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하게 김덕령만의 전공이라고 할 수 있는건
단 하나가 보이는데
선조 55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9월 2일(정축) 3번째기사
도원수 권율의 전과에 대한 치계
도원수 권율(權慄)이 치계(馳啓)하였다.
“왜적(倭賊) 2백여 명이 고성(固城) 지방에 하륙(下陸)하여 멋대로 노략질을 하는데 복병장(伏兵將) 최강(崔堈)이 소탕해 잡아들이지 못하였으므로 김덕령(金德齡)으로 하여금 군사 2백 명을 뽑아 힘을 합해 복병을 설치하게 하였습니다. 적이 남녀 50여 명을 사로잡아 갈 적에 복병이 싸우다 후퇴도 하며 혹은 요로(要路)로 곧장 달려가 숨어서 요격한 결과 비록 1급(級)도 참획하지는 못했지만 잡혀가던 사람들은 남김없이 모두 데려왔습니다.”
200명으로 적군 200명에게 달려들어
단 한명도 죽이지 못하고 다만 잡혀가던 사람들 50명 구출한것
김덕령이 군사를 일으킨 것은 1593년인데
선조 46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12월 29일(무인) 2번째기사
병조 판서 이덕형이 중국군의 동태와 김덕령에게 일면의 방어를 맡길 것 등을 아뢰다
(생략)그리고 김덕령(金德齡)의 군대가 거의 3천여 명이나 되는데 기마병(騎馬兵)이 날래고 건장하여 군용(軍容)이 매우 성대하다고 합니다.
거느린 군대 숫자가 꽤나 크다는 말은 하지만 특별히 전공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없고
그 전에 보면 선조가 김덕령이 어떤 사람인가 하고 묻자 유성룡이 그 사람 나이는 28세인데
지략에 대해서는 특별히 들어본게 없다고 말하고
그 뒤를 보면 비변사에서 김덕령의 군대에 충용군(忠勇軍)이라는 호칭을 내리려고 하자
선조가 김덕령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경솔히 믿을 수 있겠는가 이런 언급을 하는데
(며칠 뒤에 김덕령이 상소를 하자 정성이 가상하다고 직을 제수합니다)
큰 공을 세웠다면 모를리가 없으며
결정적으로 김덕령에게 직을 제수하면서 아직 공이 없다고 말을 합니다.
선조 47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1월 5일(갑신) 1번째기사
김덕령을 선전관에 제수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김덕령은 아직 공을 세우지 못했으니 갑자기 고관(高官)에 제수하기는 곤란할 것 같습니다. 선전관(宣傳官)은 내신(內臣)이므로 서관(庶官)에 견줄 것이 아니니 우선 선전관에 제수하고 그대로 충용장(忠勇將)이라는 명칭으로 군대를 통령하게 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하니, 상이 따랐다.
또 며칠뒤에는 선조가 악비조차도 신중하게 했는데 스스로 진을 치고 단기로 적을 쳐바를수 있다고 말하는거 보면 크게 쓰면 안되겠다, 이렇게 말을 하는데
이 시점까지 김덕령이 특별히 이름 날릴만한 전과를 보여준적 없다는 소리고
그러다가 한참 뒤에 9월이 되서야 위에서 언급한 적군을 한명도 죽이지 못하고
백성만 구한 저 일이 나옵니다.
나중에 권율이 김덕령을 선봉장으로 삼았다고 말을 하는데 각기증을 앓고 있어서
걷는 모습이 쓰러질것 같다고 말하고
이때 다른 장수들이 김덕령이 그러는걸 보자 맹인처럼 불안해했다고 하는것으로 봐서는
김덕령 이름값이 이 시점에는 이미 대단하기는 하는데 앞서 말했듯이 전과가 전혀 없구요.
다음해 1월 쯤에 선조가 이항복에게 김덕령에 대해 묻자
"잘 모르겠다. 용력은 뛰어나다. 지려(知慮)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용렬하진 않다."
1595년 2월 6일에는 선조가 이항복, 김응남등과 이야기 하는데
김응남은 "장수 중에 오로지 이시언만이 김덕령이 쓸만 사람이라고 말하니 둘이 힘을 합치게 하면 어떨까."
이렇게 말을 합니다.
1595년은 대체로 그런 식으로 가고
1596년 1월 13일의 기사를 보면
김덕령이 관하管下도 아니고 군령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세 명 때려죽였는데 선조가 사면을 명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사헌부에서는 김덕령 벌주자고 하는데 선조가 흉적이 국경에 있는데 용사를 죽이는건 불가하다
이렇게 대답하고
사헌부가 또 이렇게 주장하자 선조가 따랐다고 하면서
대신들간에 논의가 벌어지는데
선조 71권, 29년(1596 / 명 만력(萬曆) 24년) 1월 17일(갑신) 2번째기사
조강 후, 제주 방어 조치와 주문의 내용, 충청 목사의 적임자 등을 논의하다
호민이 아뢰기를,
“김덕령(金德齡)이 살인한 일은 극히 놀라운 일이니, 대간이 논한 바가 극히 타당한 것으로 국문하여 죄를 정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합니다. 그러나 적의 진퇴를 아직 알 수 없고 나라의 성패 또한 헤아릴 수 없는 터인데, 이 때를 당해 하나의 장사(壯士)라도 잃는 것은 좋은 계책이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법을 맡은 관원은 진실로 마땅히 이와 같이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상께서 특별히 정국(停鞫)을 허락하고 형틀을 풀어주어 그로 하여금 허물을 고치고 스스로 충성을 바치게 하소서. 이것이 사람을 쓰는 활법(活法)인 것입니다. 대신에게 문의하여 조처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이 말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고, 지평(指平) 이형욱李馨郁은 아뢰기를,
“덕령은 놓아줄 수 없는 중죄인이거니와, 일찍이 털끝만한 공로도 기록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그를 완전히 석방하여 무장들의 방자한 습성을 열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폐단이 장차 사람의 목숨 보기를 초개같이 여기는 데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덕령의 살인은 실로 놀라운 일인데, 주현(州縣)도 감히 발설하지 못하고 피살된 집 또한 감히 고발하지 못하였으니, 나라에 기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해평 부원군(海平府院君)이 내려간 후에 비로소 계문(啓聞)하였으니, 방백(方伯)이 있다 할 수 있으며, 어사(御史)가 있다 할 수 있겠는가. 대간은 의당 먼저 이들은 탄핵하여야 옳을 것이다.”
이형욱은 아예 김덕령이 털끝만한 공도 세운적이 없다고 말하는데
유성룡이나 선조가 딱히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고
그냥 그런식으로 가다가 이몽학의 난에 재수없이 연루되어 죽거
실록의 기록중에서 김덕령이 전쟁 죽에 죽인 사람은
이유도 없이 때려죽인 사람 세명이 전부
임진왜란은 관련 기록이 많으니 실록만으로 말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겠지만
최소한 조정에서 인상깊게 파악하고 있는 김덕령의 공은 거의 전무한 수준이 아닌가 하네요.
김덕령의 엄청난 명성에 비하면 오히려 권응수등이 훨씬 나은 수준
첫댓글 근데 그럼 왜 김덕령이 그렇게 까지 유명세를 탄거죠??? 선조에게 죽은 의병장이란 모습때문에 그런가........
음, 혹시나 다른 장군들이나 문집에 공이 적혀있나 해서 찾아보니 <<난중잡록>>에 " 김덕령을 잡아다 문초하였다. 이때에 김덕령이 두치복병장(豆恥伏兵將)이 되어 군사를 일으킨 지 3년에 한 치의 공도 세우지 못하고 한갓 잔혹(殘酷)한 것만 일삼아서 무죄한 사람을 많이 죽였다." 라고 하네요. 혹시나 해서 김덕령 장군 열전이 있는 <<연려실기술>>을 뒤집어 보았는데, 김덕령의 용맹을 칭찬하는 것은 있어도 구체적으로 무슨 공을 세웠는지는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나마 가장 활약을 한 것이 "수십 명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날랜 장사 5천여 명을 모집했다. 덕령이 타던 백마도 그 주인과 같아서 하루에 천 리를 갔다. 향하는 곳에는 대적이 없었으니 적군이 감히 싸우지 못하였다." 랑 "전에 호남에 있을 때 맨손으로 범 두 마리를 쳐서 잡아 왜놈에게 자랑하며 팔았더니 왜놈들이 두려워하였다. 청정(淸正)이 그 위엄있는 명성을 듣고 몰래 화공을 보내어 그의 얼굴을 그려다가 보고는, “참 장군이다.” 하면서 항상 스스로 경계를 엄중히 하였다." 이정도가 다네요.
온갖 문집 및 야사들의 총집합체라고 할 수 있는 <<연려실기술>>에서도 곽재우나 정문부 정도의 군공은 나오지 않고 오로지 용맹하다, 지략이 뛰어나다, 가또 기요마사가 두려워했다, 워매 날래네, 명과 왜국까지 용명을 날려 다 두려워했다 등등만 나옵니다. <<연려실기술>>에 곽재우가 경상우도를 평정한 것, 화성산성 방어전, 공궐의 보물 되찾은 것 등 구체적으로 군공을 기록한 것과 비교하면 그의 공이 곽재우나 정문부와 비교하면 거의 없거나 보잘것 없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런데 <<재조번방지>>에는 "그가 타는 백마도 그 사람같아 하루 천리를 달리고 가는 곳마다 승전하고 포위를 뚫고 전진에 뛰어들기를 마치 사람이 없는 곳에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왜적들이 서로 돌아보고 어이없이 놀라며 부르기를, ‘비장군(飛將軍)이다’ 하고, 그가 지나는 곳에는 모두 칼을 거두고 피하며 감히 교전하지 못하니, 위세와 명성이 크게 떨쳐, 용사와 무부들이 구름과 안개처럼 모여들었다. 드디어 그는 군사를 이끌고 영남에 진입하였는데, 적들이 듣고 여러 곳에 유둔한 적병을 거두어 한 곳에 합쳐 대군(大軍)을 만들어 가지고 항거하였다."라고 되어 있더군요.
김덕령 장군이 역적이 되어서 그의 문집이나 행장이 다 없어져 구체적인 군공을 적을게 남아있지 않게된건지, 아니면 진짜로 군공이 없는지 오락가라가 합니다. 군공을 많이 세워 왕이 직접 김충선으로 개명해주었다는 김충선도 <<실록>>에는 1급을 얻었다 정도의 군공만이 있으니, 김덕령의 행장이나 문집에는 구체적인 군공이 기록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호남절의록을 들여다 봐야 하지 않을까요. 김덕령은 사망 직후부터 아까운 인물이라는 말을 들었으니 그닥 군공을 삭제할 이유는 없어보입니다.
김덕령의 의병활동이 초창기에는 다른 의병군의 부장으로 활동하다가 부모 문제로 낙향 후 독자적으로 재봉기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부장 시절에 올린 군공이 있고, 그것때문에 평이 좋았을 가능성도 있고요.
<<호남절의록>>을 보았는데, 의녕에서 곽재우와 함께 적을 기습하여 적의 절반을 익사시킨 전공이 하나 기록되어 있네요. 근데 이게 적이 강을 건널 때 사용하는 표목을 강 깊은 곳에 세워서 이들을 유인한 후 야습으로 전멸시킨 것인데,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적군 규모에 대한 언급이 있나요?
적군 규모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게 실록과 문집을 통들어 나온 거의 유일한 군공일텐데 말이지요. 실록을 뒤져보면 나올지 모르겠으나 거기까지는 확인을 못했네요.
백병전에 능한 왜군이 두려워할 정도면 어느 정도의 용맹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