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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울산의 바닷가와 태화강을 중심으로 한 둘레길들을 둘러보았으나 이번에 울산시내의
숨은 역사문화유적을 탐방키로 하고 울산으로 Go Go!
각 명소간에 거리가 별로 멀지않아서 도보하이킹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도보로 이동하면서 탐방
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두곳은 짧은거리로 600m, 한곳은 약간 먼거리로 2Km정도입니다)
(기행코스)
울산향교~울산동헌 및 내아~서덕출조각공원~울산왜성
1.울산향교(울산광역시 중구 명륜로 117) :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
향교는 조선시대의 공식적인 지방교육기관으로 건물은 문묘와 학당으로 이루어지며 문묘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중국의 사성,이현과 우리나라 18현을 모신 대성전(大成殿)과 동.서무가 있고, 학당에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의실인 명륜당(明倫堂)과 기숙사인 동.서재가 있으며 그 옆에 전사청이 있습니다.
울산향교의 창건연대나 초기연혁은 임진왜란때 기록멸실로 정확히 알수 없으나 한고을당 한향교체제가
완성된 15세기경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창건당시에는 신학성 북쪽인 현 반구동 구교마을에 세워졌는데
임진왜란때 불탄후 그곳에 다시 세워졌다가 효종3년(1652) 지금장소로 옮겨 세워졌습니다.
1800년이후 26번 고쳤으나 배치의 기본틀은 변함없었고 주요건물들을 남북과 동서축으로 직각교차하게
배치하여 전형적인 향교건축의 특성을 살렸으며 각 건물도 전통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데, 대성전은 정면과
측면이 모두 3칸인 홑처마 익공양식의 맞배지붕이고, 명륜당은 정면5칸,측면2칸의 홑처마 익공 양식의 팔작
지붕이며 정문인 청원루는 정면5칸,측면2칸의 겹처마 익공양식 팔작지붕 형식을 하고 있습니다.
1)울산향교 표지석
2)청원루(淸遠樓) : 울산향교의 정문
3)명륜당(明倫堂)
4)동재(東齋)
5)서재(西齋)
6)전사청(典祀廳) : 제기(祭器) 등을 보관하는 곳
7)대성전(大成殿)
공자의 위패를 모신 전각으로 배향위에 사성(안자,증자,자사,맹자), 동서종향위에 송조이현(정명도 선생,주회암
선생)과 우리나라 18현(신라조2현,고려조2현, 조선조14현을 모시고 있으며, 동편건물을 동무(東廡), 서편건물을 서무(西廡)라 하는데 광복전까지는 우리나라 18현을 모시다가 광복후 대성전 종향위에 올려 모심에 따라
지금은 비어 있으며 정문은 신삼문(神三門)이라 합니다.
8)동무(東廡)
9)서무(西廡)
2.울산동헌(東軒) 및 내아(內衙)(울산광역시 중구 동헌길 167) :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
옛 울산읍성안의 중심건물로 울산도호부의 수령이 공무를 처리하였던 곳이고, 내아는 수령이 살았던 살림집임.
동헌은 숙종7년(1681) 울산부사 김수오가 지었고 영조39년(1763) 울산부사 홍익대가 다시 지어 반학헌(伴鶴軒)이라 불렀으며, 일제강점기이후 울산군청 회의실로 사용하다가 1981년 지금모습으로 복원하였습니다.
동헌은 정면6칸,측면3칸으로 가운데에 2칸의 대청을,좌우에 2칸씩의 방을 두었고, 왼쪽방앞의 툇마루 주위에는 계자난간을 둘렀고, 처마는 부연을 둔 겹처마이고, 기둥위에는 익공형식의 포를 올렸으며, 추녀마루가 길게
뻗은 팔작지붕건물입니다. 내아는 온돌방4칸,대청2칸,부엌과 누마루 각 1칸씩을 둔 ㄱ자형건물로 이 ㄱ자형 평면은 조선시대 울산지역 상류주택의 ㅡ자형 안채에 사랑방과 누마루를 덧붙인 형식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1동의 건물로 이루어진 특징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가학루,효자 송도선생 정려비,역대 울산부사들의 각종 비각,사리탑,오송정 등의 건물들도 있습니다.
1)동헌 전경
2)효자 송도(宋滔)선생 정려비 :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10호
송도는 연안 송씨로 조선초기 울산에 살았던 효자로 울산지역 최초의 생원으로 병든 부모를 10여년간이나 정성껏 간호했으나 1년사이에 부모가 잇달아 돌아가시자 몸소 흙과 돌을 날라다 무덤을 만들고 유교식 예법에
따라 사당을 세워 신주를 모시고 새벽마다 배알하고 때에 맞추어 제사를 지냈습니다.
당시까지 불교식 장례가 일반화된 상황에서 송도의 효행은 매우 두드러진 것이었고,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세종10년(1428) 효자로 정려되고 표창을 받았는데, 이러한 사실은 "조선왕조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등에
기록되어 있으며 효문동이라는 마을이름도 그러한 사실에서 유래된 것이라 합니다.
연안송씨족보에는 정려비가 원래 효문동에 있었으나 영조13년(1737) 울산도호부 서쪽연못인근으로 옮겼다 함
정려비앞면은 "효자성균생원 송도지려"라 적혀 있으며 뒷면에는 송도의 효행을 기록하였습니다.
정려비 왼쪽의 깨어진 비석은 "강희임진 팔월"이란 구절로 보아 숙종38년(1712)에 세웠던 것으로 보이며 중구 우정동에 있는 비석과 비각을 2006년 이곳으로 옮겨 옴.
3)울산 태화사지 십이지상 사리탑(보물제441호:여기 있는 것은 복제품이고 진품은 울산박물관에 있음)
1962년 태화동의 반탕골에서 발견되었으며 태화사는 자장율사가 선덕여왕12년(643) 당나라에서 돌아와 창건한 사찰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했고 탑신은 종모양인데 앞면에 감실을 설치했으며 표면에는 12간지에 나오는 12마리 동물을 돋을무늬로 새김.
4)오송정(五松亭)
옛 문헌을 바탕으로 복원한 정자로 정자주위에 다섯그루 소나무가 있어서 오송정이라고 이름붙인듯 함.
## 33기의 비각들
조선시대 역대 울산부사들 및 몇몇 특수관료들의 비각들이 세워져 있는데,
*울산부사(26기) : 선정비,공덕비,청덕비,불망비,애휼군졸비,거사비
*울산판관(1기) : 청덕비
*울산참령(1기) : 거사비
*울산군수(3기) : 애민청덕비,선정비
*울산병마절도사(1기) : 불망비
*울산암행어사(1기) : 거사비
1)비각 전경
2)울산부사 남필성 청덕선정비
숙종17년(1691)에 부임해서 동20년(1694)에 이임했으며 동36년(1710)에 이 비각을 세움.
앞면에 공덕을 칭송하는 4언구가 없고 뒷면에 좌수,별감의 이름이 새겨져 있음.
3)판관 민여임 청덕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가 울산부사 겸직시 그를 보좌한 문관으로 선조36년(1603)에 부임해서 그해에 이임했음.
앞면에 공덕을 칭송하는 4언구가 없고 뒷면에는, 처음 이 비각을 병영 북쪽에 세웠다가 현종4년(1663)에 객사앞으로 옮긴 사실과 담당 향리의 이름이 새겨져 있음.
4)암행어사 이도재 거사비
고종20년(1883) 경상좌도에 파견되어 언양현감과 울산부사의 폐정을 적발한 바 있고, 동21년(1884)에 어느 포구의 어민들이 이 비각을 세웠으며 앞면의 4언구에 고기잡이세와 미역세를 감해 주었다 하였고 뒷면에는 담당향리와 좌수의 이름이 새겨져 있음.
5)울산군수 김복일 선정비
선조18년(1585)에 부임하여 동19년(1586)에 이임했으며 동20년(1587)에 이 비각을 세웠음.
뒷면에 좌수,도감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나 마모가 심해 판독할수 없고 담당향리들의 이름 10여자도 새겨져 있으나 역시 판독할수 없으며 울산에 현존하는 공덕비중 가장 오래된 것임.
6)병마절도사 한홍렬 불망비
고종25년(1888)에 부임해서 동27년(1890)에 이임했으며 이임한 해에 이 비각을 세웠음.
앞면의 4언구에 남쪽지방을 살펴서 군정을 잘 다스렸다는 등의 내용을 싣고 있고, 뒷면에는 도감,좌수,담당향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음.
7)참령 구연하 거사비
대한제국 진위대 제3연대 제3대대의 지휘관으로 지휘본부는 엣병영이고 광무6년(1902)에 이 비각을 세움.
앞면의 4언구에 군사를 모으고 관청을 수리하고 도적을 막았다 하였고, 뒷면에는 도감,향장,담당향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음.
3.서덕출 조각공원(울산광역시 중구 푸름4길 27)
울산의 대표적인 아동문학가 서덕출선생을 기리기 위한 공간으로 2007년에 세운 울산최초의 조각공원입니다.
서덕출선생은 중구 교동에서 태어나 반구동에서 자랐으며 다리를 쓰지못하는 불구의 몸으로 어머니에게 한글을 배워 동요를 쓰기 시작하여 "눈꽃송이" "봄편지"등이 대표작이며 1940년 34세를 일기로 요절할때까지 70여편의 작품을 발표하였고 아동의 노래로는 창가뿐이던 시절에 선생의 작품은 예술성을 지닌 동요 혹은 시로써 선구적 의의를 가졌다고 할수 있습니다.
1)공원내 풍경
2)서덕출선생(1906~1940)동상("봄편지"란 시와 함께 세워져 있음)
(봄편지)
련못가에 새로 핀 버들닢을 따서요
우표한장 붓쳐서 강남으로 보내면
작년에 간 제비가 푸른 편지 보고요
됴선봄이 그리워 다시 차저 옴니다
3)서덕출전시관
4)공원에 전시된 다양한 조각작품들(일부만 올림)
#동심-가위 바위 보(2009.9)
#풍요로운 휴식(2009 이희석)
#Waiting for Dream(2009 우성립)
#봄편지(2009 김유석) : 주민,직원 선정작품
#의병-구국충정(2009 한주용)
#축복의 땅 & 소리(2009 조무현)
#도심속의 꿈-염원(2008 이안행)
4.울산왜성(울산광역시 중구 학성공원3길 54) :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
#일명 "증성" 또는 "시루성"이라고도 하며 울산시의 동남으로 흐르는 태화강의 삼각주에 있는 해발50m인
학성산을 이용하여 산정에 터를 만들고 본성으로 삼았는데, 성곽은 산곡대기에 동서90m,남북35m의 장방형 아성(주장이 있는 내성)을 쌓고 서쪽 산중턱에 한층 낮게 동서50m,남북25m의 외성을 두고 아성의 주변 산중턱에는 참호와 토루를 둘렀으며 동쪽으로 1Km의 거리에 있는 반구동강변에는 소규모 토성을 배치하였음.
성벽은 화강암과 잡석으로 일정한 경사를 주면서 3~8m의 높이로 쌓아올리고 아성에 2개,외성에 1개의 성문을 북향으로 설치하였고, 석축의 방식이나 성문의 양쪽, 성벽의 네귀에 모난 축대를 돌출시킨 것은 다른 왜성의 구조와 같음(정유재란 당시엔 도산왜성,조선말기엔 학성으로 불리었음)
#선조30년(1597) 남해안까지 쫓긴 왜군이 방위선을 보강하기 위해 11월초순부터 12월하순까지 가토 기요
마사(설계), 오타 가즈요시(감독), 아사노 요시나가, 시시도 모토츠쿠, 기요마사의 부장들이 왜군 23,000여명을 동원하여 축성한 것인데 석재는 대부분 울산읍성과 병영성을 헐어서 사용하였다고 함.
#주곽부는 해발50m인 산꼭대기에 석성으로 쌓아 본환이라 하고 본환 북쪽아래 해발35m지점에 2지환을 배치하였으며, 그아래 서북쪽 해발25m지점에 3지환을 두었으며 세성벽의 길이를 모두 합치면 1,400m이고, 성벽의 높이는 10~15m이며 태화강쪽을 제외한 3면에 2,700m길이의 외곽부는 토루와 해자를 두르고 목책을 세웠으나 지금은 도시화로 인해 남아있지 않음(3지환,2지환,본환 등은 일본식 명칭임)
#울산성전투(도산성전투라고도 불림)
조명연합군은 1597년12월23일부터 1598년1월4일까지(1차), 1598년9월21일부터 9월25일까지(2차) 왜성을 공격했으나 빼았지 못하였고, 특히 1차전투때는 경리 양호와 제독 마귀가 이끄는 명군과 권율장군이 이끄는 조선군 57,000명이 막 축조공사를 끝낸 울산왜성을 급습하였는데 성안에 있던 16,000명의 왜군은 말의 피와 오줌을 마시며 겨우겨우 버티었으며 연일 계속된 전투와 추위로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함.
1)울산왜성입구에 있는 전투기마상
2)도산성전투때 사용된 대표적인 화기 천자총통과 승자총통
1597년과 1598년 2차례에 걸쳐 조명연합군과 일본왜군이 벌였던 최대규모 전투로 울산백성들의 항전이
빛났던 전투이며 의병을 조직하여 결사항전했으며 전쟁직후 선조는 이를 높이 사 울산군을 울산도호부로
승격시키고 공이 큰 울산의병들을 선무원종공신으로 포상하였다고 함.
3)3지환(三之丸)
*울산왜성입구에서 3지환으로 가는 산책로
*3지환풍경
*독립운동가 고헌 박상진의사(대한광복회 총사령)추모비
*서덕출선생 노래비
4)2지환(二之丸)
*3지환에서 2지환으로 올라가는 산책로
*2지환풍경
5)본환(本丸:왜성 정상부)
*2지환에서 본환으로 올라가는 출입로
*본환풍경
*본환에서 바라본 왜성아래 전경
*본환에서 바라본 울산시 전경
*요산대(樂汕臺)
"울산의 이름난 선비인 김홍조가 왜성의 정상부에 요산대라는 돌로 된 비석을 세웠다"(1917 울산군청이 발간한 "울산안내")라고 기록된 바, 여기서의 "산"은 물고기잡는 그물의 일종인 '오구'지만 "물"과 "메" 즉 태화강과 동천을 뜻하는 '이수'와 당시 삼산동에 솟아있었던 '삼산'을 한데 묶어 이르기도 함.
따라서 요산대는 태화강과 동천 그리고 삼산을 즐거운 마음으로 내려다 보는 '넓은 터'라는 뜻임.
#추전 김홍조 공덕비(2지환에 위치)
학성공원은 울산최초의 도심공원으로 구한말 울산출신의 선각자 추전 김홍조(1868~1922)선생이 조성했으며.
이곳을 공원으로 꾸며서 울산군에 기증할 목적으로 1913년 주변의 땅을 사들여 각종 나무와 꽃을 정성껏 심고
가꾸었으나 1922년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1927년 그의 아들 김택천에 의해 울산군에 기증되었고 공원이 정식으로 개원된 것은 1928년4월15일이며 당시 공원이름은 울산공원이었음.
김홍조는 과거에 급제하여 경상좌도병마우후 등 벼슬에 올랐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 실업인,언론인,금융인,독립운동가로 활동하면서 인재양성,애국계몽운동,조선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공로로 1922년 세상을 떠난 몇년후
울산군수 손영목과 군민들이 그의 업적을 기리는 공덕비 조성운동에 나서 1929년4월12일 학성공원에 세워졌
는데 비문의 내용은 김홍조가 생전 의형제를 맺었던 것으로 알려진 박영효(철종의 사위)가 지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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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구경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