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시편 94편 1-3절 17-19절
설교제목 : 폐허 속의 위로
위로의 벽화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오늘은 교회력으로 오랜 성령강림절 마무리하는 주일입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 시작입니다. 새로운 변화의 시간을 위한 마무리 발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 여전히 해결해야 하고, 부족한 것 투성이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잘 갈무리했으면 좋겠습니다.
새 봄을 기다리던 우크라이나 전쟁은 혹독한 추위와 싸우며 지나가야만 하는 시간이 도래했습니다. 폐허 속에 삶의 터를 잃고 가족을 잃은 이들이 견디어야 하는 대가는 너무나 잔인한 것 같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지난주 한 뉴스 기사를 통하여 파괴의 현장에서 위로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얼굴 없는 화가로 알려진 뱅크시는 폐허가 된 도시 한복판에 그림 몇 점을 그렸습니다. 뱅크시는 전쟁과 난민, 불평등, 비인간성, 자본주의, 권위주의, 기후 온난화 같은 사회적 주제를 주로 다루며 비판적 메시지를 전하는 화가입니다.
그는 폐허가 된 돌 위에서 물구나무서는 그림과 파괴된 철근을 이용하여 시소를 타는 아이들을 그렸습니다. 폐허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살아낼 수 있다는 위로의 메시지가 담긴 그림입니다. 그 그림들이 사람들에게 절망 속에서 다시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위로를 주고 있습니다. 오늘 사회적 불안 요인과 불확실한 경제 상황으로 삶을 낙관하기에 어려움이 있지만, 폐허를 딛고 물구나무서는 아이처럼 딛고 일어서 춤출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우리 모두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빛으로 오시는 하나님
오늘 시편 94편은 하나님께서 악한 자를 보복하시고, 세상의 정의를 세우시길 간청하는 기도입니다. 많은 시편들이 하나님이 재판장으로 오시어, 당신의 정의로움을 세우시길 기도하는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아마도 악한 자들이 득세하고, 세상에 불의함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억울하고 괴롭고, 삶을 허덕이게 하는 일들의 연속이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복수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인간과 집단은 그 행위대로 하나님 앞에 서서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가 한결같이 명명한 신의 징벌의 법칙입니다. 이는 심리적으로 객체정신은 절대적 객관적 기준인 무의식의 절대지로 균형을 잡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의식의 일방성에 경도되면 전체정신은 의식을 바로 잡기 위해 보상적으로 작용하고, 파괴적으로 작용하기 시작하면 신체적 질병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좋지 않는 식습관임에 불구하고 그것을 계속 따라가게 되면, 그는 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경도된 의식과 행위는 더 많은 위험을 초개할 수 있는 근간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살아가면 우리에게 필요한 인식은 나의 행위가 절대적 기준 앞에 판가름도고, 심판받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복수하시는 하나님이 빛으로 나타나시길 기도합니다(1). 어둠 속에 있는 실체를 분명히 드러내어 신성한 의식으로 조명되길 원하고 있습니다. 거짓이 참으로 둔갑하고, 불의가 정의로 포장되고, 어둠이 빛으로 가장하고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의식은 그 실체를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자아의식은 제한된 인식과 일방성이라는 한계 안에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자아의식은 보고 싶은 것을 보고자 하고, 기대하는 것을 보고, 바라는 것을 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관점이 옳다고 생각하는 경직된 꼰대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회 안에서 다른 목소리를 내고 반대하는 의견과 비판을 가하는 언론을 통제한다면, 이는 무지 중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고 최악의 어둠을 드리우는 행태입니다. 이것은 권력 집단 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도 일어나는 요소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최근에 이부영 선생님께서 쓰신 산문집, 《길-1》이 출간되었습니다. 저에게 보내주신 책을 들고 책장을 넘기던 중 “그림자와 함께 가는 길”에 대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융은 1948년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연구소를 설립하고자 여러 제자들과 운용할 평의회를 구성하고자 했습니다. 한 여성이 거론되었는데, 제자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질도 떨어지고, 대인관계도 편안치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모두 그녀를 반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융은 “좋아하는 사람끼리만 있으면 너무나 좋은 나머지 곱게 잠들어버리지. 그러니 자네들이 잠들지 않으려면 그림자와 함께 있어야 하네”라고 했습니다. 그러곤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를 평의원에 포함시켰습니다. 이후로 그녀는 말썽을 일으킨 적이 없었고, 오히려 융 심리학을 소개하는 일에 몰두했고, 연구소에 환자 그림 아키브를 만드는데 공헌을 하고, 그림 해석에서 일가를 이루었습니다.[이부영(2022) : 《길-1》, 집문당, p213-215]
그러나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받아들이기란 여간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보려고 해도, 자신의 뒷면을 볼 수 없는 법입니다. 의식은 결코 입체적 시각을 열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신의 조명, 하나님의 빛으로 우리의 어둠과 무지가 밝혀져야 합니다. 저는 모든 꿈이 하나님의 조명이며, 의식의 어둠 속에 반영된 신의 빛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내가 보는 나가 아니라, 꿈이 비추는 나를 봄으로써 나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오늘 우리 사회와 우리 자신에 하나님의 빛이 나타나길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사회의 어둠과 무지, 나 자신의 어둠과 무지가 조명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꾸지람을 듣는 자
시인은 오만한 자들, 악한 자들이 저지르는 행태를 고발하며 기도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런 인간의 교만과 악함이 사람의 속생각의 허무함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선언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속생각이 허무함을 아신다(11).”
여기에서 ‘허무함’, 또는 ‘헛됨’은 히브리어 ‘하벨(הבל)’로 ‘호흡’, ‘연약함’이란 뜻을 지닙니다. 허무함은 한 낫 호흡처럼 연약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생각을 마치 절대적인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헛된 망상입니까!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연약하고 제한된 헛된 생각, 그 마음을 아시고, 꾸짖으시고 인생을 친히 가르십니다. 그런데 이런 주님의 훈계와 교훈을 받은 사람은 복이 많은 자라고 노래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꾸짖으시고 주님의 법으로 친히 가르치시는 사람은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재난의 날에 벗어나게 하시고 악인들을 묻을 무덤을 팔 때까지는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12-13).”
하나님께서 나를 꾸짖고 벌하심으로 친히 가르침을 얻는 자는 복된 자입니다. 이런 자에게 궁극적 심판의 날을 벗어나게 하시고 도리어 마음의 평안을 얻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교훈하시는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을 삶을 고칠 수 있고, 보다 건강해질 수 있고, 성숙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인생은 마냥 좋은 일만 있을 수 없고, 늘 내가 옳은 선택과 좋은 길만 갈 수 없습니다. 실수하고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만해지고, 악한 일에 연류될 수 있습니다. 헛된 길로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를 꾸짖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다시 온전한 길로 가라 하실 때, 듣고 삶을 선회할 수 있는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릴 것입니다.
위로자
오늘 시편에서 가장 저의 가슴을 두드리는 구절은 18절과 19절입니다.
“주님, 내가 미끄러진다고 생각할 때에는, 주님의 사랑이 나를 붙듭니다. 내 마음이 번거울 때에는, 주님의 위로가 나를 달래줍니다”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는 갑자기 당한 곤경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고난의 상황이 가중되는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빠진, 거의 무덤 앞에 이른 듯한 상황”이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생각할 때에 주님의 사랑이 나를 붙들어주심을 확신하며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헤세드’로 하나님과 그 백성이 맺은 언약에 의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에 대한 약속으로 붙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번거로운 것은 내 속에 복잡한 생각들, 염려, 근심, 불안이 엄습해오기 때문입니다. 그 때 주님의 위로가 나를 잠잠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위로는 “하나님 혹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공급되는 위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이 번잡하고 혼란스러울 때 우리에게 위로를 건네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 위안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불확실하고 불안한 세상에서 든든히 살아갈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자는 내 곁에 있는 이들에게 위로를 건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림 몇 점이 폐허 속에 절망하는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듯, 우리의 삶의 일상에서 이런 위로를 건네는 우리의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