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김대중대통령 발자취 따라 걷기
일 시 : 2013. 11. 9 (토)/오전 10부터 오후 5시까지
함께 걷는 사람들 : (사) 행동하는 양심 광주전남 지부 회원
(사) 민생평화광장 회원
초 청 강 연 : 최경환 민생평화광장 상임대표
목포지역 해 설 : 전영자 목포시 문화관광해설사
목포김대중기념관 해설 : 김향원 목포시 문화관광해설사
* 전남기상청 11월9일 예상 날씨 : 흐림/ 기온 8~18도
* 목포에 머무는 동안 조석예보 간조시간 09 : 46 ▼
만조시간 17 : 20 ▲
전날 기상예보 비올확률 60%
일찍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오전 10시 목포도착 후, 왼쪽 이경숙해설사님과 최경환대표님이 80년대 민주화 운동에 관하여 이야기 나누는 중...
최대표님께서 두 분 해설사님들께 인동초 손수건을 선물해주셨음. (큐티도 받았음되~ ^^ )
보듯만듯 하면서도 여간 섬세하게 체크하고 하심되~~^^;;
김대중대통령께서 퇴임 후 사용했던 전용차다. 아태재단으로부터 기증받았다.
가운데 김후식 광주 5.18부상자회 회장님... 머리에 총알을 맞았다고 하셨다.
머리를 자세히 살펴봐도 이상한 곳이 없어보였다. "회장님, 정말 머리에 총알 맞았어요?"라고 물어보니,
내손을 잡아서 머리에 대주었다.
'앗!' 푹꺼진 부분이 짚어졌다.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정진백 광주.전남 행동하는 양심 회장님
"김대중대통령께서 광주에 연설하로 왔을 때 차를 타고 연설회장으로 가신디,나는 그때 고등학생이었다고. 달리기 선수였거든. 달렸어. 막 달려서 그 차를 쫒아갔어. "
그 때나 지금이나 초지일관으로 김대통령을 따르고 계시니 참으로 대단하시다.
오슬로에서 김대통령께서 노벨상 받을 때 단상모습 그대로 재현했다.
노벨상은...
노벨상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스웨덴의 화학자 알프레드 노벨(1833~1896)의 유언에 따라 제정됐다. 유서에는 인류 복지에 가장 공헌한 발명, 발견을 한 사람에게 국적을 가리지 말고 상을 수여하도록 돼 있다. 이에 따라 1900년 노벨재단이 창설돼 이듬해인 1901년부터 첫 수상자를 배출했다. 재단은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으며, 수상자 선정 과정에는 일절 개입하지 않는다.
노벨상에 대해...
물리, 화학, 생리의학, 문학, 평화 등 5개 부문으로 시작됐다. 경제학상이 추가된 것은 1969년부터다. 상금은 재단의 기금 운용 실적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며, 첫해 1만5000크로나였던 액수가 올해는 800만 크로나(약 13억 원)로 늘었다. 수상자가 수상을 거부할 경우 상금은 노벨재단 기금으로 환수된다. 공동 수상일 경우에는 수상자들이 갈라 갖는다.
1901년부터 노벨평화상이 시상되었다.
노벨평화상은 개인에게도 수여되지만 단체에게도 수여된다,
1988년엔 유엔 평화유지군에게 수여 되었다. 1999년: 국경없는 의사회(MSF), 2012년: 유럽연합(EU)에게 수여했다.
노벨평화상을 거절하기도 했다.1973년 레 둑 토 (베트남·)는 수상 거부했넹^^;;
1974년 사토 에이사쿠(일본)
평화상을 제외하고 나머지 5개 부문은 기관이 아닌 개인에게 수여된다. 공동 수상자는 최대 3명이다.
노벨상 6개 부문 중 5개 부문은 스톡홀름에서 시상식을 하지만 평화상만은 노벨이 작고한 날과 시각에 맞춰 매년 12월10일 오후 4시30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다.
노벨재단 홈페이지에 따르면 1901년부터 2011년까지 개인 수상자는 총 549명이며, 수상기관은 총 23개(853명)이다. 이 중 여성 수상자는 44명에 불과하다.
일본인 사토 에이사쿠 (1964~1972 재임기간)총리는 핵무기는 보유하지도,만들지도,반입도하지않는다." 비핵3원칙을 선엉하고 실행한 공로로로 197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런 그가 비핵 3원칙을 선언한 바로 다음 해 1969년 2월 옛 서독 정부에 핵무기 보유를 위한 협력을 타진했다는 사실이 2010년 10월 일본 공영방송 NHK의 폭로로 드러났다.
노벨위원회는 2001년 출간한 <노벨평화상-평화를 향한 100년>에서 이를 ‘최대의 잘못’이라고 후회했다. 사토는 겉과 속이 달랐다. 그는 뒤에서는 ‘비핵 3원칙은 난센스’라고 말했고, 핵무기 개발을 타진하기도 했다. -자료: 한겨레
노벨문학상은 1914년, 1918년, 1935년, 1940년, 1941년, 1942년, 1943년에 수상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노벨위원회는 후보작이 없었거나 1·2차 대전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노벨문학상을 받은 여성 작가는 12명이다. 2013 10월 노벨문학상 캐나다 여성작가 앨리스 먼로(82)가 수상했다.
2000년 10월 김대중 대통령의 민주,인권,평화적 공로를 인정하여 세계적으로 공신력을 인정받고 있는 노벨상 위원회가 수여한 노벨 평화상 수상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땅의 민주화를 위해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싸우면서 세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6년의 투옥,30년 가까이 감시,가택연금등 갖은 탄압과 핍박을 받아온 공로를 세계가 인정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대통령 되기 이전에도 세계적 민주인권 단체의 추천으로 노벨상 후보에 수차례 올랐었다. 대통령 당선이후의 공로 또한 적지않다. 군사정권의 적폐와 대를 이은 김영삼 보수정권의 실정으로 외환위기에 빠졌던 나라를 되살려 836억불의 흑자를 낼만큼 경제발전을 이룩하였고 남북회담을 성공시켜 교류협력,신뢰회복등 햇볕정책을 통한 획기적인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한반도 긴장을 크게 완화시켰다.
김대중 대통령은 1971년 2월 26일 동경 외신기자클럽회견에서 평화적 공존, 평화적 교류, 평화적 통일의‘3단계 통일론’을 통일의 대안으로 설파했다. 그 후 1973년 7월 일본에서 납치(그해 8월)되기 직전‘공화국연방’제안을 처음 제기했으며 1987년 8월15일「공화국연방제」통일방안을 공식 제기했다. 이 안은 남북이 각기 독립된 기능과 권한을 갖는 상호간의 정부를 인정하는 상태에서 제한된 기능을 갖는 중앙연방기구를 설치해 단계론적으로 통일을 추구하는 방안이다.
1989년 평화민주당은 김대중대통령의 통일방안을 보다 구체화시켜‘공화국연방제안’안을 당론으로 만들었다. 공화국연방제 방안은 1민족 2체제 원칙에 의하여 남북한 체제를 인정한 국가연합적 성격을 갖는 상징적 통일기구로서 중앙연방 기구를 과도기에 설립한다는 것이다. 이 기구는 남북양측에서 파견한 동수(同數)의 공동대표로 구성되는데 경제, 문화, 학술, 체육, 언론, 인도적 교류 등의 권한을 가지며 이 기구에는‘통일의회’와‘통일행정 기구’를 두어서 양측이 독립정부가 합의하여 그 권한을 부여한 사항을 논의하고 집행한다는 것이다.
그런 후에 상호 이해와 조정을 바탕으로 국방, 외교권까지 그 권한을 중앙정부로 이관하여 완전한 통일국가(Federation)를 이룩한다는
1991년 4월 13일 김대중대통령은‘3원칙 3단계 통일방안’을 제창했는데 1972년 7월 13일의 단계설정을 원칙으로 바꾸어 공존, 교류, 통일을 3원칙으로 제시했다. 1단계는 공화국연합단계, 2단계는 연방제단계, 3단계는 완전통일국가(1국가 1정부)라는 3단계를 제창했던 것이다.
그런데 김대중은 그의 자서전에서 공화국연방제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대신‘공화국연합제’라고 말하면서 북한의 고려연방제와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1993년의 연설중에 나온 말인데 자신의 입장을 차별화하여 용공시비를 벗어나기 위한 주장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1단계의 남북연합(1995년:1992년에는 공화국연합)를 2단계의 연방제를 넘어가는 전단계로 명시해 북한의 (고려)연방제와는 다른 연합제를 부각시켰다. 3단계는 통일정부의 수립단계다. -<자료: 신문기사>
어처구니 없게도 일부몰지각한 인사들이 노벨상을 로비해서 받았다고 한다.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로비를 해서 받을 수 있는 상이라고?? 그렇다면 "로비자금을 줄테니 한 번 받아와봐라. 얼마면 받아올 수 있겠냐~?"
욱~한 심정을 누르면서...다음 일정 장소로...
김대중노벨기념관에서 김대중대통령의 정치 여정을 둘러보고 ...우린 토론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