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에 대한 탁월한 식견과 투쟁역정을 평가하며> 박사학위 수여식에서. 미국 명문 에모리대학은 김대중 선생에게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83년 5월 18일)
김대중은 하버드대학 국제문제연구소 연구원으로 머무르면서 한국경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대안을 제시하는 <대중참여경제론(Mass Participatory Economy)>이란 논문을 써서 제출하고, 이것이 교수들로 구성된 심사회의에서 채택되었다. 그리고 하버드대학 출판부에서 간행되고 부교재로 채택되었다. 뒷날 국내에서도 번역 출판되었다.
김대중은 책의 서문에서 이 논문을 쓰게 된 배경을 밝혔다.
지금 한국경제의 최대 취약점이 분배의 불균형에 있다는 것은 이미 경제전문가들이 지적한 터이며 세계적으로 공지된 사실이다. 이 책을 쓴 나의 의도는,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의 경제정책에 대한 나의 반대 입장이, 내가 보다 나은 대안을 갖고 있다는 확신감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나의 정책을 제시함으로써 관심 있는 분들이 토의할 수 있도록 하자는 데 있다. (주석 26)
한국어판으로 출판하면서 보완한 이 책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제1장 한국경제에 대한 나의 비전, 제2장 경제개혁프로그램의 목표와 기본원칙, 제3장 전후 한국경제 약사, 제4장 박정희, 전두환 정권의 경제정책, 제5장 노태우 정권하의 한국경제, 제6장 물가안정, 제7장 토지투기와 주택문제, 제8장 금융자유화, 제9장 형평성과 효율성을 위한 재정개혁, 제10장 수출위기와 근본대책, 제11장 중소기업과 대기업, 제12장 노사협력체제의 확립, 제13장 농촌경제를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 제14장 21세기를 대비한 교육과학기술, 제15장 분배적 정의와 사회복지, 제16장 맺는 말.
이 책은 김대중이 1960년대부터 줄기차게 탐구하며 정책대안으로 제시해 온 ‘대중경제론’의 기초에서 집필되었다. 대중경제론은 60년대 신민당 정책의장 시절에 박정희의 근대화론에 맞서 창안한 경제이론으로서 김대중은 1969년 경희대학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으로 '대중경제의 한국적 전개를 위한 연구'를 썼고, 중산층과 중소기업육성, 농공병진, 내포적 공업화를 주요 내용으로 삼았다.
이 경제 논문은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씨의 대중경제 - 100문 100답>이란 소책자로 발행되었다. 범우사에서 문고판으로 발행된 이 책에서 김대중은 대중경제체제를 정리하여, “대중을 위한 대중의 경제체제”라고 정의한다. 그의 대중경제론은 경제학자 박현채 교수의 이론적 조언이 있었고, 하버드대학에 제출한 논문작성에는 미국 뉴저지주의 경제연구소에 근무한 유종근 박사의 협력이 있었다.
1983년 말 미국에서 <옥중서한 - 민족의 한을 안고>가 출간되었다.
청주교도소에서 가족에게 보낸 29편의 서신을 국내에 남아있던 장남 홍일이 용케 챙겨서 보내주어 한 편도 분실되지 않고 고스란히 활자로 담을 수 있게 되었다.
필라델피아 등 몇 곳에서 출판기념회가 열리고, 많은 교포들이 사주었다.
김대중은 각종 연설회와 휘호 쓰기, 인세와 국내외 동포들의 성금, 그리고 국내에서 장남이 음식점으로 얻은 송금 등으로 생활비를 충당하였다. 휘호는 ‘사인여천(事人如天)’, ‘인내천(人乃天)’, ‘실사구시(實事求是)’등을 주로 썼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그가 호화생활, 고급승용차 소유 등 각종 유언비어가 유포되어 이미지에 상처를 입혔다. 정보기관의 의도적인 도덕성 훼손을 위한 음해 공작때문이었다.
망명 2년차가 되는 1984년으로 해가 바뀌었다.
김대중은 차츰 귀국의 시기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2월 13일 미국무성 인권담당 차관보 엘리엇 에이브럼즈와 그의 사무실에서 만나 한국 인권문제에 관한 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김대중은 미국의 대한정책에 일대 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해 3월에 모처럼 경사가 있었다.
차남 홍업이 결혼한 것이다. 5.17사태 이후 도피와 구속을 거듭해오던 홍업은 주한 캐나다대사관에 근무하는 신선련과 친구 신혼 집들이에서 처음 만나 비밀리에 사귀었다. 신선련은 홍업의 은신처를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정부의 해외 추방조처로 홍업이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떠나면서 둘은 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신선련이 미국 대학으로 유학을 오는 형식으로 출국하여 두 사람은 1984년 3월에 메릴랜드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측 하객은 하나도 없고 문동환 박사가 신부아버지 대행을 했다.
미국 교포들은 이 결혼을 ‘로미오와 쥴리엣’이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신부 아버지가 전두환 대통령의 청와대에 고위직으로 근무하다 자리를 옮겨 감사원 감사위원으로 재직 중이었다. 딸이 사귄 신랑후보가 김대중의 아들임을 안 아버지가 사표를 내게 되고, 전 대통령이 사정을 알고는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해주라고 하면서 휴가를 주었다고 한다. 결혼식이 끝난 뒤 신부의 부모는 미국에 와서 사돈이 된 김대중 부부와 상견례를 갖췄다.
김대중이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귀국을 결심하고 있을 때, 전두환은 귀국을 만류하는 ‘사절’로 신부의 아버지를 미국에 파견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어려운 사이가 ‘사돈 사이’라는 말이 있는데, 며느리나 사돈의 입장이 무척 곤란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들의 결혼은 권력의 비정함 속에서 이루어진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다.
김대중 선생은 미국 망명 당시 활발한 연구활동과 아울러 미국 정계, 학계, 종교계 저명인사들과 폭넓은 교류를 가지며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국가들이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데 많은 노력을 하였다.
김대중은 망명시절에 수많은 미국의 저명인사들과 교분을 나누었다.
그 중에서도 카터 전대통령과의 교분은 각별했다. 김대중이 카터의 인권수호 정신을 높이 평가한 때문이었다. 1984년 3월 30일 에모리대학에서 카터와 만나 그의 지속적인 인권수호 활동에 경의를 표하면서 인권침해국 방문과 국제인권센터 설립, 카터의 이름을 딴 인권상 제정 등을 제안했다. 카터는 좋은 제안이라고 인정하면서 이를 적극 수용할 뜻을 밝혔다.
또 한 사람은 닉슨 정부 때 국무장관을 지낸 키신저 박사였다.
국제정세에 정통한 키신저와 만나서 국제문제 특히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의 미래상에 관해 폭넓게 토론했다. 키신저와는 야당 시절부터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김대중은 7월 17일 제36회 제헌절을 맞아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민주헌정질서를 위해 싸우다가 해외로 추방된 망명객의 처지에서 제헌절이 남다른 감회를 불러온 것이다. <말살된 민주헌법을 소생시켜야 - 전두환 정권의 또 하나의 개헌음모를 경계하면서> 라는 제목의 성명이다.
이 성명은 지금까지 권력을 위한 수 차례 개헌이 있었음을 통탄하면서, 전두환정권의 내각제 개헌음모를 고발하고, 진정한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유신 전의 헌정체제로 개헌 방향을 촉구하며, 이제부터라도 현실을 직시하고 국민에게 권리를 되돌려주며, 대화를 통한 정치를 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7월 19일에는 미국 민주당전국위원회 미낫트 의장의 초청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미국 민주당대회에 귀빈 자격으로 참석하여 전당대회를 지켜봤다.
주석
26) 김대중, <대중참여경제론>, 제1판 서문, 산하발행, 10~11쪽,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