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독 산업전사 세계 총 연합대회 참석 캐나다 여행기
열흘간의 화려한 외출
계절의 여왕이라고 하는 5월 하순에 화려한 외출을 꿈꾸며 들뜬 마음으로 우리 일행은 가방을 들고 나섰다. 5월 23일 오후 프랑크푸르트 공항을 출발한 Air Canada 는 빈 좌석 없이 복잡하고 소란했지만 우리는 소풍 나온 어린이들처럼 즐겁기만 하였다. 해를 따라 서쪽으로 날아 간 비행기는 8시간 후에 우리를 캐나다 토론토 공항에 내려놓았다.
입국심사를 받으러 개미행렬처럼 줄을 서 있는 토론토 공항은 세계 각국 사람들로 붐비고 특히 눈이 크고 까무잡잡한 인도사람이나 우리와 모습이 비슷한 중국사람들로 보이는 인파로 매우 어수선하고 무질서해 보였다. 오랜 독일 생활에 질서가 몸에 밴 우리들은 비행기 안에서도, 공항 청사에 들어서서도 독일과 비교하는 시선으로 매사를 바라보게 되었다. 하기야 해마다 25만 명의 이민자들을 받아들인 나라이고 나라마다 그 나라만의 정서가 있고 문화가 있기 마련인데 독일을 떠나오니 독일이 마치 내 모국이나 되는 양 캐나다에 와보니 독일이 좋은 나라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랜 비행으로 피곤해진 우리를 토론토 낯선 공항 청사에서 한 시간 정도 기다리게 한 후에 마중 나온 한국 가이드는 다른 비행기에서 내린 분을 픽업하느라고 늦게 오게 된 사정을 설명했다. 그리 크지 않은 키에 전형적인 한국인인데 말씨나 인상이 부드럽지 않아 별로 호감이 가지 않았다.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Quallity Suites 호텔에 저녁 9시경에 도착하니 다른 비행기로 먼저 온 일행들이 호텔 로비에서 우리를 반겨주었다.
간단히 여행 스케줄 설명이 끝나고 방 열쇠를 건네 받은 우리들은 각자 자기 방을 찾아 화려한 외출을 꿈꾸며 토론토의 첫 밤을 맞이하였다.
넓고 쾌적한 환경에서 피로를 풀고 6시에 일어나니 토론토의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아침 해가 장엄하게 떠 오르고 있었다. 캐나다는 땅이 넓어서 인지 호텔 방도 매우 넓고 1 인용 침대도 1 .4 미터 정도 되어 매우 편했다. 캐나다는 태평양에서 대서양까지 펼쳐진 광활한 대륙이니 땅 한 뼘에 연연하는 우리와는 사정이 다를 것이다.
모카향이 그윽한 커피를 마시며 맛있는 베어컨을 곁들여서 아침 식사를 먹고 나와 박영 가이드이사의 안내로 11시경에 천 개의 섬이 있다는 아름다운 Rockport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유람선에 오르기 전에 점심 식사를 하였는데 들어 간 식당은 호숫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은빛 잔 물결이 반짝이는 호수를 바라보며 식사를 하게 되니 신선이 따로 없었다. 식당은 손님들로 북적이고 그 중에는 멋지고 세련된 한국 젊은이들도 끼어있었다.
우리는 유람선에 올라타고 천 섬 중에 80 여 개의 섬을 둘러 보았다. 옹기 종기 모여 있는 섬들이 한 폭의 서양화를 보는 것 같았다. 작은 섬들 사이로 하얀 물살을 가르며 유유히 항해하는 배에서 바라본 섬들 안에는 붉은색 별장들이 그림 같이 바위와 나무 사이로 보이고 호수를 따라 부자들의 하얀색 요트가 정박해 있었다.
천 섬 유람을 마치고 우리는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Ottawa)로 향했다. “물건을 교환한다”는 뜻인 오타와는 캐나다의 수도로 의사당이 있는 곳이지만 크지 않고 아담한 도시다. 의사당 정문을 들어서면 건국 100주년을 기념하는 12 주 문양이 새겨져 있고 꺼지지 않는 성화가 타오르고 있었다. 1867 년에 건축되어 19022년에 네오고틱 (Neo-Gotik) 양식으로 재건축하였다는 의사당은 장관 집무실과 상 하원 본 회의실이 있는 곳이다. 건물 외벽은 지붕에서 구리가 녹아내려 거무죽죽 얼룩져 있었고 의사당 전망대에 오르니 오타와 시가 한 눈에 들어왔다.
오타와 강에 걸쳐있는 철교를 바라보니 서울 한강철교를 생각나게 한다. 라일락 향기가 그윽한 오타와 강가를 산책하는 여유로움도 즐길 수 있었다. 총독관저(Rideau Hall) 를 찾아가는 Sussex 거리에는 영국 대사관, 이란 대사관, 남아프리카 대사관 등 여러 나라 대사관이 밀집되어 있었다. 총독관저 앞에는 연방수상관저가 있다는데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영국식민지에서 벗어난 후에도 실권은 없지만 여전히 상징적인 인물로 의회 개회 폐회를 선언한다고 한다. 총독관저를 둘러보고 난 후 가랑비를 맞으며 정원산책길에 나섰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과 지난해 9월에 캐나다를 방문하신 박근혜 대통령의 기념식수를 만날 수 있어 감회가 새로웠다.
우리를 태운 버스가 몇 시간을 달려 몬트리올 시에 도착하였다. 캐나다에서 토론토에 이어 두 번째로 크고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살고 있는 몬트리올은 공연의 도시, 예술의 도시, 금융의 도시라고 부른다. 캐나다에는 영어권 불어 권 도시가 있는데 몬트리올은 불어 권 도시이다.
성 요셉은 퀘백의 수호성인이며 6월 넷 째주는 휴일이다. 성 요셉 성당은 캐나다 동부 3대 기적의 성당이라고 부른다. 성 요셉 성당에는 안드레 수사의 심장이 모셔져 있다. 어려서 조실부모하고 불행한 유년기를 보내며 마루청소, 등잔닦기등 온갖 힘든 직업을 전전하다가 수사가 되어 노틀담 중학교 수위직을 받은 후 안드레 수사는 1937년 92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40년 동안 수도원을 떠나지 않았다.
일과 기도의 연속인 삶을 사셨던 안드레 수사는 2010년 바티칸에서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성 요셉 성당 벽에는 입구에서부터 수 천 개의 지팡이들이 걸려 있다. 다리 아픈 환자들이 와서 기도한 후 치유은사를 받고 놓고 간 지팡이들이라고 한다. 그는 일생을 통해 “하느님께는 이웃을, 이웃에게는 하느님을 알리는 삶을 살았다.”라고 한 친구의 증언은 그가 얼마나 사랑과 신앙에 점철된 삶을 살았는지 말해주고 있다.
퀘백 (Quebec)으로 가는 길은 얼마를 달려도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고속도로 양 옆으로 집 한 채 보이지 않고 산도 없는 평지뿐이다. 한 뼘쯤 자란 초록 물결의 밀밭과 녹음으로 짙어가는 나무들만이 차창으로 스쳐갈 뿐이었다. 산이 많아 터널도 많고 돌고 도는 우리나라의 도로와는 정반대로 이 넓은 땅덩어리가 부럽기도 하고 샘도 나고, 누구의 축복인가 싶었다. 3시간 이상을 달려 우리는 퀘백에 도착하였다. “강폭이 가장 좁다” 는 뜻을 지닌 퀘백은 다른 도시에서 볼 수 없었던 높은 빌딩이 많았다. 캐나다 전체에는 2 백 만개의 호수가 있는데 그 중 8000여 개의 호수가 퀘백에 있다고 한다.
퀘백은 1608년에 프랑스 사람들이 1400톤 급 배 21척을 끌고 와서 정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세인트 로렌스(Saint Laurent) 강을 끼고 걸어보는 듀프랭 테라스와 밑에서 올려다 본, 퀘백의 상징인 북미 3 대 호텔 중 하나인 샤토프롱트낙 호텔의 아름다움과 목 부러지는 계단이라는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 유명화가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 보는 화가의 거리, 퀘백을 빛낸 17인을 만날 수 있는 벽화 앞에서 사진도 찍고 걸어보는 것도 퀘백에 와서 누려보는 호사였다. 세인트 로렌스강의 하류에 위치한 퀘백은 고풍스런 고대와 하늘 높이 올라간 높은 빌딩의 현대가 공존하는 아름다운 도시다.
퀘백 최고의 폭포 몽모렌시(Montmorency) 폭포는 83미터 높이로 나이아가라 폭포보다 30 미터가 더 높다고 한다. 시원스레 쏟아져 내리는 하얀 폭포는 장관이었고 실비처럼 튀기는 물 보라에 얼굴을 촉촉히 적시며 걷는 나무로 된 산책길에는 벚꽃과 사리 꽃이 아름다웠다. 인구 370 만 명의 퀘벡은 파리 다음으로 불어 권의 큰 도시이며 지금도 매년 2 월 첫 주에는 10 일간의 카니발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여행 4 일째인 오늘 기적 같은 일이 버스 안에서 일어났다. 우리 일행 중에 제일 연장자이신 김연숙씨가 가이드 박영 이사의 5촌 고모가 되는 것을 고향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히 알게 된 것이다.
북한이 고향인 김연숙씨는 70년 만에 내 나라도 아닌 이곳 캐나다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한 것이다. 고모 되시는 분은 독일에 살고 있고 5촌 조카는 캐나다 교민인데 어찌 이런 만남이 성사될 수 있을까! 우연치고는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김현숙씨 고모 되시는 박영 이사의 어머니는 96세로 아직도 살아계신다니 다행한 일이다. 년 세가 많으시니 70년 만에 만나는 조카딸을 알아보실 수 있을까?!
단지라는 귀여운 이름을 가진 조그만 한식식당에서 순두부 제육볶음으로 한식을 맛있게 먹고 호텔로 향하는 저녁 어스름, 하늘에 뜬 반달이 우리가 탄 버스를 따라오고 있었다.
몬트리올 (Montreal) 에서 다시 토론토로 가는 길 역시 가도가도 집이 보이지 않았다. 몇 시간을 달려 도착한 토론토 (Toronto) 는 세계 6대의 금융도시다. “만나고 또 만나고” 라는 뜻을 지닌 토론토는 서울의 1.6배 큰 면적에 인구 400만의 캐나다에서 제일 큰 도시다. 우리 한인들도 10만 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재학생이 2만 5천 명인 토론토 대학은 노벨상을 7명이나 배출한 명문대학이며 인슐린을 발견한 학자도 토론토대학 출신이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CN 타워는 그 높이가 5334미터나 된다고 한다. 시청에 들어서자 건축가 Viljo Revell 가 15만 개의 못으로 만들었다는 둥근 조형물은 토론토를 형상화 한 작품이라고 한다. 토론토는 캐나다 제일의 도시답게 고층 건물이 많았으며 차들도 많아 교통이 복잡했다. 토론토 시내를 가로 지르는 Yong 거리 양 편으로는 한글 간판이 즐비한 코리아 타운이 형성되어 있어 우리가 지금 서울 어디쯤에 와 있는 착각에 빠지기도 하였다. 대한민국에서는 1969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전차가 토론토에서는 아직도 느릿느릿 도시를 누비고 있었다. 저녁식사를 하러 명동칼국수 집에 들어가니 한국 어느 한식집에 들어온 듯 마늘냄새가 물씬 났다. 뜨끈뜨끈한 왕 만두와 쫄깃한 면발의 칼국수에 벌겋게 갓 버무린 듯한 맛깔스런 김치를 얹어 먹는 맛은 향수를 달래주는 별미 중의 별미였다.
오늘 5월 28일 오후 6시, 제 8차 파독 산업전사 세계 총 연합대회가 이곳 토론토의 Ftanna Primavera 에서 열리는 날이다. 우리 일행은 여행하기에 편리했던 평상복을 벗어 놓고 나름대로 의관을 정제한 후 회의 장소로 향했다. 회의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고국을 떠나 올 때 푸릇푸릇 윤기 흐르던 동안(童顔)은 어디 가고 흐르는 세월 속에 모두가 백발이 성성한 모습으로 이 자리에 모였다.
캐나다에 살고 있는 재 캐나다 독일 동우회 회원들은 일찍이 60년대 나라가 형편없이 어려울 때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미지의 땅 독일에서 근무를 마친 후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이곳 캐나다로 건너 온 광부와 간호사들이다. 독일에서도 말로 할 수 없는 고생을 했는데 또 다시 미지의 이 땅에 정착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역경을 겪어야만 했을까! 비록 안면이 없어도 만나는 분마다 애정이 가고 가슴이 짠했다. 독일에서 건너 간 내 친구들도 다섯이나 이곳 캐나다에 살고 있다.
내가 캐나다 여행에 선뜻 나선 것도 아마 가슴 한 복판에 그들을 향한 그리움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친구를 바로 찾지 못 한 채 이영구 대회추진위원장의 개회 선언에 이어 식순에 따라 우리는 모두 일어서서 태극기를 향하여 옷깃을 여몄다.
1964년 고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개발 차관을 얻기 위해 독일 방문 때 대통령이 타고 갈 비행기가 없어 독일정부가 내어준 임시항공편을 사용해야 했던 가슴 아픈 사연, 단상에 오른 대통령과 영부인이 애국가 제창이 나오자 두 소절을 못 넘기고 대통령 부부와 거기 모인 광부와 간호사들의 통곡에 하늘마저 흐느끼게 했던 그 사연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여러분!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루지 못하더라도 우리 후손들에게는 가난을 물려주지 말자” 절규하며 목이 메어 제대로 부를 수 없었던 애국가! 그로부터 50 여 년이 지나 이 자리에서 깊이 패인 주름진 얼굴로 부르는 애국가도 가슴이 저리고 목이 메어옴을 어쩔 수가 없었다. 애국가 제창이 끝나자 캐나가 애국가 “오 캐나다” 연주가 있었다.
이어서 재 캐나다 독일 동우회 손병준 이사장과 손명수 재 캐나다 독일 동우회 회장의 환영사를 비롯하여 주 토론토 대한민국 총영사관 강정식 총영사가 나와 “귀하의 헌신과 열정, 조국과 가족에 대한 기여는 우리 국민들의 마음에 영원히 기억 될 것…”이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감사편지 대독에 이어 토론토 방문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6,70년대 조국 발전에 토대가 되었다며 선진 인류국가로 나가는데 관심과 애정을 가져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어서 토론토 한인 회장의 축사와 파, 세, 연 세계 총 연합회 고창원 회장의 축사와 박영자 간호협회장이 나와 우리는 행복한 할머니들이라며 남편들 잘 보필하고 더욱 행복한 여생을 보내자고 하였다. 미주 각 지역 독일 동우회 회장들의 축사가 이어졌고 끝으로 고창원 파,세,연 회장의 경과보고 및 계획사항 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윤행자 한독간호협회장이 나와 국제시장 영화가 개봉된 후 파독간호사의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며 독일에는120여 개의 민족이 살고 있는데 문화회관이 있는 민족은 한국뿐이어서 우수한 민족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고 했다. 앞으로 국민주택 신청을 추진 중이며 국회에서는 국가 유공자로 발의 중이며 앞으로 할 일이 많은 파,세,연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2 부 순서로 하얀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나와 사철가를 연주하였고 사푼사푼 나비처럼 날아 다니는 윤행자 회장의 꽹과리 연주는 장내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이어서 애절하게 가슴은 파고 드는 “봄날은 간다” 트럼뱉 연주가 끝나자 백여 명이 한데 어우러져 라인댄스로 몸을 풀었다.
오래간만에 지인을 만나 와인 잔을 기울이며 그 동안의 안부를 묻고 내 개인으로도 학생시절의 친구들을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캘거리에 살고 있는 한 친구는 졸업하고 처음 만났는데 헤아려 보니 53년만의 재회였다. 길을 가다가 서로 비켜도 몰라볼 만큼 자그마치 반세기가 흐른 것이다. 분홍빛 이마에 보송보송하던 솜털은 간 곳 없고 흰 서리가 소복이 내린 서로의 모습으로 끌어 안고 좋아했다. 밤 10시가 되자 우리는 어디서 언제 다시 만날 기약도 못한 채 마주 잡았던 손을 놓고 헤어져야만 했다.
캐나다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나이아가라 폭포(Naiagara Falls) 관광일 것이다. 나이아가라는 “천둥소리 내는 물” 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미국 쪽에 2 개, 캐나다 쪽에 1 개, 모두 3 개로 되어 있는데 미국 쪽에 있는 폭포보다 캐나다 쪽에 있는 폭포가 더욱 웅장하고 볼만하다.
미국 쪽에서 뜬 배 위의 승객들은 모두 남색 비옷을 입고 있는데 캐나다 쪽 우리 일행은 빨간 비옷을 입고 폭포 앞에까지 가는 배에 올랐다. 배가 폭포 가까이 가자 천둥소리가 진동하는 듯 했고 뽀얀 물보라로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4개의 호숫물이 모여 나이아가라 폭포가 생겼다고 한다. 쉼 없이 쏟아져 내리는 그 엄청난 양의 물은 서울 시민이 하루 사용하는 1 억 5 천 5 백 만 톤에 달한다고 한다.
일찍이 우리 선조 중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고 기행문을 남긴 분이 있다. 1902년 광무황제(고종)이 종실 의양군 이재각과 그의 수행원 이종웅외 2 명을 영국 에드워드 7세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황제를 대신하여 특명대사로 파견하였다.
이 때 비서 격인 정 3품 이종웅이 일기 형식으로 남긴 “서유견문록:이 있다. 동, 서양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과 재치 넘치는 순발력으로 우리 일행을 감동 시키는 가이드 박영 이사는 달리는 버스 안에서 그 긴 시를 막힘 없이 줄줄이 들려주었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바라보며 그 멋진 시를 들게 되니 감회가 새로워 “서유견문록”을 여기에 옮긴다.
“물의 근원이 천리이며 수세가 호대하니 이곳에 이르면 물길은 좁고
양쪽 언덕의 성벽은 넓이가 수십 칸에 이르고 모양은 제마(말발굽)와 같으니
석벽이 홀로이 깍아 지듯이 서있어 꺼꾸로 쏟아져 옴이
산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듯이 하고 물의 기세가 서로 격돌하여
혹은 푸르고 혹은 뿕어 수백 개의 무지개가 걸린 듯 하구나.
폭포아래 수면 위로는 흰 눈 같은 물보라가 공중에 가득하니
참으로 천하에 장관이로세
강가에는 4-5개 천교가 굽실하여 흡사 무지개가 물을 마시는 듯 하구나.
강남 쪽 언덕에는 교각과 수 십 층의 루가 있어
일행은 루에 올라가 난간에 의지하고 내려다보니
바람이 눈에 가득 차서 만리 하늘까지 와서 여행하는 고통은 잊을 수가 있구나.”
토버머리(Tobermory)로 가는 길가 풀밭에서는 까만 소들이 느긋하게 풀을 뜯고 있었고 어디를 가나 튼실하게 지어진 울타리 없는 주택들이 드문드문 나무 사이로 보였다. 도중에 잠깐 휴식을 하며 쉰 곳에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교회가 잔디 위에 서 있었다. 교회 안을 잠깐 들여다 보니 대 여섯 명이 바듯이 들어갈 정도로 아주 작은 교회였다.
4 시간을 달려 마지막으로 찾아간 토버머리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가장 깨끗한 청정수 지역으로 온타리오 호수와 조지만 베이가 만나는 곳이다. 호수 주변에는 녹음 짙은 나무들이 즐비하고 천 섬 호수처럼 빨간 지붕의 아름다운 별장도 보였다. 우리 일행은 이층으로 된 유람선을 타고 호수 한 가운데로 나갔다.
말이 호수지 얼마나 큰지 수평선이 보이지 않는 바다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이곳 유람선은 바닥 한 가운데를 유리로 만들어서 호수 바닥을 내려다 볼 수 있게 하였다. 언제 파손된 배인지 침몰된 배가 선명하게 보이고 바닥에 깔려 있는 자잘한 돌이나 바위까지 모두 보였다. 바위에는 홍합 새끼 인지, 다슬기인지 이름 모를 생명체가 까뭇까뭇 붙어 있었다. 물이 얼마나 맑은지 마치 거울 속을 들여다 보는 것 같았다.
호텔로 돌아 오는 길에 일행 중의 김순복씨가 자기가 전국 체전 선수단장에 7 : 9 로 선거에서 뽑혔다는 연락을 받았다며 기뻐하였다. 강능 출신인 김순복씨는 하노버 한인회장, 한글학교 교장 등 일찍이 교포사회를 위하여 많이 봉사하여 대통령 표창도 받은, 교포사회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우리 일행은 축하의 박수로 그를 환영해주었다.
우리들의 이 화려한 외출도 내일이면 막을 내린다. 이제 캐나다 여행 마지막 밤을 보내며 박영 가이드이사님의 얘기를 빼 놓을 수 없다. 모름지기 여행은 같이 다니는 멤버들이 화기애애하고 규칙을 잘 지켜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여행을 책임지고 인솔하는 가이드에 의해서 그 여행의 승패를 가릴 수 있을 것이다.
가이드는 팀을 이끄는 나침반이요 등대이기 때문이다. 박영 이사는 첫 인상이 까다롭게 보여 별로 호감 가는 편이 못 되었다. 그러나 하루 이틀 날이 갈수록 팀을 위해 노력하는 그의 성실함이 눈에 보이고 무엇보다 동, 서 양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과 독도 문제, 한.중.일 관계를 바라보는 그의 뚜렷한 역사관은 우리 일행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컸다. 고사성어를 가끔씩 인용하기도 하고 “서유견문록록” 줄줄이 암송하는 것을 보니 그의 문학적인 깊이도 대단해 보였다.
박영 이사는 캐나다 이민 와서 안 해 본 일이 없고 가이드로 일하고 있는지 18년이 된다는데 한 가지라도 더 보여주려고, 더 들려주려고 끝임 없이 노력하여 3. 4시간 장거리 버스를 타고 다녀도 지루한 줄을 몰랐다. 한 열흘 같이 다니다 보니 스스럼 없이 우리를 누나라 불러주는 귀여운 애교도 싫지 않았다. 작별이 가까워 오니 그는 무슨 말을 하다가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는 여리고 한국적인 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세계 곳곳에서 어느 나라 국적으로 살아가든 우리는 영원한 한국 사람이니까!
끝으로 안전운전으로 우리들의 여행을 편안하고 즐겁게 해 주신 이길성부장님, 여행에 필요한 모든 살림을 도맡아 수고하신 김옥순 재무님, 알차고 보람 있는 캐나다 여행이 되도록 물심 양면으로 도와 주시고 파,세,연 행사를 위하여 많이 노력하신 고창원 회장님, 윤행자 회장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아울러 열흘 동안 같이 여행하면서 좋은 추억을 만들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안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던 모든 분들께 건강과 행운이 함께 하시기를 빌면서 아쉬운 마음을 접는다.
감사합니다.
글: 진경자 , 사진: 이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