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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고도(裕貞孤道)
- 김유정기념전시관
1. 말더듬이 멱서리
대갓집 도련님으로 태어나다
김유정은 1908년 2월 12일, 강원도 춘천부 남내이작면 증리(실레마을)에서 태어났다. 10대조 김육(1580 ~ 1658)은 백성을 위해 대동법을 주장한 개혁자였고, 9대조 김우명(1619 ~ 1675)은 현종의 장인이자 숙종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고조부 때부터 춘천 실레마을에 터를 잡은 육천석지기로 조부 때는 춘천 의병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고 한다. 그런 명문가의 자제인 아버지 김춘식과 어머니 청송 심씨 사이에서 그는 2남6녀의 일곱째로 태어났다. 부모는 딸만 다섯을 낳은 끝에 얻은 이 귀한 아들이 부유하고 건강하게 장수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멱서리(곡식을 담는 그릇)'라는 아명을 지어 주었지만 그는 말더듬이에 몸이 허약했다. 게다가 횟배를 자주 앓았고, 아버지는 그럴 때 마다 어린 김유정에게 담배를 피우게 했다. 하멜 표류기에 조선의 4~5세 아동들이 뱃속 회충을 없애기 위해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등장할 만큼 당시에는 담배가 회충을 죽인다는 속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어린 시절의 흡연은 후일 김유정이 골초가 되고 폐결핵을 앓는 단초가 되었다.
어린 도련님의 담배 피우는 모습은 집안과 마을 사람들의 불편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이 때문에 감수성이 예민한 김유정은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꺼리는 염인증이 싹트기 시작한다. 김유정이 말이 아닌 글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문학의 길로 들어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2. 유년의 상실과 슬픔
청춘과 행복은 아버지의 상여를 따라 멀어져 갔다
여섯 살 무렵 김유정은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있는 아혼아홉 칸 집으로 이사를 한다. 이 시기만 해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지만, 일곱 살 되던 해 어머니가 사망하게 된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치유할 틈도 없이 아버지마저 병으로 눕게 된다. 형은 병든 아버지를 대신해 넓은 토지를 관리했다. 이삼백 리를 걸어 달포씩이나 고생하고 돌아와서도 어김없이 아버지 병시중을 들었고, 아버지가 위독할 적에는 자신의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마시게 할 정도로 효자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던 형은 난봉이 나고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축내기 시작한다.
수전노에 가까웠던 아버지는 형에게 벼루며 목침, 단소까지 내던졌다. 급기야 어린 김유정이 보는 앞에서 형에게 칼을 던지기에 이른다.
이 사건은 김유정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고 그가 불행을 느낄 때마다 상징처럼 새롭게 각인되곤 하였다.
김유정이 9세 되던 해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난다. 그는 작품 형에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내가 만일 이 때에 나의 청춘과 나의 행복이 아버지의 시체를 따라 갈 줄을 미리 알았다면 나는 그를 붙들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내리 울었으리라"
그 후 가세는 점점 기울어, 운니동에서 관철동으로, 다시 숭인동, 관훈동, 청진동으로 살림을 줄여가야 했다.
이시기에 김유정은 글방을 다니며, 4년 동안 천자문, 통감 등 한문 공부와 붓글씨를 익히고 12세 되던 1920년 재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다.
3. 예술과 우정
조선의 톨스토이를 꿈꾸다
재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김유정은 평생의 지기 안회남(소설가, 1907~?)을 만나게 된다. 안회남은 신소설「금수회의록」의 작가 안국선(소설가, 1878~ 1926)의 아들로 193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발(髮)」로 등단한 월북 작가이다. 불우한 가정에서 성장한 그와는 달리 문학적인 분위기에서 다복하게 자란 안회남은 김유정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자 의지처였다. 관심사와 기질이 비슷했던 두 사람은 수업시간에 몰래 빠져나와 학교 뒷동산에서 도시락을 까먹기도 하며,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비롯한 체호프, 노신 등의 작품을 탐독했다. 이 시기 김유정은 조선의 톨스토이를 꿈꾼다.
김유정은 다재다능했고 예술을 사랑하여, 문학뿐 아니라 야구ㆍ축구ㆍ스케이팅ㆍ권투ㆍ유도 등의 스포츠와 바이올린 연주 등 다양한 취미활동을 즐겼다. 하모니카 실력은 극장 단성사 개관 기념행사 때 무대에 올라 독주를 선보일 정도로 수준급이었다. 영화에도 관심이 많아 특히 찰리 채플린을 좋아했다. 날카로운 풍자와 휴머니즘을 함께 담고 있는 영화 '황금광 시대'는 김유정 문학의 해학성과 무관하지 않다.
안회남과의 우정은 문학에 대한 열정과 함께 그 깊이를 더해 갔다.
4. 방황과 습작
불행한 삶, 문학의 자양분이 되다
김유정은 1933년 서울동양극장에서 열린 조선성악연구회 창립공연에서 춘향역을 맡은 명창 박녹주(1905~ 1979)의 동편제 소리에 큰 감동을 받는다. 어머니 사진을 늘 가슴에 품고 다니던 그는 우연히 목욕탕에서 나오는 박녹주의 소박한 모습과 마주친다. 그 순간,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린 그는 헤어나기 힘든 사랑에 빠진다.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던 그리움과 상실감이 박녹주를 향해 일시에 열린 것이다. 그 무모한 사랑은 김유정에게 또 한 번의 상처로 남는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소리와 작품은 두 사람의 예술적 교감을 짐작케 한다. 소리의 원초적인 모습을 고집하며 한을 드러내지 않는 박녹주의 동편제와,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토속어를 고집하며 웃음으로 고통을 극복하고자 했던 김유정의 치열한 작가 정신은 그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무렵 연희전문과 보성전문에 입학하기도 하지만 중도에 그만두고 김유정은 춘천 실레마을에 머무른다. 유정의 나이 22세였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급격한 경제적 몰락과 실연의 아픔을 겪으며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채로 고향에 내려온 그는 농민들, 들병이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혹독한 현실을 살아내는 기층민들의 삶을 목도한다. 개인적인 불행과 시대의 불운은 김유정에게 하나의 화두가 되고 문학적 자양분이 되어 서글픈 웃음을 주는 해학의 문학으로 자리잡는다. 그는 자전적 소설 심청을 탈고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을 쓰기 시작한다.
5. 귀향과 농촌계몽운동
고향 실레마을에서 소설의 토양을 다지다
실레마을에 머무는 동안 김유정은 야학당을 열고 농우회, 노인회, 부인회를 조직하는 등 농촌계몽운동을 펼친다. 농우가(農友歌)를 지어 함께 부를 만큼 김유정은 고향을 사랑했다.
어느 날 야학으로 사용하던 움막에 불이 나자 김유정은 죽음을 무릅쓰고 불 속으로 뛰어들어 안에 있던 아이들을 구했다. 창문으로 의식을 잃은 아이가 던져지고 곧이어 불에 그을린 그가 기계체조 하듯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때의 상황을 지켜본 조카 김영수는, "삼촌이 건강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쇠약한 때라도 그 칼칼한 성품으로 인해 민첩한 행동으로 '옮겨진 것" 이라고 말한다. 야학당은 후에 간이학교로 인가받아 '금병의숙'이 되었다.
이 시기 김유정은 충청도 예산에 있는 광업소의 현장감독으로 몇 달 간 머무르기도 한다. 거기에서 그는 광부, 잠채꾼 등 막장에 내몰린 인생들을 만나고 이 때의 경험은 후에 금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낳는다.
6. 화려했던 날들
문학은 꽃피고, 생명은 이울다
몇 해간 습작기를 보내던 김유정은 1933년 <제일선> 이라는 종합잡지에「산골 나그네」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발을 들인다. <제일선>과 <개벽>의 발행인인 춘천 출신 차상찬(1887~ 1946)은 일찌감치 그의 문학성을 알아보고 혼쾌히 실어주었다고 한다. 차상찬은 '한국언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김유정에게 있어 문학은 '금광의 노다지'와도 같았다. 노다지를 발견한 그는 전력을 기울여 그것을 발굴해내기에 힘쓴다.
1935년「소낙비」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1등, 노다지로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 가작 당선이 이어진다. 김유정은 폭발적으로 작품들을 써내고 발표하는데,「금 따는 콩밭」,「금」,「떡」,「만무방」,「산골」,「솥」,「봄.봄」 등 한 해 동안 발표한 것만 해도 열한 작품에 달한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1등 당선 축하연에서 천재시인 이상(시인, 소설 1910 ~1937)을 만나게 되고 우정을 나눈다. 이어 박태원(소설가 1909 ~ 1986), 이태준(소설가 1904~?), 정지용(시인 1902~ 1950) 등이 속한 순수문학을 추구하는 '구인회'의 멤버로 활동을 하며 문우의 폭을 넓힌다.
이 시기 김유정의 문학은 화려하게 꽃피고 있었지만, 그의 몸은 이미 폐결핵으로 스러지고 있었다.
7. 겸허
다만 문학의 길을 걷고 싶었다
김유정은 쉬지 않고 글을 썼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건강한 몸이 필요했고, 치료약을 사려면 돈이 필요했던 그는 원고료를 벌기 위해서라도 쉼 없이 소설을 써야 했다. 그러나 소설 쓰기는 김유정의 몸을 더욱 망가뜨렸다. 그는 살고 싶었다. 동반자살을 제의했던 이상에게 앙상한 가슴을 풀어헤치며 '명일의 희망이 이글이글 끓습니다"라던 그는 '겸허'라는 두 글자를 머리맡에 붙이고 오로지 창작에 몰두했다.
1936년 그는 요양을 위해 정릉에 있는 암자로 들어간다. 산골 물에 목욕하고 너럭바위에 누워 일광욕을 즐겼다. 하지만 폐결핵이 악화되고 치루까지 생겨 누워 지내야만 했다. 김유정을 돕기 위해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던 김문집(평론가 1907~?)은 병고작가 원조운동을 벌여 모금한 돈을 조금씩 전하곤 했다. 그해 가을, 절친했던 이상이 부인과 함께 그가 머무르던 암자에 찾아온다.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 위해 작별 인사를 전하러 온 것이다. 김유정은 누구보다 가까웠던 문우가 떠난다는 사실과 꼼짝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낙담했다.
그는 또 한 번의 사랑을 앓는다. <여성> 5월호에 '어떠한 남편, 어떠한 부인을 맞이할까'라는 제목으로 한 여성의 글이 그의 글과 나란히 실린다. 그 글을 읽은 김유정은 그녀에게 절절한 연서를 보낸다. 그의 편지는 오빠인 박용철(시인 1904~ 1938)에 의해 겉봉투가 찢긴 채로 그녀에게 전해졌고, 답장은 한 번도 받을 수 없었다. 김유정이 보낸 30통의 편지 끝에 돌아온 것은 잡지에 실린 그녀의 약혼 소식이었다. 남편은 구인회 문우였던 김환태(문학평론가 1909~1944)였다.
충격으로 병세가 악화된 김유정은 그해 겨울 정릉 암자를 떠나 형수 택으로 옮긴다.「심청」,「봄과 따라지」,「가을」,「동백꽃」 등 열두 편의 작품이 이 해에 발표된다.
8. 영원한 청년작가
한평생의 햇빛과 굳게 작별하다
1937년 2월 김유정은 조카의 부축을 받아 경기도 광주군(하남) 다섯째 누이의 과수원 토방으로 거처를 옮기고, 창문을 검은 천으로 가린 적막한 어둠 속에서 병마와 처절한 싸움을 벌인다. 이 무렵 「따라지」, 「땡별」, 「연기」가 발표된다. 병이 깊어지던 어느날, 친구 안회남에게 '병마와 최후의 담판'을 벌이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며 편지를 띄운다. 번역거리를 찾아 보내주면 그 돈으로 '닭 30마리, 살모사 구렁이100여 마리'를 먹고 다시 살아나겠다는 희망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열하루 뒤, 1937년 3월 29일, 봄날 오전 6시 30분
김유정은 한평생의 햇빛과 굳게 작별한다.
고향 실레마을에는 향긋하고 알싸한 동백꽃이 노랗게 퍼드러지고 있었다.
스물아홉 고단한 삶은 뼛가루가 되어 한강에 뿌려졌다.
"나는 비로소 나를 위하여 따로이 한 길이 앞에 놓여있음을 알았다. 그 길이 얼마나 멀른지 나는 그걸 모른다. 다만 한 가지 내가 그 길을 완전히 걷고 날 그날까지 나의 몸과 생명이 결코 꺾임이 없을 것을 굳게 믿는다."
유정의 외로웠던 삶의 길 '유정고도(裕貞孤道)'는 이제 그 고단한 걸음을 멈추었지만, '영원한 청년작가' 김유정은 지금도 점순이, 덕돌이, 덕만이, 춘호, 뭉태, 계숙이... 들과 함께 실레마을 김유정문학촌에 머물고 있다.
□ 김유정의 사람들
<김유정의 사람들> 은 김유정의 삶의 궤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들을 한 자리에 모은 회화 작품이다. 이 작업을 위해 초상화의 거장, 신대엽 화가가 나섰다. 신대엽 화가는 동양화 기법을 이용해 가로 2.4m, 세로 2m에 달하는 집단 초상화 <김유정의 사람들> 을 완성했다.
이 작품에서는 앞서 말한 안회남, 이상, 박태원, 정지용, 김기림 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이 작품에 등장하는 물건들은 모두 김유정의 소설에 등장하거나 당시 시대상과 연관되어 있는 소품들로, 작품을 감상하는 또 하나의 묘미라 할 수 있다.
□ 김유정과 구인회
구인회는 1933년 결성된 문단작가 모임이다.
시인 김기림, 정지용, 소설가 이효석, 이태준, 이무영, 이종명, 김유영, 극작가 유치진, 조용만이 결성하였다. 얼마후 소설가 이종명, 김유영, 이효석이 탈퇴하고 소설가 박태원, 시인 이상, 박팔양이 가입하였으며, 다시 극작가 유치진, 조용만 대신에 소설가 김유정, 평론가 김환태로 교체되있다. 회원 교체가 여러번 있었지만 항상 9명의 회원을 유지하였다.
1930년대 경향문학이 쇠퇴하고 문단의 주류가 된 이들은 순수문학,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가 된다. 리얼리즘에 반발하고 예술성을 추구하는 순수문학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여 당시 가장 유력한 순수문학 단체로 활동하였다. 이상과 박태원이 중심이되어 <시와 소설>이라는 동인지를 펴냈다. 4년 만에 해체 되었으나 소속 작가들의 작품은 한국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김유정은 1935년 27세의 나이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소낙비가 당선되었으며, 이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이상'을 만나 깊은 친분을 이어간다. 또한 같은 해 6월 3일 조선문단사가 주최한 문예좌담회에 안회남, 이석훈, 김환태, 정지용 등과 함께 참석한다.
1937년 세상을 떠난 직후에는 강노향, 박태원, 채만식, 이석훈 등 문단의 많은 문인들이 김유정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추모글을 잇달아 발표하였다.
첫댓글 선생님의 기록이 또하나의 역사가 되겠죠?
늘 감사합니다.
훌륭하십니다. 😀
집에서 공부할 수 있어 좋습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