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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덕동이란 지금의 서울의 번동이라고 할까요. 채제공의 호가 번암에서 온 번동이다.
옥호자 정하언 부사가 용추폭포 근처에 정자를 만들지 못하고 삼척을 떠난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일로 남는다.
죽서루에 관련하여 자료를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즉 2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삼척을 여전히 아름답게 하는 것은 죽서루이라 한다. 보물 제213호 죽서루는 관동제일루다. 숙종 때 이성주 부사께서 써놓은 현판에도 심영경 부사의 한시에도 이렇게 써놓았다. 죽서루는 관동팔경 중에서 유일하게 바다가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했다. 그렇지만 지금도 바다 갈매기가 찾아오는 곳이다. 자연 암반에 높이를 맞춰 저마다 길이가 다른 17개 기둥을 올려놓은 죽서루는 남도의 소쇄원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친환경 건축물로 손꼽는다. 당대 최고 화가인 표암과 겸재 그리고 단원이 찾아와 죽서루를 그렸고 율곡도 송강도 사천도 입을 모아 죽서루 주변 풍광을 노래한 한시를 남겼다. 숙종 임금님도 죽서루 주변의 아름다움을 칭송하시는 어제시를 하사하셨으니 죽서루가 한결 자랑스럽다. 이에 시 한 수를 보탠다.
죽서루에 오르면
두타산(頭陀山) 자운(紫雲)
오십천 타고 내려와
기단도 초석도 없이
그랭이질로 세운 열일곱 기둥 죽서루 휘감으니
권세도
금은보화도
저 세상
갖고 갈 수 없음을 깨닫고
누구나 욕심 없는 사람 된다
삼척부사에서 여주목사로 발령되엇으나 간신배들의 감언이설에 의해 영조임금에 의해 팽당하여 이에 마음에 충격을 받은 정하언 (鄭夏彦)명필가는 “명덕동의 수옥대”에서 휴양 한 하언 명필가는 삼척부사 재임시절에 명덕동 수옥대에서 휴양하시던 흔적이 있다.
체제공의 명덕동기에 따르면 명덕동은 매우 으슥하여 나무꾼조차 좀처럼 오지 않는 곳으로 허리가 뻗어내려 가락지처럼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곳인데 한쪽이 확트여 있다. 그곳에서는 수락산과 각심암이라는 절을 바라보고 있다. 명덕동 안에는 밭이 약간 있고 소나무와 삼나무가 울창하게 한 숲을 이루고 물이 잔잔하게 벼랑을 따라 흐르고 금잔디가 곱게 깔려 있는 곳이었다.
체제공의 명덕기을 보면
먼곳의 꽃에는 저녁 햇살이 가득하네
정녕 물러나기를 원하는 마음 늙도록 절대 바꾸지 말자.
명덕산은 현 지명상 동대문 바깥 10리쯤에 있다고 하나 정확히 어디인지 알기가 어렵다.
오늘날 도봉구 번동 서울드림랜드 남쪽의 야산일 가능성이 높다.
번동일 가능성이 높다. 번동에서 미아 삼거리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는 오패산 동쪽 골짜기 명덕동이다. 지금은 삼성생명 주택단지로 개발할 때 계곡을 매립하였기 때문에 현재 명덕동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수옥대기에는 체제공이 명덕동의 주인이 된 과정이 기록 되어 있다. 즉 원래 명덕동은 정하언(鄭夏彦) 명필가의 땅이었다.
그러나 체제공이 삼척에 유배 되었을때 정하언 명필가는 삼척부사로 있었다. 정하언의 성품은 얽매임 없이 권세 있는 사람에게 아부하는 자들은 마치 진흙탕의 돼지 보듯이 하였다.
글씨하면 명필가 이시고 술까지 좋아 하시였다. 술한잔하면 거리낌 없이 말을 하였으며, 시속들의 사람들과 달랐다. 체제공은 정하언과 서로 잘 어울려 산수간에서 시주(詩酒)를 즐기었다.
그후 정하언은 삼척부사의 벼슬을 내놓으시고 한양으로 돌아와서 명덕동 땅을 구입하였다. 그리고 바위를 뚫어 샘을 파고 소나무와 밤나무를 심었다. 그러나 정하언이 돌아가신 후 그들의 후손들은 수옥대를 지키지 못하였다. 이에 체제공은 여러번 바뀐 수옥대의 땅을 구입하고 그 주인이 되었다.
⁂ 이종목 지음 ‘조선의 문화 공간“ 4책 조선후기 내가 좋아하는 삶( P143~144, 휴머니스트 발행)을 참고하여 정리
정하언(鄭夏彦, 1702~1769): 호는 옥호자(玉壺子), 자는 미중이며,1735(영조 11, 을묘)년 증광문과 급제하여 1741년(영조17년, 신유) 경상도사및 1744년(영조20년, 갑자)속대전 찬집랑과 1746년(영조 22년 1월,계유년)에 의주부사, 동년 11월 25일 장계에 임명,1746년(영조 22년 1월,계유년) 울진현감, 청도군수,1747년(영조23년, 정묘) 초산부사, 1748년(영조 24년 1월)의주부윤,1749년(영조25년 8월20일) 승지,1749년 병조, 형조 참의,1750년 ~1753년(영조 26~28년) 삼척부사,1757년(영조33년, 정축) 승지, 경성부사,1758년(영조34년, 무인) ,1759년(영조 35년, 기묘) 대사간 공조참의등 역임하였으며 명필글씨로 창경궁 정문의 弘化門액 및 두타산 무릉계곡에 (中臺泉石) 두타동천(頭陀洞天)이란 12자와 하행방서로 옥호거사서 신미중춘(玉壺居士書 辛未仲春) 書와 공주시 탄천면 국동리 다라티 마애글에 "延日鄭氏世葬地"란 書와 공주 공산성의 공복루에 이괄의 난 시절 인조의 공산성 피난에 대한 중수기원문, 淸風亭과 외손자 임천상이 저술한 大司諫止堂鄭公行壯이 전하고 있다. 부여군 옥호동에 청풍정을 건립한터를 부여문화원에서 보존하고 있다.
서울에 있는 수옥대는 찾을 수 없다.
1753(영조 29년) 생원 진사시의 예조 소속으로 참관하였으며 1754년(갑술년, 영조 30년) 4월2일에는 여주목사로 부임하였는데 업무을 수행하였는데 영조의 지시에 의해 하언공의 비리를 조사하라고 어사에게 명하였다. 즉 상류(上流)에 있는 권세 있는 집안들이 많아 사들이는 쌀을 축 낸다고 하니 어사를 보내 장부를 검열하라 명하시었다. 이에 어사가 여주 출장결과를 보고하기를 하언공 목사가 법 집행을 굽히지 아니하여 홀로 재신(宰臣)의 상사(喪事)시에 쌀 두섬(4가마)을 대여하여 준 것밖에 임금에게 보고하니 영조가 말하기를 정하언공은 속대전 찬집에 참여한 까닭에 능히 법을 지키나 그러나 두섬은 다른데의 천석에 해당한다고 하며 1756년(영조 32년) 1월28일 파직을 하였다. 그리고 다시 1756년 1월30일(영조32년)부터 그해 9월2일까지 여주목사로 근무하였다.
처음에는 조정(調停)을 주관하는 자는 따로 한 붕당(朋黨)이 되니 사람들이 수구론자(守舊論者)와는 서로 버티어서 서로 용남하지 않음이 어름과 숯같아 심하면 기관의 함정을 빽빽이 펴 놓았다. 허언공이 애써 나가서 일할 마음이 없었다. 홀로 자수(自守)하여 온지가 수십년이래로 한산한 곳을 잊지 못하였으니 거쳐할 곳을 정할 겨를이 없어서 곧 읍을 떠나서 여주에서 돌아가신 곳이 지금의 서울 수유리 근방인 명덕동(明德洞)에 초가를 짓고 못을 파고 이로 인하여 스스로 부르기를 지당(止堂)으로 호를 지으시며 간혹 직위를 주면 잠깐씩 프리렌스(freelance) 생활을 하였다.
명덕산은 동대문 바같 10 리쯤에 있다고 하나 정확히 어디인지 알기가 어렵다. 오태주(吳泰周)의 종암별서가 있던 곳에 인접한 것으로 보아 오늘날 도봉구 번동 성루드림랜드 남쪽 야산일 가능성이 높다. 체제공의 호 번암(樊巖)은 번계(蕃溪)라는 개울에서 유래하였는데, 현재의 번동과 관계가 깊다고한다. 번동은 미아리 삼거리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는 오패산이라고도 한다. 동쪽골짜기가 명덕동이다 이곳은 동방생명주택단지 로 개발하여 계곡을 매립하였기에 지금은 명덕동 흔적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그런데 체제공은 이 일대를 묘사한 기문을 많이 남겼다. 명덕동기에 따르면 매우 으슥하고 나무꾼조차 좀처럼 오지않는 곳이었다. 봉우리가 뻗어내려 가락지처럼 사방에 애워싸고 이었는데 한쪽이 트여 그곳으로 수락산과 각심암(覺心庵)이라는 절이 바라보였다. 명덕동 안에는 밭이 약간 있었고 소나무와 삼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었으며, 물이 잔잔하게 벼랑을 따라 흐르고 금잔디가 곱게 깔려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원래명덕동은 하언공의 땅이었다. 수옥대기에는 체제공이 명덕동의 주인이 된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체제공이 삼척에 유배되었을 때 하언공이 삼척부사로 있었다. 하언공은 성품이 얽매임이 없어 권세 있는 자에게 아부하는 자들을 마치 진흙탕 돼지 보듯이 하였다. 글씨 잘 쓰고 술을 좋아하는데, 술 한잔하면 거리낌 없이 말을 하였으니 시속의 사람과 달랐다. 체제공은 그와 늙어서도 서로 산수 간에 시주(詩酒)를 즐기기도 약속하였다. 그 후 하언공은 여주목사를 그만두었을 때 명덕동을 구입하였다. 그리고 바위를 뚫어 샘을 파고 소나무와 밤나무를 심었다. 하언공은 그 땅을 수옥대(漱玉臺)라고 이름하였다. 수옥은 물이 옥처럼 맑아 입을 행굴 만하다는 뜻이다. 하언공은 수옥대(漱玉臺) 세글짜를 새기고 붉은 칠을 해두었다. 그러나 하언공이 돌아가신 후에 그의 자손들이 수옥대(漱玉臺)를 지키지 못하여 여러번 주인이 바뀐 수옥대(漱玉臺)의 땅을 구입하고 그의 주인이 되었다.
수옥대(漱玉臺)는 벼랑을 등지고 서 있는 바위로 그위는 흙으로 되어 있었다. 높이는 대략 3~4장의 병풍을 둘러친 듯한 형세 였다. 그 아래는 흰모래가 깔려 있었다. 그 위쪽에 와룡폭포(臥龍瀑布)가 있었다. 와룡폭포의 모습은 마치 누워 있는 듯하지만 위로 조금씩 높아졌다가 다시 낮아지게 되었다. 특히 여름철 큰비가 내리면 폭포가 우레처럼 울부짖었다. 와룡폭포가 떨어져서 형성된 와룡담(臥龍潭)은 세찬 물줄기로 바위가 움푹 패여 있었고, 그 물이 흘러내려 수옥대에 이르러 복류(伏流)하였다. 와룔폭포 아래쪽은 바위로 되어 있는데 그 위쪽은 난가대(爛柯臺)라 하였다. 난가는 신선놀음 구경하다가 도끼자루 썩는줄 모른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니 신선한 땅이라는 뜻이다. 폭포아래 와룡담은 정자가 두벼랑이 걸터 앉은 형상으로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체제공이 이곳에 살 무렵 정자는 이미 무너지고 초석 4~5개만 뒹굴고 있었다.
체제공은 그의 와룡폭기에서 내가 산에 살면서 새로 지은 학창의를 입고 지팡이를 짚고 느릿느릿 걷다가 못가의 늙은 나무아래 자리를 깔고 도덕경(道德經) 몇장을 읽었다. 때때로 지겨우면 팔베개를 하고 잠을 청했다. 해는 지는 줄도 모를 때가 있었다. 잠이 설핏 깨면 숲 사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어드는 하늘빛이 보일 듯 말듯하였다. 그저 바람소리만 귀에 가득하였다. 저물녁까지에 앉은 새가 울며 날아갔다. 이때 흉중에 잡념이 전혀 없고, 마음이 밝아져 나 자신 또한 잊어버리게 된다, 라고 하였다. 학창의는 진(晉)나라 왕공(王恭)이라는 자가 입던 옷으로 신선처럼 살고자하는 복장이다. 그런 옷을 입고 노자(老子)의 도덕경을 읽으면 신선이 될 것이다.
여기서 하언공이 왜 동대문에서 10리가 되고 인적이 별로 없는 명덕동 산속에 들어가셨을까? 살펴보면 조선문화공간을 저술한 서울대학교 이종묵교수는 동책 pp174에서 삼척부사를 팽개치고 돌아와서 명덕동을 구입하였다고 하나 필자가 보기에는 여주목사시절 영조의 지시에 의해 하언공의 비리를 조사하라고 어사에게 명하였다. 즉 상류(上流)에 있는 권세 있는 집안들이 많아 사들이는 쌀을 축 낸다고 하니 어사를 보내 장부를 검열하라 명하시었다. 이에 어사가 여주 출장결과를 보고하기를 하언공 목사가 법 집행을 굽히지 아니하여 홀로 재신(宰臣)의 상사(喪事)시에 쌀 두섬(4가마)을 대여하여 준 것밖에 임금에게 보고하니 영조가 말하기를 하언공은 속대전 찬집에 참여한 까닭에 능히 법을 지키나 그러나 두섬은 다른데의 천석에 해당한다고 하며 1756년(영조 32년) 1월28일 파직을 하였다. 이에 인생무상을 느끼시었다 하언공 나이 54세에 알 것 다아는데 이런 수모를 당할까? 이제는 관직에 열중도 좋지만 남은인생에 자연과 함께 시문과 함께 보내기를 계획하였다.
여주에서 떠나 지금의 서울 수유리 근방인 명덕동(明德洞)에 초가를 짓고 못을 파고 이로 인하여 스스로 부르기를 지당(止堂)으로 호를 지으시며 프리랜서 업무를 보며 명덕동을 지키시었다.
1757년( 영조 33년, 정축년)에 승지(承旨)로 불러서 왕궁에 들어 갔는데
다시 경성부사(鏡城府使) 가 자리가 있었는데 경성은 멀고 굶주리는 마을로서 도시(道臣)이 사람을 선정하여 보내기로하고 대신으로 발령나셨다. 영조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이 승지(承旨)면 가하다고 스스로 택한 것이다. 라하며 이때 하언공이 명을 알아서 경성부사로 부임하였다. 이에 백성들을 잘 다스리니 백성들은 재앙과 굶주림을 잊게하고 위민관으로서 어질게 다스리니 이에 부하(府下)내 관청사람들을 인재를 뽑아 직접 권장하고 지도한지 1년에 진사(進士)에 오른자가 2인이나 되고 경성에서 옮고 그름을 있는 것이 비롯되었다.
1758년(기묘년, 영조 35년)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원주목사(原州牧使)임명되었다.
1761년(신사년, 영조 37년)에 본목이 판관(判官)이 다스리는 고을로 강등되어 근무하다가 승지와 형조, 형조참의를 임명되었다. 그러나 다시 강등이라는 보직을 맡으니 기분이 좋지않아 해직을 신청하고 명덕동에 돌아와서 별업(別業)에 종사하였다.
이는 여주 목사에 파직되고 두번째 또 감언이설에 의해 파직되어 삭탈관직되어 명덕동에 돌아와서 인생의 무상을 느끼는 모습이 명덕동 수옥대에 담아있다.
명년에 대신(臺臣)유선양(柳善養)이 때를 타서 속여 거짓으로 말하기를 하언공은 전에 승지(承旨)로 있을 때, 조종부(趙宗溥)의 상소에 천청(天聽)을 속여 가린 것을 아뢰지 아니하였다고 하니 하언공이 연좌되어 삭출(削黜)되었다. 이로서 종부(宗溥)가 소조(小朝)에 글을 올려 언사(言事)로서 부탁받고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헐뜯고자 하였음을 대조(大朝)에 알리게 하였다고 소통이 되었다.
1764년(갑신년, 영조40년)에 비로서 판결사에 서임(敍任)되고 얼마안가서 능주 목사(綾州牧使)가 되었다.
1765년(을유년, 영조41년)에 벼슬을 버리고 이제는 명덕동을 떠나 충남 공주시 탄천면 국동리에 돌아오시어 부친 정무공에 돌아가셨을 때 복(伏)을 입지못한 것을 종신(終身)의 슬품으로 삼고 매양 벼슬살이 나갈때는 정도(正道)는 아니지만 반드시 사판(祠版)을 받들고 종손(宗孫)의 마음에 품고서 국동에 안착하였다. 그때가 부친이 돌아가신 해의 갑자가 돌아옴에 이르러 공주(公州)로 돌아와서 묘아래에서 시묘사리하며 3년을 마쳤는데 매일 산소에 올라가 절하되 추운때나 더울때나 거르지 아니하셨다. 거쳐하는 모려(茅廬)는 누추하고 먹을 것은 명아주와 매조미쌀이었으니 젊은 혈기가 왕성한자도 거의 견딜수 없겠거늘 하언공은 쇠약한 노인이로서 유여(裕餘)하게 지내셨다.
을유년(1765년) 공주에 내려 왔을때는 그 바뿐중에도 하언공은 공주산성공원에 가시여 인조가 공주에 피신나온 후 산성공원에서 계실대 국가예산은 얼마나 지출하였나?를 정리한 쌍수정 복원한 역사를 雙樹城拱北樓重修記로 작성하시여 공주 목사에 전달하니 이 글을 공복루에 시문으로 게시하였다. 많은 관광객들이 이뜻을 모르고 있다. 공주시청 문화해설가도 모른채 설명도 않는다. 지금도 2010년에 공주시청에서 다시 복원하여 게시되고 있다. 좀더 알려져야할 내용인 것 같다.
저자:" 명덕동에 이한몸 무치고 싶다 조선의 문인 정하언"정태식 박사 일부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