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
부산 시조 시인이 나들이에 나섰다. 볍씨와 여류시조인, 시조 문인회 회원이다. 몇 해 못 만나다가 같이 가게 됐다. 준비를 많이 해서 가고 오는 내내 먹거리를 나눠줘 식후경을 하게 했다. 옆에는 금보가 자리해서 하루가 즐거웠다. 가끔 만났지만 이럴 때 더 반가워서 온갖 얘기를 마냥 하며 갔다.
봄꽃이 지고 조팝나무와 이팝나무꽃이 피더니 어언 사라졌다. 기슭에 찔레꽃이 화사하더니 그것도 시들어가는 오월 끝자락이다. 봄 가뭄이 심해 타들어 가는가 했는데 웬걸 초목이 싱그럽게 흐드러졌다. 듬성듬성 밤꽃이 희뿌옇게 보이고 물 댄 모내기 논바닥은 번쩍거린다. 섬진강을 넘어 보성을 지나는데 웬 산이 그리 많은가 가는 곳마다 산과 구렁이다.
휑하니 뚫려 사통오달이다. 고속도로가 한없이 시원하다. 며칠씩 가던 게 단번에 전국 어디든 가지니 이런 세상이 왔나. 일찍 죽으면 안 돼--. 하기야 지금도 많이 살았다. 버스에 탄 사람 대부분이 칠십 대이다. 예전 같으면 가고 없을 사람이다. 보니 얼굴은 화색이 돌고 피둥피둥하니 모두 백수를 넘기려나.
전라남도 서쪽 바다 쪽으로 장성과 함평 사이 영광군으로 달려간다. 거기 무엇 볼 것이 있겠나 했는데 성지가 여럿이다. 먼저 ‘마라난타’에 들렀다. 백제 때 법성포로 중국을 통해 인도 간다라 양식의 불교가 유입된 곳이다. 조기가 많이 나는가 좌우 집마다 식당이고 판매점이다. 굴비란 간판이 즐비하다.
점심에 여럿 올라와서 어느 게 참조기냐 물으니 작은 것이란다. 큰 것은 보리 굴비라니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보구치, 부세, 수조기, 흑조기 등 종류가 많은가 보다. 서해에서 골고루 날 텐데 여기만 흔할까. 다른 데는 조기라 하는데 여기는 굴비라 한다. 비굴하지 않다는 뜻이란다.
내산서원 강항 거처지와 조운 시조 시인의 생가를 둘러봤다. 같은 강가이면서 몰랐던 사람이다. 조선 초의 강희맹 후손이라는데 임란 때 일본에 끌려가서 고초를 겪었다. 간양록을 지어 내용을 세상에 알리고 일본 무사들을 가르쳤던 선비였다. 오래 시조를 쓰면서도 처음 들어보는 이다. 시가 섬세하고 아름다웠는데 월북 작가여서 알려지지 않았으며 낡은 집이 폐허로 숲속에 주저앉아 있었다.
영광성당을 찾아갔다. 조선 말 신유박해 당시 순교한 신자를 추모하는 천주교 순교기념관이다. 한강 양화진의 야소교(耶蘇敎) 병인박해와 함께 전국으로 번질 때 이곳에서도 벌어진 참상이다. 믿음을 버리면 살고, 위하면 위험을 맞이해야 했다. 전국 관청마다 서학 전도자 외국인과 신도들의 낭패가 이어졌다.
남은 가족이 칼 가는 망나니 집을 찾아가 곡식을 바치며 우리 부모를 단칼에 고통 없도록 해 달라며 부탁이다. 번쩍이는 큰 칼에 물을 뿜고 칼춤을 출 때 긴장한 신도의 뻣뻣한 목을 내리쳤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도모지(塗貌紙)를 발라 숨을 서서히 멈추게도 했다. 흥선대원군이 천주교도를 처형할 때 사용했다.
윤리에 어긋난 가족을 사형(私刑)할 때 눈물을 머금고 몰래 처리했던 풍습을 이용한 것이다. 그런 일이 있었는가 예전 양반 세도가에선 그래도 됐는가 보다. 못난 가족을 그리하면 평생 가슴에 응어리가 질 텐데도 했을까. 사람이 모질고 무섭다. 선한 척하면서도 악할 땐 여지없으니 말이다.
마을 한 복판에 통나무 기둥을 세우고 신도를 꼼짝을 못하게 묶어놓는다. 물에 적신 창호지를 얼굴에 여러 겹 붙여 말 못하고 듣지 못하며 보지 못한 채 숨이 끊어지게 했다. 젖은 문종이를 바르는 데서 이름한 말이다. 알 수 없다는 말 앞에 쓰이는 도무지로 바뀐 말이다. 참 무서운 단어이다.
여긴 성당 안 그림이 말해 준다. 교도를 묶어 산속으로 끌고 가서 한 사람씩 눕히고 돌을 들어 내리쳤다. 역사에서 박해가 있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렇게 처참했던가 서늘함을 느낀다. 순교자들의 도움으로 종교의 자유를 누리며 사는 지금이 참 행복하기만 하다. 안 믿겠다 했으면 살아나올 수 있었을 텐데 굳게 그 믿음을 갖고 난감함을 당한 선조들의 본보기이다. 변함없는 신앙심이 돋보인다.
순교자 이씨 오씨 김씨 유씨 네 분을 그리며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몇 해 전에 아내와 순천 손양원 목사 기념관과 증도 문준경 전도사 기념관을 다녀왔다. 좌익 당원과 인민군에 의해 총격당했다. 그래선가 기독교도가 가장 많다. 전국 평균이 20%인데 여긴 50이 넘는다. 순교하면서 부흥된 곳이다.
남쪽 순천에서 아들 형제가 나란히 좌익 학생들에게 종교인이란 이유로 사살됐다. 이어 아버지 손 목사도 순교했다. 인민군이 서해 신안군 수많은 섬을 다니면서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문 전도사를 갯벌에서 사살했다. 몸서리쳐지는 전쟁으로 세상이 엉망이다. 사람이 살 수 없는 가없는 천지다.
긴긴 오뉴월 해도 뉘엿뉘엿하다. 일정이 바빠 하나씩 빼도 집으로 갈 때는 밤 깊어서이다. 즐겁게 나서서 슬픔으로 가득해서 들어간다. 한양의 수많은 천주교도를 개 끌 듯 몰아다가 목을 쳐 한강에 밀어 넣어 핏물이 흥건했다니 이게 어디 할 짓인가. 전도하러 왔던 신부들의 모습이 남달라 숨어있을 수도 없었다.
구교와 신교의 수난으로 1만 명이 넘게 희생되었다. 그러고도 벌 안 받고 이리 잘 사는 게 신기하다. 아니 6.25의 형벌을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알게 모르게 죄를 지어 쌓여 가다가 한 번씩 큰 변란을 당한다. 역사의 거울이 보여 준다. 위정자를 잘 만나야 한다. 그러자면 우리 손으로 어진 사람을 뽑아야 한다.
영광은 빛의 고을이다. 영혼이 빛나는 곳이었다. 인민군이 신자들을 묶어 돌을 매달아서 바다에 밀어 넣었다. 전쟁 중에 정신 나간 짓을 마구 해댔다. 그도 하나둘이 아닌 수십 명을 짠 바닷물에 처넣었다. 염산면 염산교회와 야월교회 신도들 77명과 65명은 그렇게 산 채로 바다에 들어가야 했다. 얼마나 버둥거리며 힘들었겠나. 가슴이 먹먹해 온다.
첫댓글 좋은 여행다녀오시고 멋진글 수고하셨습니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 해박하신 선생님 대신으로
영광의 역사를 알게되었서요 감사합니다
가뭄이 심해 어쩝니까.
텃밭에 매일 물 퍼 준다고 야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