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트 이스트우드, 하면 <황야의 무법자> 비슷한 마카로니 웨스턴의 주인공이 떠오른다. 그만큼 그는 서부 영화 주인공들 중에서도 가장 터프한 축에 드는 총잡이로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런 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가장 미국적인 영화를 찍는 영화 감독이기도 하고 잘 알려진 재즈 마니아이기도 하다. 이미 그는 자신의 감독 데뷔작인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에서 재즈 음악을 트는 디스크 자키로 분장한 바 있다. 또한 전설적인 비밥 색소폰 주자인 찰리 파커의 생애를 영화화한 <버드>는 재즈에 대한 그의 오마쥬나 다름없다. 뿐 아니라 그는 여러 영화에서 주옥같은 재즈 넘버들을 영화음악으로 채택함으로써 재즈에 대한 깊은 애정과 폭넓은 식견을 지닌 감독으로 널리 이해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Eastwood After Hours>는 그의 이러한 ‘재즈 사랑’이 실제 공연으로 자리매김한 뜻깊은 현장을 실황으로 보여주고 있는 DVD 타이틀이다. 이미 1997년에 같은 제목의 두 장 짜리 CD로도 발매된 이 타이틀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와 관련된 수많은 재즈곡들 중에서 엄선하여 다양한 연주자들이 연주한 카네기 홀 실황을 담고 있다. 이번엔 재즈계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바치는 오마쥬에 해당한다고나 할까. 엄밀히 말해 재즈계 바깥에 존재하는 사람인 클린트 이스트우드 한 사람이 이렇게 100분이 넘는 연주의 테마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경이롭다. 그가 평생 재즈에 얼마나 많은 애정과 관심을 쏟았는지를 거꾸로 잘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의 무게감을 증명하듯 이 앨범에 참여한 뮤지션들도 쟁쟁하다. 나이든 뮤지션들부터 젊은 뮤지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폭넓은 캐스팅이 공연장을 풍성하게 하고 있다.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의 삽입곡이기도 한 첫 곡 <Misty>에서는 노장 피아니스트 케니 바론이 역시 노장인 배리 해리스와 호흡을 맞추고 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는 77세의 노장 보컬리스트 지미 스코트가 부른다. 또 다음 곡 <Hootie's Blues>에서는 피아니스트인 제이 맥샤안이 나선다. 이 사람은 조 터너와 더불어 정통 블루스를 근간으로 하고 있는 캔사스시티 재즈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뮤지션의 한 사람이다. 그 유명한 찰리 파커가 음악 생활을 시작하던 시기에 제이 맥샤안이 이끄는 밴드에서 실력을 갈고 닦았을 정도니 이 사람은 얼마나 오랫동안 활동해온 뮤지션인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노년의 그를 보는 일은 색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또 몇 안 되는 재즈 바이올리니스트 중의 한 사람인 클로드 윌리엄즈도 볼 수 있다. 트럼펫 주자 존 패디스가 이끄는 카네기 홀 재즈 밴드의 격조 있는 연주도 들을 수 있다. 또 색다른 대목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아들인 베이스 주자 카일 이스트우드 4중주단의 연주도 들을 수 있다는 점. 그밖에도 조슈아 레드맨 같은 젊고 유능한 뮤지션도 등장한다. 트랙 중간 중간에 클린트 이스트우드 자신이 등장하여 짧게 해설을 하는 부분이나, 곡 중에 영화의 장면들이 오버랩되는 것도 다른 음반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색다른 대목. 특히 아마추어 재즈 피아니스트이기도 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직접 피아노 앞에 앉아 쟁쟁한 뮤지션들과 협연을 하는 장면은 실력의 높고 낮음을 떠나 관객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미국에서 만든 독창적인 예술은 재즈와 서부영화 뿐”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미 일흔 살을 넘긴 이 우직한 연예인의 소박하고도 정확한 이 지적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의 삶 자체가 바로 그러한 미국문화의 토양을 충실히 반영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잘난 척 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쉬워도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고급스럽지도 않고 잡탕인 이 ‘기회의 땅’의 문화를 있는 그대로 살아내려고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