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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안동과학대학교 은빛학생회 원문보기 글쓴이: 개목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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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죽과 홍랑에 얽힌 사랑이야기
사대부 시인과 기생 홍랑의 열애, 400년 해주최씨 고죽 최경창의 구림 종가
묏버들 갈해 꺾어 보내노라 임에게 주무시는 창밖에 심거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 여기소서
조선시대 기생 시인 홍랑이 당대의 문장가 고죽 최경창(1538~1583)에게 보낸 이별의 시다. 연인을 떠나 보내는 애절한 뜻을 버드나무가지를 빌어 표현한 이 작푸믄 우리나라 문학사에 가장 아름다운 연시(戀詩)의 하나로 꼽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다. 이들의 비련(悲戀)의 러브스토리는 홍랑이 남긴 애절한 한글 시조 한 편을 중심으로 전설처럼 전해 오다가 지난 2000년 11월 11월 최경창의 육필 답사와 홍랑의 한글 시 원본이 공개 되면서 다시 한 번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스산한 겨울 날씨를 훈훈하게 달구어 준 연사에 담긴 사연을 찾아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다율리에 정부인과 애인이 함께 묻혀있는 최경창의 묘소와 후손들이 살고 있는 전남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종가를 찾았다.
한 묘역에 누워 못 다한 사랑 꽃 피우다
지난 11월 7일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 쬐는 양지바른 곳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다율리 해주최씨 선산에는 조상들의 음덕을 기리는 가을 시제가 한창이었다. 문중 회장 최봉섭(14대 후손)와 구림 종손 주호(16대) 씨 등 30 여명의 후손들이 참석해 조상이 남겨 둔 땅에서 거두어들이 곡식으로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을 올리고 극진한 예를 다해 묘제를 지내고 있었다. 이날 묘제에서 특별히 눈길을 모았던 풍경은 ‘시인 홍랑지묘’라고 쓰여진 비석의 주인공에게 올리는 제례였다. 양반 가문의 선산에 기생이었던 홍랑의 묘가 버젓이 자리하고 있는 일도 흔한 일이 아닐뿐더러, 사대부의 후손들이 그 무덤의 주인공 제사까지 지내주는 일은 더욱 희귀한 일이어서 관심이 컸다. 홍랑 무덤 바로 위에는 그녀가 목숨바쳐 사랑했던 연인 최경창과 그의 부인 선산임씨의 합장묘가 있었고 이들의 제례가 끝나자 홍랑의 묘 앞 상석에도 똑같은 제물이 차려졌다.
밥과 국, 술과 적, 떡과 탕, 나물과 과일... , 음식은 넉넉했지만 홍랑의 제례에는 축(祝文)이 없었다. 석잔의 술이 아니라 단잔의 술만 올렸다. 문중을 대표하여 전직 교장 최봉섭(14대 후손)씨가 제주가 되었다. 종손이 차마 기생 제사에 제주가 될 수 없기도 하지만 최향섭씨는 교장으로 퇴임한 시인이었으며 그의 시 “어떤 손”이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어 해주최씨의 DNA에는 뛰어난 文才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묘제가 끝난 후 음식을 거두어 묘지 아래 재실에서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홍랑의 묘가 해주최씨 선산에 있게 된 내력을 듣게 되었다. 묘소 인근에 있는 청석초등학교 교장직을 퇴임한 고죽의 17대 후손 전직 교장 은호씨가 들려 주었다. 그는 이곳에 8대째 살고 있는 최씨 마을 내력에 대해 밝았다. “저희 선산은 본래 이곳에서 얼마 떨어진 월롱면 영태리에 있었습니다. 지난 1969년 영태리를 군용지로 수용하면서 지금 자리로 이장하게 된 것입니다. 묘소가 있던 자라는 지금 미군 부대가 들어 있구요. 조선을 대표하는 3당(三唐) 시인 중의 한 분인 묘소를 문화재로 지정하지는 못할지언정 군부대를 짓겠다는 정부의 처사가 당시에는 한없이 원망스러웠죠.” 최씨는 묘를 이장 할 당시 홍랑의 무덤에서 옥으로 된 목걸이, 반지, 귀고리, 옷 등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이장을 도왔던 선친께 들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최씨 집안에 전해오는 유물은 없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옮겨온 지금의 묘소도 또다시 이장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큰 길이 생기기 때문이다. 조상의 묘소를 구가 시책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야 하는 문중 후손들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다.
詩가 맺어 준 홍랑과의 아름다운 만남
1683년 고죽 최경창 선생의 증손자(늑촌공 振海)가 펴낸 고죽집(孤竹集)에는 기발한 착상과 산뜻 유려한 표현으로 이루어진 주옥같은 구죽의 시 236수가 실려 있다. 여기에는 홍랑이 고죽에게 보낸 한글시“묏버들”을 고죽이 한문으로 번역한 “번방곡(飜方曲)이 수록 되어 있다. 두 사람이 주고 받은 사랑의 시로 짐작되는 시도 여러 편 보인다. 고죽과 경창의 로맨스는 이렇게 일찍부터 그의 문집을 통해 전설같은 이야기로 면면히 전해졌다. 뿐만 아니라 당시 문우들의 문집에서도 두 사람의 이야기는 간간이 나타났고, 최근에는 고죽의 육필원고까지 발견돼 조선시대 최고의 러브스토리라며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다. 황해도 해주가 본관인 고죽 최경창 선생은 1539년 평안도 병마절 도사를 지낸 최수인의 외아들로 서울에서 출생했다. 조혼이 유행하던 당시의 풍속에 따라 13세에 목사를 지낸 선산 임씨의 따님과 혼인을 하면서 전라도 영암군 구림리 지금의 종가 마을에서 신혼 생활을 하게 된다. 그때는 처가살이가 당연하던 시대였다. 구림에서의 생활은 다양한 계층의 학자들과 교류가 이어져 학문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약관의 나이로 송강 정철과 구봉 송익필 등 당대의 시인들과 시회를 열어 그의 문재가 알려지기 시작했고, 조선 8문장에도 들어가리만치 인정받았다. 그중에서도 당시의 대가로 알려진 옥봉 백광훈, 손곡 이달과 함께 3당 시인으로 꼽혔다. 율곡 이이는 고죽의 시를 가리켜 ‘청신준일’ 하다며 극찬을 했다. 그는 문장뿐 아니라 글 솜씨도 수려했고, 피리를 잘 불었으며, 활쏘기에도 명수였던 당대의 멋쟁이였다. 23세 때 진사에 합격하고 7년 후인 30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그리고 5년 후 35세 때는 홍랑과의 인연이 시작되는 함경도 경성에 북도평사로 부임 하였다. 요즘 같으면 장교 계급의 군인으로 변방을 지키려 나갔던 것이다. 서울에서 천리길이나 되는 북도평사의 부임길에 그 지역 관리가 주선해준 여독의 위로 자리에서 홍랑을 만났다. 문학적인 소양과 재색을 겸비했던 홍랑은 관기로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술 한잔에 흥취가 일자 홍랑이 먼저 시조 한 수를 음률에 맞춰 읊었다. 어여쁜 홍랑이 낭랑한 목소리로 읊조리는 시조가 바로 자신의 작품임을 알고 고죽은 놀라워하면서 홍랑에게 넌지시 누구의 시조를 좋아하느냐 묻는다. 홍랑은 고죽의 시를 좋아한다고 답했고, 고죽은 자신이 고죽임을 밝히면서 당대 최고의 시인과 기생 시인의 로맨스는 시작되었다.
홍랑의 지순한 사랑 때문에 파직
그렇게 맺은 인연으로 추운 겨울을 군막에서 함께 지냈다. 당시의 풍습으로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고. 관에 배치된 기생은 가정을 떠나 멀리 있는 군사들의 바느질, 빨래 등의 수발을 들었고, 심지어는 잠자리 시중까지 들었기 때문에 관기 신분의 홍랑은 변방에서 겨울을 보내야 했던 고죽과 함께 생활이 가능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비록 기생 신분이었지만 문학적인 교양과 빼어난 미모를 겸비한 홍랑과 조선을 대표하는 시인 중의 시인 고죽과의 사랑은 봄이 되자 안타깝게도 이별을 맞게 되었다. 고죽이 변방에서 임기가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이때 홍랑은 멀리 쌍성까지 따라와 눈물로 작별하고 되돌아가다가 ‘함관령’ 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즈음, 때마침 날도 저물고 비마져 뿌려 사랑하는 이를 향한 애달픈 마음을 한 편의 시조에 담았다. ‘묏버들’ 이란 절세의 문장은 그렇게 해서 탄생됐다. 홍랑과 헤어진 일 년 뒤 고죽이 병을 얻어 몇 달째 누눠 있다는 솟긱을 들은 홍랑은 그날로 7일 밤낮을 걸어 한양에 당도했다. 그리운 임의 병간호는 홍랑으로서는 행복한 일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함경도, 평안도 사람은 도성 출입을 금하는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고, 때마침 명종의 비인 인순황후의 국상 중이었다. 고죽을 시기하던 무리들이 이때다 하고 상소를 올렸다. 이 사건으로 고죽은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홍랑 역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고죽은 홍랑을 고향으로 떠나보내면서, ‘송별’이란 제목으로 두 편의 한시를 지어 주었다.
옥 같은 빰에 두 줄기 눈물 흘리며 봉성을 나서는데 새벽 꾀꼬리 한없이 우는 것은 이별의 정 때문이네 비단 적삼에 명마를 타고 하관 밖에서 풀빛 아스라한데 홀로 가는 것을 전송하네
또 한 편의 시는 홍랑의 버들에 자신을 상징했듯이 고죽은 난을 주면서 사랑하는 마음을 전한다.
서로 계속 바라보며 그윽한 난을 주니 이번에 먼 곳으로 가면 언제나 돌아오려는고 함관의 옛 노래를 부르지 마오 지금까지 구름과 비가 청산에 자욱하네
명나라에서도 명성이 자자했던 대 시인 고죽
홍랑의 일로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고죽은 다시 관직을 받아 명나라에 부사로 간다. 자연스레 그곳 문인과 교류하게 되고 그의 시 ‘천단’은 명나라 시인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일 년 후 그는 영광 군수로 임명되기도 했지만, 부침이 심한 관직에 뜻이 없어진 고죽은 관직을 그만두고 남원 광한루에서 시회를 열기도 하고, 대동강 부벽루 등지의 산수 수려한 곳에서 시회를 열면서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한껏 발휘하며 지냈다. 그러나 나라에서는 뛰어난 자질의 그를 그냥 두지 않고 두 계급을 승진시켜 함경도 종성부사로 교지를 내린다. 그러나 그 특진이 또 말썽이 되자 다시 성균관 직강직의 교지를 받고 한양으로 올라오다 경성 객관에서 향년 45세의 아까운 나이로 쓸쓸하게 객지에서 생을 마감한다. 멋쟁이 시인답게 성품도 곧고 맑아 사후 숙종 때 청백리에 선정되기도 했다. 고죽의 사망 소식을 접한 홍랑은 고죽의 묘소 앞에 띠집을 짓고 머리도 빚지 않은 채 시묘살이를 시작했다. 3년 동안의 시묘를 끝내면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고죽의 시문집을 가슴에 품고 피난길을 올라 떠돌다 끝내 잊지 못할 임의 곁으로 가기 위해 자결을 했다. 자신이 죽거든 고죽의 묘소 앞에 묻어 달라 유언을 남기고 말이다. 이에 문중에서는 그의 절개와 의리를 기려 고죽의 묘 앞에 무덤을 만들고 비석도 하나 세웠다. 기생 홍랑은 신분의 차이와 죽음의 이별을 극복하고 고죽 곁에 머물면서 못 다한 사랑을 꽃피우고 있었다. 이러한 사연을 짐작할 수 있는 정황을 밝힌 서첩이 지난 2000년 11월에 공개됐다. 홍랑의 한글 시조 원본과 홍랑과의 재회 후 홍랑을 떠나보내면서 고죽이 써준 답시 ‘송별’ 시의 육필도 있었다. 이 서첩은 서화 감식안으로 꼽히는 위창 오세창(1864-1953) 선생이 한때 소장했으며, 서첩 발문에는 근대 국문학자 가람 이병기(1891-1968)선생이 1936년 이 자료들을 보고 고증 평가해서 쓴 글도 실려 있었다. 위서 논란이 있기도 했지만 공개된 서첩의 말미에는 홍랑과 나눈 만남과 이별의 이야기와 주고받은 시를 고죽 자신이 기록한 자료도 있어 두 사람의 사랑이 실화였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한편 조선 중기의 학자 남학명(1654-?)의 문집 <회은집>에서는 고죽이 세상을 떠난 후 홍랑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고죽이 죽은 뒤 홍랑은 스스로 얼굴을 상하게 하고 그의 무덤에서 시묘살이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리통에 고죽의 시를 품고 피난하여 병화를 면하게 했다는 기록과 함께 홍랑과 고죽 사이에는 아들이 한 분 있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1867년 고죽의 5세 손이 만들어 대물렸다는 족보에는 서자 한 분이 기록돼 있는데, 그분이 바로 고죽과 홍랑 사이에서 출생한 아들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혈식군자’라 생식 올리는 선현들의 가을 향사
파주에서의 묘제가 있은 3일 후 전남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에 있는 고죽 최경창 선생 종가에서는 가문에서 추앙하는 다섯 분의 선조 위폐를 모시고 있었다. 우리나라 사학의 문을 처음으로 연 해동공자 최충(984-1068)을 위시해 세종 때 홍문관 집현전 박사를 역임한 강호 최만리 공, 그리고 홍랑의 연인 고죽공과 증손자인 양파 석징 공, 만성공 다섯분위 위폐를 모시고 종가의 사우 동계사에서 제례를 행하고 있었다. 구림공 70여 가구의 일가친척 외에도 성씨가 다른 집안의 어른들도 모신 자리였다. 이는 제례를 통해 가문의 화합은 물론이고 성씨가 다른 문중과의 교류와 친목을 돈독히 하기 위한 가을 축제와 같은 성격을 띠었다. 고죽의 16세 구림 종손 최주호(73)어른과 종부 문근남(69) 할머니는 손님맞이에 분주했다. 향사에 오르는 제물 준비는 문증에서 준비하기 때문에 종가에서는 제물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제상에 오르는 제물은 모두 생식이어서 부엌에서 기름 냄새 풍기는 잔손질 많이 드는 음식도 아니다. 이날 다섯 분의 신위 전에 올린 제물은 익히지 않은 돼지머리와 다리가 중심이 되어 놓여졌고, 비늘 그대로의 숭어 한 마리도 날것으로 올랐다. 육회라 하여 날고기도 한 접시 올려졌고, 줄기와 잎이 그대로 달린 무와 그 옆으로 뿌리와 잎이 달린 미나리를 짚으로 묶어 얼렸다. 기장과 쌀도 날것으로 한 그릇씩 올렸다. 신주로부터 왼편으로는 육포와 상어 말린 어포, 껍질 벗기지 않은 밤과 대추, 은행도 올렸다. 제물은 간단하면서도 날것으로 올리기 때문에 정성껏 씻고 다듬고 그릇에 담기만 하면 되는 것이어서 다섯 분의 제례를 한꺼번에 모셔도 그다지 번거로워 보이진 않았다. 생식으로 준비한 제물을 올리는 것은 2500여 년 전의 예절책 <예기>에 종묘의 큰제사는 날고기를 쓰며, 사직의 제사 때는 절반정도 익은 고기를 쓰고, 작은 제사나 한 잔의 술을 올릴 때는 완전히 익은 고기를 쓴다 하니, 날고기를 사용하는 것은 종가의 큰 제사로 봉제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혈식군자라고 하여, 군자는 날 것을 올린다는 <주자가례> 의 기록에 준하기도 했다. 제사 지내는 의식은 향교에 모셔진 성현들의 제사 순서와 같았다. 그리고 제복은 베로 만든 도포나 옥색 도포가 아닌 검은색 도포를 입었던 것도 다른 지역과 차별화 된 모습이었다.
나눔의 미학 분포례를 행하는 종가
종가의 향사에서 눈길을 끈 의례는 제사를 마친 후에 치르는 분포례였다. 제사 음식을 나누어주는 의식으로 제사상에 오른 제물은 하나씩 봉지에 나누어 담고, 그 음식 봉지는 또 네모난 소쿠리에 차곡차곡 담아서 보자기로 묶는다. 그리고 노잣돈을 넣은 봉투까지 준비해 이날 참석한 제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감사의 뜻과 음복의 의미, 나눔의 뜻을 전하는 제례의 마지막 의식은 참으로 이채로웠다. 제물은 그냥 주는 것이 아니라 예를 다한 의례로서 전한다. 찬인 이라는 역할을 맡은 분이 예복을 갖추고 두 번 절을 하고 음식 보자기를 건넨다. 음식을 받은 13명도 일일이 두 번 절을 하고 음식 보자기를 건넨다. 이날 3명의 제관과 축관, 창홀, 진설, 찬인, 알자, 봉향, 봉로, 사준, 전작, 봉작 모두 13명이 이 분포례에 참석했다. 종손 이하 해주 최씨 문중 사람들은 자신들의 조상 제례를 모시면서도 제례에는 직접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 모습도 특이해 보였다. 월출산 뒷자락 아늑하고 포근한 마을에 자리한 종가는 고색창연한 옛 건물이 아니었다. 본래 초가집 이었는데 지금은 현대식 건물로 다시 지었다. 증손으로부터 4대조를 모신 한 칸 짜리 조촐한 사당만이 낡은 기와지붕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어 宗家의 엤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영암군에서는 2004년 고죽기념관을 개관해 고죽과 관련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고죽의 문집과 초상을 상상하여 그려 놓았고, 당시에 입었던 장군복과 신발, 관복 등을 전시하고 있지만 대부분 복사품이어서 아쉬움이 남았다. 구림 문중의 최재형옹은 구림에 고죽의 후손들이 자리하게 된 내력을 들려줬다. “고죽 할아버지의 처가가 바로 이곳입니다. 부사를 역임했던 이곳 선산 임씨 따님과 혼인을 한 것입니다. 때문에 어릴 적부터 문과에 급제한 무렵인 청년기까지 이곳을 많이 내왕하셨습니다. 하지만 벼슬길에 나가시고 부터는 서울에서 생활을 하셨지요. 이 마을에 정착하신 분은 고죽공의 증손자인 양파공(碩徵)이십니다. 그분은 몸이 병약하셔서 요양을 하기 위해 증조할아버지의 처가가 있는 이곳에 자리잡게 됐고, 지금까지 400여 년 동안 후손들로 집성촌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고죽공의 구림 종가라고 하지요.” 해주 최씨 시조는 고려 성종 때 판사부사를 지낸 최온으로, 그 아들이 바로 해동공자로 추앙받는 석학 최충이다. 고죽은 최충의 18세 손이다.
2013. 10월 2~3일 전한공파 만취공 문중 친족 연찬회 자료 작성 진솔 향섭
[출처] 고죽과 홍랑의 사랑이야기|작성자 진솔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