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야기가 있지만..우선..
고려와 거란과의 전쟁에서 나오는 의문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현존하는 고려에 대한 역사서는 상당히 자료가 적을뿐 아니라 그 내용의 진위여부조차 가리기 힘든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1차적 책임은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고려에 대한 정통성을 부정하고 왜곡했던 아픈 우리의 역사가 있었고 이때 상당히 많은 역사서가 소실됩니다.. 2차적으로 많은 전쟁으로 인해 유실된 것과 더불어서 일제 침략기 시절에 왜곡과 소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멀먼 멀수록 그 사실은 진위여부의 존재보단 그러한 사실이 있었을 것이란 가정에 만족해야하는 현실이 역사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역사 또한 사람사는 이야기이며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모습과 과거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겁니다..물질적인 면이 정신을 지배하는 지금의 현실에선 다소 이해가 되지 않을수도 있지만..
고려의 통일기반은 삼한에 국한된 전투병이었다는 점에서 고려는 과거 고구려 같은 기병중심의 전투체계보단 신라의 창병과 궁병 중심을 많이 따온 보병 중심이 고려의 전투체계 입니다..2군 6위라고 해서 용호군과 응양군이 있으며 지방에 각 6위를 두고 잡병을 두었습니다..이들 모두 보병중심입니다..그러해서 이를 극복하고 보완하기 위해 별기군이 따로 편성이 됩니다..
군대 편제에 대해 다소 아쉬움이 있겠지만..농경중심의 국가에선 어쩔수 없는 편제이며 보병중심일수 밖에 없는 이유가 그 국가의 경제기반이 무엇이냐에 따라 좌우됩니다..즉 성곽중심 국가는 자연히 보병과 궁병이 발달합니다..
거란은 만주에 소수 부족이었지만..강력한 국가로 성장을 합니다...다만 우린 거란이 역사책에서 보듯 어느날 갑자기 등장을 합니다..^^ 왜 그럴까요..거란이란 새로운 부족은 어디서 왔을까요? 그들은 이미 만주에 살고있던 어느 한 부족이었을겁니다..몽골 고원에도 여러 유목민이 살았듯 만주에도 여러 유목민이 살았습니다..
모두 부여가 망하면서 갈라져 나온 부류라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겁니다..
그 이유중 하나가 만주에서 등장하는 국가들의 정치형태는 부여가 취했던 부족연맹체와 칸이란 제도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것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란 인지상정상..자신의 고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내에서 살아간다는 겁니다..정치적으로 지배층이 몰락했을경우 망명이나 이주를 통해 자신의 지역을 크게 벗어나는 경우는 있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거주지를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즉 만주에 살던 사람은 천년전이나 천년후나 대부분 만주에 거주했다는거지요..또한 이들은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면 너무도 쉽게 하나가로 통합되었다는 것에 주목해야합니다..즉 쉽게는 아니겠지만 이들에겐 같은 민족이라는 하나라는 개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부족의 개념은 성씨가 다른것처럼 그리고 태어난곳이 다른곳과 같은 차이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지금 중국 각지역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을 보면..
너무 서두가 길었네요...차후 유목민의 정치적 성향과 그들의 중심엔 무엇이 있는지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제 수치상에 나타나는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거란이 고려를 침략했을때 과연 얼마정도의 병력으로 공격을 해왔을까요? 여러분은 병력이란 숫자와 전투병과 일치시키는 오류를 범하지는 않나요?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을때 백만대군을 운영했고 선봉으로 30만 별동대를 우문술로 하여금 이끌었다고 했지만..사실상 수나라의 전투병은 30만이 총동원될수 있었던 병력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그리고 공격하는 병력과 방어하는 병력에는 숫자의 묘가 있습니다..즉..손자병법에서도 늘상 말을 하지만 공격자는 방어자보다 두배이상의 병력이 있어야하며..성을 공격할때는 10배가 되어야 이길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린 적은 수로 큰 성과를 얻는것에 너무 크나큰 기대를 하며 그러했을때 진정한 승리로 봅니다..하지만 그런 경우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야 전쟁에서 적은수로 큰수를 치는 일은 하지말아야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희귀하고 특이하기에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삼국지에 종종 보이죠..특공대식으로 일당백의 용사들을 조직해서 기습을 하고 큰성과를 보이는 경우를...허나 성공보다 실패가 많은 기술이기에 성공한 사례가 지금까지 전해진다고 보면 됩니다..
거란이 30만의 대병으로 공격해왔다는것엔 다소 무리가 있으며 아마도 5-8만정도가 공격해오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유목민의 군단편제는 10명당 조장을 두며 100명단위로 운영을 합니다..즉 100명에 깃발 한개씩 들고 다닌다고 보면 이해가 될겁니다..그리고 100명 단위에 궁병과 보병과 수송병이 붙습니다..
이제 거란의 침략으로 고려가 급작스레 동원해서 방어해야할 병력은 몇명이었을까요? 군대편제엔 늘 정규군즉 상비군과 동원군이 있습니다..오늘날 정규군과 예비군 형태는 오래 오래전부터 내려온 군대편제랍니다..^^
고려군은 당시 국경 수비를 했던 용호군과 수도 방위를 했던 응양군중 응양군많이
동원군과 더불어 방어를 했어야 했기에 많이 동원해야 5만이 안되었을 겁니다..그래서 전투에 지게 되는것이고...강감찬 장군에 의해 반격이 가해질땐 거란보단 더 많은 병력이 지원되어서 이길수 있었을 겁니다..^^ 시간이 흘러 각 지방에 내려가있던 상비군들과 동원군이 상경했을테닌까요..
여러분은 그 국가가 총동원할수 있는 병력과 전투시 전투를 수행하는 병력과 일치시키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나라의 전투병이 100만이라면 전쟁에 나가 즉 원정을 나갈수 있는 병력은 그중 많아야 4할 즉 40만이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전투병이 100만이라는 건 그나라의 인구가 1천만이 넘어야 가능한 숫자입니다..
전쟁에서 전략과 전술이 아주 중요합니다..그러나 병력의 숫자 또한 무시못하는것이 전쟁입니다..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주를 중심으로 한 유민민족과의 전쟁에서 늘 수도가 유린당하거나 위협당하는 일에 대해 상당히 슬퍼하고 아쉬워 하지만 굳이 그렇게 느끼실거 없습니다..
유목민은..거란이든 여진이든 몽골이든 그후..다시 여진(즉 청나라)이든 모두 기병중심의 전투체제이며 이들의 전술은 곧장 수도로 진격해서 수도를 치는것이 이들의 전투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고구려 연개소문이 당나라 수도를 당장에 함락시키겠다고 호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이유도 바로 이들 유목민들이 가지고 있는 기병중심의 전투체계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린 이들의 무시무시한 공격을 막아내지 못한것에 대해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많은 나라들은 쓰러지고 소멸되어야했던 과거의 사실에서 과거 우리민족의 전투방식과 그 혼은 가히 칭찬할만합니다..
여담은 이들 유목민의 기병중심의 전투방식 때문에 당태종 이세민은 보병보단 기병중심의 군비를 확충하고 이들 유목민 이때 유목민은 고구려를 말합니다..즉 고구려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대로 내려오던 전투방식 까지 바꾸며 경계를 합니다..
기병중심의 전투방식으로 당나라는 훗날 그 덕을 보게 되며 백제를 멸한후 위협을 떨치지만 이 기병대군 또한 신라의 장창병에 의해 소실됩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훗날 역사를 바꾸기도 합니다..당나라는 신라의 장창병에게
패한이후 다시 전투방식을 보병중심으로 바꾸게 되고 이로인해 다시 유목민에게 밀리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