다.
그러나 조문은 전하지 않고,
6전마다 총서(摠序)와 항목별 개요라고 할 수 있는 소서(小序)만 남아 있다.
6전의 명칭은
원나라 법전인 〈경세대전 經世大典〉을 따랐으나,
내용적인 연관성은 크지 않다.
정도전은
조준(趙浚)과 함께
조선왕조의 개국과 초기 개혁정책을 주도한 인물로
이 책을 찬술하여 왕에게 바쳤다.
서문의 내용으로 미루어보면
고려말 개혁파 사류(士類)의 집권 이후 발표한 수교를 모으고,
여기에 자신이 수정하거나,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여 편찬한 것 같다.
그러나 공식 법전으로 채택되지는 못하고,
3년 후 조준이 책임자로 편찬한 〈경제육전〉이 공식법전이 되었다.
첫부분은
총론격인 정보위(定寶位)·국호(國號)·정국본(定國本)·세계(世系)·교서(敎書)이다.
국호에서는 조선이란 국호는 기자조선(箕子朝鮮)에서 기원한 것으로
곧 조선은 동주(東周)임을 강조한다.
이는 그들이 〈주례〉의 체제를 개혁론의 이상으로 내세운 것과 관계된다.
세계는 봉작(封爵)의 명호를 적은 것이다.
총론 다음이 본론인데,
치전(治典)은
이전(吏典)에 해당하는 것으로
관제(官制)·재상연표(宰相年表)·입관(入官)·보리(補吏)·군관(軍官)·전곡(錢穀)·
봉작승습(封爵承襲)이다.
여기서는 특히 관료제도와 인사제도의 정비, 재정관서와 군사제도의 일원화,
재상의 역할 등에 중점을 두었다.
입관조에서는
조선 초기 관리선발제도의 원형이 된 7과제도를 설명하며,
군관조에서는
부병제를 주장한다.
부전(賦典)은 호전에 해당한다.
주군(州郡)·판적(版籍)·경리(經理)·농상(農桑)·부세(賦稅)·조운(漕運)·염법(鹽法)·
산장수량(山場水梁) 이외에 금·은 등 광업, 공상세(工商稅)·선세(船稅)·상공(上供)·
군자(軍資)·녹봉(祿俸)·의창(義倉)·혜민전약국(惠民典藥局)·견면(閑)이다.
경리조와 부세조에서는
고려말의 토지제도와 수취체제 붕괴에 대한 정도전의 비판과
고려말 균전·한전(限田) 논의가 발생한 배경,
그리고 토지개혁이 그들의 본래 구상과 달리 철저하지 못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균전제와 부병제를 기초로 한 국가체제를 구상했는데,
〈고려사〉의 전제개혁론 상소와 함께
고려말의 사회·경제적 상황과 개혁파 사류의 사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의창에서는
국가가 무이자로 의창을 운영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 역시 이후의 조치와 비교된다.
그밖의 항목도
조선 초기의 실제 정책들과 비교할 때 지침이 되는 중요한 언급이 많다.
예전은
항목이 가장 많다.
크게는 조회(朝會)·종묘(宗廟)·사직(社稷) 등과 문묘(文廟)·제신사전(諸神祀田) 등 제사관계,
악(樂)·역(曆), 교육과 과거제도를 논한 경연(經筵)·학교(學校)·공거(貢擧), 향사례(鄕射禮)·
관례(冠禮)·상제(喪制)·가묘(家廟) 등 예제(禮制) 관련 조문이다.
사전(私田) 정비, 주자가례 보급 등 조선 초기의 중요한 국가정책에 관한 서술이 많다.
학교조에서는 정도전의 과거제도 시행방안을 잘 보여준다.
정전(政典)은 병전에 해당한다.
항목은 군제(軍制)·군기(軍器)·교습(敎習)·정점(整點)·상벌(賞罰)·숙위(宿衛)·둔수(屯戍)·
공역(工役)·존휼(存恤)·마정(馬政)·둔전(屯田)·역전(驛傳)·추라(騶邏)·전렵(獵)이다.
조선 건국 때의 군사제도 정비는 정도전이 주도했는데,
군제에서 그는 주(周)의 제도를 이상으로 당의 부병제와 한나라의 남북군제를 참조하여
군제를 정비했음을 밝히고 있다.
형전에 해당하는 헌전(憲典)에서는
〈대명률〉을 사용할 것을 강조했다.
이에 따라 여기서는 〈대명률〉의 항목명을 채용하고 있다.
명례(名例)·직제(職制)·공식(公式)·호역(戶役)·의제(儀制)·관진(關津)·우역(郵驛) 등이다.
항목마다 고려말 제도운영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형법사용을 말하면서도 본질적인 대안은 근본적인 문제에 있다는 취지를 고수하고 있다.
여기서도 항목마다 고려말의 제도에 대한 저자의 비판과 문제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도적조에서도
민이 항심(恒心)이 없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토지가 없기 때문이라며
민생안정이 교화의 근본임을 강조하고 있다.
공전은
궁원·창고·병기·성곽·노부(鹵簿) 등과 공장(工匠) 제도에 관한 글이다.
마지막에 정총(鄭摠)이 쓴 후서가 있다.
내용의 전모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조선 초기 국가정책의 방향과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자료이다.
經濟六典(경제육전)
지금은 전하지 않으나, 실록에 부분적으로 인용되어 일부 내용은 파악할 수 있다.
〈경제육전〉은 모두 4번 간행되었다.
조선 정부는 건국 후 바로 법전 편찬에 착수하여
의정부에 검상조례사(檢詳條例司)를 설치하여 법률 편찬 자료를 수집하게 했다.
이 작업은 조준(趙浚)이 주도하였으며,
1397년(태조 6)에 〈경제육전〉으로 간행했다.
이두를 사용했으므로 〈이두육전〉이라고도 한다.
〈경제육전〉 발행 다음 해부터 1407년(태종 7)까지 새로 추가한 법령을
하륜(河崙)·이직(李稷)이 찬집하고,
이두를 모두 한문으로 바꿔
1415(태종 15)에 〈경제육전원집상절〉과 〈경제육전속집상절〉이란 2책으로 간행했다.
이후로 조준의 법전을 〈원전〉 혹은 〈원육전〉,
이후에 편찬한 것을 〈속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속전〉을 편찬하면서 〈원전〉의 조문과 모순이 있을 경우는
〈원전〉 조문은 손대지 않고 그 밑에 주를 달아 표시했다.
이 방식은 이후 법전 편찬의 원칙이 되었다.
조선의 법전 편찬 기준은 여러 수교(受敎)·조례 중에서
만세불변의 법이 되는 것만 추록하여 법전에 수록하고,
한번 법전에 수록한 조문은 조종성헌(祖宗成憲)이므로 후세 사람이 고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가 계속 변함에 따라 새로운 법을 편찬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이같은 편법을 쓰게 된 것이다.
그러나 〈경제육전〉은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았으며,
당시에 준수되지 않는 것도 있었다.
1422년(세종 4)부터 육전수찬색(六典修撰色)을 설치,
개찬사업을 벌여 1426년에 완성했다.
이를 〈신속육전〉이라고 불러 구분했다.
이때 만세의 법과 일시 준행하는 법을 구분하여
후자는 법전에 수록하지 않고 별도로 모아 〈등록〉에 수록했다.
이같은 구분법 역시 그뒤 법전 편찬에서 원칙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빠진 것이 많다는 논의가 계속되어 수정작업이 계속 진행되었다.
2년 후에 이직이 〈육전〉 5권, 〈등록〉 2권을 찬진했고,
하연(河演)이 교정하여 1429년에 인쇄까지 마쳤다.
그러나 〈육전〉을 둘러싼 논의는 더욱 가열되어
다음해에는 경연에서 〈육전〉을 강연하게 했으며, 집현전에서도 검토하게 했다.
최종적으로 1433년(세종 15)에
황희(黃喜)가
〈정전 正典〉 6권, 〈등록〉 6권을 완성·반포했다.
이를 〈신찬경제속육전〉이라고 한다.
〈경제육전〉은 1461년(세조 7) 최초의 〈경국대전〉인 〈신사년대전〉이 출현하기까지
조선의 공식법전으로 사용되었으며, 1435년(세종 17)부터는
수령취재의 시험과목이 되었다.
經國大典(경국대전)
6권 4책. 인본.
조선왕조 건국 전후부터 1484년(성종 15)에 이르기까지
약 100년간의 왕명·교지(敎旨)·조례(條例) 중 영구히 준수할 것을 모아 엮은 법전이다.
〈경국대전〉은
6조의 직능에 맞추어 이·호·예·병·형·공전의 6전으로 구성하였다.
조선의 행정사무는
모두 6조에 집중되었으며,
6조는 필요한 규정을 국왕에게 비준을 받아
수교(受敎)나 수판(受判)으로 법조문화했다.
이중 영구히 시행해야 할 사항들을 편집하여
6개의 전(典)으로 묶은 것이다.
이전(吏典)은
총 29항목으로
국가의 통치기구와 조직체제, 동반의 경·외관직, 아전·토관의 직제와
인사고과제도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밖에 노인직·추증·급가·한품서용 등 관료제 운영규정이 있다.
호전(戶典)은
30항목으로
재정·토지·조세·녹봉·공물·양전·부역·토지매매·상속에 관한 규정들을 수록했다.
예전(禮典)은
61항목으로
교육·문과와 잡과의 시험규정·외교·의장·오복(五服)·의례에 관한 규정이 주인데,
그밖에 각종 공문서양식과 음악·인장·구호사업 규정과 불교관계 규정을 수록했다.
병전(兵典)은
51개 항목인데
경외의 군사기구와 무반직, 무과와 취재 규정, 군사기구 검열과 번상규정,
면역·급보·성곽·역마·봉수(烽燧) 규정을 수록했다.
이 밖에
비상시의 소집과 행동지침,
순찰규정을 상당히 상세하게 수록해두었다.
형전(刑典)은
28개 항목으로
크게 형법제와 노비규정으로 나누어진다.
형법제는 형벌과 금령, 각종 형구와 형집행 방법, 재판규정을 수록했다.
그러나 이것이 형법의 전부는 아니다.
형전 첫머리 용률(用律)조에서 〈대명률〉을 사용한다고 규정했는데,
각종 형법은 〈대명률〉을 따르고,
형전에는 〈대명률〉과 다르거나 〈대명률〉에는 없는 법만 수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경국대전〉의 형법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명률〉을 함께 참조해야 한다.
노비규정은
노비상속, 혼인, 노비신공과 추쇄, 노비에게 가하는 형벌,
소송규정과 대궐의 근수(根隨), 차비노(差備奴)의 소속과 수에 관한 규정을 함께 실었다.
그리고 형전 부록으로
국초 이래 노비소송에 관한 판례를 편집한 〈노비결송정한 奴婢決訟定限〉을 달아두었다.
공전(工典)은
14항목인데,
도로·다리·관사·궁궐·원우(院宇)에 대한 관리, 보수 규정과 과수(果樹)·산림보호에 관한 규정,
각종 광물산지의 등록과 야장(冶場) 조항, 도량형 규정을 싣고,
중앙과 지방의 장공인의 직종과 인원을 소속처별로 수록해두었다.
조선시대 문물제도사 연구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기본자료이다.
- 브리태니커 韓嬉淑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