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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8월 28일,주일설교}*실로암에서 만나자*
(본문: 요한복음 9장 1-7절).
*많은 사람들이 실로암이란 말은 아는데 정작 실로암이 어디 있으며 어떻게
생긴 것인지를 모르고 실로암이란 병자의 눈을 낫게 하는 곳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모세 남전도회 헌신예배를 통하여 우리 모두 실로암에서
만나자는 제목을 정하고 함께 은혜를 받고 자 합니다.
실로암의 뜻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위치는 예루살렘의 벧엘 동북쪽 16km 지점에 있으며, (1) 실로암이라고 부
르기 전의 옛 이름은 실로, 실로아 또는 셀라이다(사8:6, 느3:15) 라고 불리웠
습니다.
(2) 이 실로는 예루살렘 동남쪽에 있는 못으로서 히스기야왕이 앗수르의
산헤립의 공격에 대비하여 기도하고 나서 천사가 내려와 일러 준 대로 기혼
의 샘으로부터 성내에 있는 실로암 못까지 지하도를 뚫어서 물을 끌어 왔습
니다(왕하20:20, 대하 32:30).
(3) 그때까지는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의 물이라고 표현한 것 같이 동남쪽 모
퉁이를 돌아서 옛 실로암 못까지 천천히 흘러 들어갔습니다(사8:6)
(4) 또, 실로암 못은 넓이가 16-5.4미터 못물은 아랫 쪽에 있는"옛 못"또는"윗
못" 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불리는 "아랫 못"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사7:3,
왕하18:17,사22:9,11).
(5) 신약 성서의 예수 당시도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사람이 죽었단 말이 있
습니다(눅13:4).
오늘 본문을 보니 나면서부터 소경된자가 있었습니다.
본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자기의 죄 때문인가,
그 부모의 죄 때문인가, 하고 논쟁을 하면서 예수께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엉뚱하게도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다"(5절)라고 하시고는 땅
에 침을 뱉아 진 흙을 이겨서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요9:7)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언제나 엉뚱한 말을 많이 하셨습니다.
솔직히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기분이 과히 좋지 않을만큼 엉뚱한 말씀을 많
이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진리를 말씀하신 분이셨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심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더러운 침을 뱉아
서 그 것도 흙에다 이겨서 눈에 바르셨을까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무척이
나 기분이 나쁘지 않을 수 없는 장면입니다.
저 같았으면 모르긴 몰라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온 장님은 아무 불평이 없이 어두운 길을 더듬거리며 사람
들에게 물어 물어 실로암을 찾아가서 눈을 씻고 밝은 눈으로 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 명령하여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시고, 벙어
리의 혀를 풀어서 말하게 하시고, 중풍병자를 일으키실 뿐만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셨는데, 왜 걷기도 힘든 장님 한테는 실로암까지 가서 씻으라고
하셨을까요? 실로암 물이 특효약이어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예수님이 침
으로 이긴 흙이 특효약이었을까요?
예수님은 언제나 비유로 말씀하시고 상징으로 깨닫게 하여서 더 심오한 진
리를 설명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행한 모든
이적을 이적으로만 보지 않고 표적으로 설명을 하였습니다.
표적이란 이적을 일으킨 그 사건 자체가 역사적 사실이면서 상징적의 의미
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이적 자체의 사건보다는
상징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행한 이적은 물론 표적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를 살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11:25-26),하고 부활을 증거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인 것입니다. 믿으면 아멘
하십시다. 그렇다고 문경의 십자가 사건같은 행위는 부활하지 못합니다.
또한 사마리아 성 야곱의 우물가에서 물 길러 나온 한 여인에게 물을 달라
시면서 그녀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주시기를 원하셨습니
다."이 물을 먹는 자 마다 다시 목 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 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
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고 하셨으며,
또한 벳세다 들녁에서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
이셨습니다. 그리고 곧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하리라"(요6:35)하시고, 당신이 영생의 떡이요, 생명의 떡이
되심을 증거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은 장님과 같이 어둡습니다. 우리 예수님
은 어두운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장님의 눈을 띄우시며
세상의 빛이 되심을 증거하고 실로암을 통하여 하늘로부터 이 땅에 보냄
을 받은 자 되시는 자신을 증거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실로암에서 만나자는 말씀은 예수님을 만나자는 말씀입니다. 오늘 헌신
예배로 영광을 돌리시는 모세 남전도회 뿐만아니라 우리 성현의 모든 성
도님들이 실로암에서 만나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예수님은 시시 때때로 엉뚱한 답변과 행동을 하시면서도 언제나
우리들에게는 진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실로암은 어떤 곳이었을까요?
실로암은 유다 히스기야 왕때 만들어진 하나의 못입니다.
그때 히스기야는 유다나라의 13대 왕으로 29년간 나라를 통치하며 백성
에게 선정을 베풀며 기도를 많이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훌륭한 왕이
였습니다.
그 당시 유다의 북 서쪽에는 신흥국가인 앗수르가 일어나서 근동에 있는
모든 국가를 제압하였으며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함락 시켰고,
남쪽의 강대국인 애굽도 신흥국가인 앗수르에 오금을 펴지 못할 때입니
다. 그때의 앗수르 왕은 산헤립이엇는데 그는 전쟁하기를 좋아해서 결국
에는 유다나라를 침략하였습니다.
산헤립은 사마리아를 함락시킨 사르곤 2세의 아들로서 군사적인 지략이
뛰어나 많은 원정을 하여 근동의 예루살렘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제패하
였습니다.
그러나 유다 왕 히스기야가 다스리는 예루살렘을 침략하였다가 하루저
녁에 군사 185.000명을 잃고 얼굴이 뜨뜻하여 고국에 돌아가서 자기 신
전에서 분향할 때 그의 아들들의 손에 의해서 살해를 당했고, 급기야 국
세는 기울고 신흥국가 바벨론에 의해서 망하게 됩니다.
하여튼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략을 받은 유다 왕 히스기야는 당시 선지자
이사야와 더불어 기도하며 육신의 팔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얻고서 방백들과 의논하여 군사 전략을 세
웠습니다.
"히스기야가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치러 온 것을 보고 그 방백들과
용사들로 더불어 의논하고 성밖에 있는 모든 물의 근원을 막고자
하매 저희가 돕더라 이에 백성이 많이 모여 모든 물 근원과 땅으로
흘러가는 시내를 막고 이르되 어찌 앗수르 왕들로 와서 물을 얻게
하리요"(역대하32:2-4).하면서 단합을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고대 팔레스틴 지역에는 물이 희귀 하였습니다.
다만 예루살렘의 성밖 기혼에만 수원이 풍부하였을 뿐입니다. 히스기야
는 기혼 샘물을 막아 지하수로를 만들고 성밖 기혼에서부터 예루살렘 성
안으로 물을 끓여 들였습니다.
이 전략은 적군에게 식수의 곤란을 당하게 하여서 전쟁에서 장기전을 치
루지 못하게 하고 적군을 쉽게 격퇴 시킬 뿐만이 아니라 성 안백성들에
게는 풍부한 물을 공급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히스기야가 또 기혼의 윗 샘물을 막아 그 아래로 좇아 다윗 성 서
편으로 곧게 인도하였으니 저의 모든 일이 형통하였더라"(대하32:
30),
이 외에도 히스기야의 눈물어린 기도는 (왕상19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
다. 히스기야에게 죽을 병이 들었을 때에 기도하였던 기록이 왕하 20장
1-5절에 잘 나와있듯이 우리는 기도외에 의지할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만이 승리를 가져다 줍니다.
이사야 38장을 보더라도 히스기야의 기도는 잘 나타나 있습니다. 눈물
어린 기도이지요. 우리는 이런 기도를 해야합니다.
이사야38장16에 이르기를.
"주여 사람이 사는 것이 이에 있고 내 심령의 생명도 온전히 거기에 있
사오니 원하건대 나를 치료하시며 나를 살려 주옵소서"
문제는 자기가 살고는 싶지만 그건 순전히 하나님이 원하시면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셨습니다. 그러나 요즘의 성도
들은 대부분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의향보다는 자신의 원하고 자 하는
목적을 이루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잘못된 기도이지요. 하나님이
원하옵시면 이루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
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 일들이 모두에게 가능하기 때문에 아무도
자신의 삶을 장담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삶은 위기(危機)의 연속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옳은 말입니다. 더우기 오늘과 같은 도시화가 되어버린
사회에서는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사고와 사건이 일어나는지 모릅니
다. 눈을 떠 조간신문을 펼쳐 보는 순간, 간밤에 일어난 범죄 사건과
'사람으로서 이럴 수가 있을까?' 하리 만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
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거의 불감증에 걸
릴 만큼 둔감해진 교통사고는 이루 헤아릴 수 없으리만큼 매일 일어
나는 사고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재난과 사고를 대할 때, 언제 어디서 그러한 일이 내게
도 당할 수 있을 것인지 아무도 모르는 상태에서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의 밑바탕은 항상 위기 속에서 살아간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병원으로 실려 가고, 아침
까지도 건강하게 출근했던 사람이 저녁에 시체로 돌아오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말입니다. 어느 부부가 아무 것도 아닌 일
로 저녁에 잠깐 다투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각방에서 잠을 잤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부인은 밥도 해 주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그런 아내
를 보고 투덜거리며, 출근하였습니다. 아침에는 사과를 하겠지라고
생각한 아내는 그냥 나가는 남편이 미웠습니다. 그래서 출근하는 남
편의 뒤에다 대고 욕을 퍼부었습니다. "이 웬수같은 놈아! 우리 이젠
보지 말자. 나보다 더 좋은 여자가 있으면 그리가고 다시는 오지 말
아라! 이 웬수야!"
그런데 말입니다. 저녁이 되어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슬슬 걱
정이 생깁니다. 진짜로 다른 여자에게 가버렸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던 중 밤 10시경에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병원이었습니다.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그 자리에서 즉사하여 병원 영안실에 있
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자기가 한 말이 그대로 되어 버렸습니다.
사람의 삶은 이처럼 허무하게 끝이납니다.
사람은 비단 건강의 문제에서만이 아닙니다. 갑자기 닥친 경제적인
위기나, 직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나, 우리 젊은이들에게는 실연
을 당하는 일 등등...참으로 우리의 삶은 온통 위기로 둘려 싸여 있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히스기야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죽음에서도 살리는 응답이 있엇습니다. 그것도 자그만치 15년
입니다. 3일후면 죽을텐데 15년을 더 살게 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힘입니다. 그리고 히스기야는 생명을 연장받을 수 있
어서 나라를 구했습니다. 생명을 연장 받았을 뿐만 아니라 지혜까지
덤으로 받아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되었습니다. 이러니 기도보다
더 큰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기도보다 더 큰 은혜는 없습니다.
1. 히스기야 왕처럼 우리도 위기 앞에서 좌절하거나, 낙심하거나, 자
포자기하거나, 울분을 못 이겨 폭언과 자학의 행위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향하여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왕의 신분이었지만,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했다거나, 주먹
질했다거나, 다른 사람에게 행패를 부렸다거나, 하는 일이 전혀 없습
니다. 그는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였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이점이 위대한 것입니다.
이점을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보면, 하나님께 먼저 원망이 나갑니다.
어찌하여 내게 이런 시련과 이런 억울한 일을 주십니까? 라고...히스
기야 왕은 역대의 다른 왕들에 비하여 월등히 선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에게 죽음을 예고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래서 히스기야 자신도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해 달라"고 한 것을 보면 그는
분명히 무슨 죄로 인한 죽음의 예고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인지라 죽음은 일단 공포의 대상입니다. 더더욱 그의
나이 38세라면 한창 살아서 활동할 수 있는 나이 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죽어야 한다니...얼마나 상심할 수 있는 일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향하여 원망하거나, 주먹
질하지 아니하고, 기도하였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재난과 사고와 병은 잘못했어서만 당하는 것이 아니란 점입니다.
즉 죄의 값으로 당하는 일만이 아니란 것입니다.
흔히 우리들은 누가 재난을 당하거나, 사고를 당하는 것을 보면, 속
으로 무슨 죗값으로 그런 일을 당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또
그렇게 입바른 소리를 할 수 있는 경우들을 봅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의 행위를 돌아볼 때, 하나님께 죽을 죄를 지은 것이
없다고 스스로 말하는 것을 볼 때,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진실히 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심으
로 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즉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
다. 그런데 왜 죽음이라는 위기 앞에 서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하나
님만이 아시는 일이지 사람이 이러쿵저러쿵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아
닙니다.
2. 히스기야왕은 생의 위기를 만날 때, 그것을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교훈입니다. 그는 자신의 위기를 하나
님과 함께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벽을 향하여 기도했다고 했
습니다.<벽을 향하였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오로지 하나님과만 해결하려는 결연한 의지를 말합니다.
하여간 그 때 히스기야 왕이 만든 지하 수로는 장방형 60cm
폭으로는 약 2m 의 높이로 만들었습니다.
이 수로의 측정된 길이는 533m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성밖
기혼샘에서부터 예루살렘 성안에 보냄을 받은 물 즉 전쟁을 하기위
하여 만든 지하수로가 바로 예수님께서 소경에게 가라고 한 실로암
못입니다.
예수는 이첨럼 나면서부터 장님된 자에게 침을뱉어 진흙을 이겨 그
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말씀
에 순종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서 낫거나 낫지 못합니다. 순종입니다.
그 장님은 예수님의 말을 듣고 실로암에 가서 씻은즉 눈이 밝아졌다
라고 한 것입니다. 이는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보냄을 받은 실로암
되시는 예수님 자신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요즘 많은 기독교인들이 실로암이란 말을 사용하고 심지어는 웬만한
영업장의 이름도, 실로암이란 간판을 달고 있습니다. 제가 본 간판만
해도, 실로암 떡뽁기, 실로암 노래방, 미장원, 식당, 약국, 병원, 문구점,
슈퍼마켓까지는 그래도 봐줄만 합니다. 그런데, 24시 실로암주점은 정
말이지 너무 무식한 행동입니다. 정작 실로암의 의미는 모르고 사용
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실로암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은 우리
가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이곳, 바로 하나님의 집인 교회가 실로암입
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실로암에서 자주 만나야 합니다. 그것이 곧
축복이고 본분입니다. 정해진 예배나 기도 시간에는 분명히 실로암의
샘물은 흘러 넘칩니다. 할 수만 있다면 날마다 실로암에서 만나면 더
욱 좋겠지요. 새벽에, 저녁에 언제든지 실로암의 물줄기는 흐르고 있
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먹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알리고자 하셨던 의미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실로암으로
보내신 예수님 자신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고 그 분의 가르침에 부끄럼이 없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어서 이곳
실로암에서 새롭게 출발하는 성현의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주후:2011년 8월 28일 주일설교.
박 종 태 목사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