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리고 헐벗은 우리의 예수님
부름의 길
역설적으로 평국의 죽음은 정숙에게 살아갈 용기를 주었다. 병석(病席)의 정숙을 볼 때면 평국은 아픈 사람이 제일 서럽다며 놀리듯 말했었다.
자신은 병든 사람을 치료해주는 의사가 되어 정숙의 병도 거뜬히 낫게 해주마고 호기롭게 말했었다.
정숙은 냉정해져야 했다. 사상범이어서 공립학교의 길은 요원했다. 사립학교 교사도 학교 관계자의 배려가 있어야 가능하니 그도 폐가 되었다.
더욱이 복막협착의 통증이 발작하며 밀려오면 야단스레 들것에 실려 나가 병원에서 여러 날 진정해야 했다. 학생들 보기 민망한 일이었다.
1939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가 설립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서른일곱의 나이가 학생이 되기에 너무 늦은 건지도 모른다. 정숙은 그런 시시한 핑계는 털어버리고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즈음 아버지 최원순은 일제하의 고위관직이 몹시 비위가 상해 관을 떠나 제주에 변호사 사무실을 차려 번창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다 늙어 새삼 의사가 되겠다는 딸에게 당장 시집가라고 호통을 쳤다. 혼처도 여럿 받아 놓았다.
그러나 딸의 깊은 속내를 누구보다 잘 아는 어머니는 여자라고 다 시집가서 일부종사하는 삶만 있는 것은 아니라며 정숙에게 네 갈 길이 보이면 뒤돌아보지 말고 가라고 지지해주었다.
어머니의 심적, 물적 큰 도움으로 서울에 도착하고 보니 아버지의 반대보다, 뒤늦은 공부보다 더한 고비가 정숙을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에 입학하려면 창씨개명을 해야 했다.
일본은 조선의 민족자존을 모조리 말살하기 위해 창씨개명을 지독하게 밀어붙였다. 경성여고보 시절 일본 국가를 부르며 졸업장을 받는 것은 수치라며 포기하고 제주로 내려왔던 정숙이었다.
정숙은 텅 빈 성당에서 성모님께 자신의 갈 길이 어디인지 알려 달라고 기도했다. 눈물이 흘렀다. 정숙의 눈앞에 퍼렇게 죽어가던 평국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해맑게 웃던 계숙의 얼굴도 떠올랐다. 도리가 없었다.
정숙은 이를 악물고 입학했다. 굳은 머리지만 혼을 다해 공부했다. 물론 악화된 건강이 몇 번이고 정숙의 발목을 잡았다.
정숙은 의학 공부를 시작하면서 영적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혜화동성당의 오기선 신부를 만나 프란치스코 3회(현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이 된 것이다.
천주님의 뜻에 따라 수도자의 길을 걷지 못했지만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으로서의 삶은 수도자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 삶은 독립운동으로 형을 집행 받아 수녀가 되지 못한 정숙에게 하늘이 열리는 일이었다.
다시 태어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평생을 동정녀로 살면서 주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삶의 동력을 프란치스코 3회에서 찾은 것이었다.
5년의 의사 공부 끝에 의사고시도 무사히 합격하고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이미 성모병원 수련의로 내정도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동안 학제가 바뀌어 6년제이던 중고등 과정이 7년제가 되어 있었다.
정숙은 학력이 1년 부족해 의사 면허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중고등 과정 1년이 더 필요했다. 이 소식을 듣고 이화여고 교장이 정숙에게 위생감으로 1년 재직하면 이화여고 4년 졸업장을 주겠다고 호의를 베풀었다.
이화여고생들은 정숙을 선생님이라거나 아주머니라고 부르고 시험 때는 친구처럼 대했다. 정숙은 42세 나이에 중고등 과정을 졸업하고 경성의전을 1회, 2회 연속 졸업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정화의원
정숙이 서울 성모병원에서 수련의로 근무할 무렵 제2차 세계대전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세상은 온통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 일본군은 연합군을 저지할 최후의 보루로 제주를 정해 20만에 달하는 병력을 주둔시켰다.
제주는 바람 앞에 촛불이었다. 소문만 무성하고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정숙에게 죽어도 같이 죽자며 당장 짐을 꾸려 내려오라고 성화를 했다.
일본군이 제주를 폐쇄하면 다시 못 볼 수도 있었다. 정숙은 좀 더 의술을 연마하려던 의지도 접고 아버지의 간곡한 마음을 헤아려 제주로 내려왔다.
제주에 오자마자 정숙은 성당부터 찾았다. 듣던 대로 성당은 일본군 야전병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일본은 제주도 내 반일 세력을 축출한다며 적국인 아일랜드 선교사들과 신부들을 감옥에 가두고 고문하고 옥사시켰다.
그 일은 교회 안팎을 뒤숭숭하게 했고 충격도 컸다. 정숙은 성모님께 하루라도 빨리 성당에서 주님만을 위한 미사를 드릴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1944년 10월, 정숙은 삼도리 천주교회 옆, 신성여학교 자리 그 곁에 ‘정화의원’을 열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병원을 찾는 환자 중에서 헐벗고 굶주린 이들이 아프다며 병원 문을 들어설 때 정숙은 주님께서 자신에게 의도했던 뜻이 무엇인지 마침내 알았다. 그들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이 보였다.
정숙은 주님을 대하듯 정성을 다해 돌보며 치료했다. 정숙은 부유한 이들보다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아이들에게 정성을 들였다.
여의사가 친절하게 치료해 준다는 소문은 금세 퍼졌고 아픈 아이들을 데려오는 아낙네들이 병원과 입구에 가득했다. 아파도 돈이 없어 병원에 못 가고 민간처방이나 미신에 의지하는 사람들을 제대로 치료해 줄 수 있어 정숙은 기뻤다.
환자가 많아지자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항생제와 설사 환자에게 줄 수액이 턱없이 부족했다. 제주는 일본의 전쟁 준비에 떠밀려 곳간이 텅 비었고 남자들은 강제 징용당해 동남아 전쟁터로 끌려가거나 군수공장 노동자로 보내졌다.
생계는 오로지 아낙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주민들은 일본이 요구하는 물자를 대느라 뼛골이 휘었다.
일본 식민당국은 정화의원의 정숙에게 ‘야전 군의관’이란 감투를 씌워 병든 병사들을 치료하게 했다. 한복 차림으로 왕진 오는 정숙을 보고 강제 징용당한 조선인 군속들이 헌병의 눈을 피해 정숙에게 몰려들었다.
다치고 병들어 쓸모없게 된 조선인 군속들은 비참한 몰골로 군병원 마당에 버려져 있었다. 매일 수십 명의 군속들이 새벽부터 정화의원으로 몰려들었다. 정숙은 치료는 물론 먹을 것과 입을 것도 챙겨주었다.
정숙은 후원자도 없이 무료로 치료해주고 먹이고 입혔다. 정숙의 쌀독에 쌀이 떨어지면 어머니가 독을 채워주었다. 필요한 약품은 동창이나 제자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번갈아 구해주었다.
정숙은 제주의 유지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전답을 물려받았다. 물론 형제자매의 깊은 이해와 아량이 있어 가능했다. 정숙은 물려받은 전답을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팔아 병원을 찾는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먹이고 입혔다.
또 어린아이들의 약과 분윳값을 충당했다. 어머니는 정숙의 자애를 자랑스러워했다. 형제자매들도 정숙의 뜻을 존중해주었다.
침묵의 해방
일본이 대승전하고 있다는 선전과 달리 모든 전선에서 일본이 무너지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비행장을 건설하는 부역과 바닷가를 참호로 건설하는 일로 제주 주민들 모두 동원되었다.
부상자도 급격히 늘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히로히토 일왕이 항복하였다. 일왕이 항복하자 미군은 초읽기 중이던 제주 공격을 즉각 중지했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일본이 항복하고 우리나라는 해방되었다. 라디오를 통해 항복을 알리는 일왕의 떨리는 목소리가 나오자 삼천리강산에 만세 소리가 물결쳤다. 그러나 제주는 무덤 속처럼 조용했다.
6만여 명의 일본 주둔군들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만일 일본군들이 패전하고 나가는 마당에 무시무시한 학살이라도 감행한다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무더운 8월이 지나고 9월이 되었다. 미군이 제주에 상륙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