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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창세기 6,7장
요절\ 창세기 7:1
홍수 심판과 노아의 방주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라"
오늘 말씀은 유명한 홍수 심판과 노아의 방주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사건은 인류역사에 비극인 사건입니다. 인류가 타락할 때 반드시 종말이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도 인류역사에 대한 희망을 포기치 않고 노아를 통해서 방주를
짓게 하시어 구원의 역사를 예비시키셨습니다. 홍수 심판은 인류의
종말에 사는 우리에게 영적인 경고를 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시대를 어떻게 보시는가를 알아야 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신 방주되신 예수님 안에 거하며 순종하는 이
시대의 노아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방주를 예비시키신 하나님(6:1-22)
첫째, 육체가 된 사람들. 1-6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그 시대 사람들의 타락상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점에서 그 시대를 홍수로 심판하실 수 밖에 없으셨습니까? 1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라고 했는데, 이는 사람들이 아주 많아졌을 때를 의미합니다. 4,5장에서 살펴보았듯이 가인과 셋의 후예들이 약 1300여년 동안 생육하고 번성하여 전 세계적으로 인구가 많아졌을 때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인구 증가율을 1.5% (현재 년2%) 만 잡아도 노아 당시 인구가 10억 명 이상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사람이 지금보다 10배 가까이 오래 살았기 때문에 더욱 많은 인구가 증가했을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은 지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믿음의 가정 이루기를 거부했음을 나타내 줍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던 셋의 후예들로서 믿음의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들은 오랜 세월 동안 가인의 후예들과 섞이지 않고 믿음의 결혼을 통해서 아름다운 가정교회를 이루며 하나님의
역사를 계승해 왔습니다. 그러나 노아 시대에 와서 급격히 믿음의 결혼관이 붕괴되었습니다. 그들은 불신 자매님들의 외모에 매혹되어 연애를 했습니다. 아마 사명을 위해 사는 믿음의 자매님들보다 외모만을 가꾸는 세상 여자들이 더욱 매혹적이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타는 듯한 정욕에 이끌리어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사람을 아내로 삼았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한다는 데는 부모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중심한
가치관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명을 위해 살기보다 세상 여자들과 짝하여 인생을 즐기는 자들로 타락을 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그들이 불신자들과 결혼을 하는 것을 매우 슬퍼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버리고 육신적인 사람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더 이상 함께 하실 수 없어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이는 너무 너무나 슬픈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서 떠나신다면 이 얼마나 서글픈 일입니까? 어떤 분은
오랫동안 세상 여자를 만나는 것을 즐겨 왔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여러번 회개의 기회와 경고를 주셨는데 그는 이를 가슴 아프게 통회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같은 일을 너무 슬퍼하시고 고통하십니다. 회개하기를 더욱 지체한다면 하나님의 영이 떠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처럼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을 슬퍼하시는 것일까요? 첫째는,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신7:3절에는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들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불신자들을 연애하는 사람은 결혼한 후 자기가 잘 도와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면 자기는 마음이 드는 사람과 결혼해서 좋고 하나님은 한
사람 구원해서 좋지 않느냐고 항변합니다. 정말 그렇게 될까요?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처음에는 결혼 후에는 신앙 생활을 하겠다는 서약을 받습니다. 그러나 일단 결혼을 한 후에는 생각이 달라집니다. 불신 남편이나 아내를 위해 기도도 하고 권면도 하며, 때로는
이혼을 하겠다고 위협도 해 보지만 결국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따라가고 맙니다. 역사가 이를 증거를 합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이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채 이방 여인들과 결혼을 할 때 결국 그는 우상 숭배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복음역사 가운데 소망있게 보이던 수
많은 젊은이들이 이성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실족하여 믿음의 길을
떠나갔습니다.
둘째는, 멍에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고후 6:14절에는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중동 지방에서는 밭을
갈기 위해 두 마리의 소를 하나로 묵어 멍에를 씌웠습니다. 이때 두 마리의 소는 힘을 합하여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의 가정은 사명을 위해 존재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의 가치관과 인생의 방향이 같아야 합니다. 그런데 각기 가치관과 방향이 다른 두 사람이 어떻게 같은 멍에를 메고 사명의 길을 함께
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세상에서도 같은 길을
가기 위해서 같은 전공, 같은 직업의 사람들끼리 결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평생 사명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같은 방향을 향해 가는 믿음의 사람과 멍에를 함께 하는 믿음의 결혼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불신자들과 결혼을 하여 육체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세계가 어떠했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을 자랑하는 대신 자신들의 육체를 자랑하는 네피림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시에는 육체를 자랑하는 스포츠 스타나, 슈퍼 모델, 탤런트, 혹은 전쟁 영웅들이 유명했습니다. 당시 젊은이들에게 스포츠 스타 마이클 죠던이나, 우지원, 해태의 이종범, 가수 마이클 잭슨, 김건모, DJ덕, 탤런트 배용준, 장동건이나 람보와 같은 사람들이 우상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나타날 때면
괴성을 지르며 까무라지는 여학생들이 많았습니다. 이같이 육체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유명했다는 것은 이들이 대중문화를 리더해 갔다는
것입니다.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냐면 이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우상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스타들이 새겨진 T셔스를 즐겨 입고, 그들이 대화의 주제가 되고, 그들의 사진을 방에 걸어 놓고 짝사랑하며 그들과 같이 되고자 애썼습니다. 이같은 시대는 희망이 없는 시대입니다. 한 시대가 희망이 있으려면 인생의 철학이 있고, 역사관이 있으며, 뚜렷한 가치관과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 유명해야 합니다. 이같은 사람들이 시대를 리더하는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같은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시대는 희망이 있습니다.
육체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유명한 시대는 급속도로 타락해 가기 마련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청소년들은 그 시대의 희망입니다. 그러나
대중문화의 영향을 받은 청소년들은 마음에 품는 생각이 음란하고 포악합니다. 그들은 음란 폭력물의 흉내를 내며 성범죄를 자행하고 사람을 죽여 인육을 먹는 지존파가 됩니다. 법과 질서를 비웃으며 각종
범죄를 서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같은 세상을 보실 때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후회하심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보실 때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갈대로 가버린 죄악된 사람들과 함께
세상을 쓸어버리고자 작정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죄악된 세상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악된 세상을 근심하며 한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시대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실까요? 또한 나의 모습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실까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박수갈채를 보내실까요? 아니면 마음에 근심하시며 한탄하실까요? 아니면 슬퍼하시며
쓸어버리시겠다고 작정을 하실까요? 우리는 우리 시대를 향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며, 하나님의 탄식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 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 얼마나 은혜로운 구절입니까? 노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눈여겨보시다,'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과 자비를 덧입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이 부패하고 포악함이 가득하여 근심하며 고통하는 중에서 하나님 앞에서 살고자 몸부림치는 노아 한 사람을 눈여겨 보셨습니다. 노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가 의인이요 당세의 완전한 자라고 한 것은 그가 죄가 없거나 허물이 없는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패역한 시대 가운데 휩쓸려 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 진실하게 살고자 몸부림친 자라는 것입니다. 그는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 시대 분위기를 거슬러 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따돌림과 많은 불이익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도 노아는 불신자들과 함께 어울려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살았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노아가 죄악된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다 하면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은사를 받거나, 혹은 질병에서 나음을 받거나, 혹은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큰 직분을 받거나 큰
일을 이루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이같은 것들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만큼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은혜는 죄악된 세상에서 믿음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죄의 소욕을 가진 우리가 죄의 유혹이 가득한 세상 가운데서 이 시대를 거슬러 의롭게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아니라면 하루에도 몇 번씩 실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처지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가 가득한 세상 가운데서 믿음의 길을 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진실로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노아를 지켜보시며 그를 통해서 세상을 새롭게 할
희망을 가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 한 사람을 통해서 세상을 새롭게 할 희망을 가지셨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사실입니다. 이는 마치
50억의 인구 중에서 한 사람의 믿음의 사람을 눈여겨보시며 세상을
새롭게 할 희망을 가지시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 한 사람만 있어도 세상을 포기치 않으시는 희망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각 나라 가운데서 한 사람의 믿음의 사람만 있어도 그 나라를 포기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나아간 선교사
한사람이 중요합니다. 캠퍼스 가운데 한 사람의 믿음의 사람만 있어도 그 캠퍼스는 새롭게 될 희망이 있습니다. 가정 가운데 한사람의 믿음의 사람만 있어도 그 가정이 새롭게 될 희망이 있습니다. 이 시대가
어둡고 절망적이게만 보이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여러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서 어떻게 세상을 새롭게 하시고자 하셨습니까?
셋째, 하나님의 명령대로 방주를 예비한 노아. 1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노아에게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경고하시고 그를 위해
방주를 짓도록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노아가 만들 방주를 친히
설계하여 주셨습니다. 방주의 규모는 길이가 135m, 폭이 22.5m, 높이가 13.5m나 되는 3층으로 된 초대형 선박입니다. 방주의 넓이는 농구코트 10개를 2열로 배열한 넓이로서 용적은 1만 4천톤 규모로 120년이 걸려서 완성되었습니다. 또한 방주의 재료는 전체를 잣나무로
하되 방수와 방부를 위해서 역청으로 안팎을 칠하도록 했습니다. 이와같은 초대형 선박은 조선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만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노아 개인에게 엄청난 규모의 방주를 만들도록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노아가 방주를 만들면
이로 말미암아 그와 그 가족을 심판 가운데 생명을 보존케 하시겠다고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17-22)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떤 자세로 받아 들였습니까?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이 너무 지나치다고 불평을 했습니까? 아니면 자기는 그같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거절했습니까? 노아는 놀랍게도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다음날부터 잣나무 숲이 무거진 산등성에다 방주를 만들 기초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일찍 가족을 데리고 공사 현장으로 출근을 하여 해가 지면 일을 마쳤습니다. 그는 이같은 일을 10년 20년도 아닌 120년 동안을 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짓는 데는 내외적인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한 유조선이나 원양어선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돈벌이와는 전혀
상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이 돈이 들어가는 방주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도 언제 있을지도 모르는 심판을 대비한 방주를
말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방주를 지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무수한 말거리를 제공하는 유명인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할 일 없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노아를 찾아와 비웃었습니다. '노아 영감, 멀쩡한 하늘에 구멍이 뚫린다고, 햇빛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하고
놀려댔습니다. 노아는 그때마다 그들에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회개하고 구원의 방주를 예비하라. 심판의 때가 가까웠느니라' 그는
120년 동안 심판의 메시지를 전파하며 묵묵히 방주를 예비했습니다.
노아는 사람들의 비난 속에서 방주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인생뿐만
아니라 자식들의 인생까지도 희생시켰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기 위해 참으로 감당키 어려운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명령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되 자기 편리할 대로 순종하거나 적당히 나름대로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배가 너무 크다고 규모를
축소시키거나 잣나무를 가공하기가 어렵다고 손쉬운 미루나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또 끈적끈적한 역청 대신 수성페인트를 바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대로 다 준행했습니다. 와! 노아는 놀라운 순종의 사람입니다. 노아는 순종을 통해서 구원의 방주를 예비했습니다.
순종을 통해서 구원의 방주를 예비한 노아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기
배워야 할 영적인 교훈이 무엇입니까? 말씀에 순종해서 사는 것이 곧
구원을 예비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자유주의 자들은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사람을 지극히 어리석게 생각합니다. 말씀은 마음에 위로를 받는 정도로 족하고 자신의 삶은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에
순종을 해도 복을 받기 위해서 하지 절대적인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치는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신앙인들의 전반적인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인류의
종말이 임박한 오늘날 구원의 방주를 예비하는 삶입니다. 노아가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예비한 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미련하거나 어리석은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이 생명을 보존하는 길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방주를 만들도록 하신 하나님의 명령이 납득할 수 없고 도무지 순종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만이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확신했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생각과 이성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복종시켰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여 살고자 할 때 많은 어려움이나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모님이나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므로 외롭고 서글플 때도 있습니다. 어제 한 목자님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정말
귀하고 좋은데 쉽지만은 않네요 라고 고통을 토로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며
왜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까?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이 패역한 시대 가운데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II. 대 홍수 심판(7:1-24)
1절을 보십시오.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방주 짓기와 창고에 식량
저장하기를 마치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정결한 짐승과 새는 일곱씩, 부정한 것들은 둘씩 취하여 홍수 심판 후에 온 세상에 그 씨를 다시 번성케 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노아는 이때도 불평 한마디 없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과 모든 짐승과 새들이 방주로 들어가자 하나님께서 방주의 문을 꽝
닫으셨습니다. 방주의 문은 언제까지나 열려 있지 않았습니다. 홍수
심판이 있기 칠일 전에 굳게 닫히고 말았습니다. 방주의 문이 닫힌 후
칠일간에 걸처 카운다운이 시작되었습니다. 제 칠일 째가 되는 날 하나님은 땅에 큰 지진을 일으켜 모든 지하수를 터뜨려 올렸습니다. 이때 해일이 일어나 바닷물이 육지로 엄습을 했습니다. 동시에 하늘의
창들을 여심으로 천둥 번개가 치고 지구를 감싸고 있는 엄청난 물들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대홍수가 40일 동안 온 세상을 강타했습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하늘에 구멍이 뚫렸나' 하고 농담을 했습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두려움을 느끼고 고층 아파트 꼭대기나 높은 산으로 피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온 세계 각나라에서는 홍수 대책을 세우느라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노아가 지은 방주로 헤엄처 와서 문을 두들겼습니다. '노아 영감님 문 좀 열어 주세요, 네 문 좀 열어 주세요' 그러나 한 번 닫친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때 노아가 방주의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안타까운 한마디를 했습니다. '힘껏, 더
힘껏 헤엄을 치세요.' 물이 점점 불어나 마침내 세상의 모든 산들을 덮고 7m가 더 잠기게 되었습니다. 홍수 심판이 어느 정도 절저했습니까? 21-23절을 보십시오.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이 다 죽었는데 공중의 새와 육축과 들짐승과 땅을 기는 모든 파충류와 모든 사람이 다 죽었습니다. 아가미로 숨을 쉬는 물고기를 제외한 코로 숨을 쉬는 모든 생물이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사람과 함께 온 세상을 완전히 싹 쓸어 버리셨습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섭고도 철저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홍수심판이 인류 종말에 사는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심판은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120년 전에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심판의 경고를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노아와 그 가족 외에 아무도 심판을 대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노아 시대 사람들이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먹고 마시며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만 열중했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이 말세라는 말은 하면서도 아무도 심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때가 이르자 하나님의 심판은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첫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신 하나님은 인류의 종말의
때에는 불로 세상을 심판하시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비웃습니다. 인류는 영원하리라고 노래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경고합니까?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3:10)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8) 우리는 홍수 심판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 역사적인 사실임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인류의
최후의 심판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직 기회가 있고 평안할 때에 심판을 예비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둘째, 구원의 방주로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명령. 7:1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라" 하나님은
방주를 예비하며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고자 힘쓴 노아와 그의 가족에게 심판을 앞두고 방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방주 안으로 들어간 후 심판이 끝나기까지
방주 안에 머물렀습니다. 23절에 보면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한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심판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대책없이 심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심판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구원의 방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하셨습니다. 첫 번 심판 때 방주 안에 들어가 있었던 자들만이 살아남았던 것같이, 마지막 심판의 때에도 방주되신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인류 종말이 가까울수록 세상은 어지럽고 불안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를 구원할 만한 것들을 붙잡고자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우리를
구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돈이 사람을 구원해 줄 수 있습니까? 국가나 기업이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습니까? 아니면 현대의 첨단 과학이 나를 구원해 줄 수 있습까? 자기를 메시야라고 외치는 이단의 교주들이 나를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 구원해 줄 수 있습니까? 오히려 이같은 것들이 우리를 더욱 절망의 수렁에 빠뜨리게 하는 것을 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패역한 시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나를 구원해 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이 시간 우리에 명령하십니다.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방주되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자만이 구원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예수님만이 구원의 방주되심을 믿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구원의 방주되신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면 혹
인생이 망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찌 하든지 세상 가운데로 뛰쳐나가고자 몸부림을 칩니다. 학생 때는 4년 동안 힘을 다해
구원의 방주를 지어 놓고 졸업 후에는 방주에서 뛰쳐나가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주일날 몇 시간 동안만 방주 안으로 들어갔다가 곧 방주에서 나와 다른 모든 날들은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방주의 문 앞에 서서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며 일평생을 보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는 어쩔 수 없이 방주 안에
거하지만 자식들은 세상에 나아가 멋진 인생을 살기 원하는 부모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같은 사람들에게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구원의 방주에 들어가도 너 혼자 들어가지 말고 네 온 집과 함께 들어가라고 명령하십니다. 방주되신 예수님 안에
거할 때 우리 인생이 결코 잘못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 다하는 날까지 가장 안전하게 하나님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인류의 끝날이 임박한 때에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