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세기를 두고 기독교인들이 외친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특별한 방법으로 인간의 역사에 참여하셨다는 것이다. (13)
사도행전의 열린 결말 – 그가 전하는 이야기는 역사가 종료되기 전에는 끝날 수 없기 때문이다. (15)
기독교회 이야기 : 알곡과 쭉정이가 혼합된 모습
1) 이 이야기가 성령의 사역인 동시에 그 사역이 우리와 동일한 죄인들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점
2) 그러한 죄인들을 통하여, 그리고 그 교회를 통하여–오직 그들만 통하여-성경의 메시지가 우리에게 전달되었다는 점
우리가 존경하는 이들만 아니라 멸시하는 자들이 우리를 오늘의 이 위치에까지 이끌어 온 것이다. (15-16)
역사하기(doing history)와 역사 만들기(making history)의 연결
과거 세대들의 삶과 사역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것이 역사를 하는(doing) 작업이다. …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행동과 무위(無爲)에 의해 역사를 만들어 간다(making history). (18-19)
과거는 현재를 조명해 줄 것이다. … 우리는 우리 시대와 자신의 관심사와 희망을 통해서 과거 및 그 시대의 사건들을 바라본다. … 과거는 현재라는 렌즈에 의해 측정되고 풍성해질 것이다. (19)
제2장 때가 차매
준비된 예수, 주위 세계와 단절된 적이 없는 교회 (23)
# 팔레스타인의 유대교 [24]
팔레스타인의 지정학적 위치 (24)
알렉산더의 정복과 헬레니즘, 헬레니즘의 혼합주의의 위협 (25)
로마의 정복과 유대인의 저항 (26-27)
유대교 당파 : 열심당(27), 바리새파(27-28), 사두개파(28), 에세네파(28)
유대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두 가지 기본적인 믿음 : 1) 윤리적 유일신 신앙, 2) 종말론적 소망 (28)
성전 멸망 후에 생존할 수 있었던 바리새파 (29)
# 디아스포라 유대교 [29]
디아스포라 유대교와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 (30)
기독교인들이 70인역을 독점하게 됨 (31)
디아스포라 때문에 유대교는 헬레니즘과 타협하게 된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31-32)
# 그레코-로마 세계 [32]
초대 교회는 로마 법률과 헬라 문화를 배경으로 형성됨 (32)
로마의 정비된 도로를 통해 여행하면서 선교함 (33)
혼합절충주의 (34)
혼합주의의 양상 – 신비종교(출생이 아닌 입문으로 종교를 결정하게 됨) - 이집트(이시스와 오시리스 신화 도입), 인도-이란(미스라교), 셈족으로부터 기원된 대모신(the Great Mother) (35)
박해의 이유가 된 황제숭배 – 통일과 충성의 방법 및 수단으로 생각 (35- 36)
기독교인들은 헬라 문화 속에서 자기들의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특별히 플라톤주의와 스토아주의라는 두 가지 철학적 전통이 유익하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36)
제3장 때가 차매
사도행전을 보면 처음에 예루살렘에 강력한 교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9)
# 통일성과 다양성 [39]
헬라파와 히브리파의 갈등 (39-40)
최초의 박해는 주로 헬라파 기독교인을 향한 것 (41)
사도행전 9장 이후 바울이 부각되면서 이방 기독교 중심으로 전환 (41-42)
# 종교생활 [42]
최초의 기독교인들은 유대교를 부정하지 않았고, 자기들의 신앙이 오랫동안 고대해온 메시아에 대한 약속의 성취라고 확신했다. (42)
지도자 - 베드로와 요한(두 기둥), 주님의 형제 야고보 (43)
# 유대인 교회의 쇠퇴 [44]
AD. 62년 - 예수의 형제 야고보 살해 (44)
요단강 건너편 펠라로 이동 – (야고보 이후 또 다른 형제 시므온이 이끔) – 로마에 의해 처형됨 – 독자노선 – 이단 학설과 괴상한 관습 - 5세기에 역사에서 사라짐 – 2세기 이레네우스 에비온파에 대해 저술하면서 그들 중 일부로 언급함 (44)
유대교에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기독교인들을 향해 유대교를 대적하는 글들을 양산함 - 기독교인들이 반유대적 태도를 촉진하게 됨 (46)
곤잘레스는 예수의 가족도 하나의 신앙공동체로 활동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요단 동편으로 이동해서 활동하면서 독자노선을 걷게 되었고, 이후 이단 학설과 괴상한 관습이 그 공동체와 합치게 되었고 5세기 이후에 역사에서 사라졌다고 언급한다. 2세기의 이레네우스가 에비온파를 언급하면서 그들 중 일부로 언급하였다고 한다. 과연 실질적으로 예수의 가족들이 후대에 이단으로 인식되는 것은, 공동체 내에서 예수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과정이 빈약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한편으로 역사적 예수의 가족의 존재는 오히려 초대교회의 발전과 성장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단순히 역사적 인물인 예수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을 넘어서 초대교회는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 격상시켰고,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는 구세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가족이 이룬 공동체와 거리두기가 자연스럽게 진행되었을지도 모른다.
제4장 이방 선교
# 선교의 규모 (47)
이방인 개종자들이 이스라엘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하는 질문 (48)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 (49)
# 바울의 사역 (50)
초기 기독교 전파에서 바울의 중요성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 (50)
바울의 가장 큰 공헌 :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라 남긴 서신들이 기독교 정경의 일부가 됨으로써 기독교회의 생활과 사상에 계속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 (52)
이방인 교회의 성장으로 특히 예배 생활에 많은 변화가 초래되었다. “말씀예배”와 “성찬예배” (52-53)
# 사도들 : 사실과 전설 (53)
베드로(54), 바울(54), 요한 – 최소한 두 명(54-55)
도시와 연결된 사도들의 전설 : 빌립 – 콘스탄티노플(56), 야고보(산티아고) – 스페인(56), 도마 – 인도(56-57)
사도들에 관한 대부분의 전설들은 후대에 나타난 것이다. (57-58)
기독교가 이방인들이 합류하는 것에 개방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초대교회가 성장하는 데 가장 커다란 역할을 하였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무언가 절대적인 것에 의지하고 싶은 욕구가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무언가 믿을 수 있는 존재를 접했을 때 그 공동체에 속하려는 의지를 갖게 된다. 그런데 공동체에 가입하는 조건이 까다롭다면, 공동체의 순수성은 지켜질 수 있겠지만 공동체의 성장은 쉽지 않을 것이다. 초대교회는 선교의 차원에서 이방인들이 합류하는 과정에서 유대교처럼 엄격한 절차(특히 할례)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늦게 출발한 종파였지만 언젠가 유대교를 추월해서 많은 신도를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선점한 것이다. 거기에다가 각각의 도시들이 사도들과 연결되었다는 전설이 후대에 첨가되면서 해당 도시들은 더욱 자부심을 갖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제5장 최초의 국가와의 대결
박해의 이유와 방법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59)
# 새로운 유대교 분파 (59)
유대인들을 향한 기독교의 메시지는 그들의 고유한 유대성을 버려야 하다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의 시대가 시작되었으므로 더 나은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 (60)
이방인들을 향해서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어진 약속에 참여하라는 것. 이방인들은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없었으므로 신앙을 통해 그 자리를 차지하도록 초대되었다. (60)
로마인들과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당시의 문제가 유대인들 사이의 내분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었다. (61)
# 네로 시대의 박해 (63)
AD. 64년 6월 18일 로마의 대화재 발생 – 황제는 기독교인들에게 혐의를 씌우기로 작정함. 타키투스의 기록 (64-65)
로마 문화와 사회를 사랑한 타키투스와 같은 로마 시민이 볼 때 기독교 신자들은 인류를 미워하는 사람들이었다. (66)
네로의 박해 : 잔인했지만 제국의 수도에 국한 (67)
# 도미티안 시대의 박해 (67)
로마의 신들과 많은 전통을 거부한 기독교인들이 도미티안의 비위를 거스르게 되었을 것 (67)
당시 로마 당국자들은 유대인과 기독교 신자들을 분명히 구분하지 못했으므로 제국 관리들은 “유대 풍습”을 따르는 사람들을 모두 박해하기 시작 (68-69)
플라비우스 클레멘스와 그의 아내 플라비아 도미틸라 – 죄목은 “무신론”과 “유대 관습” (69)
소아시아에서는 이 박해 때문에 밧모 섬에 유배된 저자에 의해 요한계시록이 저술됨 – 로마에 대하여 부정적 태도 (69)
역사적으로 로마 시대 교회의 박해에 대해서 기독교측은 견디기 힘든 박해였다고 언급하기를 좋아하는 듯 하다. 왜냐하면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박해를 이겨냈다는 것이 이후 기독교의 입장에서 여러 방면으로 유리했기 때문이다. 고대 역사에서 소수의 병력으로 적의 수십만 대군을 무찔렀다고 기록하는 것처럼, 적대자가 악할수록 기독교의 순교의 역사는 빛이 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 때문에 피해를 본 인물이 로마의 네로 황제였을 것이다. 물론 네로 황제가 전혀 박해를 하지 않았음에도 그를 박해자로 몰았다는 것은 아니다.
특이한 것은 당시 기독교인이 박해받을 때 죄목이 '무신론'이었다는 사실이다. 로마 황제들이 싸이코 같은 성격으로 제멋대로 기독교인을 박해한 경우도 있겠지만, 나름대로 고대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서 로마의 정신을 좀먹고 있는 것이 기독교라고 판단한 경우도 있다.
제6장 2세기의 박해
2세기 박해의 기록 - 『순교자 행전』 (71)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가 형장으로 이송되어가면서 남긴 일곱 개의 서신 (72)
# 플리니와 트라얀이 주고 받은 서신 (72)
플리니가 당면한 문제 – 기독교인들에게 뚜렷한 범죄 사실이 있을 때에만 처벌해야 하는지, 아니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범죄를 구성하는 지의 여부 (72)
황제의 대답 – 고발된 경우에 뉘우치지 않으면 처벌하라 (73-74)
터툴리안의 비판 (74)
2세기, 그리고 3세기 일부에 이르기까지 제국 전역에서 기독교인들을 색출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당국에 소환되었을 때에는 이들을 처벌한다는 것이 제국의 공식적 정책이었다. (75)
#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하나님의 사자 (75)
이그나티우스의 일곱 편지 : (76-77)
이그나티우스의 순교 자청 : 이그나티우스는 자기의 목적은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는 것이라고 했다. (77-78)
# 폴리갑의 순교 (79)
순교가 인간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라고 믿었던 초대 신자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81)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의 박해 (82)
명상록 - 목숨에 연연하지 않고 기꺼이 포기하는 영혼을 찬양. 그러나 “기독교인들처럼 고집에 의해서가 아닌” 이성의 결과일 때만 이러한 태도가 찬양받을 가치가 있다고 했다. (82)
과부 펠리시타스와 일곱 아들의 순교 (83)
순교자 저스틴 (83)
고울 지방의 리용과 비엔느 교회가 브리기아와 소아시아의 기독교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박해의 상황을 더 잘 알 수 있다. (84)
# 2세기 말 (85)
기독교에 대한 제국의 일반적인 정책은 트라얀의 정책을 따랐으므로, 신자들에 대한 악한 소문을 믿게 되면, 신자들은 곧 고발당하고 박해가 시작되었다. 따라서 소문이 허위임을 증명하고 이교도들에게 올바른 기독교의 모습을 이해시켜야 했는데, 그것이 변증가들의 임무였다. (85)
당국자들은 기독교 안에서 반역적 경향을 지닌 운동을 보았고, 그것을 진압하려 했다. 국가의 통일을 지키려는 정책적인 문제 (86)
자신의 목숨이 날아가는 상황에서 그것을 기뻐하며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당시 로마제국의 관리들은 지극히 현실주의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신앙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기독교인들이 굉장히 낯설었을지도 모른다. 고통을 당할수록 쾌감을 느끼는 마조히즘적인 집단이라는 생각도 했을지 모른다. 당시 순교는 최고의 면류관이라는 기독교인의 신념에 대해서 로마 관리들은 죽이는 것이 결과적으로 기독교에 이롭게 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을 것이다.
제7장 신앙의 수호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의 신앙과 생활에 관한 헛소문과 오해에 대해 해명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 변증가들 (87-88)
# 더러운 소문과 고상한 비판 (88)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 켈수스가 『진정한 말씀』이라는 제목으로 기독교에 대한 반박문을 저술했다. (89)
코넬리우스 프론토 (90)
교양 있는 지식층 이교도들이 기독교를 미워한 것은 순전한 지적 문제가 아니라 계층 간의 편견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다. (90)
켈수스는 예수님이 마리아와 로마 병사 사이에 태어난 사생이라고 주장했다. (91)
부활 교리에 대한 비판 (92)
# 주요 변증가들 (92)
현존하는 작품 중 가장 오래된 변증서는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인 듯하다. (92-93)
순교자 저스틴, 저스틴의 제자 타티안, 아테나고라스, 안디옥의 감독 테오필루스 (93)
라틴어로 저술된 가장 오래된 변증서는 미누키우스 펠릭스의 『옥타비우스』와 터툴리안의 『변증』이다. (93)
# 기독교 신앙과 이교 문화 (94)
교양 없는 야만인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던 기독교인들은 불가불 자기들의 신앙과 이교 문화의 관계라는 문제를 다루어야 했다. (94)
어떤 사람은 기독교 신앙과 이교 문화가 근본적으로 상반된다고 주장했다. 그 대표적인 예는 터툴리안이다.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학교와 교회가 무슨 관련이 있는가?” - 당시 성행하던 이단들을 이교 철학과 기독교 교리를 결합시키려는 시도의 결과라고 믿음 (95)
고전문화와 철학에 비교하여 기독교의 “야만적” 기원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 – 순교자 저스틴의 제자 타티안 (95-96)
저스틴은 철학과 기독교를 조화시켜 설명하려고 했다. 로고스 교리 (96-99)
저스틴의 업적은 비록 이교도들에 의해 생성된 것이라 할지라도 고전 문화의 풍부한 광맥에서 발견되는 선은 기독교에 속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이었다. (99)
# 변증가들의 논거 (99)
유일신 신앙과 신적 창조 교리 수호 (99-100)
최후의 부활에 대한 비판에 대해 변증가들은 하나님의 전능에 의해 응답했다. (100)
기독교인들이 부도덕하다는 고발에 대해 변증가들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며 부도덕한 사람들은 오히려 이교도들이라고 응답했다. (100)
황제 예배를 거부함으로써 사회 안전을 파괴한다는 죄목에 관하여 응답 (101)
켈수스와 같은 사람들의 반박의 깊이 (101)
변증가들의 저술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처했던 상황의 갈등을 증언하고 있다. 이들은 각종 이교를 거부하는 동시에 이러한 이교를 통해 귀중한 문화가 생성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이들은 철학자들을 통해 진리를 찾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동시에 기독교 계시가 이보다 우월함을 주장했다. (101)
아무리 순교가 최고의 영예라고 하지만, 기독교가 무신론적이며 질적으로 떨어지는 종교라는 인식에 대해서 기독교는 자기 변증을 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이때 등장한 사람들이 변증가들이며, 이들은 당시 이교의 철학체계를 가지고 기독교를 설명해야 했다.
제8장 신앙의 결정
다양성 (103)
# 영지주의 (104)
1945년 이집트의 낙 함마디에서 영지주의 저술들이 발견 - 『도마 복음』, 그리고 보다 후기의 영지주의자 지도자인 발렌티누스의 『진리의 복음』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단 연구자들은 발렌티누스의 가르침들을 묘사하고 어느 정도 왜곡했다. (105)
“영지주의”라는 명칭은 “지식”을 의미하는 헬라어에서 파생된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그들은 특별하고도 신비로운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진정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구별된 것이었다. 이 지식은 구원에 이르는 비밀의 열쇠였다. (105)
영지주의자들의 최종 목표는 몸 및 우리가 유배되어 있는 곳인 물질세계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 이 해방을 위해 메신저가 필요하고, 기독교적 영지주의에서 이 메신저는 그리스도였다. (106-107)
영지주의자 - 극단적 금욕주의자와 방종주의자 (109)
영지주의 집단에서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누리지 못하는 탁월한 지위를 누렸다. 정통 기독교가 교회에 내에서의 여성을 역할을 제한하기 시작한 것은 부분적으로 영지주의의 특징에 대한 반응이었을 수 있다. (109)
기독교의 창조, 성육신, 부활 등 그리스도교 핵심교리들이 부인되는 것을 발견 (110)
# 마르시온 (110)
마르시온은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악한 것이라고 확신했으므로 그 창조주가 악하거나 무지하다고 결론지었다. (110)
마르시온이 제시한 여호와는 인류 중 특별한 민족만 선택한 독선적인 신이요, 자기에게 불순종하는 자들을 기억하고 반드시 복수하는 모진 신이었다. 따라서 히브리 경전들을 부인했다. (111)
마르시온은 영지주의자들보다 더 큰 위험을 교회에 가져왔다. 왜냐하면 그는 영지주의자들처럼 창조, 성육신, 그리고 부활의 교리 등을 부인하거나 극단적으로 재해석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독자적인 감독들과 성경을 갖춘 교회를 조직했기 때문이다. (112)
# 교회의 반응 : 정경, 신경, 사도전승
마르시온의 목록은 소위 신약성경을 집대성하려 한 최초의 노력이었다. (112)
일부 영지주의자들과 마르시온 추종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히브리 경전을 기독교 정경에 포함시키는 데 동의했다. 구약성경은 기독교의 도래를 준비하신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증거로서 중요했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113)
하나 이상의 복음서 : 마르시온과 영지주의의 도전에 대한 직접적 반응이었다. 교회들은 일반적으로 자기들의 교리가 단지 한 사람의 사도나 복음서에 의해 제안된 증언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전체 사도들의 전통이 합의한 바에 기초하고 있음을 주장하고자 했다. (113-114)
요한계시록에 대한 반대 (115)
4세기 후반에는 신약 정경에 어떤 책들이 포함되고 어떤 책들이 제외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완전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주도적 관심사는 추상적인 의미에서의 신학이 아니라 예배 생활이었다. 이는 주된 질문은 “교회가 예배를 위해 모일 때에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였기 때문이다. (115-116)
이단에 대한 교회의 반응들 중 하나는 특히 세례 때에 다양한 신조들을 사용한 것이다. (116)
사도신경이라 불리는 것의 초기의 간략한 형태 … 사도신경의 골격은 150년경 로마에서 이루어진 듯하다. 이 신경을 고백할 수 있는 신자는 영지주의자나 마르시온주의자일 수 없었다. 세례 때 사용된 삼위일체 공식을 중심으로 작성 (116-117)
“전능자”(117), 신경이 자세히 다루는 부분은 성자에 관한 대목이다(118). “거룩한 교회”(118), “몸의 부활”(119)
“R”은 사도신경, 가이사랴의 세례 신조, 혹은 동일한 가정의 다른 신조의 기초였으며, 4세기에 작성되어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고대 신경인 니케아 신경의 기초였다. (119)
사도 전승의 개념이 중요해졌다. 사도전승 이론을 쉽게 이야기한다면, 만일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전달해야 할 비밀의 지식들을 가지고 계셨다면 이러한 가르침을 그가 교회를 맡긴 사도들에게 전달하셨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120)
2세기에 처음 발전될 때에는 사도전승 이론의 원칙이 배타적이라기보다는 포괄적이었다. 즉 폐쇄적인 비밀의 전통을 주장하는 영지주의 교사들에 대항하여 이 이론은 예수님의 비밀 제자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도들의 증언에 기반을 두는 개방적이고 통합적인 전통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121)
# 옛 가톨릭교회 (122)
“전체에 의한”, 즉 모든 사도들의 전체적인 증언에 의한 교회. “가톨릭” 교회, 즉 “전체에 의한” 교회만 사도적 증언 전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이것은 교회의 정통성의 보증이었고, “가톨릭”이라는 단어가 “정통적인”이나 “바른 가르침”과 동의어가 된 이유였다. (122)
초대교회는 로마제국의 박해를 견디어내면서 안으로는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적인 사상과 투쟁해야 했다. 영지주의와 싸우는 과정에서 기독교는 정통 신앙이 무엇인지 대답해야 할 필요를 느꼈으며, 신앙의 규범이 되는 정경의 결정에 대해서 합의를 도출해내야 했다.
제9장 교회의 교사들
1세기 말 로마의 클레멘트, 『고린도교인에게 보내는 서신』 (123)
『디다케』, 혹은 『열두 사도의 교훈서』 : 기독교 생활과 예배에 관한 지침서 (124)
2세기 중엽 로마 감독의 형제가 저술한 『헤르마스의 목자』 : 세례 후에 범한 죄의 용서 (124)
교부들의 저술들은 한 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이들 중 누구도 기독 교리 전체를 해석하려 하지 않았다. (124)
2세기 말 마르시온과 영지주의자들의 도전은 다른 반응을 요구했다. (124)
# 리용의 이레네우스 [124]
『사도적 가르침』 : 교인들에게 기독교 교리를 강해 (125)
『소위 지식에 대한 논박』(『이단에 반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 영지주의 반박 (125)
이레네우스의 저술은 2세기 말 교회의 신앙 상태를 보여주는 뛰어난 자료이다. (125)
하나님(목자) : 피조계를 사랑하고 이끌고 싶기 때문에 창조하신 사랑의 존재 (125)
창조의 정수인 인간은 태초부터 자유로운 존재, 따라서 책임 있는 존재로 만들어졌다. 이 자유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과 성품에까지 자랄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며, 이를 통하여 우리는 창조주와 더욱더 친밀한 교제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26)
천사들은 임시로 인간보다 높은 위치에 있을 뿐이다. 인류 가운데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될 때 우리는 천사들보다 위에 서게 될 것이다. 천사들의 기능은 마치 왕자의 첫걸음을 인도하는 선생의 기능과 같다. (126)
인류는 천사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양손”에 의해 교훈 받는다. 이 양손은 곧 말씀과 성령이시다. (126)
“신화”(神化) :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보다 더 신성에 가깝도록 만들어 가시는 것이었다. (126)
우리는 이레네우스에게서 하나님의 경륜이 역사를 통해 전개된다는 감격적인 모습을 발견한다. 그 역사의 초점은 성육신이다. (128)
#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129]
스승 판테누스 (129)
A.D. 202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박해 (129)
알렉산드리아는 무역의 중심지로서 학자나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모험가들과 상인들이 모이는 곳 – 혼합주의 정신이 절정에 달했다. (129)
클레멘트는 이레네우스와는 달리 목회자가 아니라 사상가요 연구자였다. (129)
클레멘트가 학문을 탐구한 목적은 교회의 전통적 신앙을 해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영적 진리를 탐구하는 이들을 돕고, 이교도 지성인들에게 기독교가 불합리한 미신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129-130)
클레멘트의 『이교도들에게의 권면』 : 플라톤을 비롯한 철학자들을 이용함으로써 그의 신학 방법을 보여준다.
클레멘트가 플라톤을 이용한 것은 논증에 편리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이 세상에 하나의 진리만 존재한다고 확신했으므로 플라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진리는 성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진리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이 주어졌듯이 헬라인들에게는 철학이 주어졌다. (130)
엘리트주의적 신학에 집착 (131)
클레멘트는 풍유적 주석으로 말미암아 플라톤주의에 가까운 사상과 교리들을 성경에서 추출하곤 했다. (131)
하나님은 불가해한 존재로서 우리는 단지 상징과 부정적 용어로서만 그에 관해 말할 수 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 아니신가만 말할 수 있다. (131-132)
저스틴이 이교도들에게 기독교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로고스의 교리를 사용했던 데 반해, 클레멘트는 같은 교리를 이용하여 기독교인들에게 철학 안에 있는 진리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촉구했다는 점이다. (132)
클레멘트 : 저자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찬송의 저자 – 1831년 로웰 메이슨이 번역했으며 현재는 “참 목자 우리 주”라는 제목으로 찬송되고 있다. (132)
# 카르타고의 터툴리안 [132]
40세 즈음에 로마를 방문했을 때 기독교로 개종함. 카르타고로 돌아온 후 이교도들에 대항하여 기독교 신앙을, 그리고 다양한 이단들에 대항하여 정통신학을 옹호하기 위해 많은 논문을 집필했다. (133)
『세례에 관하여』 - 세례에 관련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논문이며 초대 시대의 세례 관습에 대한 우리의 지식의 중요한 전거. (133)
『부인에게』 - 2세기 기독교인들의 결혼을 이해하는 데 도움 (133)
터툴리안은 법률가였거나 수사학 교육을 받은 인물인 듯하며, 그의 저술들 전체에서 법적 사고체계를 찾아볼 수 있다. (133)
『영혼의 증언에 관하여』 - 인간의 영혼을 증인석에 세우고 심문한 후에 영혼이 “본질상 기독교인”이며 혹 영혼이 기독교를 계속 거부하는 것은 완고하고 눈이 멀었기 때문이라는 결론 (133)
『이단들에게 불리한 취득시효』 - 터툴리안의 법적 사고체계가 가장 잘 드러나는 논문 … “장기 점유의 항변” (133-134)
이단들은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와 논쟁을 벌일 자격조차 없음을 증명하려고 했다. … 성경이 교회에 속한 것이라 주장. (134)
“취득시효” : 이단들은 성경을 해석할 권리조차 없으므로, 이러한 해석들조차 격에 맞지 않는 것이다. 교회는 성경의 정당한 소유자인 만큼 이를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유일한 존재였다. (135)
터툴리안의 법률적 성품은 누구든지 일단 기독교가 진리임을 발견한 후에는 또 다른 진리를 찾기 위한 시도조차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터툴리안의 입장에서 볼 때 다른 진리를 추구하는 기독교인은 진정한 신앙을 결여한 인물이었다. (135)
“그대들이 발견하기까지 추구해야 하고, 일단 발견한 후에는 믿어야 한다. 그 후에 할 일은 이미 믿은 것을 계속 굳게 붙잡는 것뿐이다. 그뿐 아니라 더 이상 믿을 것이 없다고 믿어야 하며, 더 이상 추구할 것이 없다고 믿어야 한다.” (135)
하나님의 전지전능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 아니라 위험한 작업이다.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가 아니라 “실제로 무엇을 이루셨는가?”이다. (136)
논리학이 아닌 수사학 (136-137)
207년경 몬타누스 운동에 합류 (137)
몬타누스주의 … 프리스킬라, 막시밀라 … 독신제도 (137)
터툴리안 : 기독교인들의 계속되는 죄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시 교회가 곧 성령의 새로운 시대에 의해 대체될 중간적 상태에 있다고 보는 것이었다. … 말년에 몬타누스파에 실망하여 자신의 분파를 설립했다고 전한다. (138-139)
『프락세아스에 대항하여』 - 삼위일체 및 기독론 논쟁에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표현을 처음 사용 … 프락세아스(가상의 인물, 당시 로마 감독 칼릭스투스?) … 프락세아스에 의하면 성부, 성자, 성령은 상황에 따라 참 하나님이 나타나신 서로 다른 양식에 불과하다. 이는 곧 “성부수난설”(성부가 수난을 당하셨다는 교리) 혹은 양태론(삼위일체의 각 위들은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의 양태[modes]라는 교리)이다. (139)
“프락세아스는 로마에서 두 가지 방법으로 사탄을 섬겼다. 즉 예언을 폐하고 이단을 도입했으며, 성령을 추방하고 성부를 못 박았다.” (139)
“하나의 본체에 세 개의 위격” - 삼위일체와 기독론의 논쟁에서 터툴리안이 그 후 정통신학의 표상이 된 용어들을 처음 사용했다 (140)
라틴어를 사용한 최초의 기독교 신학자, 서방 신학의 창시자 (140)
#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 [140]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데메트리우스 (141)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가이사랴에 정착 (141)
데시우스 박해 후유증으로 70세 쯤 두로에서 죽음 (141)
『헥사플라』 - 구약성경을 여섯 개의 칼럼을 편집한 것 (141)
『켈수스에 대항하여』 - 변증서 (142)
『제일 원리들에 관하여』 - 조직신학서 (142)
오리겐의 신학의 정신은 그의 스승 클레멘트의 그것과 비슷하다. 즉 당시 알렉산드리아에서 유행하던 철학 사조인 플라톤주의와 기독교 신앙을 연결하려는 시도였다. (142)
창세기 : 두 개의 창조(영적인 창조 vs 물질적인 창조) (143)
인간 영혼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 순수한 영들로서-오리겐은 이들을 지성들(intellects)이라 부른다-존재했음을 시사한다. - 플라톤주의적 전통에서 연유 (144)
사탄도 구원받을 것이라고 주장 (144)
오리겐은 자신이 이론을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하는 진리 혹은 교회의 기존 교리를 대처할 신조로서가 아니라, 교회의 권위 있는 가르침과 비교되어선 안 될 개인적 의견으로 제안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145)
오리겐 : 역사와 물질세계가 죄의 결과라는 결론에 도달 – 이 점에서 오리겐은 역사의 존재를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일부라고 파악한 이레네우스와 대조를 이룬다. 영혼들의 선재라든가 타락과 회복의 영원한 순환 등에 있어서 오리겐은 분명히 기독교의 정통 교리를 벗어났다. (145)
이레네우스는 그의 고향인 소아시아와 시리아에서 지배적인 것이 될 신학을 반영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것과 행하고 계시는 것과 장차 행하실 것에 대한 이야기가 주도하는 신학이다. 그것은 구원이란 사망을 정복하신 그리스도와으 연합, 세례에 의해 확립되고 성찬에 의해 양육되는 연합이라고 본다. (145)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주로 기독교와 가장 훌륭한 고전 철학의 연결을 보여주는 데 관심을 가진 신학적 경향이 등장하고 있다. 이 신학의 특징은 불변의 철학적 진리 추구이다. 이 신학에서 구원은 하나님의 조명을 받아 영적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45)
터툴리안은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방에서 율법주의에 이를 정도로 도덕적인 문제들에 깊은 관심을 두게 될 신학을 최초로 주창한 사람이다. 이 신학에서는 도덕적 순결에 의해 구원이 획득된다. (145)
제10장 3세기의 박해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의 박해 [148]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제국 내의 종교적 통일성을 유지할 필요를 느껴 혼합절충정책을 수행하기로 했다. 그는 국민들에게 솔 인빅투스, 즉 정복되지 않는 태양을 예배하도록 명령했다. 이 태양이 지존의 신임을 인정하면 모든 다른 신들을 허용할 생각이었다. (148)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칙령이 발해진 서기 202년은 기독교 박해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다. (148)
『퍼페투아와 펠리시타스의 순교』 (149)
펠리시타스 - “현재 나의 고통은 나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야수들을 대면할 때 또 다른 이가 내 안에 사실 것이다. 내가 그를 위해 고난을 당할 것이므로 그분이 내 대신 고통을 받으실 것이다.” (150)
사투르니누스, 레보카투스, 세쿤두루스의 순교 (150)
알렉산더 세베루스는 자신의 개인 제단에 다른 신들과 함께 그리스도와 아브라함의 성상들도 함께 모셨다고 한다. 그의 모친 줄리아 맘메아는 오리겐의 강의를 들으러 알렉산드리아까지 갔다. (151)
근거없는 전설에 의하면 244-249년까지 재위한 아라비아인 필립은 기독교 신자였다. (151)
# 데시우스 시대의 박해 [151]
149년 데시우스가 황제가 되었다. 기독교 역사가들은 데시우스를 잔인한 사람으로 묘사해왔으나, 그는 로마의 옛 영광을 회복하려한 전통적 로마인에 불과했다. (152)
기독교로 말미암아 쇠약해진 조상 전래의 종교를 회복하기 위한 종교 정책의 쇄신 : 데시우스의 박해는 이전의 것들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지녔다. 황제의 목적은 순교자들이 아닌 배교자들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153)
당시 기독교인들은 새로운 도전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끊임없이 박해의 위협에 시달리던 시대는 지나갔고, 새 세대들은 순교의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154)
데시우스 박해의 결과 교회 내에 “고백자”라는 새로운 칭호가 생겼다. (154)
# 배교자들에 관한 문제 : 키프리안과 노바티안 [155]
배교자의 문제를 ‘고백자들’에게 처리할 권위가 있다고 생각 (155)
원래의 교회 조직만 통일성 있고 정당한 방법으로 이러한 조처를 위할 수 있다는 감독들의 불만 – 키프리안과 노바티안의 논쟁 (156)
터툴리안의 제자 키프리안 (156)
키프리안이 배교자들에게 교회의 교제에 다시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기 위해 노력한 것은 그의 교회관 때문이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 머리의 승리에 함께 참여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으며”,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지 않은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 - 교회의 통일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확신함 (157)
터툴리안이 숭배자로 배교자들의 복귀를 엄격하게 적용함 (157)
노바티안은 키프리안보다 더 엄격했다. 당시 로마 감독 코넬리우스와 정면 충돌 (158)
히폴리투스와 칼릭스투스 감독 사이의 갈등 – 간음죄를 범한 자가 회개했을 때에 칼릭스투스는 다시 교회에 받아들이려 했으나 히폴리투스는 반대 – 로마에 두 명의 감독이 존재 (158)
교회를 사랑의 공동체로 유지하면서 순수성을 유지하는 방법과 관련된 논쟁을 벌임, 배교자들의 복귀는 일찍부터 서방교회의 주된 관심사였다. - 고해제도 발전,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어떤 면에서 볼 때 이러한 제도에 대한 반항이었다. (158)
제11장 기독교인의 생활
# 초기 기독교인들의 사회적 계층 [160]
기독교인들 중 박식한 학자들은 일반적이 아니라 예외적이었다. 오리겐이 『켈수스에 대항하여』라는 저술에서 반박 못함. (160)
처음 3세기 동안 기독교인들의 다수가 하류층 출신 (161)
평신도 층을 기반으로 저술들과 전설들이 등장 : 외경에 속한 복음서들과 여러 사도들의 “행전” 및 동정녀 마리아의 “행전” - 베드로행전, 예수가 아브가르 왕에게 보낸 편지, 마리아와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가 주고 받은 서신, 바돌로매 복음 (161)
유명한 변증가들이 기독교 신앙과 제국의 정책들 사이에 근본적 충돌이 없다는 점을 애써 주장하고 있었던 반면, 일부 평범한 신자들은 제국의 목표들과 하나님의 목적 사이에는 서로 피할 수 없는 충돌이 존재한다는 점을 깊이 의식하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해주는 자료들이 남아 있다. (162)
# 기독교 예배 [162]
사도행전 : 초대교회 성찬, 주의 만찬 – 예배의식의 주된 목적은 신실한 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거나 그들의 죄의 심각함을 의식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약속된 모든 신자들의 부활을 기억하기 위함이었다. (163)
초기 성찬 예배는 성금요일의 사건들이 아니라 부활절의 사건들에 초점을 두었다. (163)
초기 성찬 예배의 가장 특출한 특징은 그것이 축하의 모임이었다는 것이다. 그 예배의 분위기는 슬픔과 회개가 아니라 기쁨과 감사였다. 처음에는 성찬이 식사의 일부였다. (164)
2세기 초에 박해의 공포 때문에, 애찬에 대한 소문을 없애기 위해서, 또는 단지 신자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공동식사가 폐지됨 (164)
저스틴의 예배에 대한 언급 (164-165)
2세기 이후 성찬예배는 2부로 나뉘어 드려짐 (165)
초기 기독교의 또 하나의 관습은 신자의 무덤에 모여 성찬식을 거행하는 것이었다. (카타콤) (166)
지하묘지 : 1) 교회가 정부의 인정을 받지 못하여 재산을 소유할 수 없었지만 장례 협회들은 허락되었는데, 이들은 자체의 묘지를 소유할 수 있었다. 일부 도시의 기독교인들이 그러한 장례 협회들을 조직했으므로, 그들이 자기 소유의 공동묘지에서 모인 것을 이해할 수 있다. 2) 많은 신앙의 영웅들이 그곳에 묻혔고, 기독교인들은 성찬이 그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결합해주며, 믿음의 조상들과도 연결해 준다고 믿었다. (167)
죽은 자들도 교회의 일부이므로 성찬예식을 통하여 산 자와 죽은 자들이 한 몸임을 확인하는 것 (167)
“분병”의 시초, “양절판” (168)
부활주일 (168)
부활절에는 새로운 개종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회중에 받아들였다. (168)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축일은 1월 6일 주현절이었다. - 크리스마스 (169)
세례도 기독교 예배의 또 하나의 큰 사건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세례를 받아야 성찬에 참여할 수 있었다. (169)
3세기 초 세례준비기간 실시 : 3년 (170)
『12사도의 교훈』과 세례식 물 (170)
유아세례 (170)
# 교회의 조직 [171]
2세기 초의 교회에 감독, 장로, 집사의 직분이 있었다. (171)
교회는 2세기 말부터 3세기 초에 걸쳐 발생한 이단들에 대응하여 감독들의 권위와 사도전승 이론을 강조했다. 교회 내에 이방인들이 증가함에 따라 이단의 위험도 커졌으며, 이 때문에 감독들의 권위를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171)
초대교회의 여인들의 역할 (171)
신약시대 : 빌립에게는 “예언하던”, 즉 설교하던 네 명의 딸이 있었다. 뵈뵈는 겐그리아 교회의 여집사였으며, 유니아는 사도들과 동등하게 이름이 기록되었다. (171)
2세기 이단들에 대항하기 위해 교회가 권위를 중앙집권화하면서, 그 과정의 결과로 여인들이 교회 지도층에서 이탈된 것으로 보인다. (172)
초대교회와 ‘과부’와 여성 수도원운동 (172)
결혼식 (172)
# 선교방법 [173]
“순교자”라는 말은 “증인”을 의미했다. (174)
기적을 행한 이 : 그레고리 타우마투르구스 (174)
“pagan”이라는 단어는 원래 종로와 관계가 없었고 무례한 농촌 사람들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대부분의 도시 거주자들이 기독교인들이 된 후 지방에 존재하던 고대 종교들에게 paganism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175)
# 기독교 예술의 시작 [175]
물고기는 가장 처음에 등장한 기독교의 상징들 중 하나였다. (176)
고대 교회는 만왕의 왕이 상속자로 입양되었다는 사실에서 큰 기쁨을 발견한 평범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76-177)
제12장 대 박해와 최후의 승리
4세기 초에 마지막이자 가장 심한 박해가 발생했다. 디오클레티안 황제 (179)
디오클레티안의 제국 분할 통치 (179)
디오클레티안의 아내 프리스카와 딸 발레리아는 기독교인이었다. (181)
병역에 관한 기독교인이 전체적인 의견을 모으지 못한 상태 – 디오클레티안을 부추기는 갈레리우스 (181)
303년 갈레리우스는 디오클레티안을 설득하여 기독교인들에게 불리한 새 칙령을 공표하게 했다. 이때에도 그의 목표는 기독교인들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제국의 고위 관직에서 축출하려는 데 있었다. (181)
황궁에서의 화재 사건... 디오클레티안은 기독교인들에게 분노를 터뜨려 황실을 섬기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엄명했다. (수상 도로테우스 등 순교) … 기독교인 모두가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명했다. (182)
갈레리우스 중병에 걸림. 이 병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신자들의 말을 들었음인지 정책을 수정했다. A.D. 311년 4월 30일. 박해의 종식 (185-186)
콘스탄틴과 막센티우스의 대결 – 밀비안 다리 (187-188)
전쟁을 시작한 콘스탄틴은 속전속결을 위주로 했다. 그는 밀비안 다리에서 승리를 거둔 후 밀란에서 리키니우스를 만나 동맹을 맺었다. 이곳에서 맺은 협정의 일부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고, 그들의 교회들과 묘지들과 기타 재산들을 돌려준다는 것이었다. (188)
제13장 콘스탄틴 대제
기독교 역사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콘스탄틴의 신앙이 얼마나 진실했는가, 혹은 그가 기독교 신앙을 얼마나 잘 이해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고, 그의 회심과 통치가 그의 생애와 그 이후에 미친 영향이다. (193)
#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194]
리키니우스의 종교 정책 – 리키니우스 영토 내의 기독교는 여러 가지 문제로 분열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분열은 공공질서를 위협했다. 리키니우스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친위대 병력을 동원하자, 자기들이 천대를 받았다고 생각한 일부 기독교 집단은 콘스탄틴을 진정한 신앙의 수호자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황제”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198)
콘스탄틴은 단지 권력을 누리기 위해 절대 권력을 추구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전의 데시우스나 디오클레티안처럼 옛 로마의 영광 회복을 꿈꾸었다. 차이점은 데시우스나 디오클레티안이 이교의 복구를 통해 목적을 이루려 했던 데 반해, 콘스탄틴은 기독교 토대 위에서 이를 성취하려 했다는 점이다. (199-200)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진 조상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역사상 가장 뛰어난 조각가들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피디아스의 작품은 아폴로 상이었다. … 원래의 머리를 자르고 대신 콘스탄틴의 두상을 올려놓았다. (201-202)
콘스탄틴은 이곳으로 이주하는 주민들에게 납세와 국방의무 면제 등 각종 특권을 부여했다. 또 콘스탄티노플 시민에게는 기름과 식량과 포도주 등을 무상으로 배급했다. (202)
# 정복되지 않는 태양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콘스탄틴의 회심은 다른 신자들의 회심과 달랐다. … 콘스탄틴은 자기의 신앙생활을 독자적으로 규정했으며, 또 스스로를 “감독들 중의 감독”이라고 생각했으므로 교회 생활에 간섭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또 그는 회심한 후에도 기독교인이 참여해서는 안 되는 이교도 제전에 참석했는데, 감독 중에 이를 정죄한 이가 없었다. (203)
기독교를 선호하는 정책, 그리스도의 능력을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지 않았으므로 기술적으로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203)
기독교를 선호하는 정책이나 칙령들은 기독교에 우호적인 인물의 행동이었지 신앙적 결단을 내린 신자의 그것으로 교회에 의해 받아들여질 수는 없었다. (203)
콘스탄틴에게 있어서 기독교의 하나님은 그가 기독교인들을 옹호하고 지원하는 한 그를 도울 강력한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옹호하는 법률들을 만들고 교회들을 지을 때에도 그가 추구한 것은 기독교인들의 지원이 아니라 그들이 믿는 하나님의 도움이었다. (205)
콘스탄틴은 정치 생애 대부분을 통하여 정복되지 않는 태양과 기독교 하나님이 공존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 듯하다. 어쩌면 동일한 지존의 신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205)
콘스탄티노플 건설 - “새 로마”를 만드는 행위 자체가 대부분 이교도들로 이루어진 옛 로마의 귀족 집안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시도였다. 또 새 수도를 장식하기 위해 이교 신전들의 각종 조각들과 장식품들을 몰수해 왔으므로, 이는 이교를 보다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07)
# 박해에서 지배로 [208]
391년 테오도시우스는 이교도 제사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신전들을 폐쇄하거나 공적인 용도로 사용할 것을 명했다. 392년에는 공적으로든지 사적으로든지 모든 이교 예배가 금지되었다. (209)
이교에 대한 폭력 (209)
# 콘스탄틴의 영향
콘스탄틴의 회심의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박해의 중단이다. (210)
콘스탄틴의 회심 이후 기독교 예배는 황실 의식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212)
성인들과 신약 시대의 성유물들이 기적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지기 시작 (213)
너무 많은 신자들이 교회로 밀려들어왔으므로 세례준비교육을 제대로 할 수 없었으며, 세례를 받은 후에 기독교인의 생활로 인도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213)
콘스탄틴의 어머니 헬레나 - 베들레헴에 예수탄생교회 세웠고, 감람산에서 교회를 건축했다. (214)
‘바실리카’는 원래 중심부의 거대한 방이 둘 혹은 그 이상의 선들을 이루고 있는 기둥들에 의해 나뉘어진 공공건물이나 개인 건물을 가리키는 고어였다. 그러나 콘스탄틴의 회심 이후 교회 건물들이 대개 이러한 형태를 따랐으므로 이러한 교회당들은 그 후 “바실리카”라고 일컬어지게 되었다. (215)
바실리카 내부는 대리석, 램프, 그리고 수놓은 융단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이 시기에 기독교 예술의 특징을 이루는 것은 모자이크 양식이었다. (216)
고대 교회는 전통적 관습을 유지했다. 성찬의 예배의 중심으로 매주 행해졌다. 세례는 물속에 들어가는 형태를 취했고, 옛 상징적 의미를 대부분 유지했다. (218)
# 새 질서에 대한 반응들 [218]
새로운 상황이 초래한 결과들 중 하나가 “어용신학”이라는 경향이다. -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 (218)
어떤 이들은 극단적으로 반대 태도를 취했다. 이들은 황제가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선언하고 그 때문에 많은 이들이 교회에 모여든 것이 축복이 아니라 커다란 손해라고 생각했다. 사막으로 은거하여 묵상과 금욕의 생활을 했다. … 이제 순교할 기회가 없었으므로 수도생활을 통해 단련되어야 한다. (218)
삼위일체 교리에 관한 논쟁을 불러 일으킨 아리우스 주의 (219)
황제 줄리안 (219)
제14장 어용신학 :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 (221)
가이사랴의 팜필루스 – 유세비우스에게 영향을 준 인물 (221-222)
『오리겐의 변호』 (222)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의 의미 (223)
가이사랴 감독이 된 유세비우스 (224)
예수의 신적 지위와 관련된 아리우스 논쟁 – 유세비우스는 교회의 평화와 통일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225)
콘스탄틴 재위 30주년 기념행사에 콘스탄틴을 찬양하는 연설을 하게 된 유세비우스 – 아첨이 아닌 감사 (225-226)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 로마제국이라는 맥락에서 본 인류 역사의 궁극적 목표가 곧 기독교임을 보여주기 위한 변증서 (226)
어떻게 부자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228)
교회는 예배 의식뿐만 아니라 사회적 구조에 있어서도 제국을 닮아가기 시작했다. (228)
콘스탄틴과 그의 후계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이 완성되었다 (228)
유세비우스는 소위 “어용신학”의 창시자가 아니라 교회를 박해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기뻐한 많은 신자들의 대변인이라 할 수 있다. (230)
제15장 수도원 운동
콘스탄틴 시대를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와는 달리 기독교 신앙과 생활의 타락이라고 비판 (231)
많은 사람들은 수도생활에서 해답을 찾았다. 즉 모든 재산을 버리고 인간 사회에서 벗어나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육체와 정욕을 절제하는 생활이었다. (233)
# 수도원운동의 기원 [233]
오리겐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최저 수준의 생활을 하며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실행했다. (234)
수도운동의 근원 – 교회 내에서는 결혼하지 않는 이들이 주님을 보다 자유롭게 섬길 수 있다는 바울의 말씀에서 그 근거를 찾았다... 몇몇 고전 철학파들은 몸을 영혼의 감옥 혹은 무덤이므로 몸의 제한성을 초월해야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가르쳤다. (234)
스토아학파에서는 진정한 지혜의 가장 큰 적이 정념이므로 지혜자들은 영을 완전케 하는 것과 정념을 다스리는 데 헌신한다고 했다. (234)
325년, 니케아 공의회... 박해 때에 신앙을 지키고 독신생활을 함으로써 널리 존경받은 파프누티우스는 성직자 독신제도에 반대했다. (235-236)
# 사막의 최초 수도사들 [236]
“수도사”(monk)라는 단어의 어원은 헬라어로 “고독”(solitary)을 의미하는 모나코스(monachos)이다. 초기 수도사들의 강력한 동기는 고독추구였다. (236)
후일 홀로 거주하는 수도사를 의미하게 된 “은자”(anchorite)sms 원래 “도망자”(fugitive) 혹은 “피신한 사람”(withdrawn)이라는 의미였다. (236)
초기 기독교 수도원운동이 국가가 부과하는 어려운 일들, 특히 세금 부과를 피해 마을을 버리고 떠난 사람들의 비슷한 운동과 제휴되었음을 보여주는 암시들이 있다. (236)
사막의 최초의 수도사가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다. 최초의 수도사라고 일컬어지는 폴과 안토니의 명성은 이들에 관한 전기를 남긴 유명한 두 기독교 저술가들, 즉 제롬과 아타나시우스 덕분이었다. (237)
제롬이 쓴 폴의 전기 (237)
아타나시우스에 의한 안토니 전기 (237)
세월이 흐르면서 만흔 수도사들은 자기들의 생활이 대부분의 감독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생활보다 성결했으므로, 공식적 교회 지도자들이 아니라 자기들이 올바른 교리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결국 5세기의 이러한 경향은 폭도로 변한 수도사들이 폭력을 사용하여 자기들이 정통 교리라 생각한 이론을 교회에 강요하는 데까지 이른다. (242)
# 파코미우스와 공주수도생활 [242]
“공주수도”(cenobitic) - “공동생활”을 의미하는 두 개의 헬라어 단어에서 유래된 것이다. (242)
파코미우스는 공주수도원운동의 창시자는 아니지만 그 운동을 조직하고 발달에 기여한 인물이다. (243)
파코미우스의 여동생 메리도 여성들을 위해 비슷한 공동체를 세웠다. (244)
파코미우스 공동체들의 경제생활은 다양했다. 모두가 가난하게 살았으나 파코미우스는 일부 은자들처럼 극단적 빈곤을 강요하지 않았다. (245)
파코미우스의 공동체 입문에 관하여 놀라운 사실은 지원자들의 대부분이 기독교 기본 교리를 교육받은 후 다시 세례를 받아야 했다는 점이다. (247)
이집트 사막으로 도망친 사람들의 대다수가 콥트인들, 즉 고대 이집트인드의 후손으로서 당시 이집트 사회의 가장 낮은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다. (247)
# 수도원 이상의 전파 [247]
수도원운동의 이상을 전파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이집트사막의 생활을 답습한 은자들이 아니라 수도원운동에서 교회에 공헌할 수 있는 장점과 가치를 발견한 감독들과 신학자들이었다. (248)
아타나시우스, 『성 안토니의 생애』 (248)
제롬은 『은자 폴의 생애』를 집필, 파코미우스의 『규율집』을 라틴어로 번역했고, 스스로 수도사가 되었다. (248)
대 바실이라고 알려진 가이사랴의 바실은 격렬한 신학적 논쟁들에 관여하면서도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경건을 훈련하는 수도원들을 세웠다. (249)
힙포의 감독 어거스틴의 회심은 아타나시우스의 『성 안토니의 생애』를 읽은 것이 일말의 동기가 되었다. 그는 교회에서 적극적 역할을 담당할 때가지 수도사로서 살았다. 그는 감독이 된 에도 동역자들을 조직하여 반 수도적 공동체를 구성함으로써 그후 『어거스틴의 규율집』이라 불린 규칙들을 형성하는 영감을 제공했다. (249)
거룩한 감독이 수도원 이상의 대중화에 기여한 방식의 뛰어난 모범을 제공한 것은 투르의 마르틴이다. 술피티우스 세베루스가 저술한 『성 마르틴의 생애』는 수세기 동안 서유럽에서 가장 널리 읽혀진 책이었으며, 서방 수도원 운동의 모습을 결정짓는 중요한 영향력들 중 하나였다. (249)
처음에 감독들의 세속성과 사치에 대한 저항으로 발생한 수도원운동이 결국 성직제도가 추구해야할 이상으로 남게 되었다... 처음 이 운동에 참여한 인물들은 자신의 구원을 찾기 위해 사막으로 피신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특히 서방에서 수도원운동이 교회의 구제와 선교를 담당하는 도구가 되었다. (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