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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을 펴는 방도
“세종의 위민(爲民)하는 마음은 지극하였다. 정책을 폄에 있어 급하게 정하고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시행착오를 거치더라도 백성들에게 이롭게 할 수 있는 일들을 입안하고 시험하고 토론하여 그래도 성에 차지 않으면 다시 시작하고 해서 정책을 펴나갔다. 세종의 이러한 천품(天稟)은 신하들에게도 이어졌다. 풍속의 교화와 산업 · 제도 · 관리임용 등의 문제를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연구진의 활발한 운영과 왕 스스로의 학자적인 자세로 문제를 풀어나갔다.”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의 ‘선원세계’에서>
세종대왕의 생애
조선왕조 5백년 역사에 있어 아니, 우리나라의 모든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들라고 하면 대개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목하는 이가 있다. 한민족의 가슴속에 찬란한 문명과 영화를 꽃피웠던 시대의 주인공으로서, 만백성의 어버이로서 추앙을 받는 바로 조선의 4대째 왕인 세종대왕(이하 세종이라 함)이다. 그의 생애는 개인의 삶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공인의 삶으로서도 모든 영광을 안고 있었다.
태조 6년인 1397년 4월 초10일, 하늘은 맑고 인왕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은 며칠전에 내린 비로 그 수량이 많음을 뽐내기라도 하듯 시원스레 소리를 내고 있었다. 더구나 수목은 호랑이가 자주 출몰할 정도로 깊고 푸르렀다. 이러한 풍광이 합쳐진 준수방(俊秀坊)은 궁실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있었다. 바로 이곳 준수방에 위치한 태종의 잠저에서 세종은 정안군 즉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고고한 울음을 터뜨리며 탄생하였다.
풍운의 시대는 아버지 태종을 사직의 책임자로 만들었고, 태종은 그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혼미한 정국을 자기의 의도대로 만들어 나갔다. 세종의 유년기는 이러한 태종의 품속에서 많은 것을 보면서 배워나갔다.
세종이 12살이 되던 태종 8년 2월 11일에 부왕이 그를 충녕군(忠寧君)에 봉하였다. 또한 같은 달 16일에 당시 우부대언(右副代言)인 심온(沈溫)의 딸을 맞아들여 가례(嘉禮)를 올렸다. 그녀는 1395년 (태조 4) 9월에 경기도 양주(楊州) 사제에서 태어났으며, 가풍을 이어받아 재색을 겸비하여 정숙하였다. 당시 12살인 세종보다 두 살이 위였다. 가례를 올린 다음 날 그녀는 경숙옹주(敬淑翁主)로 봉하여졌고 1417년 (태종 17)에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봉하여졌으며 1418년에 세종이 즉위하면서는 경빈(敬嬪)으로 책봉되었다. 얼마 안되어 공비(恭妃)로 승진되었고 1432년 (세종 14) 왕비가 되었으니 바로 소헌왕후(昭憲王后)인 것이다.
충녕은 대단한 호학불권(好學不倦)의 학구파였다. 이미 왕실에 소장된 서적을 어느 누구보다도 많이 읽고 익혔다. 또한 아무리 날이 덥거나 추워도 개의치 않고 하루종일 독서에 열중하곤 하였다. 이것은 훗날 세종으로 하여금 눈병으로 고생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만큼 그는 주위에서 건강을 돌보면서 독서를 하라는 충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독서에 몰두하였 던 것이다.
큰형인 양녕은 왕세자로서 태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어 있었지만 그의 돌출된 행위는 태종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제왕학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하고 오락에 신경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녕의 소행은 마침내 여러 신하와 원경왕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종으로 하여금 왕세자를 폐하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왕세자를 폐한다는 것은 역사에 드문 일이다. 하지만 이제 왕조의 안정과 발전을 모색하여야 하는 창업단계의 왕조를 수성의 단계로 바꾸어야 할 때 필요한 인물로서는 부적격한 것이었다. 태종이 닦아놓은 왕업이지만 아직도 불안요소는 많았다. 그 태종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이제 여기저기 일을 벌여놓은 것을 하나하나 정리하면서 그 기틀을 잡아나갈 군왕이 있어야겠다고 여겼다.
태종의 생각에는 적합한 후계자로는 셋째인 충녕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학문적인 면에서나 인간적인 면에서나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태종은 아직 그를 염두에 두고 있을뿐 세자를 교체하겠다는 의사를 밖으로 들어낼 수는 없었다. 세자와 충녕을 가르치는 이들에게 불쑥불쑥 그들의 학문의 정도가 어떤가를 묻기도 하였다. 세자와 충녕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일들이 많이 생기면서 한해 한해가 지나갔다. 세자인 양녕은 한편으로 반성하고 다시 학문에 정진하기도 하였지만 잠시일 뿐이었다. 반면 충녕은 주위로부터 왕위에 관한 이야기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진력할 뿐이었다.
1413년인 태종 13년 충녕의 나이 열일곱이 되던 해 태종은 그를 대군(大君)에 봉하였다. 어찌보면 세자인 양녕을 후사로 확정한 것인 듯 싶었다. 그러나 충녕이 스물이 되던 1416년 7월에 태종은 경복궁 경회루에서 주연을 베풀었다. 태종은 여러 신하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 서 세자인 양녕과 충녕을 비교하면서 세자를 꾸짖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공공연하게 둘을 비교하여 말하는 일이 점차 많아졌다. 이제 태종의 의도가 점차 확연하게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진정한 제왕지재가 누구인가는 누가보아도 알 수 있었다. 다만 장자인 양녕을 세자에서 폐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왕조의 근본 자체를 뿌리부터 흔드는 중대사로 인식하는 사회통념을 여하히 대처할 것인가였다. 하지만 심사숙고 후에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고 행동에 옮기는 태종인지라 이에 대한 대책은 모두 마련된 뒤였다.
마침내 1418년 6월 초2일에 태종은 조정에 양녕을 세자에서 폐하는 일에 대해 의논하게 하였다. 사간원에서만 세자인 양녕을 뉘우치게하여 그 자리를 회복하게 할 것을 청할 뿐이었다. 다음날 결국 태종은 세자를 양녕대군(讓寧大君)으로 강봉하고, 경기도 광주(廣州)로 추방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는 결단을 실행하였다. 태종은 이때 세자를 폐하면서 “세자 제((禔))가 간신(奸臣)의 말을 듣고 함부로 여색(女色)에 혹란(惑亂)하여 불의(不義)를 자행(恣行)하였다. 만약 후일에 생살여탈(生殺與奪)의 권력을 마음대로 한다면 형세를 예측 하기가 어려우니, 여러 재상(宰相)들은 이를 자세히 살펴서 나라에서 바르게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조정에서 누구를 세자로 세울 것인가에 대해 양녕의 아들로 할 것인가, 아니면 인망이 있는 어진 이를 골라야할 것인지 의논이 분분하였으나 최종 결정은 태종의 결심여하에 있었다. 태종의 의중은 이미 충녕에게 있었다. 이때 세종의 나이 약관을 넘은 스물둘의 장성한 나이였다. 또한 누구 못지않은 학문과 경륜, 지식을 갖춘 영재이기도 하였다. 태종은 이러한 충녕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그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어 충녕이 갖춘 인격과 학문이 어느정도였는가를 알 수 있게 해주고 있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라에 훌륭한 임금이 있으면 사직(社稷)의 복(福)이 된다.'고 하였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은 성품이 심히 곧아서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한다. 내 말을 들으면 빙긋이 웃기만 할 뿐이므로, 나와 중궁(中宮)은 효령이 항상 웃는 것만을 보았다. 충녕대군 (忠寧大君)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하여, 비록 몹시 추운 때나 몹시 더운 때를 당하더라도 밤이 새도록 글을 읽으므로, 나는 그가 병이 날까봐 두려워하여 항상 밤에 글 읽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나의 큰 책(冊)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 또 치체(治體)를 알아서 매양 큰 일에 헌의(獻議)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고, 또 생각 밖에서 나왔다. 만약 중국의 사신을 접대할 적이면 신채(身彩)와 언어동작이 두루 예에 부합하였고, 술을 마시는 것이 비록 무익하나, 그러나 중국의 사신을 대하여 주인으로서 한 모금도 능히 마실 수 없다면 어찌 손님을 권하여서 그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느냐?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 또 그 아들 가운데 장대한 자식이 있다. 효령대군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니, 이것도 또한 불가하다. 충녕대군이 대위를 맡을 만하니, 나는 충녕으로서 세자를 정하겠다." 라고 하여 그의 인간됨과 학문, 사신을 대하는 풍도, 예절, 왕도 등을 들어 세자로 정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중외가 모두 인정하는 바였다. 특히 명의 사신 황엄(黃儼)은 충녕대군이 매양 똑똑하고 밝은 것을 칭찬하여 말하길, “영명하기가 뛰어나 부왕(父王)을 닮았다. 동국(東國)의 전위(傳位)는 장차 이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다.”라고 한것은 세종의 인물 됨됨이가 군계일학 격으로 뛰어났음을 지적한 것이다.
같은 해 8월에 태종은 나라의 재변(災變)과 몸의 숙질(宿疾)을 들어 세자 충녕에게 전위(傳位)의 교서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
“왕은 말하노라. 내가 부덕한 몸으로 태조의 홍업(洪業)을 이어받아 아침 저녁으로 삼가고 두려워하여 정성을 가다듬어 잘 다스리기를 도모한 지 대개 이미 지금 18년이 되었다. 은택(恩澤)이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여, 여러 번 재변이 일어났고, 또 몸에 숙질이 있었는데 근일에 이에 심하여 청정(聽政)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세자가 영명(英明) 공검(恭儉) 하고, 효제(孝悌) 관인(寬仁)하여 대위(大位)에 오르기에 합당하므로 영락(永樂) 16년 무술(戊戌) 8월 초 8일에 친히 대보(大寶)를 주어 기무(機務)를 오로지 맡아보게 하고, 오직 군국의 중요한 일만은 내가 친히 청단(聽斷)하겠다. 아아! 너희 중외 대소신료들은 모두 나의 지극한 마음을 몸받아 한 마음으로 협력하고 도와서 유신(維新)의 경사를 맞이하게 하라.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니, 생각하여 마땅히 그리 알라.”[<태종실록>권36 18년 8월 정해(10)] 라고 하면서 아직 군국의 일이 안정되지 못했고 세자가 이 일을 감당하기엔 부족하다고 여겨 스스로 군국의 일을 도맡아 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충녕이 세자로 책봉된지 얼마 되지 않았고 또 왜구로 인한 변방의 불안요소, 세종의 군권(軍權) 장악력이 미흡하다는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태종의 판단은 당시의 정세를 볼 때 옳은 것이었다. 특히 폐세자 되어 광주에 내려가 있는 양녕을 따르는 세력과 세종의 즉위에 혹 불만을 품은 세력 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주도면밀한 결단이라 하겠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 데에는 양녕, 효령 세 형제 간의 우애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즉 처음에 양녕이 미친 체하고 방랑하니 효령대군은 장차 양녕대군이 폐하게 될 것을 짐작하고, 깊이 들어 앉아 삼가고 꿇어 앉아 글을 읽었다. 대개 그 스스로 생각하길, 양녕이 폐함을 당하면 다음 차례로 효령 자신이 세자가 될 것이라는 의도에서 였다. 그러던 중 양녕이 이를 짐작하고는 들어와서 발로 차면서, “어리석다. 네가 충녕이 성덕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였더니, 효령이 크게 깨닫고 곧 뒷문으로 나가 절간으로 뛰어가서는 두손으로 북 하나를 종일 두드리니 북가죽이 부풀어 늘어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는 곧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던 것이다. 두 형이 세종을 위하는 마음이 실로 이러하였고, 양녕 자신이 부왕인 태종의 뜻이 그에게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양녕대군 · 효령대군이 스스로 제위를 포기할 정도 인품은 오히려 그 정치적 상황은 차치하고도 더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태종의 배려와 세종 자신의 능력으로 즉위에 따른 모든 잡음은 없었다. 세종은 즉위하면서 8월 11일에 다음과 같은 교서를 근정전에서 반포하였다.
“… 일체의 제도는 모두 태조와 우리 부왕께서 이루어 놓으신 법도를 따라 할 것이며, 아무런 변경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거룩한 의례에 부쳐서 마땅히 너그러이 사면하는 영을 선포하노니, 영락 16년 8월 초10일 새벽 이전의 사건은 모반 대역(謀叛大逆)이나 조부모나 부모를 때리거나 죽이거나 한 것과 처첩이 남편을 죽인 것, 노비가 주인을 죽인 것, 독약 이나 귀신에게 저주하게 하여 고의로 꾀를 내어 사람을 죽인 것을 제외하고, 다만 강도 외에는 이미 발각이 된 것이나 안 된 것이거나 이미 판결된 것이거나 안 된 것이거나, 모두 용서하되, 감히 이 사면(赦免)의 특지를 내리기 이전의 일로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이 사람을 그 죄로 다스릴 것이다. 아아, 위(位)를 바로잡고 그 처음을 삼가서, 종사의 소중함을 받들어 어짊을 베풀어 정치를 행하여야 바야흐로 땀흘려 이루어 주신 은택을 밀어 나아가게 되리라.”[<세종실록>권1 즉위년 8월 무자(11)] 라고 하여 즉위에 따른 제도의 변경을 없이하였다. 대사면령을 내려 새시대의 시작임을 천명하였던 것이다.
태종은 세종에게 위의 두 형들과 우애있게 지낼 것을 당부하였고, 세종 또한 재위 기간 중에 각별하게 양녕과 효령대군에 대한 우의를 지켰다. 신료들이 그들의 잘못을 간하더라도 극히 사리에 벗어나지 않는 한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모두 덮어두고 그들을 감싸주었던 것이다. 태종이 돌아간 후에 세종은 또한 생각하기를, `형 양녕대군이 나이가 이미 많으니 반드시 소년 기습(少年氣習)이 없어졌을 것'이라 여겼다. 이에 서울 집으로 불러 돌아오게 하여 날마다 친히 대접하되, 조금도 혐의하거나 간격이 없게 하였다. 이렇게 세종은 여러 신하들이 비록 옳지 않음을 고집하여도, 왕이 모두 듣지 않고, 두 형을 섬기되, 반드시 인정과 예절을 다하였고, 여러 아우를 대우하기를 또한 은혜와 사랑하기를 다하였던 것이다.
또한 종실(宗室)의 여러 친척에 이르기까지 자주 불러 보면서 술상을 차려 흡족하게 즐겁도록 하였으며, 평소에 친근하지 않아 밖에서 한가롭게 사는 사람에게도 복호(復戶)하게 하거나, 세금을 덜어주게 하고, 처음으로 종학(宗學)을 설치하여 종적(宗籍)에 속한 자를 모두 학문을 배우게 하였으며, 비첩(妃妾)을 대우하는 데 그 명분을 엄하게 하여 모두 화목하게 하니, 집안의 도리가 바로잡혀 이간질하는 말이 없게 하였다.
상왕인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넘겨준 뒤 포천(抱川)에 거둥하였을 때 시종하던 신하 곽존중(郭存中)에게 말하길, “내 나라를 맡길 사람을 얻어 산수 사이에 한가히 노니 걱정없는 이로 이 세상에 짐 하나 뿐이다. 역대의 제왕들의 부자(父子) 사이를 보면 실로 나의 오늘과 같은 이 없었느니라." 하였다.
태종에게는 그 자신이 아끼는 백마(白馬)가 있었다. 한 번은 정종이 피서하기 위해 광나루에 머무를 제 태종과 세종이 그를 위로하여 주연을 즐기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헤어지게 되었다. 이 때 태종은 자신이 그토록 아끼던 백마를 보살피는 관원에게 명하여 안장을 갈아 세종에게 주도록 명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배려의 일면이고 자신의 수족을 떼어줄 정도로 그를 위하였던 것이다. 세종 또한 그 바쁜 정무를 처리하는 와중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태종에게 문안인사를 여쭈니 태종이 부담스러워 격일로 오도록 말할 정도였다.
또한 세종 원년인 1419년 6월에는 부왕인 태종과 이종무(李從茂) 주도로 그 동안 고려말 이래로 해안지방과 내륙지방까지 끊임없이 노략질하던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였고, 이듬해 윤1월에는 대마도를 경상도 계림부에 편입시켰다. 태종의 치세동안 잘 가다듬은 군사와 오랫동안 왜구토벌을 준비한 까닭에 왜구 근절을 위한 대마도 정벌은 성공적이었다. 이는 태종 · 세종 2대에 걸친 태평성세의 길이 이제 탄탄대로에 접어든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침내 세종 때에 우리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왕도정치, 위민정치의 찬란한 문화가 이룩된 것이었다.
세종은 왕위에 즉위한 뒤에도 결코 학문을 게을리하거나 정사에 미룸이 없었고, 또한 효성도 지극하였다. 왕은 매일 새벽 4고(四鼓) 즉 새벽 2시 무렵에 일어나서, 신명(晨明)에 군신의 조참을 받았던 것이다. 군왕이 솔선하여 이토록 부지런함을 보이니 신하들이 게으름을 피우거나 일을 처리함에 완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모든 정사를 처결한 연후에는 윤대(輪對)를 행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물어 조그만 일에도 귀를 기울였다. 또한 수령으로 나가는 자를 불러보고 면담하여서는, 그들에게 간곡하게 일러 말하길, 형벌 받는 백성을 불쌍하게 생각하며, 백성을 사랑하라는 뜻을 타일렀다.
경연(經筵)에 나아가 세종은 성학(聖學)에 잠심(潛心)하여 고금을 강론한 연후에 내전(內殿)으로 들어가서 편안히 앉아 글을 읽었고,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았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제왕이 된 후까지 끊임없이 글을 읽고, 유신들과 토론하니 읽지 않은 글이 없었으며, 무릇 한 번이라도 귀나 눈에 거친 것이면 종신토록 잊지 않게 되었다. 왕은 경서(經書)를 읽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백 번을 넘게 읽고, 제자백가서와 역사서는 반드시 30번을 넘게 읽고, 성리(性理)의 학문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고금에 모든 일을 널리 통달하였던 것이다.
1420년 세종이 24살이 되던 해 7월, 그 무덥던 날씨가 한풀 꺾이어 가을바람이 인왕산 자락에서 천천히 내려와 제법 서늘하게 만들었다. 하늘은 높고 푸르름을 자랑이라도 하듯 올려보아도 끝이 없었다. 궁궐안에도 그 동안 정성스레 돌보아 왔던 수목들이 제각기 자리를 잡아 잘 정돈되어 위엄과 조화, 장중함을 주었다. 그러나 세종과 소헌왕후, 그리고 내궁사람 들의 얼굴은 밝지 못한 채 부산하게 오갔다. 약내음이 진동하였다. 어머니 원경왕후의 병이 더욱 심해진 것이다. 어려서는 자신을 끔찍이 위하였지만 장성한 뒤로는 오히려 엄격함으로 대해 주어 약간은 섭섭해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자신이 큰형인 양녕을 제치고 제위에 오른 탓이리라고 여겼다. 그래도 어머니에 대한 효심은 극진히 하였건만 병은 더욱 심해만 갔다. 그러던 모후가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세종은 제왕인 몸으로 부르짖고 슬퍼하며 수일동안 음식을 들지 않았다. 더구나 늦장마가 오려는 탓인지 날씨가 덥고 습기가 있어 몸에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평상을 버리고 짚자리에 엎드려 밤낮없이 통곡하였다. 옆에 있던 신하들이 기름종이로써 그 밑에 깔아 습기를 없애려 하였지만 세종은 이를 알고 걷어버리라 하였다. 더구나 큰비가 내려 물이 세종이 자리한 곳으로 스며 들었지만 오히려 옮기지 않다가 신하들이 굳이 옮기기를 청하자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 날이 밝자 곧 자리로 돌아왔다.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이토록 대단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2년 뒤인 1422년 5월 초 10일에 아버지인 태상왕 태종이 연화동구(蓮花洞口)의 이궁(離宮)에서 승하하였다. 세종은 태상왕의 병환이 있은 이래로 약과 음식 등을 모두 손수 받들어 드리었고 병세가 위독해지자 밤이 새도록 그 곁에서 모시되 일찍이 옷끈을 풀고 눈을 붙인 적이 없자 신하들이 모두 혹 몸이 상할까 걱정하였다. 그러나 이런 정성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그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하고 아들 세종의 걱정어린 눈빛을 뒤로하고는 먼 길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용안에 어린 미소는 누구보다도 세종을 믿는다는 자애로움을 담고 있었다.
이제 세종의 지위는 굳건해져 있었다. 이제 약관을 지난 20대 중반의 나이였지만 그 현명함과 결단력, 학문적 성취에 있어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뒤지지 않았다. 제왕의 위엄을 모두 갖추었던 것이다. 그 동안 태상왕인 태종의 배려를 받아왔지만 서서히 왕 자신이 스스로 군권을 장악해 나가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비록 말씀이 적었지만 어느 누구도 왕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던 것이다.
왕비 소헌왕후 심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세자는 부왕의 영향과 그 스스로 성왕을 닮으려는 탓인지 제왕학에 정진하였다. 부왕인 세종이 그 동안의 격무와 독서로 건강을 해친 탓에 눈병이 나게 되었다. 온천과 약수가 눈에 좋다는 신하들의 말에 지방으로 여러차례 행차하였다. 그 동안 도성에서는 세자로 하여금 대신하여 일을 보게 할 정도로 믿음직하게 성장해 있었다. 세종의 눈병은 그러나 약간의 차도가 있었을 뿐 낫지는 않았다. 하지만 궁으로 돌아와서도 세종은 경전과 사서 등을 결코 손에서 놓지 않았다. 눈병이 심하여도 잠시 쉬었을 뿐이었다. 이제 세자와 왕자들, 그리고 공주들은 잘 자라고 있어 문제될 것이 없었다.
여진과의 문제도 김종서 등을 보내어 변경을 안정케 하였다. 왜구들도 세종의 치세에 감복해서인지 큰 문제를 일으키지 못하였다. 또한 세종의 위민하는 마음은 지극하였다. 정책을 폄에 있어 급하게 정하고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시행착오를 거치더라도 백성들에게 이롭게 할 수 있는 일들을 입안하고 시험하고 토론하여 그래도 성에 차지 않으면 다시 시작하고 해서 정책을 펴나갔다. 세종의 이러한 천품은 신하들에게도 이어졌다. 풍속의 교화와 산업 · 제도 · 관리임용 등의 문제를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연구진의 활발한 운영과 왕 스스로의 학자적인 자세로 문제를 풀어나갔다. 태평성대의 길이 환하게 열렸던 것이다.
1443년 이제 장년의 나이에 이른 세종은 갈수록 몸이 편안치 않았다. 특히 이 해에 들어와서는 거동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지병으로 앓아온 눈병은 좋다는 약을 복용해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이렇게 악화된 눈병은 이미 왕의 나이 41세 때에도 있어 정무를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8살의 나이로 세자가 된 뒤 충실하게 학문에 정진하고 왕도를 닦아온 큰 아들 세자는 벌써 30살이나 되어 있었다. 그의 행동 됨됨이나 예절과 생각함은 세종의 뜻에 거슬림이 없었다. 세종은 이렇게 장성한 세자에게 일단 서무(庶務)를 결재시키려고 하였지만 대신들이 역사에 없던 일이라고 극구 반대하였다. 그래서 일단은 이러한 결정을 거두어 들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세종이 전적으로 정사를 돌보기에는 건강이 허락치 않았다. 1445년 세종은 세자에게 마침내 왕을 대신하여 서정을 집행토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세자는 즉위하기 전에 실제 정치 경험을 쌓아나갔다.
세자인 문종에게 일찌기 섭정을 행하게하여 정치적 경험을 쌓게 한 점이라든가 만년에 모든 정치운영을 세자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지게 한 점, 둘째인 수양대군과 셋째인 안평대군에게 그를 잘 보좌하도록 부탁한 점 등은 세종의 후계왕에 대한 정치적 배려에서 취해진 조처였다. 즉 세자의 건강이 염려되어 이를 보완시키려는 현명한 세종의 판단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역사는 그의 의도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세종 스스로는 성왕이었지만 결국 부왕인 태종 때에 일어났던 참담한 비극이 다시 문종의 사후 단종년간에 벌어지게 된 것이다.
1446년 3월, 온 천지에 봄기운이 활짝 만개하여 부드러운 온기가 궁실에 가득차 있었다. 세종의 나이 벌써 쉰이 되었다. 이제는 세자에게 정무를 넘기고 어느정도 건강을 되찾아 약간의 운신이 가능하였다. 왕비인 소헌왕후 심씨는 그러한 왕을 곁에서 돌보느라 오히려 자신의 건강을 돌 볼 틈이 없었다. 오직 세종을 위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달 들어서는 몸이 아주 좋지 않아 궁실에 몸져 눕게 되었다. 왕후의 나이도 벌써 쉰둘이나 되었다. 몸조리하기 위해 수양대군의 집으로 일단 몸을 옮겼다. 하지만 이미 왕후의 체력은 병마를 감당할 능력이 되지 못하였다. 세자와 수양대군이 극진히 병간호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세종도 근 사십년간의 고락을 같이 해 온 소헌왕후의 병환을 그렇게도 걱정했건만 왕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었다.
결국 3월 24일 봄빛이 완연히 세상을 뒤덮던 날, 세종과 함께 고락을 같이 해 온 소헌왕후는 세종과 자식들의 앞에서 병색으로 창백한 하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면서 남편과 자식들을 남기고 승하하였다. 잠시의 고요가 찾아왔다. 이윽고 슬픔이 온 방안을 가득 메우고는 곡성이 천지를 뒤덮었다. 온 백성들도 왕후의 죽음을 어머니가 죽은 것처럼 애도한 것이다. 왕후와 세종 사이에는 위로는 세자에서부터 막내아들인 영응대군(永膺大君)에 이르기까지 8남과 정소공주(貞昭公主)·정의공주(貞懿公主) 등 10남매가 있었다.
세종에게 있어 슬픔은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다. 조강지처를 잃은 마음과 앞서간 소헌왕후를 위로하여 저 세상의 복을 빌기 위해 세종은 수양대군에게 훈민정음으로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편집하여 내게 하였다. <석보상절>은 여러 불경 속에서 석가의 전기를 편집한 내용이다. 더욱이 세종은 떠나간 왕후를 그리워하며 서방정토를 생각하여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노래로 만들게 하였다. 즉 왕후를 극락정토에 있게 하고, 자신도 그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그대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세자에게 서무의 결재를 넘긴 뒤에도 왕 자신이 건강이 좋아진 듯 싶으면 세자도 그렇고 신하들도 그렇게 왕에게 많은 일들을 상의하였다. 또한 사신접대의 일들은 빼놓기 힘들었다. 세종은 먼저 떠나간 왕후 심씨, 태종과 원경왕후 등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도 궁궐 안에 불당을 만들어 극락왕생과 공덕과 복을 빌었다. 이것이 1448년 세종의 나이 쉰둘이 되던 해이다. 성균관 · 사부학당의 생도들은 불당의 건립에 반대하였으나 왕의 의지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래야만 자신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육신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마침내 그 해 12월에 내불당이 완공되었다. 그 자신의 숙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유교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우선으로 하였지만 아직도 신앙이 갖는 종교의 영역을 믿음이라는 면에서는 불교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었다. 위로는 왕실에서부터 사대부가와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그러하였던 것이다.
세종에게는 일견 이제 왕 자신의 건강만 다스리면 모든 것이 좋아질 듯 싶었다. 아래로는 신숙주, 정인지, 양성지 등의 젊은 유신들과 김종서, 황보인 등의 대신들이 버팀목이 되어 든든했다. 성균관과 사부학당 등의 유생들은 자신들의 믿는 바를 따라 왕에게 거침없이 상소를 올리는 정치적 풍토를 마련하였다. 몸은 병약하지만 믿음직한 세자인 문종이 일을 잘 처리하고 있었고, 문무에 모두 뛰어난 수양과, 문예에 뛰어난 안평이 잘 뒷받침 해주고 있었다. 그 외 많은 자식들도 모두 효성이 지극했다. 남은 것은 자신의 건강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 동안 세종은 집현전의 운영을 통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의례와 지리지를 편찬하였다. 훈민정음과 농업 및 과학기술, 전제의 정비, 세제(稅制)로서의 공법(貢法)의 완성, 의약기술, 음악, 국방 등 많은 정사를 이룩하였다. 왕 자신은 이미 성왕으로 받들만큼 큰 업적을 쌓았다. 무엇이 부족하였던가. 자신은 스스로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 없이 살았는데 …. 형들과도 사이좋게 지냈고 백성을 위해서 몸소 농사에 노심초사 하였다.
여진족에 대해서는 때로는 정벌도 하고 위무도 하면서 안정시켜 변방의 백성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게 하였다. 학문에 대해서라면 왕 자신이 당대 제일의 유학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늘은 왕에게 성왕으로서의 능력은 주었지만 건강으로 왕을 뒷받침할 수 있을 힘은 주지 않았다. 나이 스물둘에 제왕의 자리에 올라 치세하기 어느덧 삼십년이 넘었던 것이다. 더구나 재위 30년 되던 4월에는 원손(元孫)인 문종의 장자 홍위(弘暐) 즉 후에 단종이 될 아이를 왕세손으로 책봉하였으니 후사에도 아무 문제가 없을성 싶었다.
왕의 나이 쉰셋이 되던 해의 섣달에는 더욱 고통이 심하여졌다. 안질과 함께 말을 더듬고 가슴이 뛰면서 운신이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더구나 호흡도 어려울 정도로 숨도 가빠와졌다. 해를 넘겨 신하들과 자식들의 새해 인사를 받다보니 어느 사이엔가 좀 몸이 나아지는 듯 싶었다. 정월 한달 동안 명에서 사신도 오고 또 세자가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아뢰기도 하였다. 몸이 피곤하였지만 잠시동안 원기를 어느정도 회복하니 살 듯 싶었다.
달이 바뀌어 중춘(仲春)이 되었다. 봄내음이 가득 바람에 실려 궁실의 어귀마다 전해졌다. 백설로 하얗게 뒤덮여 있던 산하는 어느덧 녹아 점점이 분홍빛 물을 군데군데 피워놓았다. 연못의 잉어들은 그 동안 운신하지 못했던 화풀이를 하듯 힘차게 물을 휘젓고 다녔다. 겹겹이 입었던 옷들도 이제는 서너가지만 걸쳐도 될 수 있을 정도로 날도 화창하였다.
세종 자신의 건강도 다시 회춘하는 듯 싶을 정도로 원기가 왕성해졌다. 그 동안 종기가 나 고생하던 세자의 건강도 또한 좋아졌다. 세종은 장시간 국가의 대소사를 처리하였다. 그러던 이달 14일 밤에 갑작스레 병이 도져 다시 운신하기가 힘들었다. 17일에는 어가를 불러 먼저 간 소헌왕후와의 사이에서 얻은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사저 동쪽 별궁으로 옮겼다. 막내의 보살핌을 받고 싶었다. 어쩌면 왕 자신의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였다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별궁에서 얼마 안되어 세종은 승하하였다. 세자와 세손, 수양, 안평 등과 막내인 영응대군 내외가 자리하였다.
하늘은 더없이 맑고 계절은 봄을 더욱 만개하게 하였다. 뒤돌아보면 자신만큼 복된 삶을 살은 이도 없을 성 싶다. 부왕인 태종의 보살핌을 아낌없이 받았고 어머니 원경왕후로부터도 그러하였다. 위의 두 형과도 우애있게 지내었다. 자식들은 이제 하나같이 장성하였다. 나라도 모두 태평성세라고 할 정도로 평안하였다. 심씨의 고아한 자태가 뇌리에 어른거린다. 자신의 생애에서 후회될 것은 없었다.
세종의 생애는 우리 역사상 가장 영광스럽고 찬란했던 시대를 장식하였다. 우리는 지금도 그 시절을 기억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우리 역사상에 되살아나길 간절히 기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만큼 그의 영향은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는 것이다.
세종대왕의 능은 소헌왕후 심씨와 나란히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양지바른 곳에 자리하였다. 이곳 영릉에는 여전히 참배객들이 끊임없이 찾고 있다. 역사는 이렇게 그를 영원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선원세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