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 평일도 금일초교 너도밤나무
청해는 완도의 또 다른 이름이며, 우리 민족이 대해양 시대를 연 기상이다. 828년 신라 흥덕왕 때다. 장보고는 1만 병력을 거느리고 완도의 청해에 청해진을 열었다. 서남해안의 왜구와 해적을 소탕하여 바닷사람들이 노예로 팔려가는 걸 막고 중국과 일본은 물론 서아시아의 페르시아와 아라비아에 이르는 해상 무역로를 열었다. 왜구와 해적이 없는 맑고 깨끗한 바다 청해는 그렇게 해상왕국을 세운 우리 민족의 자랑스런 대해양 시대의 이름이다. 그러나 846년 신라 조정이 보낸 자객 염장에 의해 장보고가 암살되고, 851년 청해진 일대의 주민 3만여 명은 지금의 김제인 벽골제 제방 보수 공사장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이때 일부 유민이 지금의 신안인 압해현에 자리 잡았다. 그중 능창이 압해도에서 이웃 섬의 장정을 모아 장보고 이후 다시 출몰하는 해적을 물리치고 청해의 뜻을 압해로 잇는다. 압해는 ‘바다를 누른다’ 이다. 왜구와 해적으로부터 바다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니, 청해와 같은 말이다. 그러나 910년 태봉국을 세운 궁예의 장수 왕건에게 붙잡혀 청해를 이은 압해의 꿈도 한낱 바다 안개로 스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장보고의 청해와 능창의 압해는 영원히 사라진 게 아니다. 바다의 수호신인 이순신의 후예 우리 해군이 진해에서 바다를 지키고 있으니 말이다. 진해는 ‘바다로 나아감’ 이니 청해와 압해의 정신과 기상을 잇는 말이다. 그래서 또 청해와 압해 진해는 같은 말이기도 하다.
이 청해와 압해, 진해의 시대의 첫 문을 연 곳이 완도이다. 이 완도에서 교육을 ‘완도 의(義) 교육’이라 내세운 이유이다. 이 의교육이 현시점에서 절실한 것은 청해, 압해, 진해를 한마디로 말하면 의(義)이기 때문이다. 왜란과 한말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일어선 의병은 바로 이 의(義)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바다를 얼마나 잘 지켰는지 지난날을 되돌아볼 때 아쉬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고려 원종 때인 1270년 5월부터 1273년 4월까지의 삼별초 항쟁 시기에 서남해안의 모든 섬에 공도령이 내려졌다. 섬 주민을 모두 육지로 이주시켜 섬을 비우게 했다. 이 공도령은 1352년 공민왕 원년에 해금되어 주민 입주가 허용되었다. 그러나 조선조 들어서 들끓는 왜구 때문에 1449년 세종 3년에 다시 공도령이 내려졌고, 임진, 정유 7년 왜란이 지나간 선조 41년인 1608년에야 해금령이 내려졌다.
이 일로 공도령의 제약을 받지 않은 제주도와 강화도, 공도령이 일찍 풀린 진도와 1522년 중종 17년 종3품 첨사들이 지킨 완도 가리포진을 빼곤 서남해안의 섬은 왜구나 몰래 숨어들어 간 유민들, 해적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로 인해 수천 년 이어져 오던 고유의 섬 문화가 거의 사라져버렸으니 참 아쉽다. 다만 이제 완도에서 문을 연 청해와 그 뒤를 이은 압해, 그리고 진해가 다시 완도 의(義) 교육을 통해 새로운 대해양 시대를 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공도령과 해금령이라는 터무니없는 일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되겠다.
그렇게 청해로 대해양 시대의 터문을 연 완도는 빙그레 웃는(莞) 섬 이름처럼 남해의 여러 섬을 아우르며 새 시대의 터문을 의(義)로 열고 있다. 그 완도의 섬 중 오랜 전화의 풍파에도 평화로운 섬 평일도의 금일초교에 백여 살 아름드리 너도밤나무가 있다. 교육만이 미래를 연다는 믿음으로 1921년 개교하며 심은 나무이다. 그러기에 이번에 학교를 재신축하면서 학교와 아이들을 지켜온 이 나무를 살리기 위해 운동장이 조금 좁아지는 걸 택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의로움이다. 금일초교의 수호신 나무를 우러르며 청해에서 대해양 시대의 꿈을 다시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