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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세르주의 『러시아혁명의 진실』을 읽고(2012.3.6)
VICTOR SERGE YEAR ONE OF THE RUSSIAN REVOLUTION
우리가 그동안 아무생각 없이 받아들였던 레닌에 대한 잘못된 여러 가지 생각을 빅토르 세르주는 러시아혁명의 진실에서 바로잡아주고 있다. 레닌은 지도자의 위치와 책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으며 어렵게 러시아혁명을 완성해 나갔다. 스탈린은 레닌의 이같은 업적을 찬양하면서 자신의 욕심을 마음껏 채운 지도자로 군림한다. 이 책은 1917년 러시아혁명에 대해 다각도로 설명해주고 있다. 일독을 권한다.
옮긴이 머리말_
빅토르 세르주가 겪은 러시아혁명 첫해 자본주의는 차츰 더 철저하게 야만성을 드러내고 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더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
세르주의 아버지는 장교의 지위를 버리고 혁명에 뛰어들었다가 끝내 망명을 떠나 벨기에에 자리 잡았다. 그의 어머니는 폴란드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세르주는 한 정치 망명객 집안에 태어나서 또 다른 정치 망명객이 되어 죽었고 일곱 나라에서 정치활동을 했으며 언제나 정치적 반대파로 살았다.
세르주는 이상을 따르기 보다는 정의를, 즉 소련의 스탈린주의나 자본주의가 허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높은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정의를 좇았다.
서유럽좌파는 세르주의 작품이 너무 비판적이라는 것을 알고 배척했다. 부르주아 비판가들은 그의 작품이 너무 혁명적이라는 것을 알고 공개적으로 평론하기를 머뭇거렸다.
『러시아혁명의 진실』은 혁명 뒤 1년을 다룬 책이다. 세르주는 우리에게 스탈린주의 역사가들이 다시 고쳐 써서 화석화하거나 왜곡한 사실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1918년의 실제 러시아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그 1년은 러시아혁명으로 태어난 소비에트 정권이 앞으로 순조롭게 닻을 내리려면 어떠한 과제를 풀어야 하는지를 결정한 중요한 해였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제1년, 즉 소비에트 공화국 제1년은 1917년11월7일(구력10월25일)시작해, 잘 알려진 대로 독일혁명이 일어난 1918년11월7일 끝난다.
세르주는 10월 혁명을 압도 다수의 노동자와 농민이 느끼고 있던 대중적 감정이 진정으로 표출된 사건이라고 굳게 믿었다.
사회주의 혁명은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마르크스의 예측도 빗나갔다.
그런데 혁명이 성공한 뒤 처음부터 소련은 안팎에서 불어 닥친 시련으로 휘청거렸다. 많은 사람이 꿈꾼 세상을 제대로 실현해 보기도 전에, 제대로 혼자 서 보지도 못한 채 끝내 그 체제는 스탈린주의로 변질됐다.
세르주는 혁명과 볼셰비즘과 스탈린주의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죽을 때까지 붙잡고 씨름했다.
세르주는 이렇게 말한다. 스탈린주의의 공포는 러시아혁명의 자동적인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특정한 일련의 사건들, 특히 독일혁명의 실패와 1917년 혁명을 일으킨 러시아 노동계급의 파멸이 가져온 결과였다.
나는 10여 년 동안 온갖 감옥 생활을 겪었고, 7개국에서 혁명운동에 참여했고, 책 20권을 썼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막대한 부수를 발행하는 어떤 신문은 내가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나에게 여러 번 역겨운 말을 늘어놓기도 했다. 우리는 혁명이 승리했다가 퇴보하거나 이런저런 혁명 시도가 끝내 유산되거나 끔찍한 대량 학살로 많은 사람이 몰살당하는 일 등을 경험했고, 그런 일들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일들이 우리에게 열렸던 유일한 길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지난 어느 때보다 더 인류를 믿게 됐고, 더 나은 앞날이 우리 앞에 펼쳐질 것임을 굳게 믿는다.-1943년 빅토르 세르주
추천의 글
세르주는 평생 동안 자본주의 착취에 대한 분노와 그 착취를 끝장내겠다는 결심으로 움직였다. 1917년 볼세비키 혁명에 열광한 이유도 오직 하나였다.
스탈린 도당이 레닌을 신격화하는 데 열을 올렸지만, 이 책의 여러 장에 나오는 레닌은 그런 영웅 숭배를 철저히 경멸한다. 그는 당을 대중의 두뇌와 신경체계로 묘사했다. 당은 대중의 편에 서서 대중을 통해 보고 느꼈으며, 알고, 생각하고, 행동했다.
스탈린은 레닌의 대외정책을 지지한 사람들을 제거한 뒤에야 자신의 대외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세르주는 스탈린주의 역사 개작자들이 화석으로 만들거나 왜곡하지 않은 진짜 혁명, 즉 살아 숨 쉬는 1918년의 진짜 러시아를 보여준다.
-1991년9월 폴 풋 Paul Foot
머리말
나는 이 책에서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의 첫 투쟁을 사실대로, 합리적으로 , 생생하게 묘사하려 했다.
역사를 만드는 사람이 그 역사를 서술할 기회를 얻기란 아주 힘들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제1년(1917년11월7일~1918년11월7일)
이 첫 시기는 프롤레타리아가 승리한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 단계는 권력 장악, 영토 정복, 생산 통제, 국가․군대 창설, 생존권 획득을 포함한다.
독일혁명은 다음 단계, 즉 국제적 투쟁의 단계(더 정확하게는 국제 혁명의 기지를 무력으로 방어하는, 때로는 공세적으로 방어하는 단계)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다. 1919년에 소비에트공화국에 반대하는 제1차 연합이 결성됐다.
경제재건기라고 부를 수 있는 세 번째 단계는 신경제정책을 도입한 1921년부터 생산이 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복된 1925~26년까지이다.
사보타주(Sabotage)
고의적인 사유재산 파괴나 태업 등을 통한 노동자의 쟁의행위를 가리킨다. 사보타주(Sabotage)라는 말은 중세유럽의 봉건제도에 노동자가 대항하여 나막신(사보)으로 작물이나 기계를 짓밟은 데서 나왔다고 한다. 흔히 태업(怠業)으로 번역하는데, 실제로는 태업보다 넓은 내용으로 쟁의 중에 기계나 원료를 고의적으로 파손하는 등 적극적인 업무방해도 포함한다.
제1장 농노제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1861년: 농노해방
1789~93년에 일어난 프랑스혁명은 뒤이은 여러 부르주아혁명의 시발점이었다.
1850년쯤 유럽에서 부르조아 혁명이 완성됐다. 나폴레옹 군대는 마드리드와 리스본뿐 아니라 빈과 베를린에 이르기까지 부르주아혁명을 퍼뜨렸다. 1830년 혁명과 1848년 혁명은 부르조아 혁명의 마지막 정치적 격변이었다.
1861년2월19일 농노제를 폐지한 해방령으로 해방된 농노들은 해방됐지만 빚더미에 짓눌려 꼼짝할 수 없었다.
러시아에서 농노제를 폐지했을 때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일어났고 노예제가 폐지됐다.(1861~63년)
1881년: 민중의 의지당
민중의 의지당이 노린 주요 표적은 체제 전체의 우두머리, 즉 차르였다.
1885년: 노동운동의 탄생
언젠가는 노동자의 갈색 손이 차르 체제를 내리쳐 먼지로 만들어 버릴 날이 올 것-1877년 노동자 재판에서 직조공 표트르 알렉세에프
1876년12월6일 페테르부르크의 카잔성당 앞 광장에서 사회주의 노동자들의 첫 시위가 벌어졌다. 그때 학생이었고, 나중에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지도자가 된 플레하노프가 러시아 땅에서는 처음으로 붉은 깃발을 휘둘렀다.
러시아 노동자가 벌인 첫 성공적인 파업은 1885년 오레호보주예프에 있는 모로조프 방적공장 파업이었다.
페테르부르크 지부의 창설자는 레닌과 마르토프 두 사람이었다.
레닌은 심비르스크에서 학교 교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레닌은 러시아의 사회주의 운동을 창설한 대다수 혁명적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프티부르조아 출신이었다.
레닌의 혁명 사상은 당시 법학을 전공하고 있던 카잔대학에서 쫓겨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1895~1903년: 노동계급 정당
1894년 민스크(벨라루스)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당 1차 당대회가 열렸다. 참가한 대표는 모두 9명이었다.
레닌이 소책자《파업에 대하여》를 쓴 것은 수감돼 있을 때인 1896년이었다. 간결한 강령식 문장으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임무를 작성한 것은 그가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을 때인 1897년이었다. 유형에서 돌아와 뮌헨으로 추방되자 레닌은 그곳에서 1900년에 첫 신문 이스크라(불꽃)를 창간했다. 그 신문은 두가지 과제, 즉 다양한 일탈, 훼손, 퇴보에 맞서 프롤레타리아의 사상을 보호하고 모든 혁명적 반대파가 노동계급을 지원하게 만드는 과제를 해결하려는 것이었다.
사회혁명당
1905년: 제1차 러시아혁명과 그 원인
농민과 노동자의 비참한 삶이 유산계급이 가진 부의 원천이었다. 외국자본은 노동력이 값싸고 이윤 축적이 쉬운 러시아 당으로 물밀듯 들어왔다. 1894~1900년에 러시아 공업으로 유입된 외국자본은 거의 5억 루블이나 됐다.
노동자의 하루 노동시간은 10시간에서 15시간이나 됐다. 1838년 남부 브랸스크에 있는 기계공장에서는 하루 12시간 노동의 임금이 70코페이카였다.
1904년에는 대규모 중심지 몇 곳에 집중된 작업장과 공장에 116만9000명의 집단적 노동자 대중이 존재했다.
가폰은 1905년1월22일 청원서를 들고 작은 성부 차르를 만나려고 나섰으나 군대의 기관총이 그들을 쓰러뜨렸다. 이 어리석고 극악한 탄압 때문에 제1차 러시아혁명이 터졌다. 이 혁명은 또한 그로부터 12년 뒤 어느 날 일어날 러시아 제정의 자명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1905년: 전투
총파업이 주요 10개 철도 간선을 따라 위치한 122개 마을과 산업 중심지를 휩쓸었다.
러일전쟁은 1904년2월에 발발해 1905년9월5일 포츠머스 조약 체결로 끝났다. 전비로 13억 루블이 소요됐다. 니콜라이 황제는 대략 12억 루블에 이르는 전비를 거의 모두 주로 파리의 증권거래소를 통해 나라 밖에서 조달했다.
1917년에 볼세비키가 승리한 이유는 1905년에 그들이 취한 태도를 보면 가장 잘 알 수 있다.
1917년1월에는 물가가 163퍼센트까지 치솟으면서 130퍼센트에 그친 임금 인상률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생산은 감소하고 있었다.
제2장 1917년 10월 25일의 봉기
레닌이 혁명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노동자 정당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혁명은 노동자 식으로, 즉 조직적으로 진행됐다. 바로 이 점이 페트로그라드에서 혁명이 그렇게 손쉽고 완벽하게 승리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제3장 도시 중간계급 대 프롤레타리아
위대한 포고령: 평화
토지포고령-레닌은 밤잠을 설쳐가며 토지 포고령 초안을 작성했다. 이 포고령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농민의 지지를 확보해서 새로운 권력을 확고하게 만들 수 있을 터였다.
포고령제1조1. 지주의 토지소유권은 보상 없이 즉시 폐지된다.
최초의 인민위원회-대회는 볼세비키 62명, 좌파 사회혁명당 20명, 국제사회민주주의자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다른 집단 출신 등 모두 101명으로 이루어진 전 러시아 소비에트중앙집행위원회를 새로 선출했다. 최초의 인민위원회(인민위원이라는 용어는 평판이 나쁜 장관이라는 명칭을 쓰지 말자며 트로츠키가 제안한 것이다)
사관생도들의 폭동
당시 사회혁명당의 한 군사 지도자는 페트로그라드로 전진하는 크라스노프 장군에게 다음과 같이 써 보냈다.-우리 군대는 200~300명의 사관생도들로 이뤄졌고, 50명의 투사가 수류탄으로 무장하고 있다. -
카자흐 군대가 페트로그라드로 진군하다
케렌스키는 크라스노프 장군의 카자흐 부대에 피신해 있었다.
반(反)혁명적 사회주의자들
사보타주
반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은 전쟁 때 정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관례의 범주를 넘어서 잔인한 무기를 대량으로 썼다. 일반 주민들에게 봉사하는 모든 기업에 대한 체계적인 사보타주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계급 전쟁은 시작부터 전시에 허용될 수 있는 관례상의 특성을 모두 부서뜨렸다.
대중의 주도력
노동자들의 조직화라는 기적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인민을 구제할 해결책을 제공한 것은 레닌의 이런 사고였다. 오로지 더 많은 대중이 활기차게 앞장설 때만 온갖 계급의 다양한 저항에 맞서 싸울 수 있었다.
술
반혁명 세력은 한동안 알코올 중독이야말로 가장 치명적인 반혁명무기라고 생각했다.
보드카는 언어만큼 강력한 정치적 힘입니다. 혁명적 언어는 사람들을 분기시켜 억압자들에 대항하도록 만들지만, 여러분이 혀가 꼬부라지도록 마셔댄다면 혁명을 방어하겠다면서 장갑차를 모두 내팽개치는 꼴이 될 것입니다. 이 말을 명심하십시오. 고주망태가 되는 날이 하루하루 늘어갈수록 우리의 적은 승리를 향해 한 발짝씩 더 다가가고, 그만큼 우리는 예전의 노예 상태로 전락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트로츠키의 연설
혁명은 명령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독일은 전에 우리가 처했던 단계, 즉 차르 체제의 붕괴 직전 같은 단계에 와 있다. 우리가 사회주의의 명예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사실...대중에게 새로운 생활양식을 창조하도록 호소한 것은 현 정부 아닌가. ...우리는 노동자 공화국을 건설하려 한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레닌
제4장 내전의 첫 불꽃: 제헌의회
민족의 권리
대러시아인 5600만명, 우크라이나인 2230만명, 벨라루스인 약600만명, 폴란드인 800만명, 리투아니아인 310만명, 독일인 180만명, 몰다비아인 110만명, 핀란드계 원주민(에스토니아인, 카렐리라인 등) 350만명, 터키-타타르계 사람들 1360만명
제국의 헌법은 대러시아 민족의 절대적인 우월권을 보장하고 있었다.
독재 체제가 무너지자 분리주의 경향의 민족운동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런 경향은 특히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에서 두드러졌다. 또 대부분의 영토에서 종속민들은 농민이었으므로 대부분의 민족문제는 농업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었다.
11월2일 러시아 내 여러 민족의 권리 선언 발표
(1)모든 민족의 평등과 주권
(2)모든 민족의 자결권,여기에는 독립국을 세우기 위한 분리권까지 포함된다.
(3)모든 민족적, 종교적 특권의 폐지와 모든 소수민족이나 소수인종의 자유로운 발전
이 선언문과 20일뒤(11월22일) 레닌과 민족문제 인민위원 주가시빌리(스탈린)가 서명해 발표한 러시아와 동방의 이슬람 노동자들에 대한 호소문은 둘 다 매우 중요하다.
총사령부의 저항: 장군에 맞선 사병들
11월9일 레닌, 스탈린, 크릴렌코는 두호닌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오스트리아, 독일과 즉각 휴전협상을 벌이도록 명령했다.
스타프카의 저항은 곧 연합국이 혁명에 간섭하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프랑스의 군사사절단 단장인 라베르뉴 장군과 미국의 선임 장교는 두호닌을 공공연하게 지원했다.
칼레딘: 카자흐 반혁명의 패배
러시아어로 돈스키-크라이로 불리는 돈 지방은 일종의 카자흐공화국이었고, 선출된 군사 지도자(아타만) 칼레딘 장군이 통치하고 있었다. 그는 반혁명을 지지했다.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민족운동은 곧바로 독재 정치의 몰락을 재촉했다.
우크라이나의 사회구성은 도식적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사회의 최정상은 러시아인 관료들, 지주, 러시아인 자본가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 다음은 러시아인과 유대인으로 이뤄진 도시의 상업, 공업, 수공업 프티부르주아 장인 계급, 다음은 우크라이나 농촌 프티부르주아 계급과 이 계급 출신의 지식인들, 마지막으로 최하층은 도시와 농촌에 사는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노동계급으로 이뤄졌다.
루마니아 전선의 비극
왈라카아와 몰다비아의 대귀족들은 1905년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일어난 1907년 농민 봉기의 악몽에 아직도 시달리고 있었다. 이들은 앞잡이를 내세워 스파툴 타리라는 이른바 국민협의회를 창설했다.
루마니아군은 셰르바초프 장군의 지원을 받아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하고 혁명군 부대의 공급로를 차단했다. 이들은 며칠 동안 몰다비아 농민들과 러시아 혁명 투사들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 끝에 간신히 키시네프를 점령할 수 있았다.
장교 학살
수병들이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는 이 살벌한 검문소를 무사통과할 수 있는 장교는 아무도 없었다.
내전에서 첫 전투가 일어나고 루마니아 전선에서 배신 행위가 일어난 뒤, 우크라이나와 돈, 쿠반, 우랄, 크림반도 등지에서 음모와 봉기가 일어난 뒤, 병사와 수병들은 모든 장교를 무차별 분풀이 대상으로 여겼다.
1월20일자 전보내용-장교 수십 명이 처형됐다. 이들은 목에 무거운 돌을 매단 채 바닷가로 끌려가 물속으로 떠밀렸다. 그 시체들이 항구에 떠다니고 있다.
크림반도 지역 대부분의 소도시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다. 러시아 전체에서 가장 화려하고 가장 아름다운 크림반도의 여러 곳에서 적색 테러가 일어났다. 내전이 시작된 지역에서 적색 테러는 병사들이 직속상관인 장교를 학살하는 것에 한정돼 있었다.
강화조약
12월2일 협상이 제개돼 28일 동안 휴전이 체결됐다. 그 뒤 휴전협정은 연장 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 독일 대표단은 한 전선에서 다른 전선으로 군대를 이동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런 약속은 현실적인 것이 아닌 형식적 성격을 띤 것이었다.
소비에트의 성과
11월 초순에서 제헌의회 해산(1918년1월7일)까지 러시아 안에서는 옛 지배계급의 경제적 저항과 제헌의회를 둘러싼 정치투쟁, 평화를 위한 투쟁이 전개됐다. 이 세 가지 사건은 사실 단일한 과정의 다양한 양상이지만 개별적으로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소비에트정부 주요 포고령
11월10일 신분제가 폐지됐다.
11월22일 군대용 방한복이 징발됐다.
11월26일 외무인민위원 트로츠키는 강대국 주재 러시아 대사를 포함해 해외에 주재하는 러시아 외교관과 영사 28명을 소환했다.
12월1일 최고경제위원회가 창설됐다.
12월7일 체카라는 약칭으로 알려진 사보타주와 반혁명에 맞선 투쟁을 위한 비상위원회가 창설됐다.
12월9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 협상이 시작됐다.
12월11일 철도 분야에서 1일 8시간 노동이 시행됐다. 공교육 인민위원회가 창설돼 교회와 교육을 분리시켰다.
12월16일 군대의 계급을 폐지하고, 러시아,벨기에 금속회사를 몰수했다.
12월17일 1886전력회사를 몰수했다. 도시에서 주택 시설 내 시장이 폐지됐다.
12월18일 종교의식을 하지 않는 결혼 제도가 실시됐다.
12월19일 낙태법이 제정됐다.
12월21일 러시아어 철자가 간소해졌다. 혁명재판소를 위한 법전이 발표됏다.
12월24일 푸틸로프 공장이 몰수됐다.
12월29일 이자 지급과 채권 배당금 지급이 중단됐다.
12월31일 모자보호연구소가 문을 열었다.
1월3일 소비에트연방러시아공화국이 선포됐다. 사회주의 적군의 창설을 위한 법령이 선포됐다.
밀류코프의 당은 좌파 사회혁명당과 막심 고리키라는 뜻밖의 옹호자를 얻었다. 이 위대한 작가는 또다시 문화에 대한 사랑 때문에 길을 잃고 말았다.
제헌의회 선거-11월 중순
군대의 절반 이상이 볼세비키 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길 수 없었다.-레닌
제헌의회의 방어
제5장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
러시아와 제국주의
러시아의 공업은 1891년과 1900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발전했다. 1910년부터 러시아는 독일보다 고도의 공업 집중 현상을 보이며, 금속 생산 부문에서는 유럽 4위를 차지했다. 이는 프랑스, 영국, 독일, 벨기에 자본이 들어온 결과였다.
프랑스가 차르에게 제공한 차관은 대부분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로를 건설하는데 쓰였다.
전쟁은 연합국 제국주의에 대한 러시아의 종속을 더욱 강화시켰다. 전쟁 중에 러시아가 연합국 제국주의 국가에서 빌린 자본은 75억 루블, 당시 시세로 200억 프랑이 넘었다.
1918년1월의 당면과제
러시아는 전쟁 개시 40개월 뒤인 1918년1월 경제 파탄 상황에 이르렀다.
4년간의 전쟁으로 유럽 문명이 뿌리채 흔들렸다는 것은 틀림없다.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불가리아, 터키 등의 동맹국은 매우 인위적인 기근 속에서 살아야 했다.
미국의 지원 덕택으로 연합국의 상황은 조금 나아졌다.
1917년2월과 5월 사이에 독일 잠수함은 총 250만 톤에 달하는 1374척의 배를 침몰시켰다. 하지만 미국 혼자서만 월 평균 25만 톤에 달하는 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윌슨의 평화안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러시아혁명의 메아리를 담고 있었다.
이 시기 각 진영이 전쟁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연합국: 미국이 전쟁에 참가할 때까지 버티기. 이를 위해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러시아 전선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질질 끌어야 한다.
동맹국: 미국이 전쟁에 가담하기 전에 영국과 프랑스에 평화를 강요하기. 영국과 프랑스를 쳐부수는 데 모든 자원을 투입하려면 최대한 신속하게 러시아 전선에서 작전을 종결시켜야 한다.
혁명 러시아: 서로 싸우는 제국주의 어느 한쪽도 가담하지 않기. 그리고 유럽에서 혁명적 위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버티기. 당시 유럽의 위기에 관한 소식이 많이 유포되고 있었다.
무병합 평화에 대한 제국주의적 해석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는 연합국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호소문을 발표했다.
-여러분의 정부는 여전히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무엇을 위해 전쟁을 하는지도 밝히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교섭에 즉시 참여할 것을 요구합니다. -
이것은 실현될 가능성이 없는 희망이었다. 위대한 혁명이 마치 황야에서 울부짖는 것처럼 보였다.
체르닌과 루덴도르프의 계획
레닌의 테제
중대한 상황에서 흔히 레닌은 자신의 생각을 일련의 테제로 만들어 요약적이면서도 명확하고 간명하게 상술했다.
5줄이나 15줄 분량의 21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강화에 관한 테제는 그런 사례다.
(1)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은 노동자와 농민 대중의 지지를 통해서만 성공할 수 있다.
(2)혁명 후 내전은 불가피했으나, 아직 최고조에 달한 것은 아니다.
(3)사보타주와 부패, 다른 간접적 수단 때문에 내전은 몇 개월 동안 지속될 것이다.
(4.5)혁명은 시간이 필요하다. 자본가계급을 패배시키고 조직화 과업에 착수하려면 적어도 몇 개월 동안의 휴전을 확보해야 한다.
(6)유럽혁명이 비록 필연적이 코앞에 닥치기는 했지만 그 실현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는 알 수 없다.
(7)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 진행한 1차 협상을 통해 우리는 독일에서는 군부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것, 우리의 대안은 전쟁을 계속하거나 아니면 30억 루블에 이르는 전쟁 배상금을 은밀히 지급하고 제국주의적 강화에 굴복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8)최대한 오랫동안 협상을 지연시키기 위해 이미 최선을 다한 바 있다.
(9)우세한 힘에 밀려 강화를 달성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배반하는 것이 아니다.
(10)강화가 실현되면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철수할 수 있고, 이것은 독일 제국주의의 손에 놀아나는 꼴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혁명전쟁도 영국, 프랑스 제죽주의자들의 손에 놀아나는 꼴이다.
(11)우리는 자국 자본가계급과 관련해서만 패배주의를 옹호했다. 우리는 우호적인 제국주의와 형식적, 실질적 동맹을 맺고 이 제국주의의 지원을 받아 다른 제국주의에 맞서 싸워 승리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 항상 거부했다.
(12)우리는 원칙적으로 혁명전쟁을 지지한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적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13)아량과 관용을 바탕으로 한 정책은 현존하는 실제 세력 관계와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14)군대는 독일군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없다. 독일군은 페트로그라드를 완전히 장악할 수도 있다.
(15)농민 대중과 병사들은 전쟁에 반대하고 있다. 군대의 완전한 민주화를 고려한다면, 대다수 병사들의 의지를 거슬러서 전쟁을 벌이려고 애쓰는 것은 완전한 모험일 것이다. 사회주의 군대의 창설은 몇 개월이 소요될 것이다.
(16)3~4개월 안에 독일혁명이 터진다면 혁명전쟁을 벌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패배할 것이고, 결국 사회주의 권력이 붕괴할 것이다.
(18)이런 시점에 혁명의 운명을 놓고 내기를 건다면, 그것은 모험이다.
(19)단독 강화를 맺는다고 해서 독일혁명이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소비에트는 엄청난 선전적 가치가 있는 사례가 될 것이다.
(20)강화가 성취되기만 하면, 우리는 제국주의의 속박에서 해방될 것이다.
(21)참된 혁명전쟁이란 사회주의 군대가 다른 나라 자본계급을 타도하기 위해 벌이는 공격 전쟁을 말한다. 지금 그런 전쟁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쿠를란트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사회주의 이익은 여러 민족의 이익에 우선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레닌의 이론은 정확하게 숨 돌릴 틈 이론으로 불렸다.
트로츠키의 테제
그는 혁명전쟁이 가능하다는 듯이 가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심각한 위기에 처한 독일이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기 쉬운 피로한 군대를 동원해 실제로 공격할 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는 독일 노동계급과 군대를 시험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레닌은 매우 매혹적이지만 위험한, 매우 위험한 생각이라고 평가했다.
트로츠키는 레닌에 관하여라는 저작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호엔촐레른 왕가가 우리와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결정하거나 또는 전쟁을 치를 능력이 없을 확률이 단 25퍼센트라도 됐다면 우리는 도박을 하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
연합국과 부채의 무효화
소비에트 정부는 러시아의 외채를 무효화하고 연합국과의 모든 관계를 단호하게 끊었다.
농민들은 전쟁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싸우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영구적인 농민 전쟁은 유토피아에 지나지 않는다. 혁명전쟁은 말로 하는 게 아니다. 전쟁을 준비할 수 없다면 강화조약에 도장을 찍어야 한다.
프랑스는 경제 혁명을 이루고 난 뒤에야 비로소 전쟁에 나섰다. 프랑스혁명 때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후진적인 여러 민족이 전쟁으로 피폐해진 적도 없고 게다가 이제 막 토지와 자유를 얻은 한 민족과 서로 맞붙었다.
준비가 갖추어지지 않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전쟁으로 내몰아 적들의 치명적 공격에 내맡긴다면, 이 혁명은 손상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쓸데없이 혁명전쟁에 집착한다면, 그리고 노동계급과 당의 핵심이 학살당하도록 방치한다면, 우리가 돌아올 곳은 어디에도 없소.
레닌은 소비에트 권력이 약하다는 점을 예리하게 인식했고, 그렇기 때문에 독일이 공격해오면 소비에트 권력이 붕괴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전쟁에 말려들었다면 2~3개월 뒤 러시아혁명이 총체적으로 무너질 수도 있었다.
레닌은 원칙을 위반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를 꾸준히 펼쳐 나갔다. 뜨거운 설전이 오갈 때조차도 객관성은 냉철하게 유지됐다.
레닌은 다수파였을 때도 자만하지 않았다. 반대파를 대하는 레닌의 태도는 관대하면서도 단호했다. 반대파 개개인에 대해서는 관용의 태도를 보였으나, 반대파의 견해에 대해서는 단호했다.
지도자의 사명은 대중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을 일깨우고 이끄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중은 지도자들을 통해서 자신들의 의식 가운데 가장 예리하고 날카로운 요소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레닌
정복당한 우크라이나는 독일 제국주의의 첫 번째 무덤이었음이 입증됐다.
제6장 휴전과 영토의 축소
우크라이나 점령
독일군의 진군 단계는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3월14일 체르니고프, 3월16일 키예프, 3월30일 폴타바, 4월10일 헤르손, 4월20일 크림반도, 5월6일 로스토프나도누를 따라 진군했다. 결국, 독일군은 곡창지대를 따라 진군한 셈이다. 독일군은 농부들에게 강제적으로 빼앗을 것이 더는 없게 되자 진군을 중단했다.
핀란드 노동계급의 민주주의 혁명
핀란드는 12세기 이래 스웨덴 영토의 일부였고, 봉건제에 정복당한 일이 전혀 없는 소소유자들의 나라였다. 1809년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로1세의 동맹 체결로 핀란드는 러시아에 편입됐다.
핀란드 자본가계급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적색 국회에 맞서 케렌스키와 동맹했다.
1914년 이래 핀란드 자본가계급은 제국주의 전쟁을 이용해서 무력으로 핀란드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려 했다. 러시아는 핀란드 유산계급의 오랜 숙적이었다.
지도자들의 목적은 부자를 착취하거나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실시하지 않고도 노동계급이 주도적 계급이 될 수 있는 의회제 민주주의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핀란드의 백색 테러
자본가계급은 즉각 약 5천명의 소규모 백군 부대를 창설하기 시작했다. 이 부대의 주요 병력은 경호부대(핀란드출신청년들로 이뤄진 독일군 제27소총대대) 출신 병사와 스웨덴 자원병, 자본가계급, 프티부르조아 계급 출신의 젊은이들이었다.
프랑스 자본가계급이 파리코뮌에 대해 저지른 대학살 이래, 이 세상에서 핀란드에서 일어난 일에 견줄 만한 참상은 아직 없었다. 처형자는 2만명부터 10만 명까지 제작기 다르게 집계돼 있다.
이처럼 승리한 자본가계급에게 더는 이용 가치가 없는 개혁주의자들과 혁명가들을 무차별 단죄한 것은 백색 테러의 일반적 특징이었다. 백색 테러는 광적인 싸움이나, 혐오스러운 계급을 향한 폭력이나, 심리적 요인 등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전에서 광기의 구실은 아주 부차적일 뿐이다. 사실상 테러는 계산된 것이고, 역사적 필연성의 결과다. 승리한 유산계급은 향후 10년 동안 노동계급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놓기에 충분할 만큼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해야만 그후 투쟁에서 자신의 지배가 보장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노동계급이 유산계급보다 수가 훨씬 많기 때문에 희생자 수는 그만큼 더 커지게 마련이다.
백색 테러의 목표는, 간단히 말해 노동계급 가운데 선진적이고 의식이 투철한 사람들을 몰살시키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어떤 종류의 혁명이건 패배한 혁명은 늘 승리한 혁명보다 훨씬 더 많은 노동계급의 희생이 수반된다고 할 수 있다. 승리한 혁명에 아무리 많은 희생과 폭력이 뒤따른다고 해도 말이다.
핀란드에서 학살이 저질러진 시기는 1918년4월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러시아혁명은 사실상 거의 모든 곳에서 혁명적 적들을 너그럽게 대했다. 혁명은 테러를 활용하지 않았다. 남부지역에서 전개된 내전에서 약간의 유혈사태가 일어났지만, 이것은 예외적인 경우였다. 러시아 노동계급에게 사회 전쟁의 제1법칙인 패배한 자의 비참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 것은 유럽에서 가장 발전한 사회 가운데 하나인 핀란드의 승리한 자본가계급이었다.
캅카스의 독립
캅카스는 1760년부터 1864년까지 한 세기에 걸친 격렬한 전투 끝에 러시아제국에 점령당했다. 유럽과 아시아 대륙에 걸쳐 있는 높은 산악 지대인 캅카스에는 10개 이상의 소수민족들이 매우 다양한 나라들로 나뉘어 있다.
바쿠코민과 26명의 학살
레닌과 제3차 소비에트 대회
레닌은 세계혁명에서 러시아혁명이 차지하는 위치에 관한 전반적 견해 표명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프랑스인이 혁명을 시작하고 독일인이 끝맺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프랑스인이 혁명을 시작할 것이다. 이것은 수십 년에 걸친 혁명 과정에서 프랑스인이 혁명적 헌신성과 혁명적 주도성을 획득했기 때문이고, 그래서 프랑스인들이 사회주의 혁명의 선두에 서게 된 것이다 하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식민지에서 온갖 약탈을 자행해서 노동계급의 최상층을 타락시키는 열강이 아니라, 그렇지 못한 나라에서 가장 쉽게 혁명운동이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러시아는 사회주의 혁명을 시작했다. 독일과 프랑스, 영국인들은 이 혁명을 끝맺을 것이다. 그러면 사회주의가 승리할 것이다.
모든 노동자, 모든 농민, 모든 시민은 스스로 도울 수 밖에 없고, 자신밖에는 의지할 곳이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문제점
1917년1월1일 제국은행이 발행한 루블화 지폐 총액은 90억 루블이 조금 넘었다. 1917년에는 147억2100만 루블이 발행되었고, 1918년1월부터 5월까지 120억 루블이 발행됐다. 볼세비키당 내에서 일어난 불화를 알려면 러시아 국내의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둬야 한다.
레닌과 공산당 7차 당대회
3월6일부터 8일까지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린 7차 당대회에서 두 견해가 서로 맞섰다. 며칠 뒤인 3월10일 독일군의 점령 위협이 가시화되자 수도는 모스크바로 이전했다. 당대회는 강화조약 단 하나만을 논의했다.
우리는 역사적 경험과 세계혁명의 도움을 받아 당내 분열을 치료할 것이라고 레닌은 말했다.
역사를 통해 우리는 평화가 전쟁 전의 휴전이며 전쟁이 더 나은 평화를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수단임을 알고 있다.-레닌
나는 시간을 벌고 싶다. 그러러면 공간을 포기할 수 밖에 없다.
영웅적 희생의 테제
혁명의 전체 진행 과정 동안 게길라전은 모든 혁명적 낭만주의자들이 품었던 해맑은 희망 가운데 하나였다.
7차 당대회에서의 원칙과 행동
당명칭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서 러시아 공산당(볼세비키)으로 전환했다.
레닌이 7차 당대회에 제출한 강령 초안 요약(소비에트의 장점 10가지 테제로 규정)
(1)가난하고 억압받는 모든 대중의 단결
(2)전체 노동 대중의 재교육을 위한 활동적인 소수의 단결
(3)입법권과 행정권을 분리시키는 의회제 폐지
(4)대중과 국가의 연대, 이 연대는 예전의 민주주의 형태에서보다 더 밀접할 것이다.
(5)노동자와 농민의 무장
(6)더 많은 민주주의와 훨씬 적은 형식주의, 대표를 선출, 소환하는 기회의 확대
(7)정치 기구와 생산 부문 간의 더욱 긴밀한 관계
(8)관료제를 타파할 수 있는 능력
(9)부자와 빈자의 형식적 민주주의에서 피착취 대중의 실질적 민주주의로의 이행
(10)소비에트 전체 구성원의 국가 행정과 경영 참여
적군창설
단호한 노동, 혁명적 규율, 이것은 트로츠키가 청중의 머릿속에 심어 놓으려고 되풀이한 구호였다. 그의 제안에 따라 4월22일 일반 의무군사훈련 포고령이 통과됐다.
제7장 기근과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간섭
기근
4월2일 포고령에 따라 농촌과 물물교환이 실시됐다. 이것은 도시와 농민들 사이의 까다롭고 혼란스러운 관계를 정상화하는 첫 단계였다.
5월20일 식량군이 창설됐다. 1919년에는 식량군은 4만~4만5천명이었다.
기근은 노동계급 거주지에서도 고통, 절망, 분노를 자아냈고, 도시 중간계급이 온갖 종류의 반혁명 선동을 기꺼이 따르도록 만들어 버렸다.
아나키스트 무장해제
아나키스트들이 무장해제 당하는 동안 반혁명 장교들은 체포됐고, 몇주일 뒤 석방될때까지 오로지 석방만을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하며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혁명, 그리고 혁명에 반대한 사람들
두 개의 테제. 부하린: 확전론
두 개의 테제. 레닌: 공세 중지론
제8장 7~8월의 위기
1918년7월과 8월 두 달은 혁명에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1919년7월 위기는 훨씬 오래되고고통스럽기는 했지만, 계급 전쟁이라는 측면에서 1918년 7~8월의 위기처럼 폭발적이지 않았다. 독일 제국주의의 힘을 한껏 경험한 소비에트 공화국이 이제는 나라 한복판에서 연합국의 간섭 때문에 충격을 받고 있었다. 동맹국와 연합국이 소비에트에 대항해서 사실상 기괴한 동맹을 맺은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대 루덴도르프는 솜므와 엔에서 파리를 향해 마지막으로 죽을 힘을 다해 공세를 감행하고 있었다. 또 이때 독일군은 돈 지역을 통치하는 아타만 크라스노프에게 무기와 탄약을 공급하고 있었으며, 연합군은 아타만 크라스노프를 지원하고 있었다.
레닌과 트로츠기의 공통점은 시간엄수, 시간과 재원의 절약, 규율, 동지들 사이의 책임과 주도력에 기초한 활동 방식이다. 두 사람은 타고난 조직가였고, 꾸준히 조직가 집단을 길러냈다.
제9장 승리 의지와 테러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은 닮은 점이 많다. 여러 사건과 행동의 세부사항조차 닮았다. 심지어 일부 사건들은 날짜까지 같다. 1792년과 1918년9월2~6일은 두 혁명이 감옥에 갇혀 있던 국내 반혁명 세력을 처형한 날이다. 1792년 프로이센군이 베르덩에 침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파리는 무장봉기했다. 체코군이 볼가 지역의 주요 도시를 모두 점령하고, 영국군이 아르한겔스크와 무르만스크를 장악하자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의 노동자들은 무기를 들었다. 7~9월 동안의 여름에는 두 혁명 모두 결정적 위기를 맞았다. 프랑스가 1792년과 1793년, 러시아가 1917년, 1918년, 1919년 여름에 각각 위기를 맞았다는 점도 똑같다. 이 몇 달은 기후적, 생물학적(이 시기에 인간의 에너지는 절정에 달한다), 사회적(수확기를 앞둔 시점)요인 때문에 전쟁을 하기에는 가장 적절한 시기였다. 적색 테러의 직접 계기가 된 러시아의 1918년 7~9월의 위기는 1793년 같은 시기의 프랑스혁명을 위협했던 상황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듯하다.
제10장 독일혁명
루덴도르프는 제1차 세계대전을 통틀어 8월8일은 독일군에게 가장 암울한 날이었다고 말했다. 바로 그날 알베르와 모뢰유 사이의 피카르디에서 세 번째 전투가 벌어졌다. 그 전투에 선보인 탱크는 연합국의 군사 기술이 단연코 우월하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었다. 독일군 제2군이 괴멸됐다. 제2군은 여러 개의 사단을 재편성해야 할 만큼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
제11장 전시공산주의
문학계 고리키는 모든사람들에 호소했다.
-지금 러시아는 노동계급과 정신적으로 그들을 지지한 러시아 지식인들이 시작한 실험, 러시아의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짜낼지도 모르는 이 비극적인 실험은 매우 위대한 것이며, 전 세계는 이 실험을 보고 여러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은 세상을 다 바꿔야 한다는 사명감과 세계를 구해야 하고 최상의 세력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소명감을 느끼고 있다. 우리가 함께 우리가 창조한 새로운 생활을 향해 여행하자. 고통과 실수가 따르더라도 물러서지 말고, 또 무엇이든 누구든 아낌없이 버리고 우리와 함께 떠나자.
레닌은 카우츠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다. 처음으로 우리는 군주제, 지주, 중세적 잔재(그리고 혁명이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이라는주장)에 맞서 전체 농민층과 함께 싸웠다. 그런 다음 우리는 자본주의(부농과 쿨라크, 투기꾼을 포함한)에 맞서 빈농과 준노동계급, 모든 피착취 인민들과 함께 싸웠다. 그 결과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환됐다.
해설
이 책은 빅토르세르주의 스탈린주의적으로 개작한 당사(黨史)에 도전하는 역사 서술
본질적으로 이 책은 1917년의 코뮌 국가에서 1918년 말 당 독재로 이어진 사건들의 사슬을 재구성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세르주가 들려 주는 이야기의 기본 틀은 그의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기본 생각을 담고 있다.
첫째, 1917년10월 혁명은 압도 다수의 노동자, 농민이 느끼고 있던 대중적 감정의 진정한 표현이었다.
둘째, 볼세비키의 권력 장악에 뒤이은 초기 몇 달 동안 이미 쇠약한 러시아를 완전히 황폐화시킨 군사적 약탈과 경제 파탄 때문에 혁명의 물결은 급속히 퇴조했다는 것, 다시말해 스스로 피를 흘리며 죽어 갔다는 것이다.
볼세비즘의 초기를 다룬 세르주의 서술에 대해 공산주의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가들과 평론가들 가운데 적어도 세 부류가 불만을 느끼는 것 같다. 세르주의 첫째 전재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1917년의 볼세비키 혁명이 대중 열망의 표출이나 그런 열망을 대변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쿠데타나 음모였다고 주장한다. 이런 논리에서 보면, 1917년에서 1918년에 걸친 혁명의 운명에 대해 꼼꼼한 설명은 공산주의 이상의 좌절을 설명하는 데 별로 역사적 타당성이 없다 왜냐하면 볼세비키 정권은 처음부터 소비에트 깃발 뒤에 숨어서 소수의 독재를 이끌어 나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러시아혁명의 교훈을 생생히 전해 주는 빅토르 세르주의 고전!
혁명에 대한 편견은 대개 두 가지다. 혁명은 비민주적이라는 생각과, 혁명은 폭력적이라 도덕적으로 의심받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불굴의 혁명가 빅토르 세르주의 이 책은 이런 편견이 얼마나 실제와 다른지를 잘 보여 준다. 물론 혁명은 투표와 다수결로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통념적으로 아는 의회민주주의만이 유일한 민주주의인가?
이 책이 보여 주듯이., 1917~18년 러시아에서 민중의 전위라고 할 조직 노동자들은 압도적으로 사회주의를 지지했고, 혁명과 반혁명 사이에서 동요했던 다수의 농민은 사회주의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반동 세력의 반 민중에서 반발해서라도 결국 혁명 편에 섰다.
물론 이런 전위 주도의 혁명이 권위주의로 전락할 가능성을 내포한다는 의미에서는 위험한 부분도 있다는 점을 세르주는 충분히 지적한다. 그런데 전란 중의 나라에서 과연 전위 계급이 그 역할을 오로지 설득을 통해서, 절차적 민주주의를 지키면서 다할 수 있었겠는가? 결국 1917~18년에 러시아는 극히 폭력적인 내외 상황이 허용되는 한에서는 혁명적 민주성을 경험했다는 것이 이 책의 귀중한 결론이다.
세르주의 중요한 지적 또 하나는 내전의 폭력적 상황이 점차 혁명적 민주성을 갉아먹어 전위 정당 안에서 권위주의가 증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설득력 있게 보여 주듯이 대전에 불을 지핀 것은 혁명 세력이 아닌 반동 세력이었고, 혁명 러시아에서 포위당한 요새의 분위기를 만든 것은 궁극적으로 유럽 혁명의 실패였다.
러시아혁명이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면 이 책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변론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심화하는 오늘날, 러시아혁명의 교훈들을 생생히 전해 주는 이 책은 사회변혁을 도모하려는 모든 이들에게 필수적 참고서라 할 것이다.- 박노자(노르웨이오슬로 대학교수)
빅토르 세르주 Victor Serge(1890~1947)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나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 자랐다. 본명은 빅토로 르보비치 키발치치(Victor Lvovich Kibalchich)이고, 부모는 추방당한 러시아 지식인이었다. 청년기에는 파리에서 아나키스트 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보노(Bonnot)사건으로 5년 동안 수감되기도 했다. 1919년 러시아혁명에 뛰어들어 페트로그라드, 모스크바, 베를린, 빈에서 활동했고,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코민테른 기관지)의 편집에도 참여했다.
좌익반대파에 가담해 스탈린 체제에 맞서다 1928년 공산당에서 쫓겨나 수감됐고, 풀려난 다음에는 혁명사와 소설을 쓰는 데 몰두했다. 1933년 다시 체포되어 중앙아시아로 추방됐다. 앙드레 지드, 로맹 롤랑 등 여러 프랑스 문인들의 항의 덕분에 유형에서 풀려난 뒤 1936년 러시아를 떠나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프랑스에 살다가 독일이 침공하자 멕시코로 옮겼고 1947년 멕시코에서 죽었다.
세르주는 이 책 말고도 한 혁명가의 회상Memories of a Revolutionary(1963), 레닌에서 스탈린까지 From Lenin to Stalin(1937)을 썼고, 소설로는 툴라예프 동지 사건 The Case of Comrade Tulayev(1951), 정복당한 도시 Conquered City(1975), 캄캄한 시대일지라도 Midnight in the Century(1982), 우리 권력의 탄생 Birth of Our Power(1967), 죄수와 기나긴 황혼 Men in Prison(1969), The Long Dusk(1946) 등이 있다. 이 책의 후편인 Year Two of the Russian Revolution은 스탈린 정권이 원고 전체를 압수했다.
옮긴이 황동하
숙명여자대학교에서 소련 역사를 전공했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대진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로 있다. 저서로 《필사적인 포옹: 독소불가침조약과 소련 측의 동기 분석》(한국학술정보, 2006)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코민테른-레닌에서 스탈린까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서해문집, 2009)가 있으며, 다수의 논문을 썼다.
러시아혁명의 진실
지은이 빅토르 세르주
옮긴이 황동하
펴낸곳 도서출판 책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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