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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무동 원문보기 글쓴이: solo
1970년대 온 국민이 즐겨 불렀던 포크송 '세노야'를 작곡하고 최초로 노래했던 주인공 김광희. 양희은의 노래로 대중에게 폭 넓게 알려진 이 노래가 만들어진 것은 1970년 가을이었다. 바로 그 주인공이 당시 베일에 가려있던 서울대 음대 작곡과 학생 김광희였다. 그녀는 사실 단 한 장의 독집 음반도 발표하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수록된 음반도 단 한 장 뿐 이다. 그런 그녀가 지금도 포크 팬들의 사랑을 받는 아티스트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그녀는 일본 유학까지 다녀 온 엄격한 인텔리 부모 슬하의 부유한 가정에서 2남 3녀 중 셋째로 1950년 5월 10일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에서 태어났다. 교육열이 대단하셨던 부모는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전축을 사다 주셨다. 그래서 그녀의 형제 모두는 공부뿐 아니라 노래도 잘했다.
한국 전쟁이 터져 1.4후퇴 때 그녀의 가족들은 제주도로 피난을 떠나 전쟁이 끝난 1953년에 서울 종로구 청운동으로 올라 왔다. 취학 전인 6살 때부터 그녀는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맑고 고운 음성을 가진 그녀는 특히 동요를 좋아했고 잘 불렀다. 청운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삼음 어린이 음악 학원'에 갔다. 맑고 청아한 목소리를 가졌던 그녀의 음악 재능을 학원 선생님은 알아 보았다. TV 어린이 프로를 진행했던 그의 주선으로 어린이 프로그램에 출연해 노래를 불렀다.
이에 교내 유명 가수가 되어 학교의 모든 행사는 그녀의 독무대가 되었다. "당시 방송국에 화제가 나 AFKN을 빌려 미8군에서 방송을 한 적도 있었지요" 포크가수 양병집과 한국 포크의 컬트 '섬아이'의 주인공 박찬응은 그녀의 청운초등학교 1년 후배들.
"당시 세검정 산밑에 살았는데 놀이터가 따로 없어 동네 친구들과 인왕산을 헤매면서 산 속에서 뛰어 놀며 자랐습니다. 자연 속에 지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저에게 많은 영향을 준 것 같아요"
이화여중에 입학해서부터 성악을 공부했다. 성악가의 꿈을 키우며 연습에 몰두했다. 하지만 목을 혹사시킬 만큼 과도한 연습은 맑고 고역이던 목소리를 허스키하게 변화시켰다. 이화여고에 진학해서는 결국 성악을 포기하고 작곡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후 김광희는 존 바에즈등 외국 포크 가수들의 노래를 접했다. 아름다운 포크송의 가사가 마음에 들었다. 이후 포크송을 즐겨 듣고 노래도 불렀다. 1968년, 서울대 음대 작곡과에 합격했다. 입시의 해방감에서 벗어난 김광희는 포크송에 관심은 많았지만 엄한 가풍으로 인해 노래 활동을 하려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처지였다.
대학 신입생 시절 그녀가 작곡한 동요 3곡이 '윤석중 동요집'에 수록되기도 했다. 하지만 음대에서는 대중 음악 활동을 금지하고 있어 포크송을 만들어도 작곡자를 자신의 이름이 아닌 음악 친구들로 밝히기도 하고 가명으로 몇 차례 노래를 부르는 게 고작이었다.
그녀의 짧은 대중 음악 인생에서 김민기는 절대적 관계를 형성한 사람이었다. 1969년 2학년 때, 서울대 미대에 입학한 신입생 김민기를 만났다. 친구의 동생인지라 이미 안면은 있었다. 어떤 계기로 시작했는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때때로 김민기가 조직한 대학생 남성듀오 '도비두'와 어울려 오르간을 쳐주며 '피터, 폴&메리'의 노래를 함께 부르기도 했다.
당시 서울대는 김광희외에도 김민기, 이정선, 현경과 영애, 두나래 등 많은 아마추어 학생 가수들이 노래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작곡과 학생이면서 대중음악을 하는 친구들과도 가깝고 지낸 그녀는 "학교 ROTC축제에서 사회를 봐 달라는 요청이 오기도 했어요. 하지만 정식 포크가수 활동은 하지 않고 그저 이화여고 개교 기념 축제에 구경갔다가 무대로 끌려 올려가 노래하는 뭐 그런 식으로…, 몇 번 노래한 것이 고작입니다"
1970년 초가을,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기독교 방송의 '꿈과 음악사이' 프로그램에서 시인 고은이 수필을 낭독하는 시간에 '고은의 시로 된 노래를 깔자'는 의견이 나왔다. 선정된 시는 "세노야". 음악평론가 최경식씨는 처음 김민기에게 '세노야'의 작곡을 의뢰했다.
헌데 김민기는 작곡과에 다니는 누나 친구 김광희에게 가사를 전달하며 작곡을 맡겼다. 방송예정일은 월요일. "금요일 날 오후에 시를 받아 토요일 피아노로 몇 시간만에 부랴부랴 만들었어요" 원래 '세노야'는 다른 가수가 노래를 부르기로 예정 되어 있었다. 헌데 방송 당일 방송국에서 '작곡가 본인이 노래를 직접 불러 방송을 하면 좋겠다'는 제의가 급작스럽게 왔다.
"학교에서 쫓겨난다고 펄펄 뛰었어요. 결국은 허락했지만 이름은 절대 내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고 일주일만 방송하기로 하고 민기씨의 반주로 녹음을 했어요."
그런데 4달이 지나도록 그 노래는 계속 방송에서 흘러나왔다. 가수 이름도 없이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노래에 반해 전국 각지의 애청자들이 신청 엽서를 수없이 보내왔던 것. 애가 탄 그녀는 매일 방송국에 전화 걸어 '노래가 그만 나오도록 끊어 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렇게 세상에 던져진 '세노야'의 반응은 대단했다. 가수 이름도 없이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세간에는 호기심이 증폭되었다. 얼굴과 이름도 없이 베일에 가린 '세노야' 가수는 신비로운 존재로 부각돼 단숨에 학생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다. "하루는 학교에 갔더니 친한 같은 과 친구가 '세노야' 노래를 부른 가수가 누군지 알아 봐 달라고 하더군요"
34년만에 무대에 선 보물같은 싱어송 라이터
대중적으로 '세노야'를 널리 알린 것은 당시 대학생 포크 가수 양희은이었다.
"제가 노래한 '세노야'를 라디오를 통해 들은 희은씨가 잘 부른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래서 1970년 겨울 종로 YMCA 건물에서 콘서트 소식을 듣고 찾아 갔지요. 그 때 무대 뒤에서 우리 두 사람은 처음 만났고 친해졌어요. 그 인연으로 양희은씨가 음반을 발표할 때마다 곡을 하나씩 써 주게 된 겁니다" 양희은은 '세노야' 말고도 멧돌 포크 공연에서 김광희곡 '빈자리'를 불러 취입하기도 했다.
또한 그녀의 곡 '나의 친구'는 서울대 미대 후배들이었던 여대생 포크 듀엣 '현경과 영애'도 '내 친구'로 제목을 바꿔 불렀다. 온 국민이 사랑하게 된 '세노야'는 80년대에 들어서도 KBS에서 같은 제목으로 방송된 송지나 작의 일일 연속극에서 주제곡으로 사용되었다.
김광희는 70년대 초 여러 포크 가수들의 앨범 작업에 참여해 도움을 주었다. 김민기의 71년 데뷔 앨범 작업 때는 피아노를 연주했고, 2년 뒤에는 양희은의 2집 앨범에 참여했다. 수록 곡 '인형' 중간 중간에 나오는 웃음 소리는 그녀의 목소리. 하지만 정작 자신은 단 한 장의 독집 음반도 발표하지 않았다.
그녀는 프로 포크 가수 활동보다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가사 말에 곡을 붙여 몇 곡의 포크 송을 작곡하고, 음악 친구들과 함께 즐겁게 노래하는 범주를 벗어 나질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육성 녹음한 단 한 곡이 수록된 음반이 있다.
우연히 퓰리쳐상을 수상한 미국의 여류 시인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의 시를 접하고 감명을 받아 작곡한 동명의 노래 '나 돌아 가리라'이다. "작고한 어느 재벌은 이 노래를 듣고 '마음을 다 비우게 해주는 노래'라며 생전에 즐겨 들어 지금도 기일마다 후손들이 이 노래를 튼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아마도 가사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노래는 대학생 싱어 송 라이터들의 집결지였던 내쉬빌의 멤버들이 참여해 제작했던 포크의 명반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노래-유니버샬,1972'에 수록되어 있다. 대학생 작곡가들이 직접 노래를 불러 발표한 최초의 음반이었다. 기획자는 경기고 출신인 이수일, 김무영(작고), 가난했지만 음악적 기둥이었던 김유복 등 3명의 내쉬빌 주인들.
이들은 김민기의 데뷔 음반을 듣고 충격을 받아 이 음반을 기획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광희는 이따금 내쉬빌에서 노래를 부르긴 했지만 멀리 수원에서 개최한 '우리들' 공연에는 엄격한 집안 분위기 때문에 불참했다. "마장동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녹음에만 참여했어요.
음반으로 500장을 만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현재 100만원이 넘는 한국 포크 3대 명반으로 대접받는 이 음반은 당시 제작에 참여한 학생가수들이 나눠 가지고 일부는 대학가 앞 서점에서 판매되었다. 김광희의 '나 돌아가리라'는 후에 '가난한 마음'으로 제목을 수정해 양희은이 재취입하여 빅히트를 기록했다.
서울음대 졸업 후 마지막으로 작곡한 노래는 '님이 오시는 날'. 1976년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떠날 때 서라벌 레코드사를 통해 양희은이 발표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컨셉을 통해 한국적인 색깔의 노래를 만들기 위해 작곡한 이 노래는 가요판이 너무도 서양적으로 흐르는 것이 안타까워 만들어 본 국악 가요였다. 미련 없이 유학 길에 오른 그녀는 미네소타 주립대학원에서 작곡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78년 귀국 이후 한양대, 추계예술대, 국민대 등 대학 강단에서 강의와 현대 음악 창작 활동을 병행해 오며 현재 여성작곡가협회 부회장을 맡는 등 왕성한 사회 활동까지 펼치고 있다. 또한 김민기의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배우 오디션과 시사회 모니터링 등에서는 자문 위원으로 참여, 대중 음악과의 인연을 이어 가고 있다.
그녀는 34년 만에 처음으로 정식 포크 공연 무대에 초청 받았다. 바로 명동 서울YWCA 청개구리 송년 콘서트. '얼굴'의 윤연선, 현경과 영애의 박영애 등 전설적인 70년대 여대생 포크 가수들과 함께 무대를 꾸며 주목을 받았다. 현대 음악 작곡가인 그녀가 대중 음악인 포크 공연 무대에 설 결심을 하게 된 것은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자신의 음악을 사랑해주고 연구까지 하는 포크 팬들의 정성 때문.
미디어에 화려하게 등장했던 인기 포크가수도 아닌 자신을 기억하고 사랑해 주는 사람들에게 어떻게든 보답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크게 작용했다. "뭣보다, 이렇게 대접을 받아도 되는지 부끄럽습니다. 또 과연 학생들이 제가 대중 음악을 노래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가 걱정도 됩니다.
그래서 무대에 설 결심을 하기가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태어난다면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는 가수가 되고 싶어요. 노래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아요" 실제로 대학 시절에만 단지 몇 곡의 포크 송을 만들었을 뿐 그녀는 한번도 가수라는 직함으로 활동을 한 적이 없다.
단 한 장의 독집 음반도 없이 온 국민이 사랑하고 생명력을 잃지 않고 기억되는 포크 싱어송라이터는 유래가 없는 일이다. 그녀는 대학 시절의 베일에 가려진 짧은 활동만으로도 대중음악사에 길이 남을 명곡을 남겼다.
"현 세대가 너무 랩송 같은 10대 위주의 장르로만 주류를 이루는 것이 안타까워요. 시간이 나면 김민기씨와 음악을 같이 했으면 하지만 응해주지 않네요. 또한 좋은 시인이 지은 좋은 노랫말이 있다면 곡을 붙여 봤으면 하는 생각도 여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첫댓글 김선생님혹 사실과 다르거나..누가 되는 글이라면 말씀해 주세요 그저 반가워 퍼온글이라..선생님함자에 님자도 못붙입니다요
아이구 ~이 글을 어디서 퍼 오셨나요? 부끄럽네요. 몇군데 잘못된 내용이 있긴해요. 제 생일은 5월 11일인데...
누군가 누군가 했는데.....
조오 위에 댓글 쓰신 김광희님이 바로 그분이고..우리 사오모모임에 오심 뵐 수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