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이회영은 가통에 따라 한학을 수학하면서 삼한갑족의 후예로서 남부럽지 않게 성장한다.
“이회영은 서예와 시문은 물론, 음악과 회화, 전각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한 재주를 보여 만인의 부러움을 샀다.” (주석 5) 18세(1885년) 무렵부터 이상설, 여준 등과 만나 교유하고, 신흥사에서 이들과 함께 합숙하면서 수학, 역사, 법학 등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명문가의 자제가 과거 공부에 전념하지 않고 신학문을 공부하게 된 것은 지극히 이례적이다. 이 무렵 독립운동의 동지로서 선배로서 뜻을 나눈 이상설(李相卨, 1870~1917)과의 만남은 생애를 두고 값진 일이었다.
이회영의 생애에서 젊은 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는 이상설이다. 충북 진천 출생이지만 7세 때에 서울 장동(현 명동)에 사는 이용우에게 출계(出系)하여 양부모 밑에서 성장하며 학문에 전념, 신동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25세 때 조선조 최후의 과거인 갑오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영재 이건창으로부터 율곡 이이를 조술(祖述)할 학자라고 칭송받았다. 뒷날 북간도 용정에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건립하고, 고종황제의 특사로 헤이그에 파견되는 등 국난기 민족지도자가 되었다.
이회영의 젊은 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상설의 자료에 의존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들은 멀리 고려 충선왕 때 명유이며 문하시중을 역임한 익재 이재현을 명조(名祖)로 하고 있어 종친의 관계이며, 우연히 서울시내 저동의 이웃에 살았다. 이상설이 1870년생이고 이회영이 1867년생이어서 3년의 세차가 있지만,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벗으로 사귀며 함께 동문수학을 하였다.
이상설은 이용우의 양사(養嗣)가 되어 상경한 다음 해인 1877년(8세)에 처음으로 이제촌(李濟村)이라는 노인에게서 한문을 배우게 되었다. 공부하던 장소는 후원의 사랑으로 벽노방(碧盧房)이란 당호가 중국의 명필 옹방강(翁方綱)의 글씨로 쓰여져 걸려 있는 곳이며 근동의 여러 재동(才童)이 모여 함께 공부하였다고 전한다. (주석 6) 이 때 근동의 ‘재동’ 중에는 이회영도 포함되었다.
이회영의 바로 아래 동생 성재 이시영은 임시정부 요인으로서 해방 뒤 환국하여 초대 부통령을 지내면서 이상설 유족과 앞뒷집에서 살게 되었다. 이시영은 만년에 이상설의 수학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이회영 형제의 어린시절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보재(溥齋, 이상설)의 학우는 자신(이시영)과 그의 백형인 회영을 비롯하여 남촌의 3재동으로 일컬었던 이범세, 서만순과의 만남이요, 주옥같은 글씨로써 명필로 이름을 남긴 조한평, 한학의 석학인 여규형, 절재로 칭송되던 시당 여조현 등이 죽마고우이었고, 송거 이희종과는 결의형제의 맹약까지 한 사이였다. 또한 보재는 학우 간에서 선생 격이었기에 그 문하생으로는 우하 민충식 등 7,8명이나 있어 동문수학자는 17,8명이나 되었다.
보재가 16세 되던 해인 1885년 봄부터는 8개월 동안 학우들이 신흥사에 합숙하면서 매일 과정을 써 붙이고 한문, 수학, 영어, 법학 등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주석 7)
이회영은 이상설과 더불어 인근의 영재들과 함께 한학과 신학문을 공부하면서 10대를 보내었다. 우관(又觀) 이정규는 어린 시절의 이회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선생은 근엄한 가정 분위기에서 자랐지만 20세가 되자 누구보다도 먼저 시대의 새로운 풍조를 받아들였다. 이것은 선생의 천품과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생은 천품이 따뜻하고 시원스러운 한편, 성격이 거리낌 없이 자유로왔으나 방분 호탕하지는 않았고, 풍류적인 면을 곁들었다. 또 마음 씀이 관대하고 의협심을 지녔으며 기지(寄智)와 침착함을 함께 갖추어서 어린 시절부터 소년노성(少年老成)이라는 말을 들으며 촉망과 칭찬을 받았다. (주석 8) 짧은 글에서 이회영의 성품과 성격을 잘 표현하고 있다. 뒷날 그의 생애를 보면 천품이 따뜻하고, 거리낌이 없고, 풍류적이고, 관대하고, 의협심이 강하고, 침착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의 중심이 되었지만, 어떤 자리를 탐하지 않았고, 한국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로서 주위에 기라성 같은 인재가 모여들었다.
이러한 천품과 성격을 지닌 선생은 소년 시절부터 진취적이어서 옛 경전을 공부하기보다는 서구의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기를 좋아하였다. 이 때문에 봉건제도의 계급적인 구속과 형식적인 인습을 싫어하였다. 그래서 선생의 가정적인 분위기나 사회적인 환경으로 볼 때 당연히 관계에 투신할 입장이었지만, 선생은 조금도 벼슬길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당시의 부패한 관계(官界)를 원수 보듯이 싫어하였다. (주석 9) 이회영이 청소년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 국내외 정세는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강화도조약 체결 뒤 조정에서도 외국 문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1881년 4월 일본에 시찰단을 보냈다. 신사유람단으로 알려진 이 시찰단에는 박정양, 어윤중, 조준영, 홍영식을 비롯한 관리와 유길준, 이상재 등의 수행원 통역, 하인 등 62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약 4개월 간 일본에 머물면서 내각과 군사, 산업, 유편, 세관, 교육, 문화 시설을 살펴봤다. 뒷날 이들 상당수가 친일파가 되었다.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발생하고, 7월에는 대원군이 청군에게 납치되어 중국 텐진(天津)으로 끌려갔으며, 일본과 제물포조약이 체결되면서 임진왜란 이후 최초로 일본군이 공사관 보호를 핑계로 서울에 상주하게 되었다. 1884년 10월 갑신정변이 발발하여 수구파 정부 요인이 처단되고 개화파의 새내각이 조직되었다.
하지만 3일 천하로 끝나고 김옥균 등 갑신정변 주모자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85년 3월 영국군이 거문도를 점거하고 10월에는 청국의 실력자 위안스키(袁世凱)가 주차 조선 총리교섭통상 대표로 부임해왔다. 이회영은 위안스키와 사귀게 되고 뒷날 중국 망명 시절에 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1892년 11월 동학교도들의 삼례집회에 이어 1893년 2월에는 서울 광화문에서 국왕에게 교주의 신원을 요구하는 3일간 복합상소가 거행되었다. 1894년 1월 마침내 전봉준이 지휘하는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였다. 정부는 청군을 끌어들이고 청국군과 일본군이 진주하는 등 조선은 국내외적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주석
5> 김명섭, 앞과 같음.
6> 윤병석, <증보 이상설전>, 11쪽, 일조각, 1998.
7> 이완희, <보재 이상설선생전기초>, 여기서는 윤병석, 앞의 책, 12~13쪽.
8> 이정규, 앞의 책, 21~22쪽.
9> 앞의 책과 같음.
첫댓글 공부잘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양촌님 바쁘신중에도 들르시어 댓글 달아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어려우신길. 지지의 박수를 보내 드립니다. 짝짝짝짝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