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덕정
옛 제주시의 중심부인 삼도2동에 있으며 보물 제322호로 등록되어 있다.
1901년 신축교안 때에 이곳 광장에서 수많은 교우 및 양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1886년 한·불조약을 계기로 박해 정책은 막을 내렸지만
박해의 어떤 사건은 그 규모가 공식적인 박해를 능가하는 예를 보이기도 했다.
부패한 관리와 완고한 유생들, 혹은 무당 등의 인습에 젖은 지방민과
천주교인들과의 충돌이 결국에는 박해라는 양상으로 바뀌었고
그 중의 하나가 1901년 신축년에 발생한 제주도의 신축교안이다.
이 때에 관덕정 등지에서 교우를 포함한 양민 700여명이 피살되었고
관덕정 광장에 널려 있던 시신들은 별도봉과 화북천사이에 옮겨져 버려지듯 가매장 된 상태로 있었다.
그 중 연고가 있는 분묘는 이장해 갔고 무연고 시신들만 이곳에 있었다.
1903년, 조정으로부터 이 시신들을 매장할 자리로 황사평을 이양받아 이장하게 되었다.
황사평
제주의 무명 순교자들이 잠들어 있는 천주교 공원묘지이다.
선교사들이 토속신앙으로 행해지고 있던 미신행위를 근절시키고 여러가지 도적적인 생활을 요구하는
천주교 교리를 전파하는 과정에서, 외래 종교에 대한 도민들의 반감이 생기게 되었고.
구한말 왕실의 재정확보를 위한 과중한 조세정책이 또한 도민들에게 큰 부담이 되는 등, 여러 가지 시대적 요인들로
인하여 제주도민 사회에는 외부세력에 대한 저항감이 뱅배 해졌다.
이러한 저항감이 결국 1901년 신축년에 대정현에서 폭발하여 '신축교안'이라는 비극적인 민란으로 번지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수 백 병의 천주교 신자와 양민들이 희생되었다.
사태 수습 후 천주교회는 조정으로부터 황사평 땅을 보상받았고, 연고없는 28구의 유해를 모아 이곳에 안장하였다.
복자 김기량 순교현양비
1816년 현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 출신인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는 제주도의 첫 가톨릭 신자이며 순교자이다.
소규모 무역상이었던 그는 1857년 항해도중 풍랑으로 표류하다가 홍콩에서
파리 외방전교회에 가게되어 영세 입교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복음을 전파하였다.
1866년 거제도에 갔다가 체포되어 51세의 나이에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며
다시 살아날 것을 염려한 관허들의 의하여 가슴에 대못이 박히는 고통을 받고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짧은 일정으로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리라는 심정으로 달려간 곳...
용수(성 김대건 신부 제주 표착 기념성당)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1845년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은 후
일행 13명과 함께 '라파엘 호'를 타고 서해 바다로 귀국하는 길에 풍랑을 만나 표착한 곳.
그래서 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 기념성당과 기념관이 건립이 되었고 전문가에 의해 복원한 라파엘호를 전시하고 있다.
김대건 신부가 간직하였던 성모님 상본에 있는 그 성모상이 야외에 건립되어 있다.
너무나 유명한 이 곳은 천주교 신자들이 제주에 오면 자주 들르는 곳이다.
특히 단체로 많이 오는 곳이라 개인적으로는 세번째 방문.
대정(정난주 묘)
다산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장녀로서, 15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에 급제한
황사형 알렉시오의 부인이며 아들의 자유를 위해 추자도 남기고 온 장본인이다.
그의 남편 황사영은 1801년 신유박해때 배론으로 피난하며
구원을 요청하는 백서를 작성하였고 그 백서가 발송되기 직전에 체포되어 능지처참으로 순교되고
그의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로 아내 정난주는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 과정에서 정난주는 아들 황경한을 추자도에 두고 온다.
정난주는 노비신분으로도 37년동안 신앙을 지키다가 66세에 세상을 떠났다.
제주의 신자들은 정난주 마리아를 신앙의 증인으로 존경하며
그의 묘소를 성지로 꾸미고 그 신앙의 얼을 기리고 있다.
과거 이곳을 모르고 갔다가 놀랐던 곳.
새미 은총의 동산
성 이시돌 목장내에 있는 새미 은총의 동산은
삼위일체 대성당, 야외 예수님의 생 및 십자가의 길 동상,
야외 묵주기도의 길, 성모동굴 등이 마련된 기도하는 곳이다.
https://youtu.be/UDn8NcLuLQ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