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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說 허준(許浚) 第46話>
- 이은성 지음 / 소설 동의보감
非人不傳 第三
상화가 돌아간 뒤 어머니와 아내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는 허준을 불러앉히고 다시 마주앉았다.
유의태가 자기를 잊었듯이
자기 또한 유의태를 잊었노란 말에 가슴이 아파서였다.
"그래도 기다려야지. 단 한번 실순데 지성으로 기다리노라면 용서해주시마 기별이 오지 않겠어, "
"아니옵니다."
"왜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느냐. 그래도 수많은 제자 중에 더구나 당신의 자식까지 젖혀놓고 너를 창녕에 보냈을 적에는 너의 재주를 인정한 다는 것 못지않게 네게 유별한 사랑이 계셔서 지목한 게 아니리."
" ..."
"아무튼 ..."
하고 아내가 조용히 끼여들었다.
"오늘은 특별한 날올시다. 따로 깊은 인연이 없다 하더라도 웃어른들이나 평소 도와주신 분들을 찾아뵙고 세배를 드리는 것이 도리올시다."
"그래서?"
"하오니 유의원님을 찾아뵙고 ..."
"사죄하란 말이오?"
"왜 못하느냐. 잘잘못 떠나 웃분에게 사죄하는 건 아랫사람의 도리요 허물이 아니지 않느냐,"
"건너가겠습니다."
허준이 몸을 일으켰다.
"잠시만 앉아 보아."
" ..."
"마침 스승님이 아니 계신다 하오니 내방마님께라도 세배를 드리시면 유의원님께서 돌아오신 후 다녀갔다는 전갈은 되지 않으오리까."
"무얼 몰라도 한참 모르는군."
하고 허준이 비웃었다.
" ..."
"내가 그 집에서 쫓겨나온 날 영달이와 꺽새 시켜 내 집에 와서 가져간 짐들, 그게 누구의 행윈지 아오? 바로 그 내방 마님이 시킨 일이오."
"그까짓 피륙이나 돈냥이 문제오니까."
"나도 돈냥이나 피륙을 말하는 게 아니오. 하나 그건 분명히 성대감댁에서 내게 따로 내려준 내 짐이란 말이오."
"그까짓것 잊어라. 사람 헐벗는다고 부끄러운 거 아니다."
" ... 다른 건 다 좋아. 하나 베 한 조각이면 될 어린것들 옷감마저 쓸어가야 해. 그런 여자에게 내가 고맙습니다 하고 인살 하라고?"
"그도 찾아뵙는 것이 도리."
"더 이상 그 집 얘기 마소서. 앞으로 유의태의 유자도 제 앞에선 마소서."
거칠게 방문을 열고 나가는 아들을 손씨가 다시 불러세웠다.
"그럼 앞으로 대체 어찌할 셈이냐?"
" ..."
"7년 공들인 의원생활을 정녕 걷어치울 생각이냐?
이제 와서 중도 파기할 생각이냐 그 말이다. "
"다른 길을 찾지요. 애초 의원 노릇 하고자 이 산음땅에 찾아온 건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 누구나 누구에겐가 고개 숙여 살기 마련이다. 하늘처럼 높은 정승도 상감 앞에선 머리를 조아려 살기 마련이고 그 임금도 천지신명껜 고개 숙여 산다지 않느냐. 왜 제 분수를 생각 않고 고개 숙여 살 줄을 모르는고 ..."
"말씀 잘 하셨습니다. 앞으로는 내 분수대로 고개 숙여 살 겁니다."
"앞으로는?"
" ...?"
"한두 달 어딜 다녀오겠습니다."
"어딜?"
"고흥 나로도라는 곳에."
"나로도라면 변돌석 그분이 가 있는 섬이 아니오니까."
"그렇소."
" ...!"
"거긴 왜오니까?"
"오히려 여기보다 자유롭고 편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곳도 사람이 사는 곳일 테니 무언가 살 길이 있겠지요. 이도 저도 없으면 그 사람과 얼려 어부 노릇을 하든가 "
" ...!"
"그래도 서로 호형호제하던 사람이오. 찾아가면 박대는 않겠지요."
"넓은 세상 두고 왜 자꾸 좁은 세상으로 찾아가려 하십니까. 더 좀 생각하소서."
"더 좀 생각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니고 당신이오. 우리의 신분이 뻔한 터에 내가 보내지 말라 했음에도 왜 아직도 겸이놈을 서당에 보내고 있소!"
" ..."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자식의 눈을 뜨게 해주려는 거지 영화를 기대하여 보낸 적 없습니다."
"그 얘기도 내가 누누이 한 바요. 천하게 태어난 놈이 섣불리 세상에 대해 눈을 떠서 그 눈에 쳐다보이는 게 뭐요!"
" ..."
"모르면 몰라서 지나가되 세상 됨됨일 알면 고작 할 수 있는 건 이것저것 세상에 대한 불평불만밖에 더 있소?"
"전 그렇게 생각지 아니합니다."
"당신 말은 항상 나하고 반대요."
"서방님이 그 동안 유의원님댁에서 다른 문도들보다 의술에 대해 일찍이 숙달하신 건 다른 이들보담 글을 더 많이 아셨기 때문이라 여기옵니다. 그렇다면 서방님이 의업으로 입신하시면 겸이가 그 가업을 이을 것이라 여기어 미리 서당에 보내고 있었던 것올시다."
"나도 에미하고 같은 생각이다. 그래서 겸이를 서당에 보내는 건 나와 의논도 했던 바이고 ..."
" ..."
" ..."
" ..."
"좋소. 하나 앞으론 그런 기대 버리시오. 유의태와 인연이 끊어진 지금에 와서까지 장차 의업에 기대어 살 생각 없은즉 ... 나로도에는 내일 새벽에 떠나겠소. "
"애비야?"
손씨가 튕겨일어나 말릴 듯했으나
그 어머니를 향해서도 허준의 눈은 차가웠다.
"손바닥만한 섬이 아니라 합디다. 산도 있고 들도 있고 고기도 잡히는 넓은 섬이라 하니 이미 자리잡은 그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면 더러운 세상 꼴 보지 않고 거기가 천국일지 모르지요."
"좀더 앉으소서. 그리고 더 의논을 한 연후에 ..."
"노자는 내 나름대로 마련할 궁리가 있소. 집에 있어도 생활에 도움도 못 됐던 사람이니 기다리지 말고 한 두어 달 후면 돌아오리다."
그날 밤 아내는 애써 허준의 곁에 누웠다.
어떻게든 남편이 나로도행을 단념하길 애원하기 위해서였고 동시에 유의태가 돌아오는 날을 알아다가 그집 문간에 거적을 깔고 부부가 몇날 며칠을 꿇어앉아서라도 스승의 가르침보다 성대감의 서찰에 의지하여 출세를 꿈꾸었던 지난날의 잘못을 함께 빌고 그리고 지난 7년 동안 쌓아온 의술공부를 계속할 허락을 받자는 그 얘길 하기 위해서였다.
하나 상화가 들고 왔던 술병을 혼자 비운 허준은 끝내 아내를 돌아보지 않은 채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새벽 집을 나설 때 허준은 가족에게 인사도 하지 않았다. 가족들의 깊은 실망을 알고 있었고 그건 새삼 말로
달래질 것들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쩌랴 ... 의원 생활을 계속하겠다면 아내도 어머니도 기뻐는 할 것이로되 부산포와 같은 얼치기로 독립한다는 것은 허준의 자존심이 움직이지 않았다.
허준은 자기의 의술의 목표를 유의태에게 두었다. 유의태 정도의 자신만만함이 없고선 내가 의원이노라 소리치고 싶지 않았다.
오로지 출세를 위해서라면 상화의 말처럼 다시 성대감을 찾아가 소개장을 못 받아낼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의태의 문하에서 떨려난 순간부터 소개장에 대한 미련도 없었다.
'넌 그 정도의 인간이야!'
자기가 창녕에 다시 가면 그렇게 조소할 유의태의 일굴이 떠올랐고 비록 그와 인연을 끊었어도 유의태의 그런 식의 비웃음만은 듣고 싶지 않았다.
유의태에 대한 의리가 아니었다.
오기에 가까운 자존심이었다.
스승이라는 존경 너머로 자신이 언제부터 유의태에게 그런 경쟁심을 품고 있었는지, 허준은 유의태와 헤어지고 나서야 그걸 알았다.
그 갚음이란 자기 또한 철저히 유의태를 잊어버리는 길이라고 믿었다.
당신에게 배운 의술로는 생업은커녕 한그릇의 밥
한잔의 술도 벌어먹지 않겠다는 그것이 요 두 달 허준이 찾아낸 자기 앞길에 대한 각오요 결심이었던 것이다.
지난날 변돌석이와의 얘기를 상기해보건대 나로도로 가는 포구는 여수였고 그 여수로 가는 길은 세 갈래가 있었다.
큰길 따라 남으로 진주, 사천 해안으로 뱃길을 찾아나서는 길과 남서로 뚫린 하정 창촌 거쳐 하동으로 나가 섬진강을 따라 오르내리는 소금배를 타는 길. 남은 길은 하동서 길머릴 돌려 백운산록을 거쳐 동곡 운평 광양만으로 빠지는 길이었다.
허준은 그 백운산록으로 접어들었다.
쌓인 눈과 드문드문 노루떼의 발자국이 있는 능선을 불어치는 삭풍이 콧등을 베어갈 듯이 모질었으나 허준은 지름길도 아닌 이 험로를 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7년 공무가 수포가 되고 장래에 대한 모든 희망을 잃은 그에겐 번거로운 주막길 따위보다 인적 먼는 산속길이 더 편했다. 그리고 7년 동안 지리산 골짜기를 들짐승처럼 헤매고 다닌 그의 하체에는 웬만치 가파른 산길 따위는 조금도 고통스러운 길이 아니었다.
그 허준이 백운산 중턱 제법 양지바른 비탈에서 잠시 걸음을 쉴 때였다.
눈발이 비껴간 바위 틈에 두어 잎 시든 풀줄기가 눈에 띄었고 그 마른 가지에 보송보송 말라 있는 붉은 열매가 도대체 이런 엄동에 볼 수 있는 예사 열매가 아니었다. 7년 약초꾼으로 산판을 헤맨 그 호기심으로 허준이 다가가 그 열매의 모습이며 메마른 줄기에 매달린 잎새의 모양을 들 여다보았을 때 돌연 허준은 숨을 삼켰다.
그건 산삼이었다.
"오 오 ..."
하고 허준이 자기도 모르는 신음소리를 냈고 눈을 씻고 다시 보고 다시 또 그 풀잎과 열매를 보던 허준은 다음 순간 뛰쳐 일어나며 무인공산을 향해 소리쳤다.
"심 봤다앗!"
심은 산삼의 별칭이었고 그걸 처음 발견한 사람은 그 산삼이 자기의 것임을 온세상에 알릴 의무가 있다는 것이 약초꾼들의 불문율이었다.
"심 봤다앗!"
"심 봤다앗!"
허준의 떨리듯 헷갈리는 소리가 백운산의 골짜기와
능선 위로 거푸거푸 퍼져나갔다.
산상의 세찬 바람이 벼랑 위에 선 허준의 몸을 휘감고 지나갔다.
그러나 지금 허준의 온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심봤다! " 라는 산신령에게 고한 외침 세 마디에 금세 목도 쉬어버렸다.
"이 ... 이건 꿈이야. 이건 생시가 아니라구!"
자기에게 닥친 행운이며 당장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고 있는 현실이요 꿈에도 상상 않던 뜨거운 갈망일 터인데도 허준의 목쉰 소리가 거푸 또 부정했다.
"꿈은 아니야. 그러나 이건 믿을 수가 없어!"
산삼의 이파리 수를 세던 허준이 다시 눈을 부릅떴다. 하나는 잎이 여섯 잎으로 퍼진 심마니들의 은어로 '육구만달'이라 불리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역시 심마니들의 은어로 '칠구두루부치'라고 호칭되는 귀하디귀한 일곱 잎짜리 진품임에 틀림없었다.
'꿈에도 생각 않던 내가 소망을 보게 되다니!'
그 소망이란 말,
전업인 심마니들뿐 아니라 방방곡곡 십 년을 하루같이 산판을 헤매고 다니는 수백 수천의 약초꾼들이 자신에게도 한 뿌리 태어나길 바라고 바라는 것이 산삼이었다.
처음 유의태의 문하에 들어가 지리산의 골짜기와 산봉우리를 타고 다니던 약초꾼 시절 허준은 머리가 허옇다 못해 누렇게 변한 어인마니(채삼꾼의 우두머리)를 만나 하룻밤 바위굴에서 가을비를 퍼하며 밤을 지샌 적이 있었다.
그는 평생을 산삼캐기에만 뜻을 둔 진짜 심마니였고 허준이 산삼에 관해 지식을 얻어들은 건 그의 입에서였다.
한 냥을 넘는 산삼 한 뿌리면 팔자를 고친다는 신비의 영약, 그 산삼이 귀한 만치나 그걸 캐기 위해선 금기도 많아서 부정한 걸 본 적이면 아예 산에 오르지도 않는다는 말에서부터,
산에 오를 적이면 1, 3, 5, 7, 9로 반드시 홀수로 동무를 짠다는 수수께끼 같은 미신과 산삼을 발견하면 여느 약초 따위 발견할 때 쓰는 캔다는 말 대신 '돋운다'고 경대한다는 것이며,
온갖 잡풀이 살아 숨쉬는 여름에 캐는 건 효력이 없고 적어도 잡풀 따위는 모두 시들거나 죽어버리는 처서를 지난 늦가을부터 새로운 지력이 소생하는 이듬해 초봄까지에 돋우는 것이어야 진짜 산삼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산삼들은 온갖 초근목피가 시드는 엄동일수록 바위 밑에 깔린 생생한 지력을 흡수하는데, 그 열기로 인해 산삼 주변에는 어떤 폭설이 와도 눈이 쌓이지 않는다고 들려주었었다.
그토록 존귀한 영약이고 보니 생성하는 곳 또한 그 지점을 '주무시는 곳'이라 존대하고 캐는 행위를 오히려 반대로 '돋운다'고 한다고 황발의 늙은 심마니는 탄식처럼 말했었다.
또 한번 거센 산바람이 허준의 온몸을 휩쓸고 산삼이 솟아난 바위벽에 휘몰아쳤다. 이미 허준의 머릿속에는 집을 나설 때의 목적인 나로도행은 없었다.
그는 즉시 자기의 저고리를 산삼 앞에 깔고 주막에서 챙겨온 주먹밥과 술병을 올려 산신령에게 새삼 소망 본 인사를 올리고 나자 손톱을 세워 두 산삼을 돋우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 돋우는 방법 또한 여느 약초뿌리를 캐는 것과는 달랐다.
겨우내 언 땅이었다. 허준의 손가락의 살갗이 찢기고 손톱에 피가 뻗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허준은 고통도 몰랐다.
불빛은 없어도 족했다.
백운산 큰 봉우리로 깨진 해골조각 같은 하현달이 거의 기울어 새벽이구나 여겼을 때는 수많은 돌쩌귀에 찢기고 뽑아내는 바위에 찍힌 허준의 열 손가락은 완전히 피투성이였다.
이윽고 황소라도 한 마리 파묻을 만한 거대한 구덩이가 파졌을 때 허준은 그 첫 뿌리를 두 손으로 돋우며 허공에 쳐들었다.
그건 완연히 동녀를 닮은 진품이었다.
'한 냥이 넘으면 부르는 값이 없다고? 이건 두 냥은 돼!'
허준의 입에서 울음이 터져나왔다.
남은 한 뿌리는 흙더미째 통째로 들어 안고
제물을 모셔놨던 저고리에 쌌다.
허준은 비탈을 들짐승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길을 따라 달려왔건만 지금 그가 달리는 곳은 길도 아니었다.
'집으로!'
그 일념뿐이었다. 얼어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건 산삼을 싼 저고리를 잡아맨 손이 펴지지 않았을 때 느낀 감정이었다.
그러나 발이 말을 들어주었다.
넘어지면 무릎으로 달리고 허준은 하룻길 떠나온 저 멀리 산음에 있는 집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산사의 종소리가 들렸다. 저 아득히 마을에 몇 개의 불빛이 굽어보였고 첫닭들이 홰를 치고 우는 소리도 들려왔다.
갑자기 허준은 자기가 죽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번 넘어지자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땀이 흐르다 멎은 그의 얼굴은 얼어붙다 못해 자주빛으로 죽어가고 있었으나 그 자신은 그걸 알지 못했고 부둥켜안은 산삼보따리만이 머릿속에 가득찬 일념이었다.
새벽밥을 짓는 하얀 연기가 마을에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 연기에 데워진 따스한 구들장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허준이 그 마을을 향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허준의 걸음은 그 동구 밖에서 멎었다.
'가면 안돼!'
추위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나 길도 없는 산길을 달려오느라 갈가리 찢긴 옷이며 얼굴, 산삼을 싼 흙투성이 저고리는 금세 의심받을 것이 아닌가 ...
허준은 마을에서 발길을 돌렸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가야 해. 집에 당도하기까지 그 누구와도 만나선 안돼 ...'
허준은 날이 밝아옴에 따라 오히려 큰길을 피하여 샛길을 찾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지리산 쪽으로!'
샛길도 알고 지름길도 아는 곳은 지리산뿐이었다. 적어도 그 산길은 사람들의 왕래가 심한 큰길보다는 안전한 길이라 여겼다. 그리고 그 지리산에는 겨울 한철 사냥꾼들이 불의의 대설을 만나면 수삼 일씩 피신할 작은 움막들이 흩어져 있음을 허준은 알고 있었다.
해가 돋자 허준은 밤 사이의 격정에서 깨어나 골짜기물에 소세를 하고 옷을 털고 산삼 보따리를 다시 싼 다음 등판에 매달려 쫓아온 패랭이도 상투 위로 반듯이 고쳐 썼다.
그리고 피멍이 든 두 손을 여벌인 버선을 꺼내 감쌌다.
그러나 허준은 행복했다. 한 뿌리면 집 한 채. 또 한 뿌리가 제 식구 계량할 논밭쯤 너끈히 마련하고도 남을 진품 산삼 두 뿌리가 자기의 가슴에 있지 않은가.
고생은 끝났다. 이제 20리하고 두어 마장 더 하룻밤 하루낮을 내리달려 현 서쪽 27리에 있는 독녀성의 허물어진 석축을 저만치 황혼 속에 발견하며 허준이 뇌었고 다시
"이젠 기어서라도 갈 수 있어?"
하고 스스로 용기를 내어 외쳤을 때였다.
"두 다리가 땅에 붙은 걸 보니 사람은 사람인 모양인데."
하는 낯선 소리가 등뒤에서 났다.
허준이 소스라치며 돌아보자 한눈에 심마니태로 알 수 있는 다섯 명의 장정들이 바로 등뒤에 서 있었다.
" ...!"
"산에서 내려오는 걸 이쪽 등성이에서 보고 있었는데 어디서 무얼 하다 내려오는 잔가?"
허준이 대답 대신 산삼 보따리를 끌어안으며 물러섰다.
"난 약초꾼일세."
"무슨 대단한 약초를 캤기에 저고리에 싸고 다니나 따라오며 아무리 봐도 그게 수상쩍어."
이어 한 사내가,
"펴봐 한번." 하며 이미 허준의 퇴로를 막듯이 등뒤로 돌았다.
허준은 그들의 손에 각각 들린 키가 넘는 다섯 개의 작대기를 보았다.
약초꾼도 그렇거니와 심마니들도 깊은 산중에서 각자 흩어져 일을 보다가 바위나 나뭇등걸을 두드려 동패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그 작대기였다. 또 그건 불의에 숲속에서 뛰쳐나오는 맹수의 골통을 부수는 무기삼아 쓰는 '마대'라 불리는 황백나무 몽둥이였다.
허준이 몸을 날려 뛰었다. 그러나 의욕뿐이었다.
허준은 어깻죽지에 무서운 충격을 느끼며 곤두박혔다.
"안돼!"
허준이 고함치며 튕겨일어나려 했으나 또 한번 몸 위에 몽둥이인지 발길질인지 알 수 없는 충격이 왔다.
그러나 허준은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산삼 보따리를 끌어안고 버퉁겨 일어나려 했다.
그 불안은 허준의 팔목을 흙투성이의 짚세기가 한 번
두 번 짓밟았다. 그리고 채뜨려 가는 산삼보따리를 보며 무어라 절규하던 허준은 이마로 땅을 찍으며 의식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깨어가는 허준의 의식이 무슨 소리를 들은 듯했다.
"아직 숨은 붙었고 어디서 본 얼굴이야."
하는 한가한 소리에 이어 역시 같은 목소리가,
"짐승이 덮친 것 같진 않고 도둑떼가 덮친 듯하이.
핫, 이 산속에 도둑떼라니."
"도심은 인간의 무리나 지닌 것이지 산을 핑계대지 말게. 나무 관세음보살."
"이제 알겠군, 유의태 밑에 오가던 그 아일세, 보게."
"들쳐업게나."
"이 아이가 이런 시각에 혼자 웬일인구."
"내가 이 아이 집을 짐작을 해. 어서 업으라니까는."
"하필 왜 이쪽 길로 왔던가."
처음의 목소리가 웃음과 함께 하는 소리 끝에 허준은 자신의 몸이 완강한 힘에 쳐들리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리고 그제야 그 목소리의 임자가 안광익 바로 그 사람의 음성인 걸 깨달으며 허준의 의식은 다시 멀어졌다.
계속 ~~
[著者 : 放送作家 故 李恩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