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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오랜 역사 동안 수많은 신학자와 설교자가 인간의 본성과 운명을 설명하고자 노력했다. 신·구약성서는 이들에게 인간이 누구인지 탐구하는 언어와 논리를 제공하는 중요한 자료였다. 그러다 보니 성서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간에 대한 정의인 ‘하나님 형상’은 신학적 인간론의 핵심 개념이었다. 하지만 그전에 우리가 눈여겨 볼 사람 됨의 근본 조건이 있다. 창세기 1장에 따르면 하나님은 시공간을 먼저 만드신 후에 그 속에 남자와 여자를 위치시키셨다. 그런 만큼 인간은 시초부터 시간적 존재다. 인간은 영원하신 하나님 형상으로 만들어졌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기에, 신학적 인간론은 시간이라는 범주로는 다 알려지지 않은 사람 됨의 신비도 다룬다.
본고는 영원과 시간 혹은 하늘과 땅 사이 위치한 존재로서 인간의 특수성을 욕망, 비극, 이중성, 관계라는 핵심어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처럼 중요하면서도 쉽지 않은 인간학적 주제를 풀어나가는 데 도움을 얻고자 아우구스티누스, 도널드 맥키논, 마르틴 루터, 칼 바르트라는 지혜자의 인도를 받고자 한다.
태초 이래 모든 인간은 ‘시간’ 속에서 살면서 자신을 존재하게 한 ‘영원’을 향해 있다는 공통의 운명을 지닌다. 이러한 인간의 독특한 모습을 잘 묘사한 신학자로 아우구스티누스를 손꼽을 수 있다. 그는 인간은 이 땅에 살면서도 존재의 근거이신 하나님에 대해 근원적 갈망을 가진 존재라고 묘사한다.
“오, 주님, 당신은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을 받으실 만합니다.… 그러기에 당신의 피조물의 한 부분인 인간이 당신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ad te)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in te) 안식할 때까지는 편하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 인간은 자기 외부의 것을 탐하고 소유하려는 욕망의 존재다. 이 욕망이 있기에 인간은 자아 밖으로 나와 다양한 타자와 사물과 관계를 맺는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은 선하고 아름답기에, 인간이 속한 세계는 오감으로부터 다양한 욕망을 일깨우기에 충분히 좋은 곳이다. 하나님의 창조하신 이 같은 ‘쾌락적’ 본성을 고려한다면, 인간이 자신에게 있는 욕망을 무조건 억압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아니 심지어 위험하다. 오히려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선물하신 매력적인 세계 속에서 자신이 본래 가진 욕망을 적절히 인정하고 사용하고 훈련하는 지혜와 기술이 필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현실 세계가 너무 좋아 우리 욕망이 세계가 주는 쾌락에 고착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욕망은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만족시켜 드려야 할 신처럼 행사한다.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는 욕망에 삶이 지배당한다. 현실 세계에서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가 된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발상의 급격한 전환이 필요하다. 인간이 현실에서 욕망을 충족함에도 욕망이 계속해서 일어난다면, 인간의 욕망을 완전히 만족시켜 줄 대상은 현실 너머의 초월적인 무엇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욕망의 인도를 충실히 따라가며 현실이 주는 기쁨을 그때그때 누리던 중에, 어느새 우리는 현실 너머에 있으면서 진선미의 근원이신 분을 점차 알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이처럼 현실 세계가 불러일으키는 욕망은 일상의 분주함과 익숙함 속에서 잊고 살던 세계의 궁극적 기원이신 분에 대한 갈망을 일깨운다. 현실에서 경험하는 진선미는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 완벽한 선, 궁극적 아름다움을 지금 여기서 맛보도록 우리의 닫힌 마음을 열어 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갈망의 존재인 인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사랑’함으로써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다. 이러한 통찰은 인간 본성을 이성 중심으로 정의하는 오랜 철학적 전통과 신학이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영국의 철학자 도널드 맥키논은 ‘인간의 유한성’과 ‘시간의 불가역성’을 고려할 때 삶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주요 범주로 비극성을 빼놓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유한한 존재로서 인간은 유한한 세계 속에 살고 있다. 세계는 인간의 욕망을 제한 없이 충족하기에는 좁지만, 인간이 완전히 이해하고 조종하기에는 너무 다양하고 복잡한 곳이다. 그 결과, 현실에서 내가 원래 품은 뜻은 변형 혹은 왜곡된 형태로 드러난다. 나의 욕망은 내가 원하거나 계획하지 않던 방식으로 충족될 수밖에 없다. 즉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자기 생각과 행동, 주체와 타자,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끊임없는 타협의 과정이다. 인간의 타고난 한계 조건을 무시하다 주체는 타자가 자신을 수용하는 방식까지 간섭하려 한다. 또는 자신에 대한 오해가 두려워 자기 안의 세계에 머무름으로써 타자나 자아에게 폭력을 가한다. 이처럼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과 자기가 속한 세계의 유한성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을 때 삶의 비극적 색채가 짙어진다.
인간 비극성의 또 다른 차원은 시간이 한 번 가면 되돌아오지 않는 데 있다. 시간적 존재인 인간의 삶은 계속되는 상실의 경험으로 구성된다. 물론 일부 사람의 경우 시간이 갈수록 인간이 만든 것을 더 가질 수는 있다. 일례로 어떤 이는 죽을 때까지 자산이 늘며 더 부유해진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나이가 들어가며 젊음과 건강, 가족과 친지 그리고 결국에는 생명을 잃는다. 그렇기에 시간의 불가역성은 상실을 궁극적인 것으로 만든다. 시간 속에서 우리가 궁극적인 것을 잃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상실 자체를 피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잃음은 궁극적’이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인간은 여러 기만의 기재를 동원해 삶의 비극성을 은폐하고 회피하려 한다. 하지만 부와 정치, 학문, 복지, 종교적 경건 등으로 방어벽을 아무리 쌓더라도 상실의 경험은 결국 이 모든 것을 찢어버리고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이러한 비극성은 결코 그리스도교 신앙에 낯선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은 하나님이 인간의 유한성과 시간의 불가역성을 직접 대면하신 사건이다. ‘참 인간’이신 분 안에서 하나님은 인생의 비극적 구조를 말소하지 않고 오히려 직접 감싸 안으셨다. 이는 시간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삶의 비극적 조건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 속에서마저 한결같이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때 가장 인간다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인간이 결코 평면적이지 않아서인지, 예부터 인간의 이중성은 철학자나 작가들이 다루는 인기 있는 주제다. 그리스도교 신앙 역시 인간의 복잡다단한 모습을 직시하도록 우리를 초청한다. 특별히 신학자들은 인간 현상의 역설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인간성을 비춰 봄으로써 사람 됨의 심층적 의미를 드러낸다.
대표적으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그리스도인을 ‘의인이자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으로 정의한다. 본성상 인간이 자신의 의로움으로는 구원을 획득할 수 없는 ‘죄인’일지라도, 우리를 조건 없이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관점에서 보면 성도들은 ‘의인’이다. 루터는 이러한 이중성에 대해, 의사를 신뢰하면서 의사의 처방에 따라 치유를 위해 노력하는 환자의 상태를 예로 들며 설명한다.
이 사람은 아프기도 하고 동시에 건강하다. 그가 아픈 것은 사실이지만, 의사의 확실한 약속에 의하면 건강한 것이다. 그는 의사를 신뢰하며, 의사는 자기가 그 사람을 고칠 것을 확신하기에 그가 이미 건강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의사는 그 사람을 치유하기 시작했고, 더 이상 그를 불치병 환자로 여기지 않는다.
역사 속에서 ‘의인이자 동시에 죄인’이라는 루터의 말은 죄인이 아무 선행을 하지 않아도 구원받는다는 방식으로 곡해되기도 했다. 하지만 환자가 의사의 말을 따라 노력하며 회복의 과정을 거쳐 나가듯, 죄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책임감 있는 존재로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 앞에서’(coram deo)와 ‘세상 앞에서’(coram mundo)라는 그리스도인의 이중적 관계 구조가 형성된다.
루터는 사람 됨의 심층적 구조는 우리의 관찰로는 포착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선물하시는 은혜로만 알려질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것은 우리의 일반적 시간 의식 속에서는 지각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지는 종말의 관점에서만 포착할 수 있다.
이를 풀어 보자면, ‘의인이자 동시에 죄인’은 ‘나 자신을 하나님의 율법 아래서 보면 죄인일지라도 복음 아래서 보면 의인’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상태에 관한 설명이자, ‘현실에서 자신을 보면 죄인일지라도 나는 영원한 하나님의 약속 아래 있다’라는 종말론적 선포다. 이와 동시에 ‘내가 비록 지금은 불완전해도 주님께서 이미 나에게서 시작하신 바를 끝내 이루실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인간은 영원하신 하나님과 대비되는 시간적 존재이지만, 하나님 형상으로서 영원의 모습을 역사 속에서 (부분적이고 불완전하게나마) 드러내는 특별한 역할을 담당한다. 물론 하나님 형상이 무엇인지 성서가 명확히 밝히지 않아 신학자마다 다른 의견을 내어 놓지만, 현대신학의 뚜렷한 흐름 중 하나는 하나님 형상을 ‘관계’라는 관점에서 본다는 점이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이 영원부터 사랑의 관계 속에 계시기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도 관계적이다.
인간은 본성상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타자와 관계를 맺으며 존재한다. 그런데 창세기 1:26에 따르면 하나님은 하나님 형상인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됐다는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칼 바르트는 관계적 존재로서 인간은 추상적인 타자가 아니라 ‘나’와 구별된 낯선 몸을 가진 ‘너’를 마주한다고 주장한다. ‘나와 너’의 관계가 각자의 신체성을 전제로 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이원성으로 이뤄졌음을 인식할 때, 주체와 타자는 서로를 ‘쳐다 보고, 말을 나누고, 도움을 베풀고, 기쁨을 향유하는’ 동료 인간으로 서로를 만날 수 있다.
반면 ‘나’에 흡수되거나 환원될 수 없는 ‘너’의 고유함을 무시한다면, 관계성은 타자에 대한 주체의 폭력을 지속하고 내면화하는 구조로 왜곡된다. 이러한 이유로 바르트는 하나님 형상을 남자와 여자의 창조로 설명하는 창세기 본문을 ‘인간성에 관한 대헌장’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신학적 논의를 모르더라도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사람들과 본능적으로 사회적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그런 즉자적이고 자연적인 관계성을 넘어, 타자를 고유한 존엄과 인격을 갖춘 ‘너’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나와 너’가 상호주체적 관계성에 들어갈 때, 우리는 별 볼 일 없고 때로 비극적이기까지 한 현실 한가운데서 영원에 속한 환희를 맛볼 수 있다. 왜냐하면, ‘나’와 ‘너’가 서툴게 만들어 나가는 관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기쁨이 머무는 자리가 되기 때문이다.
생로병사는 개인이 겪는 시간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요약한다. 하지만 죽음을 향해 가는 삶의 근본 구조를 단순화한 나머지 수많은 사람이 인간의 조건으로서 시간을 부정적으로 본다. 또한 영원을 시간 개념에 대한 반대급부인 양 추상적으로 정의하곤 했다. 물론 생물학적인 존재로서 인간이 경험하는 시간 속에서 우리의 생명은 “죽음에 이르는 생명”일 뿐이다. 하지만 영원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죽음은 “생명에 이르는 죽음”이 될 수 있다.
인간은 그 자체로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창 1:26)이요 하나님의 숨을 나눈 존재(창 2:7)다. 그렇기에 ‘시간’이라는 조건이 사람 됨에 있어 의미하는 바를 하나님의 영원과 관련해 보지 않고서는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는다.
인간은 현실 속에서 영원을 갈망하고, 비극적 삶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며, 지금의 죄성이 아니라 약속의 빛 아래서 자신을 바라보고,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영원한 기쁨을 미리 맛보는 존재다. 인간이 품은 이 신비를 알려 주시고자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서와 교회를 통해 지금도 말씀하고 계신다.
주
1)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선한용 옮김(대한기독교서회, 2003), p. 45.
2) C. 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장경철·이종태 옮김(홍성사, 2001), p. 215 참고.
3) Donald MacKinnon, “Some Notes on the Irreversibility of Time,” in Explorations in Theology (London: SCM, 1970). pp. 90-98. 이하 비극성에 관한 내용은 다음 글에서 더 자세히 다뤘다. 김진혁, “비극적 삶을 감싸는 하느님의 자비,” 김동규 외,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교 사상가들》(도서출판100, 2020), pp. 140-151.
4) Rowan Williams, The Tragic Imaginati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6), p. 113.
5) Martin Luther, Lectures on Romans (1515-1516), p. 269. 알리스터 맥그라스, 《신학이란 무엇인가》, 김기철 옮김(복있는사람, 2021), p. 756에서 인용.
6) 한스-마르틴 바르트, 《마르틴 루터의 신학: 비평적 평가》, 정병식·홍지훈 옮김(대한기독교서회, 2015), p. 388 참고.
7) 칼 바르트, 《교회교의학 III/2》, 황정욱·오영석 옮김(대한기독교서회, 201), p. 341.
8)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p.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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