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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의 종가-안동 김씨(상락 김씨) 판관공파 종가
윤 천 근(안동대 교수, 동양철학)
아! 소산마을
안동 일원에서 가장 넓은 평야라 할 수 있는 풍산들판! 이 곳은 우리의 전통시대에는 산으로 뒤덮인 안동 일원의 여러 지역에 비해서는 경제적으로 풍요한 지역이었다고 할 것이다.
전통시대의 우리 선민들의 삶은 농업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었다. 농업경제 시대에 있어서는 얼마나 너른 들을 갖고 있느냐가 풍요함의 여부를 결정한다. 물론 얼마나 비옥한 땅이냐 하는 것도 풍요함을 결정지워주는 중요한 조건일 것이다.
풍산 들은 이 두 가지를 다 갖추고 있는 곳이다. 넓은 들과 비옥한 토질, 풍부한 물 --- 그런 것들에 바탕하여 풍산 들은 풍부한 쌀을 생산하여 내었다.
쌀은 역사시대로 진입한 이래로 우리 민족의 삶을 중심에서 지지하여 왔던 곡물이다. 하얀 쌀밥을 먹는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전통적 삶 속에서는 ‘잘 산다’는 것을 증거하여 주는 말이었는데, 풍산 들은 그 주변에 발 붙이고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바로 하얀 쌀밥을 먹을 수 있게 하는 권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먹걸이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결정한다. 먹걸이의 풍요함은 사람들의 수를 결정하고, 먹걸이의 종류는 사람들의 미각과 문화를 결정하는 것이다.
풍산 들의 서북쪽을 비수로 찌르듯 뚫고 들어와 낮으막하게 웅크리고 있는 산, 점점이 이어지는 나지막한 산들이 마지막으로 풍산 들을 향하여 팔을 벌리며 내려앉은 곳, 그 산마루에 움을 틀고 있는 소산마을이 만만치 않은 삶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 넓고 비옥한 풍산 들이 풍부하게 생산하여 냈던 쌀 때문일 것이다. 풍산들의 풍요함이 그 한끝의 소산마을에서 두 안동 김문이 터잡고 살아가며 간단치 않은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게 이끌어 갔던 바탕의 이유가 되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소산마을의 안동김문들---
구 안동김씨와 신 안동김씨
소산리는 안동 김문의 텃밭이다. 그러나 소산리의 안동김씨는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소산리에서는 서로 원류를 달리하는 두 안동김문의 삶이 펼쳐져 나가고, 또 서로 파를 달리하는 안동김씨들의 역사가 이어져 나가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소산리의 안동김문의 역사는 그 마을이 아직도 우리 앞에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전통 가옥들, 아직도 상당한 위엄을 갖추고 있는 여러 채의 고대광실들의 숫자 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양한 것이다.
소산동의 안동김문은 구 안동김씨와 신 안동김씨로 나누어진다. 구 안동김문은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자 하는 가문이고, 신 안동김문은 전에 ‘안동김씨 비안공 종가’를 다루었을 때 살펴본 가문이다.
신 안동김씨는 신라말기에 고창군의 성주를 지냈던 김선평을 시조로 하는 가문으로, 조선 중기에 청음 김상헌에 의하여 명문으로 떠오르고, 조선 말기에 세도정치의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군림하였던 바로 그 가문이다. 이 신 안동김문은 15세기 후반에 비안공 김삼근에 의하여 소산에 입향하게 되고, 그리하여 소산리는 신 안동김문의 역사에 있어서 본향으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소산리에서 이 신 안동김씨의 역사는 여러 파종가들을 중심으로하여 펼쳐져 나아간다.
그런데 안동김씨 집성촌인 소산에는 이들 신 안동김씨들 만이 살고있는 것이 아니다. 구 안동김씨들도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일가들은 소산에 한 스무나무집이 살고 있습니다.”
판관공 종가인 ‘삼소재’(三素齋)에서 만난 종손 김석교(金奭敎)씨는 말하였다. 소산리가 워낙 큰 마을인 탓에 스무여나무 집은 별것 아닌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스무나무 집이란 상당히 많은 숫자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소산리의 이 안동김씨, 그러니까 구 안동김씨는 (이 글에서 신 구를 구분하지 않고 쓰여지는 안동김씨는 구 안동김씨를 의미함)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 가문일까? 안동김씨 대종회에서 발간한 『안동김씨 보감』(이하 보감이라 약칭함)의 2집에는 ?구 안동김씨와 신 안동김씨의 구별?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이 글에서 안동김씨 종친회가 자신들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으며, 또 신 안동김씨와 자신들을 어떻게 구분하여 놓고 있는가를 알아보도록 하자.
“구 안동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제 4자 대안군(大安君) 은설(殷說)의 셋째아들인 숙승공(叔承公)을 시조로 하는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을 중시조로 하는) --- 구 안동의 경우는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에는 태사(太師) 일긍(日兢)을 시조로 하여 기록되어 있으나, 우리 『안동김씨세보』(安東金氏世譜)에는 숙승공으로부터 안동김씨를 봉하였기 때문에, 숙승공을 안동김씨 시조로 모시는 것이다. 또 『김씨대종사』(金氏大宗史 ; 1958년 간)에는 구 신 양자가 모두 신라 왕실 계통의 후손으로 나와 있으며, 일부에서는 양쪽이 다 동원분파(同源分派)인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다만 옛부터 안동지방에서는 우리 구 안동김씨를 상락김씨(上洛金氏)라고까지 부르는 사람도 많았는데, 그것은 ‘상락’이란 안동의 고호(古號)로써 구 안동김씨 중에서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진 명인들이 대대로 많았기 때문이며 --- 역사적으로 보아 우리 구 안동은 고려 때부터 이조 중기 후, 인조 대 까지의 기간에 대대로 명인들이 쏟아져 나왔고 상당한 세력을 떨쳐왔으며, 반면 신 안동은 이조 말기, 즉 인조 대로부터 고종 대에 이르는 기간에 인물들을 배출하였으며, 특히 이조 말기인 순조 - 헌종 - 철종의 3대에 걸친 세도정치를 통해 많은 권세를 펼쳤다. 그러니까 안동김씨는 세칭 구 안동의 퇴조와 얻비슷한 시기에 신 안동의 시대가 개막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보감』은 이렇게 신 구 안동김씨를 구분하여 설명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보감』은 이 글의 여러군데서 자신들이 더 오래된 안동김문임을 납득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숨기지 않으며, 자신들을 신 안동김문과 구분하여 받아들여주기를 요구한다. 『보감』의 이 글이 마지막에 신 안동김씨의 행렬자를 부기하고, 또 그 위에 자신들이 세도정치를 하였던 안동김씨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하여놓고 있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이 글의 필자가 가지고 있는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상황을 보다 명료하게 하기 위하여 위 글의 마지막 구절을 여기 인용하여 보도록 하자.
“이조 말기의 세도정치 하면 안동김씨를 연상하게 되고, 세도정치한 안동김씨가 구 안동인지 신 안동인지 구별 못하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한 가지 실 예를 들면, 학교 역사시간에 안동김씨 세도정치 문제가 나오면 선생이 학생들에게 무조건 안동김씨 손 들어 보라고 한다. 손을 들으면 구 안동, 신 안동을 구별하지 않고 신 안동김씨 일색으로 간주해 버린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조 말엽에 세도정치한 안동김씨는 신 안동김씨 집안이요, 우리 구 안동김씨는 전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천명해 둔다.”
안동김씨는 이렇게 전혀 다른 두 성씨가 하나의 본관과 성씨를 같이 쓰고 있으므로, 그 두 성씨 사이의 관계가 상당히 미묘한 경쟁적 양상을 띄고 나타나는 것을 부정하지 못한다. 전에 신 안동김씨를 취재하였을 때도 그랬고, 이번에 구 안동김씨를 취재할 때도 그러하였다.
전에 신 안동김씨를 취재하였을 때, 신 안동김씨에 속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구 안동김씨, 즉 상락김씨와 다르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하였고, 사실은 자신들이 먼저 안동김씨가 되었는데 왜 신 안동김씨, 후 안동김씨라고 말하여지는지 모를 일이라고 지나가는 말처럼 주장한 적이 있었음을 나는 기억한다.
이번에 구 안동김씨를 취재하는 동안에는 구 안동김씨에 속하는 노인으로부터 자신들이 안동김씨라고 표기되어야 마땅한데 왜 세상 사람들은 안동김씨 하면 신 안동김씨를 떠올리고 자신들은 굳이 상락김씨라고 표현하는지를 모르겠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나중에는 상락김씨라고 쓰든 구 안동김씨라고 쓰든 마음대로 하라는 말을 하였지만, 그러한 말 속에는 자신들이야말로 아무 전제도 붙이지 않고 안동김씨라고 표기하는 것이 마땅한 가문이라는 의식이 바탕에 깔려있는 것임을 감지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구 안동김씨와 신 안동김씨! 그들 중 어느 가문을 진실로 안동김씨라고 부를 수 있느냐 하는 것을 따져보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어쨌든 안동을 본관으로 하는 김씨가 둘 존재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니까 말이다.
소산마을의 삼소재(三素齋)를 찾아서
약속시간은 상당히 늦어 있었다. 소산마을 취재에 앞서 안동김씨의 중시조라고 말하여지는 김방경 장군의 묘소를 돌아보았기 때문이다. 예정에 없던 걸음이었지만, 김방경 장군에 대한 설명이 없이 우리가 취재하려는 안동김씨, 즉 상락김씨를 말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녹전의 김방경 장군 묘소를 돌아본다는 것은 소산마을 나가는 쪽과는 방향부터가 달랐기 때문에 조금 시간을 필요로 하는 문제가 아닐 수 없었지만, 김방경 장군 묘소를 먼저 들르는 것이 혹여 거기에서 풀기 어려운 의문점을 만나더라도 소산마을에 가서 물을 수 있는 이점이 있다고 여겨져서 강행하기로 하였다. 최대한 서둘러서 녹전의 김방경 장군 묘소를 살펴보고 왔지만, 그래도 예정보다 시간이 많이 늦어 버렸다. 그래서 소산마을에 가는 길에 김방경 장군의 생가터를 돌아보자는 계획을 접어 두었는데도 그만 약속 시간으로부터 한시간 정도나 늦어버렸던 것이다.
소산마을은 전에 신 안동김씨를 취재할 때에 들렸었고, 또 그 밖의 일로도 두어번 들렀던 적이 있었으므로, 상당히 익숙한 곳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자 하는 안동김씨, 즉 상락김씨의 판관공 종가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있지 못하였으므로 먼저 마을 입구의 노인회관을 찾았다.
“안동김씨, 그러니까 상락김씨 익원공파 종가를 찾아 왔습니다만…”
처음에 김복영씨와 나는 우리가 이번에 탐방하는 소산동의 안동김씨 종가가 익원공파 종가인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서슴치 않고 익원공파 종가를 입에 올렸던 것이다.
“상락김씨를 찾아왔대. 자네 나가 봐!”
문 쪽에 앉아있던 노인이 안쪽에 앉은 노인을 향하여 말하였다. 빙 둘러앉아 화투장을 만지고 있던 노인 중의 하나가 일어서서 나왔다. 아마도 거기 앉아있던 노인들 중 유일한 상락김씨였던 모양이었다.
“나도 상락김간데…”
나를 이끌고 밖으로 나온 노인이 말하였다.
“익원공파 종가를 가려고 합니다.”
내가 말하였다.
“파 종가는 아니고… 파 종가는 여기 없어요.”
“여기 소산마을의 종가를 찾습니다. 여기 종가가 안동 일원의 익원공파 중에서는 제일 큰집이 아닙니까?”
“그건 맞아요. 그렇지만 파 종가는 아니지요.”
노인이 다시 말하였다.
“그 집에 가려면 어찌하여야 합니까?”
“어디 보자!”
노인이 마을 안쪽을 향하여 돌아서며 말하였다. 노인과 우리의 시선 앞에는 마을 안쪽을 향하여 뻗어있는 두 갈래 길이 눈에 들어왔다. 마을 안쪽을 향하여 우측으로 난 길은 신 안동김씨의 종가를 취재할 때 갔던 길이었다. 좌측으로 난 길은 조금은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었으며, 오른쪽 길보다 조금 좁아 보였다.
“이 길로 가세요.”
노인은 왼쪽 길을 가리켰다.
“쭉 올라가면 끝에 큰 집이 있어요. ‘삼소재’라고, 그 집이 종가이지요.”
그 말을 들었을 때 김복영씨와 나는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아, 그 집!”
그 집은 전에 눈여겨 본 적이 있던 것이고, 전에 취재하였던 신 안동김씨의 비안공 구택 건너편에 있던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우리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노인이 가르쳐 준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경사 길이 끝나고 그 정점에서 평탄한 길에 접어들었을 때, 앞쪽으로 산 기슭에 올라앉은 커다란 집의 사랑채 대청마루 끝에 두 사람이 길게 길 쪽으로 고개를 빼고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앉아있는 ‘삼소재’의 사랑채 대청마루에서는 길을 따라 걸어들어 가는 우리의 모습이 보였고,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길 위에서는 낮은 울보다 더 높은 대청마루에 앉아있는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미안함을 느끼며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삼소재’의 대청마루에 올라앉아 정중하게 수인사를 나누고 나서, 우리는 약속시간에 늦은 사과부터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동김문(상락김씨)의 역사 --- 김방경 이전
‘삼소재’는 소산마을에 사는 스무나무집의 안동김씨, 그러니까 구 안동김씨의 종가에 해당한다. 이 안동김씨, 즉 상락김씨는 어떠한 역사를 갖고있는 가문일까?
『보감』에 의하면 안동김씨, 상락김씨는 경순왕(敬順王) - 은설(殷說) - 숙승(叔承) - 일긍(日兢) - 이청(利請) - 의화(義和) - 민성(敏成) - 효인(孝印) - 방경(方慶)’으로 이어지는 가계의 흐름 속에 그 초기의 역사가 놓여진다고 할 수 있다. 그 가계가 경순왕으로까지 소급하여 올라가는 것은 신라 왕가의 한 분파로 안동김씨가 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감』은 이러한 가계의 흐름 속에서 안동김씨로서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개시되는 것은 ‘숙승공’ 때서부터라고 한다. 위에 인용을 하였다시피, ‘숙승공을 안동김씨로 봉’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안동김씨로 봉하였다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라고 하기 어렵다. ‘안동군’(安東君)으로 봉하여졌다면 몰라도 말이다. 그런데 이 칭호도 적절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안동의 당시 명칭, 그러니까 신라 말기의 안동의 명칭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안동권씨, 안동장씨, 신 안동김씨 등을 출현시키는 ‘3태사’와 연계된 이야기 속에서는 신라 말에 안동은 ‘고창군’이었다고 하고, 왕건이 병산 싸움에 승리하도록 ‘3태사’가 도움으로써 지명이 안동으로 바뀌어진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고, 또 신라 말에 경순왕에 의하여 그 손자인 ‘숙승공’이 당시 안동에 봉하여지는 것이 사실이라면, ‘숙승공’은 당시 안동의 이름을 좇아 ‘고창군’이나 뭐 그 밖의 다른 군호로 봉하여졌을 것이다. 그랬던 것이 나중에 안동으로 이름이 바꾸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관향을 안동으로 하는 성씨로 불리워지게 되었을 터이다.
우리는 이러한 추정을하여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정은 적절한 것이라 하기 어렵다. 경순왕은 935년까지 재위에 있었고, 고려왕조의 녹을 먹으며 979년까지 살았다. 그렇다면 신라가 망하던 해, 그러니까 935년에는 그의 나이가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80년 이상의 수명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30대 후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나이의 경순왕에게 손자가 있어서, 그 손자가 안동에 군으로 봉해질 정도의 나이가 되었으리라고 볼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가능성 보다는 차라리 고려 왕조에 의하여 숙승공이 ‘안동군’으로 봉하여졌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다. 이럴 경우에는 이들을 김선평을 시조로 하는 신 안동김씨와 구분하여 구 안동김씨, 또는 선 안동김씨라고 부르는 것이 어려워지는 약점은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이야기의 골조 속에서는 ‘숙승공’이 아무리 이른 시기에 안동군으로 봉하여지고, 안동김씨라는 성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김선평보다 앞서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 안동김씨나 후 안동김씨, 또는 구 안동김씨 신 안동김씨라는 구분은 안동에 들어온 시기가 앞서거나 뒤선다든지, 안동김씨라는 성을 받은 시기가 앞서거나 뒤선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라 보기는 어려운 노릇이라고 하겠다. 그것은 아마도 역사 속에서 어느 가문이 먼저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게 되느냐 하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문제라고 할 수 있을 터이다.
『보감』에 의하면 안동김씨의 시조라고 말하여지는 ‘숙승’은 경순왕의 넷째아들인 대안군(大安君) 은열의 셋째아들이다. 여기서 ‘대안군’이라는 것이 어디를 봉지로 가지는 것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숙승의 벼슬은 공부시랑에 이른다고 한다.
‘숙승’의 아들인 ‘일긍’은 금자광록대부 상서 우복사 삼한공신 태사 대광(金紫光錄大夫 尙書 右僕射 三韓功臣 太師 大匡)을 지낸다.
‘일긍’의 아들인 ‘이청’은 상락군 안동태수를 지낸다. 아마도 이때부터 이들 일문이 본격적으로 안동에 세거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청’의 아들은 예부시랑을 지낸 ‘의화’이고, ‘의화’의 아들은 문과 한림 직사관(文科 翰林 直史館)을 지낸 ‘민성’이며, ‘민성’의 아들은 이 가문의 중시조가 되는 김방경의 아버지 ‘효인’이다.
김효인은 고려 희종(熙宗) 4년(120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한다. 그는 정의대부 병부상서 한림학사 지제고(正議大夫 兵部尙書 翰林學士 知制誥) 벼슬을 지냈고, 나중에 금자광록대부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수문전 태학사 판리 병부어사대사중서령(金紫光錄大夫 三韓壁上功臣 三重大匡 修文殿 太學士 判吏 兵部御使台事中書令) 벼슬을 추증받았다. 그는 예서에 능하였다고 하며, 고려 고종 시대, 그러니까 서기 1253년에 타계한다.
이 김효인은 방경, 지경(之慶), 현경(玄慶) 등 세명의 아들을 두었다. 현경은 충순공(忠順公)으로, 그의 손자인 영규(永奎)는 수성최씨(隋城崔氏)의 시조가 된다. 지경은 부사공(副使公)이고, 방경은 충렬공(忠烈公)이다. 충렬공 방경의 후손들은 21개 파로 나뉘어 복잡할 정도로 전개되어 나간다.
충렬공 김방경
충렬공 김방경은 우리가 여기서 살펴보고자 하는 안동김씨, 즉 상락김씨의 중시조이다. 사실 안동김씨는 이 충렬공 김방경의 후손들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안동김씨의 역사 속에서 김방경이 지니고 있는 위상은 높은 것이라고 하겠다.
‘삼소재’의 방문에서도 그것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삼소재’의 대청마루는 직사각형의 형상을 하고 있고, 그 직사각형의 한쪽 끝은 대문과 연결되어 있었다. 사랑방은 대청마루의 대문쪽 한 끝에 뒤쪽으로 달라붙어 있었다. 그러니까 대청마루는 사랑방의 앞쪽에서는 좁은 쪽마루 형상을 띄고 있고, 사랑방 옆쪽으로는 통으로 마루가 깔려 있었다. 통으로 마루가 깔려 있는 부분은 앞쪽이 터져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삼면이 다 벽으로 막혀 있었다.
그 사랑방 앞쪽의 쪽마루 측면의 벽, 그러니까 대문쪽 벽에는 작지 않은 액자가 벽에 걸려 있었는데, 액자의 위쪽에는 종이가 주렴처럼 드리워져 액자의 윗부분 3분의 2 정도를 가리고 있었다. 한 눈에도 그것이 이 집 주인에게 심상치 않은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충렬공 김방경의 영정이었다.
액자에 넣어진 종이그림의 위쪽에는 ‘안동김씨 중시조 휘 방경 존영’(安東金氏 中始祖 諱 方慶 尊影)이라는 글자가 씌여져 있었다. 그 밑으로 옷을 달리하는 충렬공 김방경의 영정이 나란히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말할 때 좌측에는 무복을 입은 충렬공 김방경의 모습이고, 우측은 문복을 입은 충렬공 김방경의 모습이었다. 그 두 개의 그림 아래 쪽에는 충렬공 김방경의 행장이 길게 씌여져 있었다. 그러니까 액자 앞을 덮고 있는 종이주렴은 액자의 그림을 보이지 않게 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건 뭐 그리 들여다 보십니까?”
내가 종이주렴 밑으로 그 안의 영정을 들여다 보고 있으니까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삼소재’의 주인 석교씨와는 열여덟 촌이고, 항렬로 치면 4대 위라는 김명회씨가 말하였다. 김명회씨의 어조에는 불만의 기색이 역력하였다. 김명회씨의 불만이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지는 나로서는 명료하게 알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들에게는 소중한 의미를 갖는 영정을 무례한 태도로 들여다보는 것이 불만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중요한 일도 많을 터인데 그런 것에나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 불만이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담배라도 피울 양이면 영정이 걸려서 이쪽, 안보이는데 와서 피우고 그러지요.”
익원공파 판관공 종손인 김석교씨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하였다.
“그래서 보지 못하게 이렇게 가려놓은 것이군요?”
“뭐 가려놓는다고 하여서 별 차이야 있겠는가마는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아서 ---”
미상불 충렬공의 영정이 지켜보고 있는 곳에서는 행동거지가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김석교씨인 모양이었다. 그만큼 충렬공 김방경은 소산마을의 ‘삼소재’에서도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었다.
‘삼소재’의 사랑채 벽에서 만나본 김방경은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안동김문의 역사 속에서 김방경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가를 웅변으로 증명하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김방경은 이 가문의 의미를 결정하는 인물이다, 오늘날 이 안동김씨는 모든 이들에게 김방경의 가문으로 인식되어 있는 정도인 것이다.
김방경은 누구인가? 『삼소재문집』에서는 김방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기술하고 있는 부분이 보인다.
“상조(上祖)의 휘는 방경이시니, 고려 충렬왕을 받들어 정난정사공신(靖難定社功臣)으로 책록되었고, 벼슬이 삼중대광 첨의중찬(三重大匡 僉議中贊)에 이르렀으며, 세자의 스승을 지내셨고, 시호는 ‘충렬’이시다. 경기도 마전 ‘숭의전’(崇義殿)에 배향되고, 또 안동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되시었다.”
김방경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가정 먼저 언급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삼별초를 토벌하고, 일본정벌에 나선 그의 모습이다. 이 점에 대하여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은 김방경 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시 강도(江都)에 천도하여 대몽항쟁을 벌였던 고려는 일단 강화를 한 다음 원나라와 개경환도 문제로 실랑이 --- 1270년 6월에 이르러 개경환도가 강행되자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 때 그 토벌의 임무를 맡아 --- 진도를 사방에서 공격하여 삼별초의 토벌에 성공 --- 이어 탐라로 들어간 삼별초의 잔여세력의 평정을 책임맡아 1273년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에 임명되어 원나라 장수 흔도(?都)? 홍다구(洪茶丘)와 함께 공격하여 마침내 삼별초를 완전히 토벌하고 탐라를 평정하였다. 이 공로로 시중에 오르고, 그 해 가을 원나라에 들어가 원나라의 세조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1274년(충렬왕 즉위년) 10월 원나라의 일본정벌에 도독사(都督使)로서 고려군 8천인을 이끌고 도원수 홀돈(忽敦)의 총지휘 아래 참여하였다. 처음 대마도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리고 이키도(壹岐島)에서 용전하여 크게 기세를 올렸지만, 심한 풍랑으로 결국 실패하였다. --- 1281년의 제 2차 일본정벌에 주장(主將)으로 참여하였으나 또다시 실패로 돌아갔다. 1283년 삼중대광첨의중찬판전리사사세자사(三重大匡僉議中贊判典理司事世子師0로 치사(致仕)하였으며, 이어서 첨의령(僉議令)이 가직되고, 상락군개국공식읍일천호식실봉삼백호(上洛君開國公食邑一千戶食實封三百戶)에 봉하여졌다.”
이상의 기록을 통하여 볼 때, 김방경의 일생에 있어서 삼별초의 난과 원나라의 침입은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결국 그 사건이 김방경을 영광의 정점으로 밀어올렸기 때문이다. 김방경의 영광스러운 삶을 말할 때 원나라와의 관계는 무시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서 이 시기에 원나라는 그에게 영광만을 선사하여 주었던 것은 아니다. 무릇 영광을 누리게 되면 반드시 누구에겐가 질시를 받게 마련이다. 이 점은 김방경에게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김방경도 제 1차 일본정벌과 제 2차 일본정벌 사이 이 기간 동안에 위득유(韋得儒) 등의 모함을 받아서 다루가치(達魯花赤) 등에 의해 구금되고 홍다구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김방경의 자(字)는 본연(本然)이다. 『고려사』 ?열전?의 ?김방경사기?(金方慶 史記)를 번역해 실은 『보감』(2집)에 의하면, 김방경은 어려서부터 특이한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처음 방경의 어머니가 임신하였을 때, 여러번 운아(雲霞)를 먹는 꿈을 꾸고서 이웃사람들에게 ‘구름기운이 항상 입과 코에 풍겨 있으니 어린애는 반드시 신선 중의 인물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출생하여서 조부 민성(敏成)의 집에서 자라났는데, 조금만 비위에 틀리는 일이 있으면 길거리에 그대로 눕고 울었지만 지나가는 소나 말이 모두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멀리서 피하여 가니 보는 사람들이 이상히 여겼다.”
김방경은 16세에 음서로 산원 겸 식목록사(散員 兼 式目錄事)에 보임되어 벼슬살이를 시작한다.
『보감』에는 김방경의 인물됨을 네가지 조목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 보인다.
“첫째, 기골이 장대하시고, 풍채가 늠름하여 범상치 않아, 추위와 더위를 모르시고, 병환이 없었으며, 잠이 적은데다 늙으셨어도 머리가 검었다 한다.
둘째, 성품이 강직하고 신후(信厚)하며, 도량이 넓고 틀이 크시며, 사소한 일에 구애되지 않으며, 말이 적고 위엄을 갖추어 아이들이 가까이 따르지 못했다 한다.
셋째, 다문박식하여 백사에 빈틈이 없고, 판단이 정확하고 예민하셨으며, 시문에 능하시고 서도는 가전의 필법을 이루셨다.
넷째, 친척과 붕우 간에 경조를 궐함이 없고, 항상 예절에 밝으셨고, 사치를 버리고 검소한 생활태도와 건실한 경제관념을 지니셨을뿐 아니라, 인권을 존중하고 약자를 돕는 의협심도 강하셨다.”
그는 강종 1년 (1212년)에 출생하여 충렬왕 26년(1300년)에 타계한다. 그는 안동 회곡에서 살았다고 하며, 그의 묘소는 안동 녹전에 위치한다.
회곡의 아주 좁직한 들은 마치 가는 뿌리에 그보다 조금 밖에 살이 붙지 않은 고구마가 울틍불퉁한 형상으로 달라붙어 있는 모양이었다. 산과 산 사이에 아주 좁직하게 열린 들의 한쪽 산기슭에 옛날 김방경이 살았다는 회곡마을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한 50여호 됩니다.”
회곡마을 입구에서 익숙한 솜씨로 삶은 삼대로부터 껍질을 벗겨내고 있던 할머니는 말하였다. 밖에서 보기에는 서너집이 어울려 있는 작은 마을 같았는데, 산자락을 따라 안쪽으로 깊이에 까지 집들이 이어서 자리잡고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 주인도 안동김씹니다. 상락김씨지요. 이 마을에 우리 일가는 한 20여호 살아요.”
그 할머니가 쭈그리고 앉아서 삼대의 껍질을 벗기고 있는 뒤쪽으로는 김방경이 생전에 살았다는 집 터가 있었다.
“돌이켜 생각하건데 이 회곡 땅은 우리 선조의 태지(胎地)입니다.”
『삼소재문집』에 보이는 일절이다. 그러고보면 안동김씨의 중시조인 충렬공 김방경은 회곡에서 나고, 회곡에서 살았던 모양이다.
“전에는 우리가 주관해서 제를 지내곤 했지요.”
삼소재의 김석교씨는 말하였다.
“지금은 전국에서 후손들이 와서 제사를 지내곤 하지요.”
충렬공 김방경이 살았던 집 터에는 비와 각이 세워져 있다. 비각은 1985년에 중건한 것이다. 비의 전면에는 ‘고려첨의중찬충렬공상락김선생휘방경유허’(高麗僉議中贊忠烈公上洛金先生諱方慶遺墟)라는 글자가 크게 쓰여 있다. 이 비석은 이상정(李象靖)의 글씨라 한다. 비석의 측면에 세워둔 작은 표석의 글에 의하면 김방경의 처음 비석은 1635년에 실석되었고, 영조 41년(1765년)에 지금 서 있는 자리의 건너편 산 기슭에 이상정의 글씨로 다시 세웠으며, 그 비석을 순조 14년(1814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김방경은 1300년에 타계하여 안동 녹전에 묻혔다. 실전되었다가 다시 찾게 되었다는 이 묘소 앞에는 현재 두 개의 비석이 좌 우로 나란히 서 있다. 앞에서 보았을 때 우측으로는 옛날 비석인데, 앞면에도 뒷면에도 글씨라곤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지지 않았다. 그 옆의 것은 새로 지은 비석인 것 같았다.
“백비인 모양이야.”
옛날 비석을 보며 김복영씨가 말하였다.
나도 그의 의견에 찬동하였다. 눈을 감고 비석의 겉면을 쓸어보아도 글씨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여기다 백비를 세웠을까?”
김복영씨가 말하였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을 것 같지 않아요? 소산에 가서 물어 봅시다.”
“백비라니요? 아닙니다.”
‘삼소재’에서 만난 김명회씨는 단호하게 말하였다.
“오래되어서 글자가 닳아 없어진 것이지요. 전에는 글자가 있었어요. 그 옆에 새로 세운 비석이 있지 않아요? 글자를 알아보기 어려워서 옆에다 새로 비석을 세운 것이지요. 백비가 아니예요. 내가 봤는데, 흐릿하지만 글자가 있었어요.”
우리는 글자가 참으로 대패로 비면을 밀어버린 듯이 닳아 없어진 게라고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김명회씨가 확실히 두 눈으로 보았다고 장담하는 이상, 그의 말을 믿지 않을 수는 없었다.
충렬공 김방경의 묘소에서 느낄 수 있었던 가장 커다란 의문점은 바로 위에 ‘광산김씨 예안파 입향조’의 묘지가 붙어 있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서로 성씨를 달리하는 두 묘소가 이웃하여 위 아래로 같이 붙어있는 것은 우리네 정서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원래 충렬공 묘소는 실전이었어요.”
‘삼소재’의 대청마루에서 김명회씨와 김석교씨는 입을 모아 말하였다.
“광산 김씨 묘를 쓰려고 땅을 파다 보니 지석이 나와 우리 집안에 찾아 주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광김 묘가 충렬공 위로 올라갔어요. 그렇지만 그 집 제사 지낼 때는 먼저 충렬공에게 고유하고 제사를 지냅니다. 한 번은 그럴 필요 없다고 하여 그만 두었는데 난데없이 돌풍이 불고 하여서 그 이듬해 부터는 다시 충렬공에게 먼저 고유를 하고 지내게 되었지요.”
광산김씨 예안파 입향조의 묘소에는 문인석의 표정이 아주 재미있었다.
충렬공 김방경의 묘소는 앞부분을 각지게 처리를 하였고, 뒷부분은 앞부분 보다 두배는 더 넓은 범위에 걸쳐 밋밋하게 흘러내리는 능선을 갖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의 묘소 앞에 서서 보면 산기슭 아래의 재사와, 산과 산 사이에 열린 좁직한 들판의 저쪽 끝 쯤의 밭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원형의 나무 숲이 정면으로 내다보이고, 건너편 산의 높은 봉우리를 피하여 그 우측의 8부능선 쯤에 우리의 시선이 가 닿는다.
안동김씨 익원공파의 역사---
김방경에서 익원공까지
“안동 인근에 있는 자손들은 거의가 다 익원공(翼元公)의 지하이지요.”
‘삼소재’에서 김석교씨는 말하였다.
“우리는 판관공 종손 집이고, 안동 예천 의성 일원의 후손들은 거의 여기 지손입니다.”
김명회씨가 말하였다.
그러니까 안동 일원의 안동김문들 중에서 제일 웃대의 종손 집이 바로 ‘삼소재’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삼소재’는 익원공파 종가라 할 수는 없었지만, 안동 일원에서는 파 종가라 하여도 크게 문제가 있을 수 없는 위상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익원공파는 어떻게 말할 수 있고, 판관공 가문은 또 어떻게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충렬공 김방경으로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충렬공 김방경은 다섯 아들을 두었다. 『보감』을 살펴보자.
“충렬공께서 아들 5형제를 두셨는데, 큰아들은 판서공 선(?)이요, 둘째아들은 도첨의공(都僉議公) 흔(?)이요, 셋째아들은 문영공(文英公) 순(恂)이요, 넷째아들은 사사공(司事公) 륜(?)이요, 다섯째아들은 순(恂)이다. 그런데 둘째아들 흔과 다섯째아들 순은 후손이 없으시다. 공의 현손(玄孫)이 21명이신데, 즉 21파 중에 현재 12파의 후손들이 전국적으로 수십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고 하나 아직까지 확실한 수자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보감』은 이렇게 전재하고, 뒤에 현존 12파를 열거하여 놓고 있다. 그 12파는 다음과 같다.
1. 개성윤공파(開城尹公派) : 휘는 칠림(七霖).
2. 군사공파(郡事公派) : 휘는 칠양(七陽).
3. 전서공파(典書公派) : 휘는 성목(成牧).
4. 부사공파(副使公派) : 휘는 천순(天順).
5.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 : 휘는 구용(九容).
6. 도평의공파(都平議公派) : 휘는 구정(九鼎).
7.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 휘는 유(儒).
8. 제학공파(提學公派) : 휘는 익달(益達).
9. 안렴사공파(按廉使公派) : 휘는 사렴(士廉).
10.익원공파(翼元公派) : 휘는 사형(士衡).
11.서운관정공파(書雲觀正公派) : 휘는 수(?).
12.정의공파(正儀公派) : 휘는 철(哲).
『보감』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12파 중에서도 제학공파, 안렴사공파, 익원공파의 3파가 구 안동김씨 인구의 60-70%를 차지하여 통칭 ‘제안익(提按翼)3파’ 라고도 불린다. 그 밖에 군사공파, 대사성공파, 도평의공파가 그에 버금간다.”
우리는 안동 일원에서 많이 사는 익원공파가 전체 안동김씨 자손들 중에서도 상당히 많은 숫자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위의 구절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익원공파는 충렬공 방경 - 충렬공의 셋째아들인 문영공 순 - 문영공의 넷째아들인 정간공(貞簡公) 영후(永煦) - 정간공의 큰아들인 영삼사공(領三司公) 천(?) - 영삼사공의 넷째아들인 익원공 사형으로 이어지는 혈족의 흐름 속에 놓여진다고 하겠다.
익원공 김사형에게는 네 형제가 있었다. 그의 둘째형은 안렴사공 김사렴이다. 김사렴과 김사형은 풍운의 려말선초를 같이 살아갔던 사람이다. 그들 둘은 정치적 입장이 달랐다.
『보감』에 의하면, 김사렴은 공민왕 때 벼슬이 안렴사에 이르렀는데, 이색, 정몽주와 함께 직간파(直諫派)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그는 고려가 망하자 청주 오근(梧根)에 은거하여 두문불출 하였으며, 한양 쪽을 향해 앉지도 않았고, 이태조가 조정에 불러도 나가지 않았고, 후손들에게도 벼슬하지 말 것을 유훈으로 남겼다고 한다.
익원공 김사형은 그런 둘째형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보감』에 의하면 그는 고려 왕조에서 벼슬이 정3품 삼사우사(三司右事)에 이르렀으면서도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는데 참여하여 개국 1등공신이 되었으며, 좌의정으로 치사할 때까지 한 번도 탄핵을 받는 일 없이 원만한 벼슬살이를 하였다고 한다. 『삼소재문집』에서는 이 인물에 대하여, ‘호가 낙포(洛圃),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책봉되고, 개국원훈이 되었으며, 시호는 익원이고, 태조의 사당에 배향되었다’고 적고 있다. 『한국민족문화 백과사전』의 김사형 조에는 이보다 조금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한 뒤 교주강릉도도관찰출척사(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로 나갔고--- 윤이(尹彛), 이초(李初)의 옥이 있은 뒤 그 당을 둘러싸고 찬성사(贊成事) 정몽주와 대결하고 서로 탄핵 ---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 1등 공신 --- 문하 우시중의 직위와 상락백의 작위와 식읍 1천호 및 식실봉 300호를 받았다. 그 뒤 좌정승을 지냈고 --- 제1차 왕자난 때, 백관을 거느리고 대궐에 나아가 적장자를 후사로 세울 것을 요청하여 태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책봉 ---”
이렇게 익원공 사형은 고려말 조선 초의 역사 속에서 확실한 족적을 남긴다. 『안동김씨 대동보』에 의하면, 익원공 김사형은 자가 평보(平甫)로써, 고려 충혜왕 2년에 출생하여, 영락(永樂) 5년에 타계하고, 묘는 양근(楊根)에 있으며, 이황(李滉)이 그 신도비명을 찬(撰)한 것으로 되어있다. 익원공 김사형의 후손들은 조선 초의 역사 속에서 크고 작은 벼슬을 지낸다. 조선조에서 현달한 안동김씨들 중 상당수가 이 익원공파의 후손들인 것이다. 익원공파 후손 중 우리의 눈길을 끄는 근세의 인물로는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있다.
김구는 초명이 창수(昌洙)이고, 충렬공의 24대 손이며, 익원공의 20대 손이다. 그는 1875년 해주에서 김순영의 아들로 태어나 1949년에 위대함으로 점철되었던 그의 생애를 마감한다. (『보감』에는 그의 탄생년대가 1875년으로 되어 있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1876년으로 되어 있다. 어느 기록이 맞는지 상고하여볼 필요가 있는 것이지만, 일단 여기서는 『보감』의 기록을 취한다.) 김구에 대해서는 여기서 굳이 지면을 할애하여 구구하게 이야기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 현대사 인물 중에서는 가장 위대하다고 할 수 있는 김구에 대해서는 우리 국민 대다수가 이미 숙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삼소재’의 사랑방에서도 익원공파의 한 갈래인 판관공파 종손 김석교씨가 익원공의 후손 중의 한명인 김구를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방 안의 벽에는 김구가 73세 때 쓴 ‘충효전가’(忠孝傳家)라는 휘호가 액자에 넣어져 걸려있었던 것이다. 김구선생의 휘호는 대구 종친회에서 나누어 주었다고 김석교씨는 말하였다.
소산마을에서의 안동김씨 판관공파의 삶
익원공으로부터 5대 후에 소산리 안동김문의 역사와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판관공이 출현하게 된다. 판관공은 휘가 건(?)이며, 성주판관(星州判官)을 지냈다. 판관공파의 파조가 되는 것이다. 판관공 김건은 4 아들을 둔다. 첫째아들과 그 후손들의 종적은 묘연하였었다. 근래 대동보를 할 때 그 첫째아들의 후손들이 공주에 살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으나 수적으로 그리 많다고 할 수 없다고 한다.
“둘째, 셋째, 넷째는 안동으로 낙향하였지요. 둘째 아드님이 소산의 입향조가 되십니다.”
김석교씨는 말하였다.
김건의 둘째아들은 김언준(金彦濬)이다.
“그(김건) 아드님 휘 언준은 충좌위 부사과(忠佐衛 副司果)로, 다시 안동에 와서 소산에 살았으며, 문장과 행의로 교남(嶠南:영남)에 명망이 높으셨다.”
『삼소재 문집』의 기록이다.
“18대 어른이 소산에 들어오셨습니다.”
김석교씨는 말하였다.
“충렬공으로부터 10대 되시는 분이지요. 충렬공으로부터 현 종손까지는 28대가 됩니다.”
김명회씨가 말하였다.
그러니까 안동 일원의 안동김씨들은 대부분 이 김언준의 후손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김언준의 19세 손이 ‘삼소재’의 현 종손인 김석교씨였다.
“우리 가문은 크게 벼슬한 사람은 없어요.”
김석교씨는 말하였다.
“그렇지만 문필은 끊기지 않았지요.”
김언준의 3대 후손은 인달(仁達)이다. 그는 가선대부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지낸 사람으로, 학문에 힘 썼고, 서애 유성룡과 교분이 두터웠다.
김인달의 4대 후손은 용추(用秋)이다. 김용추는 소산리 ‘삼소재’의 역사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김용추 시대에 ‘삼소재’가 지금의 규모로 지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 때는 ‘삼소재’라는 당호를 쓰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용추는 호가 송정(松亭)이며, 고산(孤山) 이선생(이유장)께 사사하고, 늦게는 갈암(葛菴) 이선생(이현일)의 문하에 올라 문사(文詞)를 크게 울리고 덕망이 함께 높으셨다. 참봉 이수겸(李守謙)과 십년간 도산서원에서 갈마하고 글씨를 익혀 ?동고록?(同苦錄)이 있다.”
『삼소재 문집』의 김용추 관계 기록이다.
“11대조이신 용추공의 처남이 예천군수로 왔는데, 누님 집에 와 보니 집이 퇴락해서 말이 아니었대요. 그래 집을 지어 주었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삼소재예요.”
김석교씨가 말하였다.
“선 안동 상락 김씨 시조의 18대 손인 김용추(1651-1711) 공의 종택 --- 조선 현종(顯宗) 15년 (1674년)에 건립 ---”
경상북도 민속자료 66호로 지정되어 있는 ‘삼소재’의 안내판에 쓰여있는 문구이다. ‘삼소재’는 300년 이상이나 소산마을 안동김문의 삶을 지켜오고 있는 것이다.
『대동보』에 의하면 김용추의 자는 의칙(議則)이고, 그 배위는 진성이씨 이명철(李命哲)의 따님이다.
김용추의 손자는 동식(東軾)이다.
“호는 소산자(蘇山子)이니 대개 부군(金德胤)과 그의 형제(동식과 그의 동생 동철) 등 삼부자가 모두 문장으로 세상에 전하므로, 살고 있는 소산(素山)의 소(素)를 소(蘇)로 하여 삼소(三蘇 : 중국의 당송 팔대가에 속하는 소동파 3부자)의 뜻을 취함이다.”
『삼소재문집』의 김동식 관련 문장을 문맥이 통하도록 조금 바로잡은 구절이다. 이 문장을 통해 볼 때, 우리는 이들 3부자가 문장에 뛰어난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소동파에 견줄 정도의 자부심까지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성취하였던 문장의 정도가 어떠하였는지를 가늠하여 볼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우리 가문에서는 소산(素山)이라고 하지 않고 풀초 밑의 소(蘇)를 써서 소산(蘇山)이라고 하지요. 신 안동김씨의 소산(素山)과 구별하기 위해서이지요.”
김석교씨는 말하였다. 안동김문에서 소산(素山)을 소산(蘇山)이라고 써 온 것은 아마도 김동식 이후의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김동식이 처음 소산이라는 말을 썼을 때에는 신 안동김씨와의 구별 같은 것은 염두에 없었을 것이다. 김동식은 숙종 29년(1703년)에 태어나 영조 21년(1745년)에 타계하기 때문이다. 그 때는 신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기 전이므로 신 구 안동김씨 간의 적극적인 구별도 별로 행해지지 않았을 터이기 때문이다.
김동식의 3대 후손으로는 김영락(金英洛)이 있다.
“우리 가문은 숙종 때 이후로는 진사도 하나 못했습니다.”
김석교씨가 말하였다.
“그렇지만 문장은 끊이지 않고 나왔는데, 그 중 삼소재 어른이 제일이지요.”
김석교 씨가 말한 삼소재가 바로 김영락이다.
김영락은 자가 기언(耆彦)이고 호가 삼소재(三素齋)이다.
“부군의 성은 김, 휘는 종락(宗洛), 자는 기언이며, 처음 휘는 영락, 호는 삼소재요, 안동인이다.”
『삼소재문집』에서 김영락의 손자인 대용(大容)이 기록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김영락은 김종락이라고 표기하여야 옳을 듯 하다. 영락은 다만 초명이고, 종락으로 개명을 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동보』에는 영락으로 기재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그것을 따르고자 한다.
김영락은 정조 20년(1796년)에 태어나 고종 12년(1875)년에 타계하니, 향년 80세 였다. 김영락을 말할 때에는 ‘삼소재’라는 그의 호가 갖는 의미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그 호의 의미야말로 이 인물의 인격을 알수 있게 하는 척도이기 때문이다.
“내 친구 상락 김사문(金斯文 ; 사문은 유학자를 지칭함) 기언(耆彦)은 글을 읽고 행의가 있는 집 사람이다. 하루는 와서 청하기를 ‘사는 집에 현판이 없을 수 없으므로 삼소(三素)라고 써 걸어서 경계하고 반성하는 바탕으로 삼고자 한다’고 하였다. 그 뚯은 ‘소리를 행하고(行素履), 소찬을 먹고(食素餐), 소산에 산다(居小山)’는 것이라 하였다.”
『삼소재문집』 속에 실려있는 학서(鶴棲) 유태좌(柳台佐)의 ?삼소재기?(三素齋記)에서 살펴볼 수 있는 구절이다. ‘삼소재’는 김영락의 호이면서 김영락이 살던 집의 당호이기도 한 것이다. ?삼소재기?를 통해서 우리는 김영락이 일상의 생활을 얼마나 맑고 소박하게 꾸려가고자 하였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삼소재 김영락은 유성룡을 문묘에 배향하고자 하였던 영남 유림의 집단 상소 운동의 중심에 서 있기도 하였다. 그 상소운동 과정을 적고 있는 그의 일기는 너무 간단하다는 흠이 있기는 하지만 상당히 가치있는 자료라 하겠다.
‘삼소재’와 종손 김석교씨
오늘 ‘삼소재’는 소산마을의 한가운데에 의젓한 자태를 뽐내며 버티고 서 있다. 그렇게 크다 할 수는 없는 집이지만, 앉은 자리도 좋고, 상당한 품격을 갖추고 있는 집인 것만은 분명하다. 오늘날 삼소재에는 김석교씨 내외가 노모를 모시고 살고 있다. 김석교씨는 33년생으로, 올해 연세가 65세이다. 이 집의 안주인인 전주유씨는 30년 생이라 하니 68세의 나이라 하겠다. 그들 노 부부가 그보다 20년은 더 연상인 노할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는 것이다.
“자제분들은…?”
내가 물었다.
“맞이는 구미에 가 있고, 둘째는 안동 시내에 살고 있어요. 공무원이지요.”
김석교 씨가 말하였다. 『대동보』에는 김석교씨의 자제들로 2남 2녀가 기재되어 있었다.
“큰 아들은 직장 마치면 들어올 작정입니다.”
김석교 씨가 말하였다.
종가의 삶을 지킨다는 것은 어디서나 어려운 일이다. 옛날에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더욱 그러한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의 삶은 도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나가기 때문이다. 종가를 지킨다는 것은 시골에 눌러 앉는다는 것을 뜻한다. 현대에 있어서 시골에서의 삶은 우리를 만족시키기 어렵다. 그러니 직장이 있는 도시로 나갈 수 밖에 없고, 현대적 삶과 종가를 지킨다는 것은 일정한 배타적 문맥 위에 놓여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사실인 것이다. 결국 현대적 삶 속에서 종손들은 겨우 직장을 끝내면 돌아온다는 식의 선택을 통하여 종가를 지켜나가는 방도 밖에는 없을 터이다. 소산마을의 ‘삼소재’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밖에 없었다.
“논 밭은 한 4천평 정도 됩니다. 혼자 힘으로 다 지을 수 없어서 일부는 남들에게 주어서 짓게 하고 있지요.”
종손 김석교씨는 크지 않은 키에 마른 몸체를 하고 있었다. 그는 마르고 길쭉한 역삼각형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콧날이 날카로웠으며, 입 주위와 눈 주위에 깊고 긴 주름이 많이 보였다. 그의 얼굴은 전체적으로 역삼각형의 형상을 하고 있으면서도 이마가 조금 좁았고, 광대뼈가 높았다.
“집이 좋은데, 어떻게 유지를 하고 있습니까?”
“25~6년 전에 수리를 했습니다.”
김석교씨가 말하였다.
“전에는 지손 별로 거출하여서 집을 수리하고 했지요.”
나는 대청마루에 앉아 집 주위를 눈으로 죽 돌아보았다. 김복영씨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진기를 들이대고 있었다.
“80년도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서 지원금을 받아 원장을 둘렀지요.”
나의 시선을 따라가며 김석교씨가 말하였다.
“흙담이라서 아주 좋습니다.”
“이번에 다시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어서 대대적인 수리 복원을 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김석교씨의 말을 들으며 대청마루 안을 휘돌아 보았다.
“저것은…?”
나는 대청마루의 대들보 위에 올려져 있는 낡은 말안장을 가리켰다.
“아, 그거요?”
김석교씨가 웃으며 말하였다.
“당나귀 안장입니다. 옛날 어른들이 바깥 출입을 할 때는 당나귀를 타고는 했지요. 안동 출입할 때나 그런 때…”
“언제 것입니까?”
“증조부, 고조부 어른까지는 저것을 사용했다고 해요.”
“꽤 오래된 것이군요?”
“그런 셈이지요.”
“집 구경을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김복영씨가 말하였다.
“그러시지요.”
김석교씨를 필두로 하여 우리는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뜨락 아래로는 길다란 화단이 만들어져 있었고, 화단 가는 수석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화단이 좋습니다. 수석도 많고…”
“전에는 더 많았는데, 구경 온 사람들이 하나씩 집어가고 해서 많이 줄었어요. 하나만 가자고 가도 이빨이 빠진 것 같아서 보기 흉하지요.”
“이렇게 죽 들러쳐져 있으니까 과연 그렇겠군요.”
김명회씨는 볼일이 있다고 하며 작별을 고하였다.
우리는 안채로 들어갔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자 바로 사랑채를 향하여 만들어져 있는 아궁이와, 아궁이 위에 앉혀져 있는 무쇠 가마솥이 보였다. 대문 안 현관의 천정에는 그을음이 잔뜩 묻어 있었다.
안마당은 건물들에 의하여 사방에서 포위되어 있었다. 이 집도 입구자 형의 집이었던 것이다. 안채는 원형이 많이 변형되어 있었다. 좁직한 사각형의 안마당으로 들어서자 안채의 개량식 부엌 문을 열고 상체가 기억자로 굽어진 노할머니가 고개를 내밀었다. 안채의 마루는 오래되고 두꺼운 판자로 깔려 있었다. 마루의 3분의 일 정도는 뜯어내고 작은 창고로 만들어 앉혀놓고 있었다.
“잠실로 썼던 것이지요.”
김석교씨가 말하였다.
“옛날에 못살 때 누에라도 치려고… 보수할 때 원래대로 바꾸어 놓아야 겠어요.”
마루 밑에는 잠실을 만들 때 뜯어냈던 마룻장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쌓여 있었다. 뜨락은 시멘트로 덮여 있었고, 사각형의 안마당에는 보도블럭이 깔려 있었다.
“문화재과 공무원들이 원형을 바꾸어 놓았다고 뭐라고 안합니까?”
내가 말하였다.
“뭐라고 하지만 어쩌는 수 있습니까? 자기들도 다 바꾸어 놓고 살텐데요 뭐…”
김석교씨가 말하였다. 그러고보면 김석교 씨는 새로 지원금을 받아 집을 수리 복원 하더라도 완전히 원형 그대로 복원하여 놓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김석교 씨와 작별을 하고 돌아서 나오는 우리의 마음은 편치 못하였다. 언덕 길의 초입 쯤에 이르러 돌아보니 삼소재의 원형 흙담과 사랑채 건물이 여전히 당당한 모습으로 우리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외양일 뿐이었다. 그 내면은 바꾸고 고치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생활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삶은 흘러가는 것이던가! 과거의 삶은 역사의 갈피 속에 남겨지는 것이던가! 굳이 과거 속의 삶을 부여안고 현대를 돌파하여 나가려 하는 것은 덧없는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소산마을의 ‘삼소재’에서도 우리는 과거와 현대가 어떻게 손을 맞잡아야 가장 아름다울 수 있는가에 대한 화두만을 절절히 확인할 수 있었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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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상락 ㅡ은 안동이아니고ㅡ 상주 죠
제대로 알고 쓰세요
상주ㅡ상락
안동ㅡ고창
이런 기본도 모르고 학생들을 가르치려고
웃기네
상락김씨 시조 ㅡ김숙승 집터가
상주 문화재로 되어있은 것은 아는지모르겄네
기본도 안된 인간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니
간신 김자점이 ㅡ 안동김씨다
이런 헛소리나 하고 있지
상락김씨 시조 김숙승집터 자료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상주 문화사적 ㅡ 5호 ᆞ6호ᆞ 7 호ᆞ8호 9 호ㅡ
5개 중 하나
ㅡㅡㅡㅡㅡㅡㅡㅡㅡ
요기 까지만 가르쳐주지
엉터리를 세뇌교육 시키는것이 교육이냐
35년쯤 전에 국사시간에
선생이
"안동김씨 손들어 " 그러는거야
그래서 나는
손을 번쩍들었지
국사 가 이러는거야
"간신 김자점이 안동김씨다 " 이러는거야
순간 주위에 있던 학생들이
"깔깔 깔 깔" 웃기시작 한거야
그때부터 나는 간신 김자점 이 후손이 되어
돌맞아가면서 학교를 다녀야 했어
그후 20년이 지난 쯤
백과 사전을 보니
간신 김자점이 진짜 안동김씨 인거야
그래서 나는
간신 김자점이 진짜 내 조상이 맞구나 그럴게 생각 했지
그후 10년쯤 지난후
인터넷을 검색 해보니
피한방울 안섞인 또다른 안동김씨가 있더라고
간신 김자점이 집안 은
상락
솔직히 말해서 김숙승 이집안은
간신 김자점이 집안이고 상락김씨 맞잖아
상락김씨는
간신 김자점이 능지처참 당하고
상주지역에서 쫏겨나서 전국을 떠돌던 화전민 천민 집안 이잖아
김자점이 이집안은
간신 김자점이 능지처참 당하고
상주지역에서 야밤도주 해서
상주지역에서 쫏겨난 집안이죠
그런데
왜 이집안이 안동김씨로 둔갑해 있지
참 웃기는 세상 이구나
성씨는 원래
시조 1인당 성씨 하나가 원칙 입니다,
그런데
안동김씨는 성씨는 하나인데 시조가 두명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서로 자기집이 진짜안동김씨라고 싸우고 있는것입니다,
지금꼴이
나라는 하나인데 대통령이 두명이라서
서로 자기가 진짜대통령 이라고 싸우고 있는꼴입니다
김숙승 집안을 다른 성씨로 바꾸든지
김선평집안을 다른 성씨로 바꾸든지
합시다
언제까지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꼴 볼겁니까,
이제부터라도
서로 확실하게 구분합시다,
나라는 하나인데
대통령이 두명이면
서로
자기가 진짜대통령이라고 치고박고 싸우는것입니다,
지금
안동김씨 두집안이 그런 꼴입니다 ,
언제까지 불구경 하듯이 보고만 있을겁니까
김숙승집안을 다른 성씨로 바꾸든지
김선평집안을 다른 성씨로 바꾸든지
결정합시다
솔직히
김숙승 이집안은 상주가 상락군이었을 때 상주에서 만들어진 성씨 아닌가요 ,
안동김씨 세도 정치할때 "천민"으로 살던 집안 인것은 확실 하지 않습니까,
상락김씨 시조 김숙승 집터가 상주에 문화재로 되어 있는것도 사실 이지 않습니까,
상락김씨 면 상락김씨 고
안동김씨 면 안동김씨 지
일명 상락 은 뭐냐고
학자라는 자들이 이 모양이니 ,
김숙승 집안에 관하여
1ㅡ김구 ᆞ간신 김자점이 시조김숙승 후손 이고
2ㅡ1651년 간신 김자점이 능지처참 당하고 부터 조선이 망할때 까지 이집안 전부 관직에도 못나가고 천민으로 살았고
3ㅡ김숙승집터가 상주에 문화재로 되어있고
상주에서는 이집안을 상락김씨라고 부르고
4ㅡ천민은 성씨를 가질수 없고,그러므로
1651년 이전에는 상락김씨로 살았고 그후 조선이 망할때까지 성씨가 없었고
5ㅡ안동김씨 세도정치 할때 김숙승 집안은 천민으로 살던 집안이고 ,
만약 아직도 조선이 망하지 않았다면 천민 집안이고
위의 내용 틀린 부분 있나요
최종병기 활 ㅡ 영화에 보면
양반이 역적으로 몰려 도망다니죠
도망다니는 자는 몰락한 양반으로 "천민" 입니다,
간신 김자점 집안사람들은 김자점이 처헝되고부터 조선이 망할때까지 이렇게 도망다니던 "천민 " 집안입니다
그전에는 상락김씨로 살다가 그후 조선이 망할때 까지 "천민 " 으로 살아가는 집안입니다
천민들은 관직에도 못나가죠,
특히
김자점과 아들 김익은
효종을 죽이고 숭선군을 왕으로 만드려고
역모를 하다 잡혔죠,
이런 경우는
김자점집안 3족을 멸하고 김자점
과 같은 시조를 모시는 전부가 " 몰락한 양반
"이 되고 "천민" 이 되는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