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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다원주의 적그리스도 조직 WCC에 가입한 교단 |
교회 일치와 연합을 한다는 것은 좋으나 그러나 기본을 잃어버리고 연합 일치만을 주장하는 것을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연합은 엡4:1절 이하에 성령 안에서 하나가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안에 있는 운동을 하여야 합니다. 성령안에 있지않고 연합만을 주장하다가는 도리어 더 큰 문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wcc의 강령에 나타난 대로 종교다원주의로 빠져나가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어떤 교회는 더 좋은 교회를 지향하기 위하여 교인들에게 설문 조사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파악해서 그들이 원하는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교회마다 설문조사를 합니다. 어떤 설교를 듣고 싶습니까? 에배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일종의 여론 자사와 같은 방법론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이런 방법이 너무나 많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해서 그들의 욕구를 채워주고 사람들이 원하는 교회를 만들어 가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사람들의 설문조사 대로 설교를 짧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더 많이 제공합니다. 그렇게 결국 교회는 그들이 원하는 것들을 스스로 결정하는 자리에 올라서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교회의 모습을 딤후4:3절에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이 오늘 이 교회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교회가 걸어가야 할 것들이 아닙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들은 교인들에 물어봐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에서 무엇을 하라고 했는가를 봐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꾸 본질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고 질문의 답을 얻어야 합니다. 다른 데서 얻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 속에서 교회의 본질을 찾아야 합니다. 제가 과거에 읽은 예화 중에 하나가 기억에 참 오래 남습니다.
파선 (破船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어느 위험한 해안에 한 때 볼품없는 작은 인명 구조대가 있었습니다 . 건물이라고는 오두막 한 채 뿐이었고 보트도 작은 것이 하나 있었을 뿐이었지요 . 그러나 헌신적인 몇 명의 회원들이 끊임없이 바다를 지켰습니다 . 그래서 새로운 보트들을 더 구입했고 새로운 승무원들을 더 훈련시켰습니다 . 작은 구조대는 점점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 그들은 바다로부터 구조된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기 위해서라도 좀 더 편안한 장소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래서 그들은 비상용 간이 침대를 훌륭한 침대로 갈아치우고 확장된 건물 안에 좀 더 훌륭한 가구들을 갖다 놓았습니다 . 이제 그 구조대는 그 회원들을 위한 대중적인 회합장소가 되어 버렸습니다 . 이제 회원들은 인명을 구조하는 임무를 위해 바다에 나가는 일에는 점점 관심을 잃게 되었고 , 그래서 그들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인명구조원을 새로 채용했습니다 . 그러나 인명 구조의 주제는 여전히 클럽 장식들 가운데서 돋보이고 있었습니다 . 그리고 클럽 가입식이 거행되는 방에는 여전히 예식을 위한 구조선이 있었습니다 . 대부분 회원들은 클럽의 인명구조 활동이 별로 즐거운 일이 아닌데다가 클럽의 정상적인 생활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서 구조 활동을 그만 두기를 원했습니다 .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 그 구조대는 일종의 클럽으로 발전해 버렸고 그래서 또 다른 인명구조대가 새로 생기게 되었습니다 . 마땅히 해산되어야만 합니다 . |
우리가 어떤 자리에 처하였던 교회가 태동할 때 취했던 그 본래의 모습을 우리는 따라가야 하고 그 어떤 시대에나 살결같이 사도행전의 교회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의 모습을 되찾는 것이 교회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스스로를 지옥으로 내몰고 있는 세상을 위한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러하기에 오늘 우리는 다함께 처음 교회의 모습은 어떠했는가를 추척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교회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처음 교회에서 찾아볼수 잇는 교회는 첫째로, 교회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모입니까? 그것은 마16:18절에 나오는 네 위에 즉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모임을 말합니다. 교회안에 신앙고백을 부정하는 자들은 공동체 일원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사람들이 모임을 말하는데 그 모임의 의미는 무엇을 말합니까? 이 세상에는 수 많은 모임들이 있습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이 모이기를 원합니다. 온갖 계 모임들이 왕성한 나라는 한국뿐일 것입니다. 심지어 좁업한지가 반백년이 넘었는데도 초등학교 동창회 모임을 한다니까요? 그리고 군에 제대한지가 반백년이 넘었는데도 그것도 똥방위 나왔는데도 군인계도 있어요? 내가 아는 장로님이 그 계모임에 꾸준하게 다닌다고 합니다. 우리 지방에도 한심한 목사님들이 있습니다. 남의 잘못을 지직질하고 싶지 않은데 지방 행정담당자로 감리사 직책이 있는데 그때 같이 감리사한 자들이 게속해서 계로 모인다고 합니다. 2년동안 지방행정 책임자로 수고하다고 끝나면 됐지 뭐가 아쉬워서 계속 만나는 겁니까? 우리 지방 후배목사님은 몇일있다가 2박3일동안 과거 같이 감리사했던 분들이 제주도로 여행간다는 말을 하더군요? 제가 그 사람 앞에서 미쳤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2박3일 동안 기도하면 입신한다고 했습니다. 기분 나빴을 것입니다.
교인들도 쓸데 없는 모임을 자제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전도하는 목적이 아닌 세상 모임은 절제하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모이는 것은 이런 세상에서 모이는 것과 다릅니다. 세상의 것들과 전혀 다릅니다. 교회 안에 모임은 생명이 있습니다. 이 모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함께 모입니다. 무엇이 그들을 함께 모이게 합니까? 그들을 하나로 묶는 독특한 요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큰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1-2장을 읽어보십시오, 오순절 날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그리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엄청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그들이 방언을 하기 시작합니다. 오늘날의 방언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말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완전 놀라운 어메이징한 사건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으로 인하여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방에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모인 사람들을 향해 “새술에 취하엿다”(행2;13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일어나 놀라운 말씀을 전하자 청중 가운데 많은 사람들에게서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변화를 맛본 사람들은 본래 120명이었는데 그들이 함깨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몇 일이 지나가 한꺼번에 3000명의 결신자가 나왔습니다. 베드로의 설교가 낳은 결과였습니다.
행전2:37절을 보시면 베드로의 설교를 듣자 들은 청중들의 반응은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이라고 말합니다. 이렇듯 초대교회는 사도의 설교를 듣고 마음의 변화가 회심의 역사가 일어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설교를 듣고 변화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모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사실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이처럼 교회는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셨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의 모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신학을 논의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냥 복음을 듣고 회심하고 강한 주님의 이끌림을 받아 교회로 나온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귀로 들은 말씀이 아니라 전 인격으로 그 말씀을 듣고 변화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죄에 대한 죄책감이 없는 사람은 회개가 불가능 합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설교를 듣고 죄책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변화를 받은 자들이 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찔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 안에는 이런 회개 운동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회개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죄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죄책감 없이 교회에 나오고 회개가 없이 신자로 살아가는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설교를 듣던 사람들은 죄로 인해 가책을 느끼고 회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 놀라운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받았는데 행2:47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가장 이상적인 연합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신자들은 자신들이 받은 새 생명을 어떻게 나타낼 가요? 그들이 함께 모였다는 사실에 그 답이 있습니다. 그들이 믿음을 갖게되자 교회가 삶의 중심이 된 것입니다. 성경은 그들이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 라고 말합니다.(46절) 이것이 교회의 참된 구성원들에게서 발견되는 특징입니다.
그들은 날마다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그들은 일년에 한번 부활절 아침에 예베애 참석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미국교회 적지 않는 신자들은 부활절과 추수감사적, 그리고 성탄절 그렇게 세 번 교회에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에서는 썬데이 크리스찬 이라고 주일에만 나오는 신자가 대부분입니다. 죽은 신앙의 표본인 유럽 교회는 평생 두 번 나간다고 합니다. 한번은 태어나서 유아세례 받으려고 그리고 죽을 때 장례식 하기위하여 관 안에서 교회에 나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그런 교회가 아닙니다. 규칙적으로 모였습니다. 사도들이 그들을 찾아 돌아다니거나 최근에 왜 왜 교회에 나오지 않았느냐고 찾아다니면서 물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책임에 충실했고 교회에 더욱 자주 나오고자 힘썼던 것입니다. 매질이나 강압에 못이겨 또는 감언이설에 이끌려 교회에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일은 저 사이비 이단 신천지에서나 일어나지 진정한 교회에서는 일어나지 않고 도리어 더 열심히 모이지 못해 안달이 나 있습니다. 초대교회에 문제가 있다면 그들은 집으로 돌려보내기가 어려웠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고자 했고, 날마다 그렇게 했습니다.
둘째로, 초대교회 신자들은 왜 그렇게 교회로 모여습니까? 그들은 왜 날마다 함께 모이기를 힘썼습니까? 그들은 왜 그렇게 떼어놓기가 어려웠습니까? 이 말을 하기 전에 부정적으로 몇 가지 말씀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오락을 즐기기 위해 모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개탄스럽게도 교인들이 안모이니까 이런 방법으로 교인들을 끌여 들입니다. 그래서 교회안에서 세상 프로그램이 많아집니다. 각자의 취미에 따라 활동하는 그런 모임들입니다. 그래서 놀이와 춤 연극 가장 많은 것은 악기교습, 여러 가지 형태들로 활동합니다. 그런 교회들은 간판만 교회일 뿐 참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 일을 행하고 매우 잘하는 세상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그런 일을 합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런 이유로 모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런저런 종류의 오락을 즐기려고 모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왜 모였습니까? 본문에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들이 서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떳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2:42절)
바로 이것을 강조해야 합니다.
본문에 열거된 활동과 관련하여 의미심장한 요소가 하나 더 있다면 그것은 열거된 순서일 것입니다. 교제가 아닌 가르침 곧 말씀이 맨 먼저 언급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맨 처음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세계 교회는 연합에 목메여 있습니다. 우선 연합하자는 데만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만나서 교리에 대해서 말하지 말자고 합니다. 무조건 모이자 다른 종교에 전도의 목적으로 다가서지 말자 라고 합니다. 이땅의 모든 종교는 같다고 말합니다. 무조건 합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발상은 초대교회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교회의 모임의 근거가 말씀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기독교의 교제가 아니라 세속적인 만남이 됩니다. 그냥 인간들의 모입이 됩니다.
그래서 첫 번째 모이는 목적이 말씀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왜 이렇게 탄생하고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사 회개와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요3:3절의 말씀처럼 성령으로 아니고는 불가능한 사건입니다. 성령으로 새롭게 변화된 놀라운 사건입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입니다. 복되신 주님은 성령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요16:13)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하네 하리라.”(요14:26)
성령님은 교사이십니다. 성령의 존재와 인격과 본성은 말씀, 즉 진리가 가장 근본이 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구원은 진리를 아는 지식에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바울은 데모데에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절)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와 가르침과 성경에 첫 번째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가장 앞세워야만 우리 자신을 바로 세울수 있고 교회를 바로 세울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딤전3:15절에 교회의 정의를 말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모름지기 진리를 수호하고 진리가 교회를 떠받치는 터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순수한 그래서 오늘 본문에 매일 모여서 교회가 해야 할 것은 말씀을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이 사실의 중요성은 초대교회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초대교회 때에도 거짓 교사들이 득실거렸고, 이단들이 난무했습니다. 그들은 제법 도덕적이고, 훌륭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가르침으로 교회를 망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전하는 잘못된 것들인지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그들의 가르침이 옳은지 그런지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분별이 가능합니까? 지도자가 선량해 보이고 인격적이라고 해서 다 좋은 지도자가 아닙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그들의 인격과 별개입니다. 한동대학교 교목중에 정말로 인격적이고 훌륭하게 보이는 목사가 있는데 동성애를 주장하는 설교를 한다고 합니다. 겉으로는 너무나 훌륭하게 보이는데 말입니다.
또한 매우 열정적이고 매우 활동적이라고 해서 그의 가르침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기준으로 적용한다면 매주 토요일마다 가정에 문을 두드리면서 책자를 나눠주고 영어를 가르쳐주는 여호와의 증인 미국인들은 우리는 뭐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그들은 개인적으로 삶이 깨끗합니다. 인격적으로 좋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나 몰몬 교도들은 오락을 즐기지 않습니다. 전도의 열심히 특심 합니다. 문전박대도 마다하지 않고 이집저집을 다닙니다. 이렇듯 전하는 사람들이 열정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위대하고도 영광스러우며 놀라운 것을 체험했다면 그가 가르치는 것이 곧 진리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그것도 그렇지 않습니다. 심리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주관적인 경험을 기준으로 진리를 판별하는 것도 위험한 부분이 많습니다. 안전한 길은 딱 한 가지 입니다. 그것은 교회는 사도와 선지자들이 터 위에 세워졌다는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2:20절)
는 말씀이 있습니다. 교회를 정의하는 또 다른 표현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사도의 가르침과 선지자의 가르침 즉 구약의 말씀 위에 교회가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교회를 사도들의 가르침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즉 성경의 진리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주님은 사도와 선지자의 가르침인 구약과 신약의 성경을 문자로 기록해두어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성경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을 체험으로만 해석하지 않고 성경의 기준 즉 선지자의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것이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항상 먼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 생명이 넘치는 교회는 반드시 사도와 선지자의 터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교회는 항상 진리의 터와 기둥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진리를 수호하고 잘못된 것을 성경으로 바로잡는 역할을 꾸준히 해 나가야 합니다. 그런 교회역사는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면 항상 개혁이나 큰 영적 부흥기가 있을 때면 언제나 가장 먼저 신앙고백을 작성하는 일을 했습니다. 초기 교회는 거짓된 가르침에 맞서서 신조를 작성했습니다. 사도신경과 아타나시우스 신조, 니테아 신조,를 비롯한 여러 가지 신조를 만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은 위기에 처한 교회의 생명을 바로잡는 노력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구원의 길을 비롯해 많은 진리들이 크게 흔들릴 때 교회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함께 모여 이단 사상으로부터 진리를 수호하는 일들을 먼저했습니다. 그래서 신조를 만들고 그것을 발표하고 고백하는 일들을 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도 개혁자들의 지도자들은 아우스브르크 신앙고백을 작성하였고, 영국 성공회도 39개 신조를 만들었습니다. 17세기때는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을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교회사의 위대한 시대마다 교회는 그릇된 가르침과 오류와 이단 사상을 바로잡거나 배격하기 위해 자신이 믿는 바를 바르게 규정하는 작업을 먼저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모여서 진리를 세우고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임에 있어서 우선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신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 힙니다. 본문에 나오는 “그들” 은 사도들이 아니라 사도들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신자입니다. 그들은 사도들로부터 진리를 전수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자신을 점검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악한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온갖 이상한 사상과 종교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인생에게 가장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가 주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교회가 진리를 수호하고 진리를 증거하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참 본질입니다. 지금 오락을 즐길 때가 아닙니다. 세상은 온통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동성애를 옹호하고 있습니다. 지구상의 가장 적 그리스도가 공산주의인데 교회의 목사라는 사람이 교인이라는 자들이 공산주의를 옹호하고 있습니다. 분별을 못합니다. 그리고 온통 쾌락을 일삼고 있습니다. 지옥으로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럴 때 더욱 교회가 본연의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진리를 수호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회처럼 이단으로 매도당하는 것이라고 해도 끝까지 진리를 수호해야 합니다. 우리 감리교 웨슬레 목사님처럼 끝까지 교회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교회의 책임을 다해야 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처럼 말씀을 진리를 열심히 배우고 새겨야 합니다. 그들은 날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원했습니다. 오늘 이시간 여러분들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왜 사도들의 가르침을 원했을까요? 그 한가지 이유는 그들 안에 본성이 새로워 졌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성령으로 변화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믿음의 사람들은 이렇게 살 것은 권고하고 있습니다.
2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은 항상 그런 욕구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우리는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런 사모함으로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까?
지금 생각하면 참 부실하기 그지 없었지만 과거 제가 초등학교 중학교 때 진리의 핵심도 제대로 전하지도 안는데 원맨쇼같이 얼마나 만담같이 부흥회를 했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이 미어터졌습니다. ZZZZ
왜 그랬을까요? 성령으로 변화 받으니까 말씀이 그립습니다. 진리가 너무나 목말랐습니다.
여러분 안에 이런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오늘날 너무나 말씀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기독교 서점도 도시마다 있습니다. 각종 라디오나 tv 매체 속에 말씀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나 정작 영혼의 갈증을 해소해주는 말씀은 없습니다.
11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오늘날 신자들은 영적 기갈 속에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는 그것 조차도 모르고 삽니다. 사모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것을 느끼는 사람이 얼마나 될가요? 죽은 시체위에 아무리 무거운 것 놓은들 그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죽은 영혼들이기 때문에 말씀을 듣지 못해도 기갈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생수와 빵과 같습니다. 그래서 겔47장에 성전 문지방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생수가 발목과 허리과 가슴과 창일 하게 이루어 죽은 강이 살아나고 물고기가 넘실거려 수 많은 어부들이 강가에 고기를 잡는 생명의 역사를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연합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리 가운데 거하지 않는다면 연합해도 아무런 일을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진정한 신자와 교회가 될려면 갓난 아이들처럼 순전하고 신령한 젖에 굶주리고 목말라 하느냐입니다.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신자들은 과거 자신의 상태와 삶의 방식이 전적으로 자신들의 무지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의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세상 지식의 무지가 아니라 진리의 무지가 가장 큰 적이고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많이 배워야 한다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바른 신앙은 진리를 아는데서 시작됩니다. 구원도 진리되신 예수님을 아는데서 옵니다.(요5:39절 17:3) 믿음의 성장도 진리를 알고 배우는 데서 가능합니다.(롬10:17,벧전2:2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진리를 모르니까 진리위에 서 있지 못합니다. 마치 기초가 튼튼하지 못한데 그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만 꾸준하게 진리의 가르침을 받아야 변화됩니다. 한번 은혜 받았다고 해서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아이들이 엄마의 젖을 먹듯이 말씀의 진리를 섭취할 때에 믿음이 자라나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를 알아야 배드로 전서3:15절의 말씀처럼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진리를 설명하고 가르칠 수가 있습니다. 자심이 믿고 있는 기 놀라운 구원의 신앙을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제자 디모데에게 이런 종류의 가르침을 굉장히 많이 증거 하고 있습니다.
딤후2:15절에
“너희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그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하나님앞에 자신을 드리기를 힘쓰라.”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14절에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울 것을 알며...”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악해서 진리를 제대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딤후4:4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가르침은 모이는 일 중에 가장 우선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자라납니다.
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3:18절)
가르치는 진리의 말씀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래야 성장합니다. 그래야 남들에게 그리스도의 소망의 이유를 전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진리를 아는데 얼마나 갈망하고 있습니까? 지난 10년의 세월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때보다 진리를 더 많이 알고 자라났습니까? 지난 10년 동안 은혜 안에서 자라나고 있습니까? 성장했습니까? 성장은 교회의 본연의 사명에 충실할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가르침과 진리의 말씀이 중요하고 가장 우위에 있어야 합니다.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왜 입니까? 진리의 기둥과 터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진리의 빛을 밝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신자들에게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빛들로 나타나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야”(빌2:15-16절)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매우 구체적일 뿐 아니라 모든 사도가 똑같은 것을 가르쳤습니다. 나중에 사도가 된 바울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전래 받은 것을 전한다고 말했습니다.(고전15:3절) 바울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처럼 사도들의 대열에 합류했지만 그들과 똑같은 가르침을 전하였습니다. 신약성경 전체가 똑같은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서로 충동되거나 모호한 것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진리안에 거해야 합니다. 이 진리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런 자들은 참된 복 받은 자입니다. 영적 갈증을 느껴야 사모합니다. 그래서 마5:3절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선언합니다. 여러분 이 가난함에 여러분 안에 일어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 안에 잇는 자들은 반드시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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