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바르고 깔끔한 ㅇ할머니는(97세) 화장실이나 거실을 오고 갈 때면 스스로 실버카나 휠체어를 운전하고 다니신다. 평소에는 할머니에게 인사를 드리면 들릴락 말락한 목소리로 “감사합니다.”라고만 대답할 뿐이었는데 오늘따라 할머니의 이야기는 한이 없었다.
“할머니는 옛날에 농사를 지으면서 누에를 많이 치셨다면서요?”
“촌에서는 농사만 지서갖고는 아그들 공부 갈치도 못했어라우. 긍께 누에쳐갖고 광주로 핵교 보내고 그랬지라우. 봄에, 가실에 고로구 두 번 허는디 금방 뽕따다가 주고 돌아서믄 누에가 벌써 다 묵어부러라우. 긍께 밤잠도 못자요. 그래서 한 달 죽어라고 하믄 20몇만원썩 나온께 그때는 큰돈이였지라우. 시방 사람들은 그런일 허라고 하믄 못할것이요. 아이고! 일이라믄 징허요. 몸설나요. 그래도 그 때 시상이 재밌었지라우.”
할머니는 까마득한 옛 이야기를 신나게 들려주었다.
어느 날 할머니는 한 직원에게 또 얘기를 하고 싶었나보다.
“내 이름은 번판이(반편이)여라우. 아이구, 죽어야쓴디 갈수록 아는 것도 없고 금방 아는 것도 까묵어불고 묵는 것이나 잘하제. 나는 번판이란 말이요. 빨리 죽고 자와도 여그서 어찌나 고완(구완)을 잘해 줘싼께 죽지도 않고 존것만 묵어싸서 죽을라믄 아직도 당당 멀은 것 같은디 이렇게 번판이로 오래 살아서 어찌까 모르겄소.”
할머니의 얘기는 끝이 없었다.
“번판이가 뭐다요?”
“멍청이를 번판이라고 하지라우.”
하루는 가족이 면회를 왔다. 할머니가 가족에게 물어보았다.
“번판이는 지금도 잘 크고있냐?”
“잘 크고 있어요.”
할머니 옆에 있던 직원이 할머니에게 물었다.
“번판이가 누구다요?”
할머니는 깔깔 웃으며 설명해주었다.
“우리 집에 강아지가 한 마리 있는디 사람들이 와도 짖지도 않고 꼬리만 흔들어싼께 내가 이름을 번판이라고 지어줬지라우. 우리 집에 번판이가 둘이나 된단 말이요.”
할머니는 하루 종일 가만히 계시질 않는다. 옷 정리며 서랍정리, 이불은 손으로 다리미질 하듯 착착 펴서 각을 세워 개켜놓곤 한다. 직원은 그 모습에 감탄하며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할머니가 젊었을 때는 방바닥을 닦아 놓으면 떨어진 밥태기도 주워 먹을 수 있었겠어요. 그리고 방바닥이 너무 반들반들해서 미끄러져 낙상하는 파리들도 많았겠어요.”
“그런 소리를 많이 듣고 살았는디 지금은 번판이가 되어부러서 포도시 내 이불만 갤 줄 안단 말이요.”
“할머니는 옛날에도 훌륭하셨고, 지금도 대단하셔요.”
“아니여라우. 번판이여라우.”
할머니는 끝까지 겸손하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