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user.chollian.net/~hsg3104/역사왜곡1.htm
1. 개설
A.D 660년에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가 멸망하자 백제의 후국(侯國)이던 대화왜(大和倭)는 백제를 구하기 위하여 백제복국군(百濟復國軍)을 출동시켰으나, A.D 662년에 백촌강(白村江) 전투에서 백제복국군이 패배하고 마지막 보루인 주유성(州柔城)마저 항복하자 백제유민들은 정든 고향을 떠나 백제의 후국(侯國)이 있던 일본열도로 건너갔다.
「주유(州柔)가 항복하였다. 일을 어떻게 할 수 없다. 백제(百濟)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을 어찌 또 갈 수가 있겠는가..중략..처자들에 가르쳐 나라를 떠나갈 것을 알렸다.」日本書紀 天智天皇紀 2年條
일본열도로 건너간 백제유민들은 나라 이름을 일본(日本)으로 바꾸고 A.D 712년에 고사기(古事記)를, A.D 720년에 일본서기(日本書紀)를 각 지으면서 일본국의 역사를 미화하고, 신라에 대한 패배감을 극복하기 위하여 한반도와 관련된 부분을 많이 왜곡하였다. 일본서기를 읽어보면 내용이 조잡(粗雜)하여 도저히 학자가 적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아주 치졸(稚拙)한 문장이 중간 중간에 많이 나온다. 일본서기 내용 중 아주 치졸(稚拙)한 문장의 대표적인 예가 신공황후가 물고기를 타고 신라로 가서 신라왕의 항복을 받으니 옆에서 보고 있던 백제왕과 고구려왕도 따라서 항복함으로써 삼한(三韓)이 일본의 관가(官家)가 되었다는 부분이다. 이처럼 황당(荒唐)하고 치졸(稚拙)한 내용은 주로 한반도(韓半島)와 관련된 부분에서 많이 나온다. 그 외 일본인들은 일본의 역사왜곡에 방해가 되는 물품도 훼손하여 일본의 역사왜곡을 감추었는데, 그 대표적 예가 칠지도 명문(銘文) 훼손이다.
2. 칠지도 명문 왜곡
일본의 나라현(奈良縣)에 있는 석상신궁(石上神宮)에는 백제왕이 왜왕에게 보낸 칠지도(七支刀)가 보관되어 있는데, 그 명문(銘文) 중 일부가 예리한 도구에 의하여 글자가 손상되어 있다. 이는 칠지도가 일본의 역사 왜곡에 방해가 되자 일본인들이 칠지도를 훼손하여 일본의 역사왜곡을 감춘 것이다. 일본인들이 신궁(神宮)에 보관되어 있는 귀중한 칠지도를 왜 훼손하였는지 알기 위하여 칠지도에 적혀 있는 명문을 살펴본다.
「태화 4년(A.D 230년) 5월 16일 정오에 여러번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여러 병란을 물리칠 수 있으므로, 마땅히 후왕들에게 줌이 마땅하다. 이전에는 이런 칼이 없었는데, (온조)백제왕에게 (칠지도 모양과 유사한) 진기한 칼이⇒생겼기에, 성음(구태백제왕)께서 (그것을 보시고) 왜왕을 위하여 (칠지도를) 만들었으니 그 뜻을 후세까지 알려라.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鐵七支刀( )벽百兵宜( )供侯王( )( )( )( )作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 )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안의 글자는 후에 학자들이 보충한 것이다.
칠지도에 관한 내용이 일본서기 신공황후기 52년조에 나온다.
「신공황후 52년(일본서기년도 A.D 252년 실제년도 A.D 230년) 秋 9월 丁卯朔丙子(10일) 구저(久저) 등이 천웅장언(千熊長彦)을 따라왔다. 칠지도(七支刀) 1구, 칠자경(七子鏡) 1면 등 각종의 중보(重寶)를 바쳤다. 이어 말하여 "신의 나라의 서쪽에 강이 있습니다. 수원은 곡나(谷那)의 철산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 먼 곳은 7일을 가도 이르지 못합니다. 그 물을 마시고 그 산에서 제철(製鐵)하여 길이 성조(聖朝)에 바치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손자인 침류왕에게 일러 "지금 내가 통하고 있는 귀국(貴國)은 하늘이 열어주신 바이다. 이로써 천은(天恩)을 내리시고, 해서(海西)를 떼어서 나에게 주셨다. 이 때문에 국기가 영원히 단단하다. 너도 마땅히 화호(和好)를 거두고, 토산물을 모아서 봉헌(奉獻)하기를 끊이지 않는다면 죽어도 한이 없다"라고 말하였다. 이후 매년 계속하여 조공(朝貢)하였다.」☞손자 침류왕에게 일러 이전에 적혀 있는 문구는 일부 왜곡한 것이고, 그 이후에 적혀 있는 문구는 후에 가필한 것이다.
앞에 나온 칠지도 문구를 나누어 살펴본다.
泰( ) 四年
백제왕이 신공황후에게 칠지도(七支刀)를 준 시기에 대하여 일본서기에는 신공황후 52년으로 적혀 있고, 칠지도에는 泰( )四年으로 적혀 있다. 구태백제가 건국된 A.D 205년에서 야마대연맹이 붕괴된 A.D 247년 사이에 중국의 연호 중에서 泰( ) 四年으로 볼 수 있는 연도는 위(魏)의 太和 四年(A.D 230년) 뿐이다. 따라서 泰( )는 위나라의 연호이고, 구태백제왕이 신공황후에게 칠지도를 준 연도는 위(魏)나라의 太和 四年이다.☞ 太와 泰는 같이 쓰인다. 위구태(尉九台)는 공손강(公孫康)의 지원을 받아 구태백제를 세운 후 공손씨(公孫氏)가 사용한 후한(後漢)과 위(魏)나라의 연호(年號)를 사용하였다. 일부 사학자들은 칠지도에 적혀 있는 "泰和四年"을 동진(東晋)의 "太和 四年(A.D 369년)"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분들이 주장하는 근거는 신공황후기 55년조에 초고왕(肖古王)이 사망하였다고 적혀 있고, 56년조에 구수왕(仇首王)이 즉위하였다고 적혀 있는데, 이 내용은 실제로는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에 관한 사실이므로, 52년조에 나오는 초고왕(肖古王)도 근초고왕(近肖古王)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일본서기의 왜곡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착각이다.
( )月十六日丙午正陽
학자들은 ( )월을 5월로 판독하고 있다. 이는 한나라, 삼국시대, 진나라 때 주조한 검 등의 명문(銘文)에 五月丙午라는 문구가 상용(常用)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양(正陽)은 한낮을 가리킨다.
造百鍊鐵七支刀
위 百은 100이라는 뜻보다 모든, 아주 많은, 여러 개라는 뜻이다. 위 문구는 「여러 번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 )벽百兵
위 병(兵)은 병란(兵亂)의 해독(害毒)을 뜻한다. 위 문구는 칠지도가 「모든 병란의 해독(害毒)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이다.
宜( )供侯王( )( )( )( )作
위 의(宜)를 동사로 보아 「∼함이 마땅하다」는 뜻으로 풀이되고, 공(供)은「주다」는 뜻이 있고, 후왕(侯王)은 칼(刀)이나 거울(鏡)의 명문(銘文)에서 주로 고위관리나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사용되었다.
先世以來未有此刀
「전에는 이런 칼이 없었다」는 뜻이다.
百濟王世( )奇生
위 백제왕은 곡나(谷那)에 철광산을 가지고 있던 온조백제왕이고, 세(世)는 당시 온조백제왕 치세(治世)를 뜻하며, 기(奇)는 진기하다는 뜻이고, 생(生)은 생겼다는 뜻이다. 앞에 나온 문구는 「온조백제왕에게 칠지도 모양과 유사한 진기한 칼이 생겼다」는 뜻이다.
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위 성음(聖音)의 성(聖)은 극존칭(極尊稱)을 나타내는 글자이고, 음(音)도 고대에 높힘에 사용된 글자이므로, 성음(聖音)은 아주 높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성음(聖音)은 구태백제왕을 가리킨 말이다. 또 고위왜왕(故爲倭王)은「왜왕을 위하여」라는 뜻이고, 지조(旨造)는「칠지도를 만들었다는 뜻」이며, 전시후세(傳示後世)는「후세까지 알려라」는 뜻이다. 위 문구는 구태백제왕이 왜왕을 위하여 칠지도를 만들었다는 뜻을 후세까지 알려라는 뜻이다. 앞에 나온 칠지도(七支刀) 문구는 성음(聖音)이 후왕(侯王)인 왜왕(倭王)에게 보내는 문구이다. 일본서기 신공황후기(神功皇后紀)에 의하면 백제로부터 칠지도를 받은 왜왕(倭王)은 신공황후이므로, 신공황후는 백제의 후왕(侯王)이었다. 또 신공황후 재위 시는 야마대연맹(邪馬臺聯盟) 시기이므로, 야마대연맹은 구태백제의 후국(侯國)이었다.
일본서기 흠명천황기에도 임나의 왜(倭)가 백제 초고왕(肖古王), 구수왕(仇首王) 때에 백제를 부형(父兄)의 나라 즉 종주국(宗主國)으로 섬겼다고 적혀 있다. 당시 대마도는 야마대연맹에 속해 있었으므로, 이는 야마대연맹이 백제를 종주국으로 섬겼다는 뜻이다. 즉 야마대연맹은 백제의 후국(侯國)이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칠지도는 제작년도 등이 지워져 있다. 일본인들이 신궁(神宮)에 보관되어 있는 귀중한 물품인 칠지도를 훼손(毁損)한 것은 일본서기 왜곡과 관계가 있다.
일본서기 왜곡과 칠지도 훼손과의 관계를 살펴본다. 백제 유민 안만려(安萬侶)가 일본서기를 만들 때 가장 중점을 두어 왜곡한 부분은 일본열도왜와 백제와의 관계였다. 일본서기 저자는 일본국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하여 일본열도왜가 멸망한 백제의 후국(侯國)으로 있었는 사실을 감추고 거꾸로 일본열도왜가 백제의 종주국으로 있었는 것처럼 일본서기를 왜곡하였다. 일본서기 저자가 그 다음으로 중점을 두어 왜곡한 부분은 일본열도왜와 신라와의 관계였다. 일본서기를 만들 당시 일본국의 지배세력은 백제유민들이었고, 이들은 신라에 대한 패배감과 반감이 아주 강하였다. 그 때문에 일본서기 저자는 일본열도왜가 신라를 정벌한 듯이 일본서기를 왜곡하여 마음으로나마 백제유민들의 한(恨)을 풀고 패배감을 극복하려 하였다. 일본서기 중 왜곡이 가장 심한 신공황후기를 보면 섭정전년도조에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벌하고 이웃에 있던 고구려왕과 백제왕으로부터도 복속을 맹세 받은 듯이 적혀 있다. 이러한 내용은 같은 안만려(安萬侶)가 일본서기를 짓기 8년 전에 지은 고사기(古事記)나 그 후 김부식님이 지은 삼국사기에도 전혀 나오지 않는 내용이므로 왜곡임이 분명하다. 위와 같이 신공황후기를 왜곡해 놓고 그 뒤 흠명천황기(欽明天皇紀)를 적는 과정에서 구주왜(九州倭) 사료를 보니 임나(任那:대마도)의 왜가 백제 초고왕(A.D 167-214년), 구수왕(A.D 214-234년) 때 백제를 부형(父兄)의 나라 즉 종주국으로 섬겼다고 적혀 있었다.
「흠명천황 2년(A.D 541년) 여름 4월, 아라(安羅)의 차한지(次旱岐), 이탄해(夷呑奚), 대불손(大不孫), 구취유리(久取柔利) 등과 가라(加羅)의 상수위(上首位), 고전해(古殿奚)와 졸마(卒麻)의 한지(旱岐)와 산반해(散半奚)의 한지(旱岐)의 아들과 다라(多羅)의 하한지(下旱岐) 이타(夷他)와, 사이기(斯二岐)의 한지(旱岐)의 아들, 자타(子他)의 한지(旱岐) 등이 임나의 일본부길비신(日本府吉備臣)과 백제에 가서 칙서를 들었다.
백제의 성명왕(聖明王)이 임나의 한지(旱岐)들에게..중략.."옛적에 우리 선조 속고왕(速古王), 귀수왕(貴首王)의 치세 때에 아라(安羅), 가라(加羅), 탁순(卓淳)의 한지(旱岐) 등이 처음 사신을 보내고 상통하여 친밀하게 친교를 맺었다. 자제(子弟)의 나라가 되어 더불어 융성하기를 바랐다..중략..록기탄(록己呑)은 가라(加羅)와 신라의 경계선에 있어 해마다의 침공으로 패배하였다. 임나도 구원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망한 것이다. 남가라(南加羅)는 땅이 협소하여 졸지에 방비할 길이 없고 의탁할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망하였다. 탁순(卓淳)은 상하 둘로 갈라져 있었다. 군주는 스스로 복종하려는 생각이 있어 신라에 내응하였다. 이 때문에 망한 것이다". 후략」
「흠명천황 2년 가을 7월 백제는 아라일본부(安羅日本府)가 신라와 더불어 통모한다는 말을 듣고 전부(前部) 나솔(那率) 비리막고(鼻利莫古), 나솔 선문(宣文)..중략..등을 보내어 아라(安羅)에 가서 신라에 온 임나의 집사를 소환하여 임나를 세울 것을 도모하게 하였다. 따로 아라일본부(安羅日本府)의 하내직(河內直)이 신라와 내통한 것을 심하게 꾸짖었다.
왕은 임나에게 "옛적에 우리 선조 속고왕, 귀수왕이 당시의 한지(汗岐) 등과 처음으로 화친을 맺고서 형제가 되었다. 이에 나는 그대를 자제(子弟)로 알고 그대는 나를 부형(父兄)으로 알았다"..중략..성명왕(聖明王)이 또 임나의 일본부(日本府)에게 천황이 조(詔)하여 만일 "임나가 멸망하면 그대는 거점이 없어질 것이다. 만일 임나가 흥하면 그대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지금 임나를 재건하여 옛날과 같게 하여 그대를 도우며 백성을 어루만지고 기르게 하라" 하였다. 후략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에는 일본열도에 야마대연맹이 세워져 있었고, 당시 임나(대마도)는 야마대연맹에 속해 있었다. 따라서 야마대연맹에 속한 임나가 백제를 종주국으로 섬겼다는 것은 임나를 포함한 야마대연맹 전체가 백제를 종주국으로 섬겼다는 것을 뜻한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를 보면, 백제의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는 일본의 신공황후(A.D 173-247년) 재위시기이다. 따라서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에 야마대연맹이 백제를 부형(父兄)의 나라로 섬겼다는 것은,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에 야마대연맹의 여왕인 신공황후가 백제를 부형(父兄)의 나라(종주국)로 섬겼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일본서기를 만드는 안만려에게 매우 당혹스러운 내용이었다. 왜냐하면 안만려는 신공황후기를 지으면서 신공황후가 백제, 신라, 고구려를 복속시켰다고 왜곡해 놓았는데, 뜻밖에도 흠명천황에 관한 구주왜 사료에서 일본이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에 백제를 종주국으로 섬겼다는 내용이 나왔기 때문이다. 만약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에 일본이 백제를 종주국으로 섬겼다는 내용을 부정하기 위하여 구주왜 사료를 전부 없애 버리면, 그러한 내용이 적혀 있는 흠명천황기를 대부분 지워야 한디. 그렇다고 하여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에 일본이 백제를 종주국으로 섬겼다는 구주왜 사료를 지우지 않자니 꼼짝 못하고 신공황후가 백제를 종주국으로 섬겼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되게 되었다. 이처럼 어려운 난제(難題)에 빠지자 일본서기 저자는 꾀를 내어 신공황후가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 인물이 아닌 것처럼 잡아떼기로 하였다. 즉 신공황후가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의 인물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 신공황후가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에 백제를 종주국으로 섬겼다는 구주왜 사료를 부정하기로 하였다. 일본서기 저자는 그 방법으로 신공황후가 백제 초고왕, 구수왕과 접촉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위장하기 위하여 신공황후기에 나오는 백제 관련 기사를 모두 원래 연도대로 순서대로 적지 않고 연도를 바꾸어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 이후 연도에 적어 놓았다. 즉 신공황후가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의 사람이 아닌 것으로 위장하기 위하여 백제 관련 기사를 모두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 이후 연도인 신공황후기 46년조(A.D 246년) 이후에 적어 놓았다. 그러나 이런 어설픈 위장은 곧 문제점이 생겼다. 왜냐하면 백제 관련 기사를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 이후 연도에 적어 놓으면서 그 내용 중에 나오는 백제 초고왕, 구수왕에 관한 문구를 지우지 않아 신공황후가 백제 초고왕, 구수왕과 교류한 사실이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백제 관련 기사를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 이후 연도로 늦추어 적어 놓은 것이 도로아미타불이 되어 버렸다. 앞서의 꾀가 실패하자 일본서기 저자는 또 꾀를 내었다. 일본서기 저자는 신공황후기에 나오는 백제 초고왕, 구수왕은 사실은 신공황후 시기에 재위한 진짜 초고왕, 구수왕이 아니고 그 보다 훨씬 후대(後代)에 재위한 근초고왕(近肖古王)과 근구수왕(近仇首王)이라고 강변(强辯)키로 하였다. 이는 신공황후가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 사람이 아닌 것으로 위장하여 백제 초고왕, 구수왕 시기에 일본이 백제를 종주국으로 섬겼다는 구주왜 사료를 부정하자는의도이다.
[참고:이것도 아주 어설픈 위장이었다. 즉 신공황후가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위장하기 위하여 신공황후를 백제 근초고왕, 근구수왕 재위시기의 사람으로 위장하였기 때문에 A.D 173-247년까지 재위한 신공황후가 갑자기 5세기 중반의 인물로 변하게 되어 일본의 천황체계가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뒤에 나오지만 일본서기 저자는 뒤죽박죽이 된 일본의 천황체계를 수습하기 위하여 신공황후의 즉위시기와 사망시기를 일부 늦추고, 신공황후 뒤에 나오는 응신천황의 재위연도를 실제연도보다 120년 앞당기고, 또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의 재위시기를 120년 앞당기는 괴상한 일을 벌이게 된다. 결과적으로 보면, 일본서기 저자는 신공황후가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의 인물이 아니라고 부정하기 위하여 신공황후를 백제 근초고왕, 근구수왕 재위시기의 인물로 위장했다가 일본의 천황체계가 억망이 되자 그 다음에는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의 재위시기를 신공황후 재위시기로 앞당기는 촌극을 벌였다. 이렇게 되어 신공황후가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에 백제를 부형의 나라로 섬겼다는 구주왜 사료를 부정하지도 못하고 일본 천황 체계만 억망이 되어 버렸다.]
일본서기 저자는 신공황후가 근초고왕(近肖古王)과 근구수왕(近仇首王) 재위시기의 사람이라고 강변(强辯)하는 방법으로 백제가 신공황후에게 칠지도를 준 내용이 적혀 있는 신공황후기 52년조(일본서기년도 A.D 252년 실제년도 A.D 230년) 문구 하단에 "손자 침류왕(枕流王:A.D 384-385년)에게 일러..후략" 문구를 삽입해 놓았다. 이는 신공황후기 52년조에 나오는 초고왕, 구수왕이 진짜 초고왕, 구수왕이 아니고 침류왕의 부 근구수왕과 조부 근초고왕인 것처럼 위장하기 위한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침류왕(枕流王)의 조부(祖父)는 근초고왕(近肖古王:A.D 346-375년)이고 부(父)는 근구수왕(近仇首王:A.D 375년-384년)이다. 즉 근초고왕, 근구수왕, 침류왕은 모두 신공황후 때의 인물이 아니다. 따라서 신공황후기 52년조에 적혀 있는 "손자 침류왕에게 일러..후략" 문구는 신공황후와 전혀 관계가 없는 내용이다. 이는 신공황후가 백제 초고왕, 구수왕 때 인물이 아니고 근초고왕, 근구수왕 때 인물인 것처럼 위장하기 위하여 신공황후기 52년조에 삽입해 놓은 것이다. 일본서기 저자는 위 왜곡을 더욱 보강하기 위하여 근초고왕(近肖古王), 근구수왕(近仇首王), 침류왕(枕流王)의 즉위와 사망사실을 실제년도에서 120년을 앞당겨서 신공황후기 55년조, 56년조, 64년조, 65년조에 각 적어 넣어면서 근초고왕, 근구수왕의 명칭을 초고왕(肖古王), 구수왕(仇首王)으로 적어 놓았다. 이는 신공황후기 신공황후기 46년조 이후에 나오는 초고왕, 구수왕이 진짜 초고왕, 구수왕이 아니고 근초고왕, 근구수왕인 것처럼 보강 왜곡하기 위한 것이다.
「신공황후 55년(A.D 255년) (근)초고왕 사망(A.D 375년)하다.」[참고: 255=375(근초고왕이 사망한 해)-120] 「신공황후 56년(A.D 256년) (근)구수왕 즉위(A.D 375년)하다.」[참고:일본서기는 삼국사기와 달리 먼저 왕이 죽은 다음 해를 다음 왕의 즉위년도로 보았다. 256=376(근초고왕이 사망한 다음해)-120] 「신공황후 64년(A.D 264년) (근)구수왕 사망(A.D 384년)하다.」[참고:264=384(근구수왕이 죽은해)-120] 「신공황후 65년(A.D 265년) 침류왕 사망(A.D 385년)하다. 왕자 아화(阿花)가 나이가 어려 숙부 진사(辰斯)가 빼앗아 왕이 되었다.」[참고:265=385(침류왕이 사망한 해)-120]
위지(魏志)에 의하면 신공황후는 A.D 247년에 죽었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근초고왕, 근구수왕, 침류왕은 신공황후보다 훨씬 후대에 존재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위에 나온 문구는 신공황후와 전혀 관계가 없는 내용이다. 그 후 칠지도(七支刀) 명문(銘文)을 보니 칠지도를 만들어 왜에 보낸 연도가 "泰和四年"으로 적혀 있었다. 신공황후(神功皇后) 재위시기에 "泰和四年"으로 볼 수 있는 연도는 위(魏)의 "太和四年(A.D 230년)" 뿐이다. 만일 백제가 칠지도를 만들어 신공황후에게 보낸 연도가 위(魏)의 "太和四年"인 것이 들통날 경우, 여태까지 신공황후가 백제 초고왕(肖古王), 구수왕(仇首王)과 교류한 사실이 없는 것처럼 일본서기 신공황후기를 왜곡해 놓은 것이 모조리 들통나게 된다. 이러한 난제에 빠지자 일본인들은 백제가 칠지도를 만들어 신공황후에게 보낸 연도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칠지도 명문 중에서 제작년도 등을 지워 버렸다.
3. 일본서기 왜곡
일본열도로 밀려난 백제인들은 신라에 대한 패배감을 극복하기 위하여 일본서기를 왜곡하였다. A.D 670년경에 일본으로 나라 명칭을 변경한 대화왜는 A.D 712년에 백제인 태안만려(太安萬侶)로 하여금 고사기(古事記)를 편찬케 하고, A.D 720년에 역시 안만려(安萬侶)로 하여금 일본서기를 편찬하게 하였다. 이는 백제 유민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가 일본국을 세운 후 신라에 패한 패배감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서기에는 여러 가지 왜곡된 내용이 많이 들어 있는데, 일본서기의 왜곡 부분을 살펴본다.
1). 신대(神代) 왜곡
일본서기 저자는 고기(古記)에 환국(桓國)에 7명의 환인(桓因)이 있었고, 환인이 아들 환웅(桓雄)에게 천부인(天符印)을 주어 세상에 내려보냈다는 내용을 본떠서 일본서기 신대(神代)를 만들었다. 신대(神代)의 왜곡 요지를 나누어 살펴본다. -고기(古記)에 나오는 7명의 환인을 모방하여 신대(神代) 상(上)에 나오는 7명의 신(神)을 만들었다. 고기에 나오는 7명의 환인과 일본서기 신대(神代)에 나오는 7명의 신(神)을 대비해 보면 아래와 같다.
古記 日本書紀 1세 안파견환인 국상입존(國常立尊) 2세 혁서환인 국협추존(國狹木追尊) 3세 고시리환인 풍짐순존(豊斟淳尊) 4세 주우양환인 니토자존(니土煮尊) 사토자존(沙土煮尊) 5세 석제임환인 대호지도존(大戶之道尊) 대고변존(大苦邊尊) 6세 구물리환인 면족존(面足尊) 황근존(惶根尊) 7세 지위리환인 이장낙존(伊장諾尊) 이장염존(伊장염尊)
고기에 나오는 7명의 환인은 환국(桓國)의 통치자로 적혀 있으나, 일본서기 신대(神代) 상(上)에 나오는 7신(神)은 하늘나라(高天原)에 존재한 신(神)으로 적혀 있다. 이는 만주에 살던 부여 무리가 아직 일본열도로 이동하기 전이기 때문이다. -하늘나라 신(神)이 일본열도를 만들었다고 왜곡하였다. 즉 신대(神代)의 마지막 신(神) 이장낙존(伊장諾尊)과 이장염존(伊장염尊)이 천부교(天浮橋)에서 천지경모(天之瓊牟)를 휘두르자 그 창날 끝에서 떨어진 소금물 방울이 엉켜서 한 섬을 만들었고, 2신(二神)이 그 섬에 내려와 부부가 된 후 교합하여 담로주(談路洲)를 포(胞)로 하여 대일본(大日本) 풍추진주(豊秋津洲), 이예이명주(伊豫二名洲), 축자주(筑紫洲), 억기주(億岐洲)와 좌도주(佐度洲), 월주(越洲), 대주(大洲), 길비자주(吉備子洲) 등 8주를 낳고, 대마도(對馬島), 일기도(壹岐島) 등 여러 작은 섬들은 바닷물 방울이 엉켜서 이루어 졌으며, 그 다음으로 바다(海), 내(川), 산(山), 나무(木), 풀(草) 등을 낳았다고 왜곡하였다. -이장낙존(伊장諾尊)과 이장염존(伊장염尊) 2신이 일본열도를 관할하는 신(神)을 만들었다고 왜곡하였다. 신(神)을 만든 순서를 보면 먼저 일신(日神)을 낳아 하늘로 올려 보내고, 다음 월신(月神)을 낳아 역시 하늘로 올려 보내고, 그 다음으로 질아(蛭兒)를 낳았으나 3년이 지나도 서지 못하므로 바람에 띄워 버리고, 그 다음으로 소잔명존(素잔鳴尊)을 낳았더니 너무 잔인하여 국내의 사람들을 많이 죽게 하므로 부모 2신이 소잔명존을 근국(根國)으로 축출하였다고 왜곡하였다. 이는 송화강(松花江) 유역에 살던 섬야노(陝野奴) 무리가 몰래 구주로 이주하여 천왕(天王)을 칭하였다는 고기(古記) 내용을 보고 섬야노(陜野奴)를 일본국의 국조신(國祖神)으로 왜곡한 것이다. -일본서기에는 이때 소잔명존이 고천원(高天原)에서 추방되어 근국(根國)인 신라로 가기 전에 천조대신(天照大神)을 찾아가 용서를 빌자 천조대신(天照大神)이 소잔명존을 용서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칼과 소잔명존의 곡옥(曲玉)을 서로 교환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는 구주로 몰래 이주하여 천왕(天王)이라 칭한 소잔명존이 왕검조선의 단제를 찾아가 용서를 빌은 사실을 신화(神話)로 꾸민 것이다. -소잔명존이 아들 오십맹신(五十猛神)을 데리고 근국인 신라국 소시모리(曾尸茂梨)로 갔다가 그 곳에서 흙배를 만들어 타고 출운국의 파천(파川) 상류에 하강하여 그 곳에 있던 나쁜 뱀을 죽이고 초치검(草치劍)을 얻고 혼인하여 아들 대기귀신(大己貴神)을 낳았다고 적혀 있다. 이는 九州에서 쫓겨난 소잔명존이 마한(馬汗) 관경에 속하지 아니한 本州의 출운(出雲) 지방으로 이주한 사실을 신화(神話)로 꾸민 것이다. -그 후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아들과 황조(皇祖) 고황산령존(高皇産靈尊)의 딸이 혼인하여 천진언언화경경저존(天津彦彦火瓊瓊杵尊)을 낳자 고황산령존이 황손(皇孫)을 귀여워하여 그를 위원중국(葦原中國)의 임금으로 보내려고 하였으나 그 곳에는 나쁜 귀신들이 많으므로, 이를 평정하기 위하여 천수일명(天穗日命)과 대배반삼웅지대인(大背飯三熊之大人)을 보냈으나, 천수일명 등이 대기귀신(大己貴神)에게 아첨하여 보고하지 않으므로, 고황산령존이 다시 무옹퇴신(武甕槌神)과 경진주신(經津主神)을 보내어 대기귀신으로부터 복속을 맹세 받은 후 황손 천진언언화경경저존(天津彦彦火瓊瓊杵尊)에게 팔판경(八坂瓊)의 곡옥(曲玉)과 팔지경(八咫鏡), 초치검(草치劍) 3종의 보물을 주어 세상으로 내려보냈다고 적혀 있다. 이는 우리의 고기(古記)에 환인이 환웅에게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 세상으로 내려보냈다고 적혀 있는 것을 모방하여 천손하강(天孫下降)을 신화(神話)로 꾸민 것이다. -이때 지상으로 내려온 황손(皇孫)은 혼인하여 4 아들을 낳았는데, 그 셋째가 언화화출견존(彦火火出見尊)이고, 언화화출견존은 다시 아들 언파렴무노초즙불합존(彦波렴武노草葺不合尊)을 낳았고, 언파렴무노초즙불합존은 다시 언오뢰명(彦五瀨命), 도반명(稻飯命), 삼모입야명(三毛入野命)과 협야존(狹野尊) 등 4 아들을 낳고 서주궁(西州宮)에서 죽었다고 적혀 있다. 이는 신무천황의 가공(架空) 세계(世系)를 만든 것이다. 일본서기 신대(神代)의 왜곡을 정리하면, 神代 上은 고기(古記)에서 7환인을 모방하여 가공(架空)의 7神을 만들었고, 神代 下는 고기에서 환인이 아들 환웅에게 천부인(天符印)과 무리 3,000을 주어 세상으로 내려보냈다는 것을 모방하여, 고황산령존이 황손 천진언언화경경저존(天津彦彦火瓊瓊杵尊)에게 팔판경(八坂瓊)의 곡옥(曲玉), 팔척지경(八尺只鏡), 초치검(草치劍) 등 3종의 보물을 주어 세상으로 내려보낸 것처럼 왜곡하였다.
2). 건국년도(建國年度) 왜곡
일본서기에는 B.C 660년에 일본국이 건국된 것처럼 적혀 있다. 숭신천황기(崇神天皇紀) 10년조를 보면 신무천황(神武天皇)이 조작되었다는 설이 있다고 적혀 있고 숭신천황 때부터 나라가 시작되었다고 적혀 있다. 따라서 가사 일본국이 숭신(崇神) 및 수인(垂仁)이 다스린 변한계 소국과 그 뒤 야마대연맹, 응신조, 인현조 등을 전부 승계하였다고 가정하더라도 일본국이 시작된 시기는 숭신천황(崇神天皇)이 즉위한 B.C 97년 이전이 될 수 없다.
3). 시조(始祖) 왜곡
1세 신무천황(神武天皇)
일본서기 신무천황기(神武天皇紀)에는 신무천황이 B.C 660년에 일본국을 건국하였다고 적혀 있다. 일본서기 중 신공황후(神功皇后)까지의 역사는 주로 변한계(弁韓系) 이주민들의 역사를 적은 것인데, 변한계가 일본열도로 이주한 시기는 B.C 194년 이후이며, 변한계의 나라가 시작된 시기는 숭신천황(崇神天皇) 때이므로, 신무천황이 B.C 660년에 일본국을 건국하였다는 것은 사서를 왜곡한 것이다. 일본서기 저자가 무엇을 근거로 하여 일본국의 가짜 시조를 만들었는지 살펴본다.
「매륵단제(買勒檀帝) 갑인 38년(B.C 667년)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裵반命)을 보내어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다. 12월에 삼도(三島)가 모두 평정되었다.」桓檀古記 檀君世紀
위에 나온 B.C 667년은 일본서기에 신무천황이 등장하는 해이고, 일본서기에는 신무천황의 이름이 협야존(狹野尊)으로 적혀 있다. 이는 단군세기에 나오는 협야후(陜野侯)와 이름이 같다. 단군세기와 일본서기를 대비하면 일본서기에 나오는 협야존(狹野尊)은 단군세기에 나오는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裵반命)이다. 이를 보면 일본서기 저자는 일본서기를 만들기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의 고기(古記)에 협야후가 삼도를 평정하였다는 내용이 나오자 이 자료를 이용하여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裵반命)을 일본국의 가짜 건국시조로 만들었다. 고기(古記)에는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裵반命)이 삼도(三島)를 평정하였다고만 적혀 있지 새로운 국가를 세웠다는 내용은 전혀 없다. 즉 협야후 배반명은 왕검조선의 매륵단제(買勒檀帝) 명을 받아 삼도(三島)를 혼란스럽게 하는 무리들을 평정하였을 뿐이지 구주에 독립왕조를 세우지 않았다.
4). 가공천황(架空天皇)을 만들어 넣어 왜곡
2세 수정천황(綏靖天皇) B.C 582년 즉위 3세 안녕천황(安寧天皇) B.C 549년 즉위 4세 의덕천황(懿德天皇) B.C 510년 즉위 5세 효소천황(孝昭天皇) B.C 475년 즉위 6세 효안천황(孝安天皇) B.C 392년 즉위 7세 효령천황(孝靈天皇) B.C 290년 즉위 8세 효원천황(孝元天皇) B.C 214년 즉위 9세 개화천황(開化天皇) B.C 151년 즉위
앞에 나온 천황이 가공천황(架空天皇)이라는 것은 천황의 명칭에서도 알 수 있다. 즉 중국황제의 시호에 효(孝)자를 사용한 시기는 한(漢)나라 때인데, 효소천황은 전한(前漢)의 8세 황제 효소제(孝昭帝)와 시호가 같고, 효원천황은 전한(前漢)의 10세 황제 효원제(孝元帝)와 시호가 같다. 이는 일본서기 저자가 전한황제의 시호를 일본천황의 시호로 일부 도용(盜用)하였기 때문이다. 앞에 나온 2-9세 천황들의 본기 내용에는 세자책봉, 천황의 즉위와 사망 사실만 적혀 있고 역사적 사실 기재가 전혀 없다. 이는 위 천황들이 가공천황이기 때문이다.
5). 구주의 1개 소국 왕을 천황으로 왜곡
10세 숭신천황(崇神天皇) B.C 97년 즉위 11세 수인천황(垂仁天皇) B.C 29년 즉위
일본서기에는 숭신(崇神)과 수인(垂仁)에게 천황(天皇)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지만 환단고기를 보면 숭신(崇神)이나 수인(垂仁)이 재위한 시기에는 일본열도에 아직 소국연맹(小國聯盟)이 만들어지지 않아 일본열도는 촌락국가 형태의 수많은 소국(小國)들로 분립되어 있었다. 따라서 숭신(崇神)이나 수인(垂仁)은 구주에 있던 1개 소국(小國)의 왕에 불과하였다.
6). 경행천황, 성무천황, 중애천황의 재위시기 왜곡
12세 경행천황(景行天皇) A.D 71년 즉위
경행천황기(景行天皇紀)에는 경행천황이 A.D 71년에 즉위하여 60년을 재위하고 A.D 130년에 사망한 것으로 적혀 있고, 2, 3, 4, 12, 13, 18, 19, 20, 25, 27, 28, 40, 51, 52, 53, 54, 55, 56, 57, 58, 60년조가 적혀 있다. 이 중 29년부터 50년까지 사이의 약 20여 년 공백기는 경행천황(景行天皇)의 재위기간을 약 20여 년 늘리면서 생긴 공백이다. 따라서 경행천황(景行天皇)의 실제 재위기간은 60년에서 약 20년을 뺀 약 40년이므로, 경행천황은 실제로는 A.D 71년부터 A.D 110년경까지 약 40년간 재위하였다. 경행천황의 사망년도를 A.D 110년경으로 보면, 경행천황 다음 천황인 성무천황(成務天皇)의 실제 즉위년도가 A.D 155년경이므로, 경행천황이 실제 사망한 때로부터 성무천황이 실제 즉위한 때까지 약 40여 년간의 천황공백기가 생긴다. 경행천황 다음 천황인 성무천황(成武天皇)이 일본무존(日本武尊)의 아들인 중애천황(仲哀天皇)을 태자로 삼았고, 중애천황기(仲哀天皇紀)를 보면 중애천황이 일본무존을 부왕(父王)이라 부르고 있으므로, 경행천황에서 성무천황 사이 약 40여 년간의 천황공백기는 일본무존계(日本武尊系)가 통치한 시기이다. 일본서기 저자는 경행천황과 성무천황 사이에 존재한 약 40여 년간의 천황공백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성무천황을 경행천황 바로 다음 천황으로 적고, 경행천황의 사망시기를 실제보다 약 20년 늦추는 동시에 성무천황의 즉위시기를 실제보다 약 20여 년 앞당겼다.
일본무존 통치시기 은폐
A.D 110년경에 경행천황이 죽은 후 그 뒤 성무천황이 즉위할 때까지 약 40여 년간 일본무존이 통치한 시기가 있었다. 일본서기 저자는 천황의 연속성을 가장하기 위하여 A.D 110년경에 죽은 경행천황 대신에 일본무존이 죽었다고 적고, 경행천황의 재위시기를 40여 년 늘려 놓았다.
13세 성무천황(成務天皇) 일본서기년도 A.D 131년 실제년도 A.D 155년경 즉위
성무천황기(成務天皇紀)에는 성무천황이 A.D 131년부터 A.D 190년까지 60년간 재위하였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성무천황(成務天皇)이 실제 재위한 시기는 A.D 155년경부터 A.D 161년경까지이므로, 성무천황기에 적혀 있는 성무천황의 재위기간은 실제보다 앞쪽으로 20여 년, 뒤쪽으로 29년 합계 50여 년이 더 많게 적혀 있다. 성무천황의 즉위년도가 실제보다 20여 년 빨라져 있는 것은 경행천황과 성무천황 사이에 존재한 일본무존계(日本武尊系)의 40여 년 통치기간을 감추기 위하여 40여 년 중 20년은 경행천황의 재위기간에, 20여 년은 성무천황의 재위기간에 각 넣어 성무천황이 경행천황 바로 다음 천황인 것처럼 왜곡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무천황의 사망년도가 실제보다 29년 늦어져 있는 것은 신공황후의 사망시기를 늦게하기 위하여 신공황후 앞에 재위한 성무천황과 중애천황의 사망시기를 연쇄적으로 실제보다 뒤로 늦추었기 때문이다.
14세 중애천황(仲哀天皇) 일본서기년도 A.D 192년 실제년도 A.D 165년경 즉위
중애천황기(仲哀天皇紀)는 1, 2, 8, 9년조가 적혀 있는데, 중애천황 8년은 실제 3년이고, 중애천황 9년은 가공년도이다. 즉 중애천황은 재위 8년 9월에 사망한 것이 아니고 재위 3년 9월에 사망하였다. 중애천황기에는 중애천황이 A.D 192년에 즉위하여 A.D 200년까지 재위하였다고 적혀 있으나, 중애천황은 실제로는 A.D 161년에 성무천황이 죽은 후 A.D 162년부터 A.D 164년까지 3년간의 공백기를 거쳐 A.D 165년에 즉위하여 3년간 재위하다가 A.D 167년에 사망하였다. 따라서 중애천황기에 적혀 있는 중애천황의 재위시기는 실제 재위시기와 다르다.
7). 신공황후기 왜곡
일본서기에서 가장 많이 왜곡되어 있는 부분은 신공황후기(神功皇后紀)이다. 신공황후기의 왜곡 부분을 나누어 살펴본다.
「섭정전 10월 전략. 신라왕 파사매금(波沙寐錦)은 미질기지파진십지(微叱己知波珍十岐)를 인질로 하여 금, 은, 채색(彩色)..중략..가지고 80척의 배에 실어 관군을 따라가게 하였다. 때문에 신라왕은 항상 80척 배의 조공을 일본국에 바친다. 이것이 그 연유다. 이에 고구려, 백제 2나라 왕은 신라가 지도와 호적을 거두어 일본국에 항복하였다는 것을 듣고 가만히 그 군세(軍勢)를 엿보게 하였다.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스스로 영외에 와서 머리를 땅에 대고 "금후는 길이 서번(西蕃)이라 일컫고 조공을 그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후략」
위 문구는 일본서기 저자 안만려(安萬侶)가 A.D 712년에 지은 고사기(古事記)에도 없는 내용이므로 왜곡임이 분명하다. 또 신공황후가 신라왕 파사매금(波沙寐錦)을 항복 받고 미질기지(微叱己知)를 인질로 잡아 왔다고 적혀 있으나,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파사이사금은 A.D 80년부터 A.D 111년까지 재위한 신라왕이고, 미사흔(未斯欣)이 인질이 된 해는 구태백제에 인질이 된 A.D 391년과 임나연정에 인질이 된 A.D 402년이므로, 파사이사금이나 미사흔은 모두 신공황후 때의 인물이 아니다. 위 문구는 일본열도왜가 신라를 정벌한 적이 있었는 것처럼 왜곡하기 위하여 옛 신라기(新羅記)에서 왜(倭)가 신라보다 우위에 있는 내용을 찾아내어 신공황후기에 짜깁기해 넣은 것이다.
「섭정전 12월 전략. (一에 말하였다. 신라왕을 포로로 하고 해변에 와서 무릎근을 뽑고서 돌 위에 포복시켰다. 조금 있다가 베어서 모래 속에 묻었다. 한 사람을 남겨 신라에 있는 일본의 재<宰>-로 하고 돌아왔다. 그 후에 신라왕의 처는 남편의 시신이 묻혀 있는 곳을 모르고 혼자서 재<宰>를 유혹할 생각을 가졌다. 재<宰>를 꾀어서..후략)」
위 문구는 구태백제가 신라의 서불한(舒弗邯) 석우노(昔于老)의 말 실수를 빙자하여 석우노를 죽인 내용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A.D 253년에 일어난 사실이다. 따라서 석우노의 죽음은 A.D 247년에 죽은 신공황후와 전혀 관계가 없다. 일본서기 저자는 옛 신라기에서 왜(倭)가 신라 대신(大臣)을 죽인 내용이 나오자 이 왜가 일본열도왜인 것처럼 왜곡하여 신공황후기에 짜깁기해 넣었다. 석우노가 죽은 A.D 253년경은 야마대연맹이 와해된 후 일본열도가 수십 개의 소국으로 나누어져 있을 때이고, 반면에 구태백제는 온조백제, 일본열도 내 백제계 소국들, 일부 가야국들을 후국(侯國)으로 거느리고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을 때이다. 따라서 강대국인 신라가 대항도 해보지 못하고 신라의 최고 대신(大臣)을 죽도록 방관할 수밖에 없었던 상대방은 일본열도 지역의 소국(小國)이 아니고 왜(倭)를 군사(軍士)로 사용한 구태백제(九台百濟)이다.
「원년(일본서기년도 A.D 201년 실제년도 A.D 173년) 신공황후 즉위하다.」
신공황후는 A.D 167년경에 중애(仲哀)를 죽이고 사실상 섭정을 하였으나 정식으로 섭정왕이 된 년도는 비미호(卑彌乎)가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여왕이라 칭한 A.D 173년이다. 즉 일본서기에 적혀 있는 신공황후의 즉위년도는 실제년도보다 28년이 늦어져 있다.
「신공황후 5년 신라왕은 오례사벌(오禮斯伐),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 부라모지(富羅母智) 등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후략」
신공황후기 5년조 내용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A.D 417년에 일어난 사실로서 신공황후보다 일백 수십년 후에 일어난 사실이다. 그리고 이때 박제상(朴提上) 등이 찾아간 왜국은 대화왜(大和倭)가 아니고 대마도 임나연정(任那聯政)이다. 따라서 위 사실은 A.D 247년에 죽은 신공황후와 전혀 관계가 없다. 이처럼 신공황후기에 신공황후와 전혀 관계없는 사실이 들어 있는 것은 일본서기를 지은 백제인들이 신라에 대한 적개심으로 옛 신라기에서 왜가 신라보다 우위에 있는 기록을 모두 찾아내어 신공황후기에 짜깁기해 넣었기 때문이다.
「신공황후 69년 여름 4월 황태후(皇太后)가 치앵궁(稚櫻宮)에서 붕(崩)하였다.」
위지(魏志)에 의하면 신공황후는 A.D 247년에 사망하였으므로, 일본서기에 적혀 있는 신공황후의 사망년도는 실제년도보다 22년이 늦어져 있다. 이는 신공황후의 사망으로 구주왜(九州倭) 천황시대가 끝이 난 후 백제의 직할통치를 거쳐 A.D 390년부터 대화왜(大和倭) 천황시대가 시작되자, A.D 247년부터 A.D 390년까지 142년간의 천황 공백기를 감추고 구주왜와 대화왜를 같은 천황가(天皇家)로 묶기 위하여, 신공황후의 사망년도를 실제년도보다 22년 늦추고 응신천황(應神天皇)의 즉위시기를 실제보다 120년 앞당겼기 때문이다.
[참고:신공황후와 응신천황 시기 실제 천황계보와 왜곡 천황계보 비교]
1. 실제천황계보(구주왜 천황과 대화왜 천황 사이에 공백기 있음)
2. 왜곡천황계보(구주왜 천황과 대화왜 천황 사이에 공백기 없슴)
8). 응신천황 재위시기 왜곡
15세 응신천황(應神天皇) 일본서기년도 A.D 270년 실제년도 A.D 390년 즉위
일본서기에는 응신천황(應神天皇)이 A.D 270년에 즉위한 것처럼 적혀 있다. 그러나 응신천황 3년조를 보면 백제 진사왕(辰斯王)이 죽은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A.D 392년에 일어난 사실이므로, 응신천황의 실제 즉위년도는 A.D 390년이다. 일본서기 저자는 앞에 말한 142년 동안의 천황 공백기를 감추기 위하여 응신천황기(應神天皇紀)에 신공황후가 응신(應神)을 낳았다고 왜곡하고 이 왜곡을 더욱 보강하기 위하여 신구(神龜) 2년에 구주의 大分縣에 "宇佐八幡神宮"을 짓고 比買大神, 신공황후, 응신천황 3신을 같이 모심으로써 신공황후와 응신천황이 같은 혈통인 것처럼 조작하였다.
9). 가공천황 만듬
16세 인덕천황(仁德天皇)
앞에서 본 것처럼 응신천황의 즉위년도를 120년 앞당겨 A.D 270년에 즉위한 것처럼 왜곡한 결과 응신조(應神朝)가 실제 멸망한 연도는 A.D 400년이므로, 그럴 경우 응신천황이 혼자서 130년간을 통치한 셈이 된다. 일본서기 저자도 이건 너무 심하다 싶었는지 가공천황인 인덕천황을 1명 만든 후 A.D 270년부터 A.D 310년까지는 응신천황이 다스리고 그 뒤 A.D 313년부터 A.D 399년까지는 인덕천황이 다스린 것처럼 왜곡하였다. 일본서기에는 인덕천황이 A.D 313년부터 A.D 399년까지 재위하였다고 적혀 있으나, 응신천황이 실제 재위한 연도는 A.D 390년부터 A.D 400년까지이므로 인덕천황은 가공천황임이 분명하다.
10). 임나연정시기 대화왜 1개 소국왕을 천황으로 왜곡
17세 이중천황(履中天皇) A.D 400년 즉위 18세 반정천황(反政天皇) A.D 406년 즉위 19세 윤공천황(允恭天皇) A.D 412년 즉위 20세 안강천황(安康天皇) A.D 453년 즉위 21세 웅략천황(雄略天皇) A.D 457년 즉위
위 천황들은 임나연정 시기에 일본서기에 나오는 대화왜 천황들이다. 광개토왕의 공격으로 응신조가 멸망한 후 일본열도는 다시 수십 개의 소국들로 나누어졌고 임나연정 시기에 대화왜 소국들은 임나연정에 복속하고 있었다. 따라서 위 이중 등은 임나연정에 복속한 대화왜 1개 소국의 왕에 불과하였는데도 일본서기에는 이중 등이 마치 일본열도 전지역을 통치한 듯이 왜곡되어 있다.
11). 임나연정 멸망 후 대화왜 1개 소국왕을 천황으로 왜곡
22세 청녕천황(淸寧天皇) A.D 480년 즉위 23세 현종천황(顯宗天皇) A.D 485년 즉위
위 천황들은 A.D 479년 임나연정이 멸망한 후부터 A.D 488년에 백제가 대화(大和) 지역에 다시 천황제(天皇制)를 부활시킬 때까지 일본서기에 나오는 천황이다. 이 시기 일본열도는 수많은 소국들로 나누어져 있었으므로, 청녕 등은 대화 지역에 존재한 1개 소국의 왕에 불과하였다. 그런데도 일본서기에는 청녕(淸寧) 등이 마치 일본열도 전지역을 통치한 듯이 왜곡되어 있다.
4. 광개토왕비문 왜곡
일본인들은 광개토왕 비문(碑文)도 왜곡하였다. 이 비(碑)의 발견은 A.D 1876년에 청나라 사람에 의해서이다. 이 비(碑)을 현지 답사한 신채호 씨는 조선상고사에서 만주인 영자평(英子平)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적어 놓았다.
「비가 오랫동안 풀숲에 묻혔다가 최근에 영희(榮禧)가 이를 발견하였는데, 그 비문 가운데 (고주몽)고구려가 땅을 침노해 빼앗은 글자는 중국인들이 모두 도부(刀斧)로 쪼아 내어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많고 그 뒤에 일본인이 이를 차지하여 영업적으로 이 비문을 박아서 파는데 왕왕 글자가 떨어져 나간 곳을 석회로 발라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도리어 생겨나서 진적(眞的)한 사실은 삭제되고 위조된 사실이 첨가된 것 같습니다.」
비문(碑文)을 일본인들이 차지한 후 결락(缺落)된 글자가 많아 졌다는 것은 비문(碑文)의 변조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비문은 4면으로 나누어 새겨져 있는데, 서문 및 비려 정벌에 관한 내용이 318자, 백제에 관한 내용이 366자, 왜에 관한 내용이 382자, 부여에 관한 내용이 95자, 능 수묘(守墓)에 관한 내용이 641자이다. 비문에는 왜(倭) 관련 부분에 결락자가 집중되어 있고 왜 관련 부분 중에서도 비면의 제2면 10행과 제3면 1행에 결락자가 집중되어 있다.
(제2면9행)00000000來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安羅人戌兵拔新羅城0城倭滿倭潰城六 (제2면10행)00000000000000000九盡臣0來安羅人戍兵滿0000000000000 (제3면1행)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潰 (제3면2행)0000安羅人戍兵昔新羅寐錦未有身來000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00新羅寐錦00僕勾
위에서 결락자가 집중되어 있는 부분은 광개토왕이 보기(步騎) 5만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한 왜를 물리치고 왜를 추격하여 대마도와 일본열도 지역의 왜를 정벌한 것을 적은 부분이다. 이 비(碑)를 답사한 일본인 학자 금서룡(今西龍)은 그 결과를 大日本時代史 부록에 실으면서 "제2면 말행(10행)은 문자를 넣을 만한 여지가 없고, 제3면 제1행은 탁본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현존하는 비문에는 제2면 10행에 문자가 새겨져 있고, 제3면 1행에도 결락되지 않은 글자가 일부 보인다. 그렇다면 금서룡은 왜 "문자를 넣을 만한 여지가 없었다" "탁(拓)하지 않았다"는 등 구구한 변명을 하며 제2면 10행과 제3면 1행을 탁본하지 않았을까? 또는 탁본하고서도 탁본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을까? 1895년 5월 계연수님이 광개토왕비문을 답사(踏査)한 후 그 내용을 적어 둔 것이 있었는데, 그 후 1912년에 다시 답사하였을 때 비문이 훼손되어 있는 것을 보고 전에 적어 둔 내용을 참조하여 비문징실(碑文徵實)을 만든 것이 있다. 이 비문징실에 적혀 있는 제2면 10행과 제3면 1행 내용을 살펴본다.
「(제2면9행)官兵섭跡而越來攻來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安羅人戍兵拔新羅城0城倭滿倭潰城六
(제2면10행)被我攻탕滅無遺倭遂擧國降死者十中八九盡臣率來安羅人戌兵滿假00倭欲敢戰與록己呑卓淳
(제3면1행)諸賊謀00官兵制先直取卓淳而佐軍由淡路島到但馬右軍經難波至武藏王直到竺斯諸賊悉自潰
(제3면2행)遂分爲郡安羅人戌兵昔新羅寐錦未有身來000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00新羅寐錦00僕勾
관병이 왜의 자취를 밟고 넘어 급히 쫓아 임나가라에 이르러 성을 치니 성은 귀복 하였다. 아라인 수병이 신라성을 발하였다. 0성에 왜가 가득 있었으나 왜가 무너졌고 6성이 우리의 공격을 받아 궤멸되어 남은 것이 없었다. 왜가 드디어 거국으로 항복하니 죽은 자가 십중팔구나 되었으며 신하를 모두 데리고 왔다. 아라인 수병이 가00에 가득 차 있었다. 왜가 록기탄, 탁순의 제적과 더불어 감히 싸우고자 하여 00을 꾀하였으나 관병이 먼저 이들을 제압하여 바로 탁순을 빼앗았다. 이어 좌군은 담로도를 경유하여 단마에 이르고, 우군은 난파를 경유하여 무장에 이르고, 왕은 바로 축사에 도착하니, 제적이 스스로 무너졌다. 드디어 이를 군으로 삼았다. 아라인 수병 예전에는 신라 매금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는 법이 없었는데, 이제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때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고 (고주몽)고구려에 복속하였다.」
비문징실에 의하면 제2면 10행과 제3면 1행에 적혀 있는 문구는 광개토왕이 대마도왜, 구주왜, 대화왜를 모두 정복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비문징실을 만든 계연수(桂延壽)님은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들려 가서 온 몸이 절단된 채 시신(屍身)이 압록강에 던져진 애국지사이다. 한국의 일부 사학자들은 계연수님이 항일투쟁을 하다가 죽은 애국지사임에 주목하여 애국심이 지나쳐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채 위 비문징실을 조작하였으며, 광개토왕은 일본열도를 정복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비문징실의 진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광개토왕이 A.D 400년에 일본열도를 정복하였다는 비문징실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살펴본다. 위 영락(永樂) 10년조의 "관병이 급히 쫓아 임나가라(任那加羅)에 이르러..후략" 문구 중 임나가라(任那加羅)는 대마도(對馬島)라는 뜻이다. 한국의 일부 사학자들은 임나가라라는 문구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가라(加羅)를 경상도 지역으로만 이해하고 임나(任那)와 가라(加羅)가 붙어 있자 임나를 경상도 가야(加耶) 지역이라고 주장하였다. 일본서기나 환단고기에 임나(任那)는 대마도(對馬島)라고 적혀 있으므로, 임나가라는 대마도이지 경상도 가야 지역이 아니다. 고대에는 경상도, 대마도, 일본열도를 변두리에 있다는 뜻으로 모두 가라(加羅)라 불렀다. 그리고 "관병(官兵)이 급히 쫓아 임나가라(任那加羅)에 이르러 성을 치니 성이 귀복(歸服) 하였다"는 문구는 대마도왜가 광개토왕에게 항복하였다는 뜻이고, "왜가 거국(擧國)으로 항복하였다"는 문구는 대마도왜에 이어 구주왜(九州倭)와 대화왜(大和倭)까지 모두 광개토왕에게 항복하였다는 뜻이다. 환단고기 고구려본기에도 광개토왕이 영락 10년(A.D 400년)에 대마도를 점령하고 구주왜와 대화왜로부터 항복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일단 스스로 바다를 건너서는 이르는 곳마다 왜(倭)를 격파하였다. 왜인은 (구태)백제의 보좌였다. (구태)백제가 먼저 왜와 밀통(密通)하여 왜로 하여금 신라의 경계를 계속해서 침범하게 하였다. (광개토왕의 정벌이 끝난 후) 백제(百濟), 신라(新羅), 가라(加羅)의 여러 나라가 모두 조공을 끊임없이 바쳤고 거란(契丹), 평양(平凉)도 모두 평정 굴복시켰다. 임나(任那)와 이(伊), 왜(倭)의 무리는 신하로서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위에 나오는 임나는 대마도왜를, 이(伊)는 이세(伊勢), 대화(大和) 등지의 대화왜를, 왜(倭)는 구주왜를 지칭한 말이다. 따라서 "임나(任那)와 이(伊), 왜(倭)의 무리는 신하로서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는 문구는 대마도왜, 대화왜, 구주왜 모두가 광개토왕에게 복속하였다는 뜻이다. 송서(宋書) 왜전(倭傳)을 보면 임나연정(任那聯政)의 마지막 왕 무(武)는 "동으로 모인(毛人) 55개국을, 서로 66개국을, 북으로 95개국을 복속시켰다"고 주장하고, 자칭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7국제군사라고 주장하였다.
「왜왕 흥이 죽고 동생 무가 왕이 되어 자칭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7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 하였다. 興死弟武立自稱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위 왜국왕은 임나연정왕이고, 왜왕 무(武)가 주장한 영역은 일본열도, 대마도, 신라, 백제, 가야 지역이다. 위 문구에는 왜왕 무(武)가 마치 자기가 일본열도왜, 백제, 신라, 대마도왜, 가야를 복속시킨 듯이 주장하였으나, 임나연정을 설치한 사람은 광개토왕이므로, 일본열도왜, 백제, 신라, 대마도왜, 가야를 복속시킨 사람은 왜왕 무(武)가 아니고 광개토왕이다. 환단고기 고구려본기, 송서 왜전, 광개토왕 비문을 종합하면 광개토왕은 영락 10년에 대마도왜와 일본열도왜를 평정하였다. 이는 비문징실에 적혀 있는 내용과 일치한다. 따라서 광개토왕비문 제2면 10행과 제3면 1행에서 결락된 글자는 비문징실에 적혀 있는 글자와 같은 글자이거나 또는 같은 내용이다. 계연수님이 비문의 제2면 10행과 제3면 1행을 보았을 때 새겨져 있던 글자들이 그 후 갑자기 결락되었다는 것은 일본열도가 광개토왕에게 정복당한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일본인 누군가가 고의로 비문을 훼손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