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하늘에는 하얀 새털구름이 누군가 가만히 흩뿌려 놓은 듯 한가로이 떠 있었고, 석관동 의릉의 푸른 잔디 위에는 어느새 가을의 기운이 조금씩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선선한 바람이 나뭇잎 사이를 스쳐 지나가고 햇살마저 한층 부드러워진 것을 보니, 여름은 어느새 뒤로 물러나고 가을이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와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기분 좋은 가을날, 고전강독회에 들어와 처음으로 맞이하는 가을 모꼬지에 동문 선배님들과 재학생을 비롯해 75명 가까운 학우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오늘은 책을 펼치는 대신 아름다운 가을 풍경 속을 함께 걸으며, 역사도 만나고 사람도 만나는 특별한 하루였습니다.
아침 8시 반을 조금 넘긴 시간, 석관동에 자리한 의릉 매표소 앞에 도착했습니다. 의릉은 조선 제20대 왕 경종과 계비인 선의왕후가 잠들어 있는 곳입니다. 약속시간이 9시 반이니 아직 한 시간 가까이 남아 있었습니다. 조금 일찍 온 셈인가 싶었는데, 매표소 앞에는 벌써 김대겸 선배님과 박형애 선배님 두 분이 먼저 나와 계셨습니다.
인사를 나눈 뒤 의릉 입구 주변의 솔밭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나무 사이로 놓인 벤치에 앉아 잠시 쉬고 있으니 아침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조용히 내려앉았습니다.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숲은 한적했고, 가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만 들려왔습니다.
그렇게 잠시 앉아 있다 보니 하나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재학생들이 도착하고 동문 선배님들도 속속 모여들었습니다. 반가운 얼굴을 발견할 때마다 서로 손을 흔들며 인사를 나누었고,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은 안부부터 물었습니다.
특히 동문 선배님들은 손수 준비해 오신 선물을 봉지봉지 가득 담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성스럽게 나누어주셨습니다. 선물을 받는 것보다 누군가를 위해 무엇인가를 준비했다는 그 마음이 더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가을 아침의 서늘한 바람 속에서도 사람의 정은 참 따뜻했습니다.
이번 모꼬지는 동문회에서 주관한 행사였습니다. 전체 일정부터 답사와 식사까지 동문 선배님들이 많은 준비와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특히 윤상현 회장님을 비롯해 한양흠 총무님과 김연태 기획부장님 등이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데 많은 애를 써주셨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사는 한 나절이었지만, 그 시간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준비한 시간과 수고는 결코 하루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시간이 9시를 넘어서면서 사람들이 빠르게 모여들었고, 약속한 9시 반이 되자 어느새 75명 가까운 인원이 의릉 앞에 모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이며 해설을 듣기에는 아무래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결국 전체 인원을 3개 조로 나누고, 각 조마다 한 명씩 해설사를 배정해 의릉을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우리 조를 맡은 해설사는 진정임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뜻밖에도 우리와 아주 특별한 인연이 있었습니다. 진정임 해설사 역시 방송대 국어국문학을 공부하셨고, 2003년에는 고전강독회 선배님으로 활동하셨다고 했습니다. 졸업까지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그때의 배움과 인연을 바탕으로 지금은 조선 왕궁과 왕릉을 해설하는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역사와 문학을 공부했던 분이라 그런지 설명에는 깊이가 있었고, 무엇보다 말을 참 쉽게 풀어주셨습니다. 어려운 역사 이야기도 차근차근 풀어나가니 학우들의 이해가 빨랐습니다. 단순히 왕릉에 있는 건축물과 석물의 이름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 세상을 떠난 뒤 어떤 절차를 거쳐 왕릉에 모셔지는지까지 자세하게 들려주셨습니다.
특히 왕이 세상을 떠난 뒤 왕릉에 모셔지기까지 무려 다섯 달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왕릉 하나에도 왕의 죽음에서부터 장례와 능침 조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절차와 시간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평소에는 그저 오래된 능 하나로만 바라보았던 공간이 해설을 듣고 나니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 3조는 의릉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매표소 밖에 마련된 의릉 역사박물관을 둘러보았습니다. 숙종 때부터 이어지는 역사적 배경을 시작으로, 그 아들인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가 이곳 의릉에 잠들게 된 과정까지 설명을 들었습니다. 왕 한 사람의 생애만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정치와 왕실의 사정이 서로 얽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역사라는 것이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박물관을 둘러본 뒤 금천교를 건너 홍살문을 지나 본격적으로 의릉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향로와 어로를 따라 옆에서 걸으며 왕릉으로 향했습니다. 폭신폭신한 잔디 위를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발걸음도 느려졌습니다. 걸으면서 해설사의 설명을 들 하나씩 의미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왕릉 입구에 마련된 제례 공간에 이르러서는 조선 왕릉에서 행해지던 제례에 대한 설명을 자세하게 들었습니다. 왕을 모시는 공간이 단순히 무덤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후대의 사람들이 왕을 기억하고 예를 갖추는 장소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습니다.
다시 나무 숲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자 흰색 건물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남북공동성명이 이루어졌던 역사적인 중앙정보부 건물이었습니다. 아쉽게도 출입문은 굳게 닫혀 있어 건물 안까지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건물 외곽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아보았습니다.
그곳에 서 있으니 오래전 남북이 서로의 손을 맞잡으며 통일을 이야기했던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당시에는 금방이라도 남북이 하나가 될 것처럼 기대했던 사람들의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장소를 다시 바라보니, 역사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때 가까운 미래처럼 느껴졌던 일이 어느새 역사의 한 장면이 되어버린 것을 보며, 우리도 모르게 품었던 기대와 착각을 조용히 되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시 그곳을 나와 발길을 선의왕후의 능으로 향했습니다. 능침 주변으로 올라가 왕릉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살펴보았습니다.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평소 사진으로만 보았던 왕릉의 구조와 석물 하나하나를 직접 눈앞에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뜻밖의 즐거움도 있었습니다. 우리 조원들은 선의왕후의 능 앞에 함께 앉아 단체사진을 남겼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평생을 살아가면서 왕릉의 능침 가까이까지 올라가 사진을 찍을 기회가 몇 번이나 있겠습니까. 해설사께서도 이곳은 아무나 올라갈 수 있는 곳이 아니며 허락받은 사람만 올라갈 수 있는 곳이라고 몇 번이나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우리가 남긴 사진 한 장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습니다.
선의왕후의 능을 돌아본 뒤에는 경종의 능으로 향했습니다. 능 앞에는 직사각형 모양의 커다란 석상이 놓여 있었습니다. 바로 혼유석이었습니다. 혼유석은 왕의 혼이 나와 쉬고 노니는 곳이라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아래를 살펴보니 네 개의 둥근 받침돌인 고석이 혼유석을 받치고 있었습니다.
능 주변을 따라가면서는 호랑이와 양의 석상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호랑이와 양은 모두 능 바깥을 향해 서 있었습니다. 사나운 호랑이는 능을 지키는 역할을 하고, 양은 왕을 위로하고 평안을 기원하는 의미를 지닌다고 했습니다. 능 앞에 서있는 무신 석상은 호랑이 가죽을 걸쳐입고 있다고 설명을 했는데, 왜 입고 있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듣지 못해 아쉽기도 했습니다.
반면 하나의 왕릉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석물들이 그저 장식으로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의미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의릉의 비각과 비문이 있는 곳을 둘러보았습니다. 그곳에 새겨진 글을 통해 왕의 삶과 그 시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서 약 한 시간 반에 걸친 의릉 역사 공부를 마쳤습니다.
평소에는 왕릉을 그저 오래된 무덤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습니다. 그곳에 누가 잠들어 있는지, 왜 이곳에 능을 조성했는지, 어떤 절차를 거쳐 왕을 모셨는지, 능을 지키는 석물 하나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를 알고 나니 의릉은 더 이상 단순한 문화유적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이라는 긴 역사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깃든 살아 있는 역사 공간처럼 느껴졌습니다.
답사를 마치고 매표소를 빠져나오니 어느덧 정오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3개 조로 나누어 움직이다 보니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많은 동문 선배님들과 함께했지만 서로 다른 조에서 움직이다 보니 따뜻한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 헤어진 분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같은 장소에 함께 있었으면서도 미처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는 것이 못내 아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쉬움도 잠시였습니다. 정오가 조금 지나자 동문회에서 미리 예약해 둔 음식점으로 모두 함께 이동했습니다. 도롯가에 자리한 능이오리집은 넓은 편이어서 75명 가까운 인원을 한꺼번에 맞이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네 명씩 둘러앉은 식탁마다 따뜻한 능이오리탕 한 냄비가 놓였습니다. 아침 일찍나와 숲길을 걷고 역사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시장기가 돌던 참이었습니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음식 냄새가 식당 안에 퍼지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와 이야기 소리가 식당 안에 가득했습니다. 맥주도 한 잔씩 곁들이며 함께 식사를 하다 보니 오전 내내 이어졌던 답사의 긴장도 어느새 풀어졌습니다.
같은 음식을 앞에 놓고 둘러앉으니 아침보다 훨씬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답사 중에는 해설을 듣느라 미처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도 식탁 위에서는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공부 이야기, 학교 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까지 오가면서 선후배라는 이름보다 한 학우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삼삼오오 흩어져 인근 카페로 향했습니다. 우리 재학생들도 박재왕 집행부 회장님과 함께 메가커피에 들러 커피 한 잔을 마셨습니다. 헤어지기 아쉬웠던 탓인지 못다 한 이야기가 다시 쏟아졌습니다. 오전부터 함께 걸었던 의릉의 풍경과 해설 이야기, 학교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까지 이야기꽃이 한동안 이어졌습니다.
그러다 문득 다음 만남을 약속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우리는 다음 달에 있을 가을 문학답사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습니다. 오늘 함께 걸었던 가을길이 아직 마음에 남아 있는데, 벌써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단순한 하루짜리 행사가 아니었습니다. 의릉이라는 역사적인 공간에서 조선의 시간을 만나고, 그 길 위에서 선배와 후배가 서로의 안부를 묻고 웃음을 나누었습니다. 책 속에서만 만나던 역사를 직접 걸으며 배웠고, 공부로 이어진 인연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정으로 한 걸음 더 가까워졌습니다.
무엇보다 70명이 넘는 많은 인원이 함께 움직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 처음부터 끝까지 행사를 세심하게 준비하고 이끌어주신 동문 선배님들의 수고가 있었기에 오늘의 시간이 편안하고 즐겁게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윤상현 회장님을 비롯한 동문회 관계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가을은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푸르던 잎들이 어느 순간 노랗고 붉게 물들고, 그렇게 깊어진 가을도 머지않아 겨울에게 자리를 내어줄 것입니다. 사람의 만남도 어쩌면 계절과 닮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만날 수 있을 때 만나고, 함께 걸을 수 있을 때 함께 걷고, 나눌 수 있을 때 마음을 나누어야 합니다.
오늘 의릉에서 함께 걸었던 사람들의 얼굴과 웃음, 숲길 사이로 스며들던 가을 햇살과 하얀 새털구름은 아마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이 계절이 돌아오는 날, 우리는 오늘을 떠올리며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참 좋은 가을날이었다고.
참 좋은 사람들과 함께한 하루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