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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토. 세월호 2주기에 부쳐
참회
2년 전 오늘 세월호가 침몰하였다. 하지만 아직도 세월호 진실규명과 애도는 끝나지 않고 있다. 나는 오늘 참회의 고백을 해야겠다.
당시 나는 세월호에 대한 애도가 너무 길다고 생각했다. 방송은 연일 유병언 일가의 책임으로 몰아 붙였고, 전국적 애도 분위기를 일부러 조장하는 듯 했다. 애도가 정권에 해로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애도가 분노를 삭힌다고 생각했다. 애도와 분노가 함께 정권에 대한 책임을 묻고 정권퇴진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하자 무력감이 찾아왔다. 분노와 통찰 부족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부의 무책임과 책임 떠넘기기, 은폐가 이어졌고, 세월호 유가족의 진실규명을 위한 길고 긴 싸움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여당이 다수당이고 독재자에 대한 맹목적 지지를 보여주는 40%의 국민을 기반으로 한 박근혜 대통령이 버티는 한 현대사를 점철한 수많은 사건들처럼 진실규명은 불가능해보였다.
세월호에 국정원이 개입된 정황과 통진당 해산, 채동욱 검찰총장 해임,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사건, 연이은 사찰 사건과 국정원 직원의 자살 사건 등은 국정원의 대선개입 사건 개입 조사와 재판과 맞물려 유난스러운 일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기간을 국정원이 중심에 놓인 사건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국정원이 이렇게 대놓고 나라를 뒤흔드는데도 권력에 장악된 언론은 천하태평이었고, 국민은 무감각했다. 그저 욕하고 자조하는 게 일이었다. 세월호 이후 우리나라는 정말 헬조선이 되어버렸다.
산골에 처박혀 사는 나로서는 현실과 다소 거리를 두며 살고 있다. 하지만 작년 가을 소스라치게 각성하는 계기가 있었다. 바로 교육부의 국사과 국정교과서 밀어붙이기와 외교부의 한일 위안부 협상 타결이었다. 친일파 후손으로 국사교과서를 국정화해 아버지의 명예를 지키겠다는 대통령의 의지는 완고했다. 하지만 나를 경악케 한 것은 위안부할머니들을 무시한 채 정부가 맘대로 협상을 타결하고 할머니들과 국민에게 받아들이라고 강요했던 것이다. 한일국교 정상화 때의 박정희와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솔직히 나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위안부 문제만큼은 믿었다. 그래도 여자가 아닌가? 여자로서 여자의 고통에 대해 저토록 무관심하리라고는 감히 상상을 못했다. 하지만 권력엔 남녀가 없었다. 나의 큰 실수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를 닮은 권력자지 결코 공감의 정치를 펴는 여성이 아니었다.
결국 나는 박근혜 대통령의 도움으로 위안부와 아버지 박정희와 친일파에 대해 더욱 공부해야 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정말 우리나라가 제대로 된 길을 가려면 박정희를 철저히 파헤치고 심판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박정희와 유신은 결코 지나간 시대가 아니었다. 박근혜 대통령이야말로 친일파와 유신독재의 건재를 확인시켜주는 장본인이었다. 해방과 6.25 전후의 양민학살과 친일파 문제, 동학혁명과 임진왜란, 심지어 신라의 삼한통일까지 정말 과거에 종결된 역사란 하나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위안부할머니들이야말로 만주 관동군 장교로 독립군을 토벌하던 박정희와 연관이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이야말로 아베와 마찬가지로 위안부할머니들 문제를 해결 아닌 종결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과 진실이 필요했다. 역사의 사실과 진실을 통해 영광의 거짓 역사를 대신할 통한의 참 역사를 서술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나는 사실과 진실을 구분한다. 사실은 최대한 객관적인 태도로 사건을 이해하고 서술하기 위해 사용하지만, 진실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피해자가 겪은 역사의 은폐된 사실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다.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사실도 사실이지만 진실이 제대로 규명되어야 한다.
그러자 세월호를 바라본 내 태도에 커다란 문제가 있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바로 진실규명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고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하는 문제이다. 영광의 거짓 역사를 들어내는 통한의 참 역사의 지레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아르키메데스의 점인 진실이 필요하다. 민중의 아픔을 제대로 밝히고 그것을 토대로 역사적 평가가 이뤄져야만 비로소 삶다운 삶도 가능할 것이다. 세월호와 위안부할머니들은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 반대편에 국정원과 박정희 친일파가 있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제대로 애도한다는 것은 단순히 분노가 아니다. 진실을 드러내고 진실에 입각해 판단을 내리고 행동하는 것이다. 분노 대신 애도가 길었다고 생각한 내 생각은 잘못 됐다. 제대로 된 진실규명조차 불가능했고 또 없었기 때문에 애초 애도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참으로 애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떠나보낼 수 없다.
진실이 밝혀지지 않는 한. 그리고 진실에 의한 심판이 이뤄지지 않는 한. 그래야 비로소 애도가 가능할 것이다.
국정원과 한(恨)
하지만 내 삶 전체를 통해 볼 때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 가장 어렵고 심지어 불가능할 때가 많다. 왜냐하면 언론을 장악한 것이 언제나 권력이었기 때문이다.
작년 강기훈 씨가 유서대필사건으로 구속된 지 25년 만에 명예를 되찾았다. 91년 당시 분신정국과 정권퇴진 운동으로 위기에 처한 정부가 운동권에 타격을 주기 위해 분신자살을 한 김기설 씨의 유서가 대필되었다고 사건을 조작함으로써 위기를 돌파했다. 지금도 명확하게 기억하는 것이 정보를 독점한 정부의 발표는 늘 시민이 판단을 내릴 수 없게 한다. 61년 박정희 파시즘정권을 강화하기 위해 김종필은 중앙정보부를 만들고 이후 중앙정보부는 각종 간첩단 사건과 도청, 사살, 암살 등을 일삼아 왔다. 그러다보니 정부의 발표는 어느 사이엔가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그것을 반박한 정보를 캐는 것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독재정권에 의해 군대와 중앙정보부가 정보를 독점하였고, 언론이 길들여졌고, 입법 사법 행정부가 완전히 그 하부기관으로 재편되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발표한 것을 받아쓰기 하고 보여주라는 것을 보여주는 언론을 매일 접하며 박정희유신의 보냈다. 그러니 제 정신으로 살 국민이 몇이나 되겠는가?
지금도 KAL기 폭파사건이나 아웅산 테러 사건이 과연 북한의 소행인지 아니면 안기부의 기획인지 증명하는 것이 쉽지 않다. 천안함 폭침사건도 그렇고 세월호 사건도 그렇다. 도무지 믿을 수 없다. 정부가 내세우는 물증과 발표는 믿을 수 없고, 심증은 있지만 그것을 증명한 물증은 없다. 그리고 정부를 못 믿고 정부와 다른 말을 하면 곧 빨갱이라고 비난을 받고 심판을 받는다. 그러다보면 20~30년이 훌쩍 지나간다. 그러니 중앙정보부의 뒤를 이은 안전기획부, 안전기획부의 뒤를 이은 국가정보원 기획이 무리가 있어도 대체로 성공한다. 정보의 독점과 언론 통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사법부까지 지배하였으니 어떤 결과가 났는지는 뻔하다. 때문에 이런 정부의 발표는 정보를 차단하고 독점할수록 거짓에 가깝다. 하지만 여전히 진실 규명이 어려운 상황에서 반대와 저항의 동력도 약화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서울시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을 보면 박원순 서울시장과 야당 세력을 음해하려는 노골적인 의도가 보인다. 국정원 선거개입 조사에 박차를 가하려던 채동욱 검창총장 친자 문제를 제기해 해임하는 등의 공작을 보면 국가정보원을 지배하는 권력의 위력을 파악할 수 있다. 즉 61년 중앙정보부의 기본 임무를 충실히 완수하고 있는 것이다. 독재권력 연장 말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현대 한국사에만 일어난 문제는 아니다. 언제나 역사를 지배한 것은 권력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언론이 있어서 왕정의 독단을 견제했다고 하지만, 산림(山林)처사가 상소를 올린다고 해도 5%의 지배권력인 양반에 해당하는 일이다. 도무지 그 많은 한자를 습득해 의사표현 할 수 있는 사람이 권력을 쥔 유한 계급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그러니 권력자들의 언론과 권력자들의 역사만이 존재할 뿐이다. 세계 어느 곳을 봐도 지금까지 남아 있는 소위 문화적 업적들이라는 것이 권력의 잉여착취분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거대 기념물 치고 1%의 권력을 위한 기념물 아닌 것이 없다. 그러니 역사의 진실은 숨은 다수의 침묵과 피일 것이다.
신명의 문화를 가진 한민족이 뼛속 깊은 한(恨)을 기르게 된 원인은 이러한 권력의 폭력에 기인한다. 우리가 일본에 의한 외침으로 한의 민족이 된 것이 아니다. 국가권력을 소유한 지배자들의 내부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라의 삼한통일에는 영광만 있는 것이 아니다. 멸망한 백제와 고구려인의 수십만이 넘는 희생이 있었고, 가야와 왜의 고통이 있었다. 물론 신라의 서민과 노예는 말할 것도 없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어떤가? 책임자인 선조와 인조는 멀쩡하고 조국을 위해 희생된 사람을 제치고 아부자들이 높은 공훈자가 되었다. 응당 역성혁명이 일어나야 할 상황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일본에 끌려간 수십만 조선인이 제대로 구출 될 것도 아니다. 동학혁명은 어떤가? 30여만 명의 희생자들을 양반들은 혐오했다. 일제시대 국내는 물론 만주에서 희생된 수십만의 조선인 농민과 독립운동가들과 수십만 징병, 징용, 정신대의 희생자들은 어떤가? 6.25 전후 제주 4.3항쟁, 여순 봉기, 거창양민학살 사건, 노근리양민학살 사건, 20만 보도연맹 희생자 등 다시 수십만이 넘는 희생은 다 무엇인가? 따지고 보면 일제에 비행기를 헌납한 친일파 자본가는 아무것도 아니다. 자청해서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하고 장교가 되어 만주의 동포와 독립군을 토벌한 박정희와 백선엽 같은 관동군 장교들은 A급 친일파가 아니라, 골수까지 황국신민인 전범이 아닌가? 그런데 그들이 한국군과 경찰과 정부의 주인이 되었다. 이런 역사를 가지고 영광의 역사를 기억하자고 하면 말이 되겠는가? 통한의 진실을 중심으로 역사를 제대로 이해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진실에 의해 심판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역사에서 화해는 심판에 의해서만 가능할 뿐이다. 그래야 한의 저주를 풀 수 있기 때문이다.
정보를 누가 소유하고 역사를 누가 서술하느냐는 그래서 중요하다. 왜냐하면 진실을 은폐하지 않고 영광의 역사는 만들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귀향
얼마 전 조정래 감독의 영화 『귀향』을 보았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지만 피해자인 위안부 할머니들만이 아니라 역시 피해자일 수 있는 일본사병의 모습까지 담고 있는 균형 잡힌 영화였다. 북한의 김옥순 할머니 같은 분들이 겪은 극단의 잔혹에 비하면 오히려 온건하기까지 한 영화였다. 그런데 내게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현대의 소녀와 희생자 연결과 일종의 씻김굿이 모티브였다. 감독의 역사인식과 예술관이 보통이 아니었다. 폭력문제는 일제시대에 끝난 것이 아닌 여전히 현실에서 재현되고 있는 폭력으로 인식했다는 점과 과거의 진실을 정직하게 대면함으로써 비로소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더불어 굿이라는 의례를 통해서 과거의 진실을 현재화 해 승화시키는 모습을 감동적으로 보여주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를 후원한 7만 5270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힘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긴 엔딩 자막 자체도 하나의 의례로서 완벽하게 기능하고 있었다.
영화 상 서툰 부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점은 그 다지 중요하지 않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미숙한 몇 곳이 있다고 해서 상업영화와 비교하며 실망했다는 둥 하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 것처럼, 저자본으로 저만큼의 깊이와 탄탄함을 갖춘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은 진정성이 아니면 해낼 수 없는 놀라운 일이다.
영화를 보며 나는 곧 이산가족의 아픔을 담은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85년)이나 이장호 감독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87년)가 떠올랐다. 우리는 유대민족을 디아스포라의 민족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천만 이산가족이 살았던 우리 자신을 디아스포라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천만이나 되는 이상가족의 한을 생각하면 통일도 당장 통일이 되었을 텐데 어찌 통일이 그들이 거의 돌아가실 때까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절대권력의 폭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통일은커녕 일생 단 한 번의 만남도 허락되지 않는 사람도 부지기수였으니 그들의 한을 어떻게 다 풀어낼 수 있을까?
그렇게 한(恨)은 절대폭력 앞에서 희생되며 쌓인 억눌린 감정이다. 그 고통을 『길소뜸』과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무속과 연결시켜 섬뜩하게 자각시킨다. 하지만 두 영화가 해소하지 못하는 고통으로 끝나는 것에서 80년대 군부독재의 시대를 살던 당시의 정서를 읽을 수 있다. 『귀향』이 진전한 점은 희생자할머니들의 커밍아웃과 연대의 손길이 있었다는 점이 다르다. 때문에 아직 일본의 공식적인 인정과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을 받지 않았더라고 씻김의 위안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절대폭력 앞에 희생당한 삶들의 고통과 한을 풀어내는 것에 대해 우리 민족은 과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 제대로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희생자의 진실을 제대로 밝힌 다음에야 비로소 악의 세습을 끊고 바른 역사를 열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구한말과 일제시대의 민족종교인 동학, 증산도, 대종교, 원불교를 이러한 역사와 한철학의 맥락에서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주의 모악산 자락에 살았던 강증산은 동학혁명의 좌절을 겪으며 30만의 희생자들과 이 땅의 억눌리며 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지난 역사의 희생자들의 한을 풀고 평등한 해원상생(解寃相生)의 시대를 이해 천지굿을 한다. 편협한 서구중심적 근대주의 시각으로 보면 굿과 무속은 미개해보이겠지만, 인류학적 심리학적 예술적 시각에서 보면 굿과 무속은 고통에 대한 탁월한 치유책이자 사회적 결합력이 된다. 일찍이 스스로 하느님이 되어 이러한 굿을 해본 사람이 없었다. 미신의 시각을 버리고 한국의 한 남자무당이 나타나 인류역사의 모든 한 맺힌 것들을 위로하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위대한 퍼포먼스를 수행했다고 생각해보자. 그것이 증산의 진정성이었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앞의 영화들과 함께 증산의 해원굿이 계승되는 모습을 확인한다. 감독들은 전혀 의식하지 않았겠지만 우리 안에 해원에 대한 염원과 의례가 있고, 그것이 굿으로 나타남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한맺힌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이별의 의식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해원은 무엇을 통해 이뤄지는가? 바로 진실과의 만남을 통해서 였다.
귀향(歸鄕)은 고향에 돌아온다는 뜻이다. 너무 멀리 떠나가 버린 진실로 우리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고향에 돌아올 수 있겠는가? 세월호 2주기인 오늘 세월호의 304명 희생자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원시반본(原始反本)이랬다. 우리는 처음 시작한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곳이 마음의 고향이다. 마음도 첫 마음이 중요한 것이고, 온갖 현란한 역사도 사건도 말할 수 없는 사람들 곧 희생자들의 진실로 돌아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악몽 같은 역사의 데자뷰도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다.
나는 아직 희생자들에게 무릎 꿇고 명복을 빌 수 없다. 왜냐하면 진실의 자리여야만 그들이 돌아와 한을 풀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들 앞에는 아직도 온갖 거짓의 커튼이 나부끼고 있다. 봄은 왔지만 진달래꽃은 핏빛으로 붉고, 나비는 아직 청산을 헤맨다.
세월호와 위안부할머니들과 그 외의 역사라는 이름 앞에 희생된 무사한 민중의 노란 나비들이 일제히 고향으로 날아 갈 수 있기를 빌며, 그것이 또한 나 자신의 일임을 느끼며 글을 맺는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ㅠ
이래저래 비문과 오타가 많은 글,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