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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에 살아라!
불멸의 '정예 10만' 결집! ③
취임한 제3대 회장은 결심했다.
'앞으로 2년 동안이 승부다.'
"움직이지 않으면 길은 열리지 않는다."라고
노도처럼 전진!
은사에게 맹세한 '국사(國士) 10만' 결집,
제자는 투쟁을 시작했다.
1000만 볼트
'국사(國士) 10만' 결집은 제자가 스승에게 한 맹세였다.
제3대 회장에 취임한 이케다 회장은 10만 결집에 승부를 걸었다.
"나는 앞으로 2년 동안이 승부라고 생각했다."(<나의 이력서>)
회장에 취임한 1960년과 1961년, 이 2년 동안에 승부를 내겠다고 마음먹었다. 회장은 그 2년 동안 '움직이지 않으면 길은 열리지 않는다.'는 각오로 자리에 앉을 틈도 없이 움직였다. 그리고 1961년 11월. 대망한 '국사 10만' 결집을 실현한다.
이케다 회장은 2년간의 투쟁을 이렇게 기록했다.
젊은 날에 읽은 괴테의 말에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달하겠지라는 안이한 생각으로 걸어가면 큰 잘못이다.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도달점이며, 그 한 걸음에 가치가 있다.'라고 있는데 바로 그와 같은 걸음이 필요한 나날의 연속이었다."(<나의 이력서>)
당시 청년부 간부는 말한다. "회장에 취임하신 이케다 선생님은 아주 대단했습니다. '오사카투쟁' 때 100만 볼트로 움직였다고 들었는데 회장이 되고 나서는 1000만 볼트였습니다. 마치 감전되어 버릴 듯한 기세였습니다."
"다이사쿠를 따라가라"
1960년 여름. 이누보사키에서 열린 수호회 야외 연수회를 마친 이케다 회장은 하계강습회 준비에 들어 갔다. 그런 가운데 8월 4일, 남자부 간부회가 열렸다. 회장은 남자부에게 '세가지 지침'을 제시했다.
'몸을 소중히 한다.' '빨리 잠자리에 든다.' '어떤 회합이든 추진하는 간부의 일념으로 즐거운 회합을 만든다.'는 세가지 지침이었다.
청년이 중요했다. 인재가 필요했다. 그리고 진짜 이케다 문하생을 발탁하고 싶었다
은사 도다 제2대 회장은 "다이사쿠를 따라가면 된다."라고 유언했다. '따라오는 제자'가 필요했다.
다음 날인 5일부터 하계강습회가 열렸다. 이케다 회장은 맨 먼저 리쿄보(다이세키사에 있는 승려나 신도가 머무르는 방) 2층으로 올라갔다. 은사가 마지막으로 지휘하던 방이었다. 그 방에서 오후 2시에 교수회가 열렸다.
이케다 회장은 '청년'과 '교학'에 힘을 쏟았다. 7월에 실시한 교수 등용 논문시험 최종결과를 이 자리에서 결정하기로 했다. 2시간에 걸친 최종심사 결과, 14명을 새 교수로 발탁했다. 그 중 12명이 청년부였다. 회장은 청년에게 초점을 맞췄다.
나는 지금 인재가 필요하다
하계강습회는 전기와 후기로 나뉘어 2박 3일에 걸쳐 5일 동안 열렸다. 참석자는 청년부 1200명을 포함해 8000명이었다. 그리고 이케다 회장의 결단에 따라 <닛코유계치문>을 교재로 선정했다.
회장은 전국에서 모인 청년부와 앞장서서 간담을 나누고 질문회를 열었다. 여자부 질문회에 참석했을 때였다. 한 여자부원이 손을 들었다.
"저는 현재 인재등용이라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하고 괴로움을 털어놨다. '인재육성'은 회장이 지금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부분이었다.
회장은 말했다. "그것은 어느 세계나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회사나 정치에서도, 또 학회에서도 인재가 있어야 유업(遺業)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인재가 아닌 인물이 지도자가 되거나 상관이 되었을 경우, 그 세계는 붕괴됩니다.
나는 지금 인재가 필요합니다. 인재는 찾아내야 합니다. 인재를 발견하면 자신도 지금의 자기 보다 훌륭해지도록 노력하고, 인재를 격려하며 그리고 선배와 자꾸 연결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인재를 등용하고 발탁하는 지름길입니다. 찾아내십시오. 자기 이상으로 광선유포에 활약할 사람을 발견한다면 당신이 광선유포에 크게 공헌하는 셈이 됩니다. 공덕이 나옵니다."
스승의 정신을 그대로 후세에
강습회 둘째 날 밤에는 가장 중요한 행사인 회장의 <닛코유계지문> 강의가 있었다. 이케다 회장은 그 강의에 앞서 은사의 묘를 참배했다. 회장의 마음에는 항상 은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니치렌 불법은 모두 사제의 법이다. <닛코유계치문>도 사제로 관철된 중요한 글이다. 닛코 상인의 유계치문은 대성인 입멸 후 스승의 정신을 그대로 후세에 전하고 광선의 큰 강을 열리고 한 제자의 정열이 용솟음치는 글월이다.
당시 세이쿄신문은 회장 강의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이케다 선생님은 강의에 임하기 전부터 '이번에는 26개 조항을 강의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거기에는 스승의 정신 그대로 사제의 맹세를 완수하려는 제자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강의는 오후 6시 반에 시작했다. 대강당은 입추의 여지도 없었다. 회장의 늠름한 목소리가 대강당에 울려 퍼졌다.
이 <닛코유계치문> 26개 조항은 닛코 상인이 향년 88세인 1333년 정월 13일에 남기신 글월입니다. 닛코상인의 천화(遷化)는 그해 2월 7일이므로 돌아가시기 20여일 전의 유언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문을 읽어 나갔다. "대저 생각하건대 말법 홍통 (末法弘通)의 혜일(惠日)은 극악방법법(極惡謗法)의 어둠을 비추고 ... 오로지 광선유포의 금언(金言)을 받들기 위함이니라."
힘찬 강의가 시작되었다. "대성인이 명령한 광선유포를 실현한다는 자각을 촉구하고자 26개 조항을 남기 셨습니다.
대성인 말씀대로 닛코 상인도 광선유포를 목표로 했고, 닛코 상인 말씀대로 니치모쿠 상인도 광선유포를 위해 투쟁하셨습니다.
창가학회는 전 인류의 행복과 전 세계의 평화를 확립 하는 근본의(根本義)인 대성인의 철학으로, 오로지 광선유포를 지향하는 외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지금, 광선유포의 때가 무르익고 있습니다. 영취산에 가서 대성인과 은사 도다 선생님에게 '창가학회가 광선유포를 이뤘습니다.'라고 보고드리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
사자신중의 충을 공격하라!
"후지(富士)의 입의(立義) 조금도 선사(先師)의 홍통하심에 위배하지 말아야 할 것. "
"'후지의 입의'란 닛코 상인의 설법입니다. 닛코 상인의 설법은 대성인의 불법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닛코 상인의 말씀대로 실천해 대성인이 홍통하신 설법에 조금도 잘못이 없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위서({爲書)를 만들어 어서라 칭하고. 본적일치 (本迹一致)의 수행을 행하는 자는 사자신중(師子身中)의 충(蟲)이랴고 알아야 할 것."
"자기 편의적인 문서를 만들어 '어서다. 대성인의 진필이다.'라고 부르며, 대성인 불법을 올바르게 넓히지 않고 전하지 않는 타락한 자가 나옵니다. 그런 자는 사자 몸 속의 벌레이니 공격하라는 말씀입니다."
▒▒▒ 당시 이야기 ▒▒▒
불꽃이 튀는 듯한 기백이 담긴 강의였습니다. 선생님이 어문을 근간으로 도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제자가 마땅히 지녀야 할 자세를 철저하게 가르치셨습니다. 그전에도 '유계치문'을 교재로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선생님의 유계치문 강의는 참으로 의미가 달랐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본산에서 늠름하게 "학회가 광선유포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강의를 본산에서 하신 데는 이런 의미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때 역대 법주 중에 닛코 상인의 가르침을 배신한 인간이 있었음을 배웠습니다. 유계치문의 정신을 배반하고 불상을 조립한 법주 닛세이(日精), 신찰을 받고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을 군부에 팔아넘기고 불에 타 죽은 법주 닛쿄(日恭)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유계치문 한 문장 한 문장에 비추어 분명해졌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수호회 지도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광선유포는 승려들이 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창가학회만이 할 수 있다. 승려나 구신도를 의지하면 크게 실패한다." 그 말씀 그대로였습니다. 그들에게 절복정신 따위는 전혀 없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어떻게 학회정신을 심어줄지에 고심하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닛코 상인의 유계치문 정신이었습니다.
아직 광선유포가 되지 않은 동안
"아직 광선유포가 되지 않은 동안은 신명을 버리고 수력홍통(隨力弘 通)을 해야 할 것."
"마키구치 선생님은 군부정부의 탄압 속에서도 국가간효를 부르짖다가 차디찬 감옥에서 73세의 일기로 순교의 생을 마치셨습니다. 그리고 '불석신명' 정신을 현대에 되살리셨습니다. 그것은 실로 멸하려 하던 대성인 불법과 정신을 영원케 하는 광원(光源)이며 또 창가학회가 정의롭고 진실하다는 증거입니다.
또 도다 선생님도 2년간 감옥생활하셨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패전의 잿더미가 된 들판에 홀로 서서 광선유포를 결심하셨습니다.
선생님 가슴속에는 지용보살이라는 사명의 불꽃이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75만 세대라는 대원을 세우고 회장 취임 후 7년도 채 안 되어 그것을 이뤄내셨습니다. 이리하여 광선유포가 비로소 실현되었습니다. 대성인 이래 700년, 도다 선생님과 학회의 손으로 이제껏 듣지도 못한 광포의 문을 열었습니다."
새로운 지부 결성
제3대 회장이 취임하고 나서 학회는 기세가 더욱 강해졌다.
어떻게 하면 그 확대의 물결을 광선유포의 거대한 강물로 이어지게 만들까? 그것을 위한 창가 발전의 규범은 무엇인가? 이케다 회장이 심사숙고 끝에 얻은 결론이 <닛코유계치문>이었다.
창가의 신심은 계승되었다. '인재확대' '국사 10만'을 향한 길이 구축되었다. 다음은 노도와 같은 전진으로 투쟁의 포진을 어떻게 정비하느냐에 달렸다.
회장은 이미 구상하고 있었다. 회장은 취임과 동시에 한꺼번에 23개 지부를 신설했다. 7월에는 오키나와에 지부를 결성했다. 9월 본부간부회에서는 지바, 미토, 마에바시, 누마즈, 고후, 마쓰모토, 나가노, 도야마, 가나자와, 무로란, 오비히로, 야마가타, 미나미아키타, 이와테, 도쿠시마, 오이타 등 16개 지부가 탄생했다.
이로써 전국은 101개 지부 체제가 되었다. 또 남자는 122개 부대, 여자도 122개 부대로 당당한 포진을 갖췄다.
'모든 결성식에 참석한다'
신설된 16개 지부 결성대회가 11월 1일부터 연이어 열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지부 결성대회 직전까지 이케다 회장에게는 첫 북남미 방문(10월 2일부터 25일까지)이라는 빡빡하고 힘든 일정 이 짜여 있었다.
귀국 직후 열리는 지부 결성대회에 회장이 참석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출발 전,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16개 지부 결성대회에 모두 참석한다."
또 그 사실을 "신문에 발표하라."고 지시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11월 남자부와 여자부총회 목표도 지시했다.
회장이 미국을 방문하기 전날 세이쿄신문에 그 총회에 대한 예고기사가 실렸다.
"남자는 미쓰자와에서 5만명" "여자는 니혼대 강당에서 2만 5000명." '10만 결집'을 향해 드디어 대전진이 시작되었다.
일본의 기둥
11월 1일 지바현 체육관에서 지바지부가 결성대회를 열었다.
1만명이 참석한 가운데 오후 6시 15분, 남여 부대기와 지부기가 입장했다. "니치렌 대성인이 탄생하신 땅에 지부가 탄생했습니다."라는 사회 자의 첫 마디로 대회를 시작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속에 등단한 이케다 회장은 역설했다.
니치렌 대성인은 니치렌을 없애려는 것은 일본의 기둥을 쓰러뜨리려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학회를 비판하고 괴롭히면 일본의 기둥을 쓰러뜨리는 꼴입니다."
'지바시에 처음으로 지부가 생겼다. 그러나 아직 하나뿐이다. 제2, 제3의 지부를 결성할 수 있는 지바로 만들고 싶다.' 회장은 그러한 소망을 담아 대회 전후에 짬짬이 청년을 격려했다.
▒▒▒ 당시 이야기 ▒▒▒
본부에서 열린 지도회 때, 선생님은 저에게 이렇게 지도하셨습니다.
"인생에서 생사(生死)라는 문제는 가장 큰 주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사람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광선유포를 위해 회합에 참석하면 생명이 '생(生)'의 방향으로 갑니다.
반대로 불법의 세계에서 멀어지면 생명이 '사(死)'의 방향으로 갑니다.
그러므로 회합에 참석하면 생명은 이미 승리하는 쪽으로 성장히는 희망이 있는 쪽으로 움직입니다."
나와 함께
마에바시지부 결성대회는 11월 4일 오후 6시 전에 마에바시시(市) 군마회관에서 열렸다. 행사장에는 회원들 6000명이 달려왔다. 이날 군마에 첫 지부기와 함께 남자 제114부대, 여자 제114부대의 부대기가 나부꼈다.
▒▒▒ 당시 이야기 ▒▒▒
마에비시지부는 마에바시, 이세사키, 시부카와, 누마타, 도미오카, 후지오카 등지에 흩어진 학회원이 언저리에 모여 결성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여자부 부대장에 임명된 저는 부대 전체를 장악하는 일이 불안했습니다.
결성식이 끝난 후 선생님에게 그 불안한 심정을 털어놓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 여자부는 밝은 웃음을 띄며 행동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이좋게 단결해서 분발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힘들다는 것은 잘 알지만 먼저 당신이 솔선해서 활동하려고 노력하세요 상식있게, 시간을 엄수하고 무사고로 투쟁해야 합니다."
불안한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돌아가려는 참에 선생님이 "오늘 늦은 시간까지 수고했습니다. 배고프지요? 이거 드세요" 하며 경단을 주셨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또 이렇게 격려하셨지요.
"따로따로 흩어져 있던 경단도 꼬챙이로 꿰면 가지런히 하나로 모입니다. 당신 자신이 명랑하게 분발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모두 모여듭니다. 그 속에서 힘이 나옵니다. 단결의 기본은 책략이나 방법이 아니라 신심을 근본으로 한 투쟁입니다." 저는 용기가 솟구쳤습니다. 우리는 그 지도를 부대의 모토로 삼았습니다.
신심의 궁극
누마즈지부 결성대회는 11월 7일 오후 6시부터 누마즈시 산업회관(당시)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는 멤버 3000명이 모였다. 누마즈지부는 누마즈, 후지노미야, 아타미, 이즈 등 16개 지구에 1만 4000세대로 새롭게 출발했다. 또 남자 제116부대, 여자 제 l16부대도 생겼다.
이 자리에서 이케다 회장은 <개목초>를 배독하며 이렇게 말했다.
"대성인은 반드시 삼장사마가 있다고 아침저녁으로 가르쳤지만 '어리석은 자의 버릇'으로 '필요한 때'에는 잊어버리지 때문에 부처가 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필요한 때', 즉 무언가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 비로소 커다란 복운을 쌓을 수 있는, 숙명을 전환할 수 있는 경사스러운 때라는 확신을 품고 신심을 관철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신심의 궁극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점을 가슴에 새기세요.
사람의 그릇
11월 9일 오후 5시 40분, 고후지부 결성대회가 막을 열었다.
11월 치고는 봄날씨 같았다. 도쿄를 비롯한 48개 지부에 소속한 모든 동지가 대회가 열리는 야마나시 현민회관으로 모였다. 또 이날 대성인과 인연이 깊은 땅에 청년부 부대기가 펄럭였다. 남
자 제115부대, 여자 제115부대가 생겼다.
연단에 선 이케다 회장은 이런 말을 꺼냈다. "나는 몹시 부끄러움을 잘 타고 좋은 사람이지만, 일단 사악을 대하거나 신심과 학회정신에 서면 아수라왕과 같이 학회원을 지키고 지휘를 한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게 말해두겠습니다. …"
확신에 찬 늠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결성대회가 끝난 뒤 지구간부 이상 멤버들이 대기실에 모였다. 이케다 회장이 시간이 허락하는 한, 간담을 나누고 싶다고 멤버들을 불렀기 때문이었다. "자, 질문회를 합시다."라고 회장이 말문을 열고 자신이 직접 사회자가 되어 질문회를 시작했다.
▒▒▒ 당시 이야기 ▒▒▒
결성대회에서 체험담을 발표한 구장(區長) 한명이 질문했습니다. "부대의 주축이 되어 최선을 다하고 싶지만 제 그릇이 작아서 고민입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지도하셨지요.
"그렇게 서두른다고 금세 크게 성장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그릇은 경애입니다. 자기 단점을 고민하고 하나하나 극복해서 하루하루 자신을 성장시키는 투쟁 속에서 차츰 경애가 열려 그릇이 큰 인간이 되는 법입니다. 나와 함께 광선유포를 위해 분발합시다."
▒▒▒ 당시 이야기 ▒▒▒
당시 여자부 구장(區長)이던 저는 힘껏 투쟁해서 선생님을 맞이하고자 자전거로 결집하러 다녔고, 집에 돌아오면 밤마다 계속 축인근행을 했습니다. 제가 질문회에서 가장 먼저 손을 들었지만 다른 여자부원이 처음에 지명받았습니다. 그 여자부원이 끝나자 선생님은 "다음은 아까 손 든 사람!" 하며 저를 지명해주셨습니다.
당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도 병약하여 네 자매의 맏딸로 생활고 속에서 필사적으로 봉제업일과 학회활동에 매달렸습니다. 어머니는 딸인 제가 걱정되어 끊임없이 잔소리를 했습니다. "기쁨에 넘쳐 집에 돌아가도 어머니와 얼굴을 마주하면 환희가 사그라지고 맙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하고 선생님에게 생각을 털어놨습니다.
선생님은 제 눈을 지그시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들어주셨지요. "당신이 침울해지면 안 됩니다. 어머니에게 이해를 받고 싶다면 당신 자신이 어머니가 기뻐하는 딸로 변해야 합니다. 평소 당신이 하는 행동 자체가 신심입니다."라고 차근차근 말씀하시는 선생님의 따스한 진심은 지금도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북알프스의 산기슭에 부대기
고후지부 결성대회를 끝낸 이케다 회장은 나가노 마쓰모토시로 향했다. 회장은 "멀리 보이는 알프스 산들이 아름답다."라고 기록했다.
11월 10일 저녁 때, 회장이 마쓰모토지부 결성대회가 열리는 행사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1만여명의 동지가 모여 그 인파가 행사장 바깥까지 넘쳤다."고 한다. 이 회합은 청년부 부대인 남자 118부대와 여자 118부대 결성대회도 겸해서 열렸다.
▒▒▒ 당시 이야기 ▒▒▒
이케다 선생님은 마쓰모토지부에서 초대 부대장을 맡은 남편에게 지부를 결성하기 2년 전, '용기'라고 쓴 휘호를 주셨습니다. 선생님은 2년 전부터 남편을 계속 격려하셨습니다.
지부 결성대회 후, 선생님이 계신 숙소로 인사를 드리러 간 남편은 선생님에게 격려를 받았습니다. "우선 승부는 3개월입니다. 남자부 리더로서 법의 깃발을 손에 든 이상, 전국 최고의 투쟁을 하겠다는 기개가 있어야 합니다. 전 일본의 남자부원들이 '나가노에는 가쓰노가 있노라.' 하고 말할정도가 되십시오."
남편은 그날 밤 부대기를 불단 옆에 장식하고 진지하게 제목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3개월 뒤 열린 부대총회에는 200세대 이상 절복을 달성했습니다. 모두 그때 이케다 선생님에게 받은 격려 덕택이었지요.
가와나카지마 전투
나가노지부 결성대회는 11월 11일 오후 5시 15분부터 약 1만 2000명이 참석한 가운데 나가노 시내에서 열렸다. 나가노지부 결성대회도 청년부의 새로운 부대인 남자 제117부대와 여자 제117부대의 발족식을 겸했다.
결성대회가 대성공리에 끝난 그날 밤, 이케다 회장의 숙소인 여관에 지부간부가 보고차 들렀다. 회장은 그들을 방으로 불러 고다쓰(일본의 난방기구로 이불을 덮은 난방용 테이블)가 있는 쪽으로 들어오라고 권했다.
초겨울 신슈의 차가운 밤, 지부간부들은 회장의 진심에 응해 고다쓰에 둘러 앉아 대화를 나누는 추억을 새겼다.
▒▒▒ 당시 이야기 ▒▒▒
선생님이 여관방에 있던 고다쓰 쪽으로 불러 간담을 나눴습니다. 나가노가 무대인 '가와나카지마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였습니다.
선생님은 우에스기 겐신과 다케다 신겐의 병법에 대해 상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겐신이 쓴 '차면(車懸)의 진(수레바퀴 형태로 부대를 배치해 차례로 공격을 가하는 진형)'이라는 병법에 대해서는 손가락 다섯개를 수레의 움직임에 비유하며 조금씩 회전시키면서 "이렇게, 이렇게."라고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다케다 신겐의 '딱따구리 전법'도 역시 손을 사용해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은 현지에 사는 우리보다 자세히 알고 계셨습니다.
대략적으로 설명하신 선생님은 우리쪽을 보고 "투쟁은 때가 중요합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투쟁에는 '때'가 있습니다. 때를 기다리고, 때를 만들고 또 때를 놓치지 않고 싸워야 반드시 승리합니다."
선생님 지도는 명쾌했습니다. 우리는 '지금'이라는 때를 놓치지 않고 투쟁하기로 서로 다짐했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들은 뒤 저는 제 고민을 말씀드렸습니다. 초등학교만 나온 제가 부대장을 맡아 과연 지휘를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엄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지도하셨습니다.
"사람은 실력이 중요합니다. 학력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하지 말고 공부하십시오.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노력해 모든 사람에게 모범이 되면 됩니다. 안간힘을 쓰며 허세를 부릴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작은 일에 구애받던 저 처신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또 이렇게 격려하셨습니다
"나도 날마다 공부합니다. 하루에 20분도 30분도 좋습니다. 틈을 내어 독서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그렇게 지속하면 힘이 됩니다. 당신도 실력을 쌓아 정말로 힘있는 민중의 리더가 되십시오. 오늘은 당신의 영광스런 미래를 향한 출발을 위해 노래를 부릅시다."
혼신을 다한 지도였습니다. 선생님은 늠름한 목소리로 '다바루자카'를 불러주셨습니다.
'이렇게까지 격려해주시다니.' 하고 눈물이 나올 것 같았습니다.
인간혁명하는 때
l1월 12일. 전날 밤부터 내리던 비도 그치고 도야마는 맑게 깨어 있었다. 이날은 도야마지부 결성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또 대망하던 청년부인 남자 제119부대와 여자 제119부대도 결성하는 기념할 만한 날이었다.
결성대회는 오후 1시 50분에 도야마시 공회당에서 열렸고 참석자 4000명의 환희는 폭발적이었다. 대회가 끝난 뒤 공회당 대기실에서 지구간부 질문회가 열렸다.
이케다 회장은 청년부, 특히 여자부를 걱정했다.
당시 여자부 조직은 '부대' 아래에 '구(區)', '구' 이래에 '반'이 있었다. 그러나 도야마의 여자 제119부대에는 단 한명의 구장도 없었다. 부대장 혼자 22개 반을 챙겨야 했다
▒▒▒ 당시 이야기 ▒▒▒
저는 질문회에서 과감하게 손을 들었습니다.
"여자부구장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손을 쓰면좋겠습니까?"
선생님은 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손을 쓴다? 손을 써서 어떻게 하려구요?" 그리고 손뼉을 쳐서 몇번 소리를 내고 '손뼉을 쳐서 찻집 주인을 부르려구요?'라고 말했습니다. 웃는 사람도 있었지만 저는 진지했습니다.
"여자부를 어떻게 이끌면 좋을까요?"
"당신이 모든 멤버를 끌고 갑니까? 만약 언덕길이라면 큰일이겠군요. 누군가에게 뒤에서 밀어 달라고 부탁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요."
이케다 선생님을 처음 뵈었는데 금세 제 성격을 들켜버렸습니다. 저는 지기 싫어하고 건방진 성격이었지요. 제가 무슨 말을 해도 선생님은 단번에 명쾌하게 해결해주셨습니다. 선생님에게 직접 지도받은 천재일우의 훈련이었지요. 그 뒤 선생님은 모든 장년부, 부인부 간부에게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여자부장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내 여동생이리고. 생각하고. 응원해주기 바랍니다. 여자부를 소중히 해주십시오."
그리고 선생님은 머리를 숙이셨습니다. 얼마나 감격했는지 눈물이 나왔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저를 보고 말씀하셨지요.
"리더는 울면 안 됩니다. 언제나 명랑한 얼굴로 모든 멤버를 감싸야 합니다. 지금이 바로 승부를 걸 때입니다. 인간혁명할 때입니다. 도야마 여자부의 미래를 기대합니다."
제가 도야마 광포롤 위해 투쟁하겠다고 결심을 굳힌 순간이었습니다.
종교계의 왕자라는 자각
가나자와지부는 8개 지구, 4600세대의 진용을 갖춘 가장 작은 지부였다. 이케다 회장은 그러한 지부의 멤버들에게 이렇게 역설했다.
"일본에서 가장 작은 지부이기 때문에 사이좋게 신행학에 면려하십시오. 공덕을 받고 싶은 사람은 절복을 하십시오. 또 어떻게든 숙명전환하고 싶다, 불행한 사람을 구하고 싶다는 사람은 절복을 히십시오.
마음이 약해서 나는 나중에 공덕을 받으면 된다는 사람은 느긋하게 신심해도 괜찮습니다. 신심은 자유니까요. 그렇지만 여러분은 종교계의 왕자라는 자각으로 전진하기를 바랍니다."
정예 5만 결집
왜 이케다 회장은 각 지부 결성대회를 샅샅이 돌며 격려했는가? 왜 지부에 힘을 쏟았는가? 당시 청년부 집행부는 말한다.
"이케다 선생님은 '광포의 싸움터'는 지부와 지구라는 관점에서 지부를 노도와 같이 순회하셨습니다. 그리고 장년부와 부인부, 남자부, 여자부 4부가 혼연일체가 되어 투쟁할 수 있는 태세를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순회하신 조직에는 청년부를 소중히 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선생님의 물밑 투쟁이 얼마나 굉장했는지 모릅니다. 그 투쟁이 '국사 10만'을 결집하는 기세가 되었습니다."
이케다 회장이 지부 결성대회에 한창 온 힘을 기울이던 11월 6일, 남자부 최초 야외총회가 열렸다. 미쓰자와경기장에서 열린 제9회 남자부총회였다. 1년 전 100개 부대를 달성한 제8회 남자부총회 석상에서 다음 총회에 '정예 5만 결집'을 목표로 내걸었다. 이는 '국사 10만'을 향한 도약이기 때문이었다.
나라에 10만 국사가 있으면
총회는 6일 정오에 막을 열었다. 스탠드를 가득 메운 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전국 121개 부대의 부대기를 선두로 1만 4000명의 대표가 행진했다. 이날 목표인 5만명을 크게 웃돌아 참석자는 6만 6000명이었다. 부원수도 연초에 17만을 목표로 출발했는데 이때 이미 20만을 돌파했다.
총회에서는 '국사 10만' 결집을 향한 맹세를 담아 "청년이여 국사이어라."가 낭독되었다.
"청년이여, 홀로 서라! 두 사람은 반드시 일어서리라, 세 사람은 또 그 뒤를 이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나라에 10만 국사가 있으면 고뇌하는 민중을 구할 수 있음은 불을 보듯 분명하다. …"
끝으로 회장이 연단에 올랐다. "젊은 지용보살이, 즉 남자부가 많을수록 일본의 행복도, 민중의 행복도, 동양 그리고 나아가 세계의 진실한 평화가 실현되지 때문에 나는 축복하는 바입니다."
광포에 형식은 필요 없다
총회에서 남자부의 새로운 체제가 발표되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기획실과 지방 참모제가 폐지되고 전국에 '부장' '부부장' 제도가 생겼다. 부대를 강화하고자 고안한 체제다. 이로써 전국은 13개 부로 그 진용을 갖췄다. 또 총회에서는 새롭게 68명의 부대장을 임명했다.
그 중 한 부대장이 허름한 양복을 입고 이케다 회장에게 인사하러 왔다. 회장은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부대장은 "채소장사를 합니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부대장이 되었다고 해서 결코 좋은 옷을 입을 필요는 없습니다. 자기답게 자기 성격을 살려 신심을 지도하면 됩니다. 일에 몰두하며 자기 일에서도 모든 사람에게 모범이 되십시오."
또 이 말도 덧붙였다. "나도 공장에서 일했고, 신문배달이나 외무사원일도 하면서 야학을 다녔습니다. 날다다 새벽 2-3시까지 공부했지요. 뒤처지지 않으려고 굉장히 노력했습니다." 아무것도 꾸미지 않는 회장의 모습에서 그 부대장은 청년에게, 그리고 광선유포에 형식은 필요없다고 배웠다.
신심의 목적
한편, 여자부는 연초부터 총회 때까지 '부원 13만명 달성'을 목표로 전진했다. 그러나 이미 10월에 15만명이 넘었다. 여자부는 목표보다 훨씬 초과하고 11월 20일에 제8회 총회를 맞았다.
총회장소인 료고쿠 니혼대 강당에는 전국에서 대표가 모였다.
고적대 700명과 합창단 500명이 출연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11시 20분, 총회는 막이 열렸다. 총회를 시작하며 여자부가 15만명을 달성 했다는 보고가 발표되자 강당이 떠나갈 듯한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또 새로운 '부장제(部長制)'가 발표되었고 부장 11명도 임명되었다. '부' 아래에 '부대'가 놓이게 되어 새로운 부대 발전이 기대되었다.
이 자리에서 이케다 회장은 지도했다.
"도다 선생님은 '여자부는 행복해지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껏 알랭의 <행복론>이나 에머슨의 <행복론> 등 수백명 수천명이 행복을 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책을 읽고 자신도 행복해지고 남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신심을 하는 목적은 부처가 되는 것이고,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불법의 진수인 어본존을 믿어야 반드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또 학회는 그 길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이 종교혁명이고 광선유포입니다."
처음으로 해외지도를 가고 새로운 지부 결성대회로 전국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청년을 격려하는 데 온 힘을 다했다. 회장은 실로 사자분신과 같이 행동했다.
당시 청년부 간부는 "선생님은 회장에 취임하고 그 짧은 사이에 몸이 무척 야위셨습니다. 그 모습을 본 우리는 긴장감이 돌았습니다."라고 회고한다.
그러한 속에서 회장은 대백련화 권두언을 매월 게재했다. 당시 편집장은 이렇게 말한다. '"권두언을 써 주십시오.'라는 제 요청에 선생님은 아무리 바빠도 응해주셨습니다."
첫번째 권두언은 '국가 간효', 두번째는 '우리는 국사이니라'
격투가 연상되는 힘찬 필치였다고 한다.
"일찍이 도다 조세이 선생님은 '청년이여, 국사이어라.'하고 부르짖으셨다. 우리는 결코 종교쟁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 종교혁명이 바로 국가를 근본부터 구하는 직도(直道)다…."(<우리는 국사이니라>)
'국사 10만'. 제자는 본무대를 향해 드디어 박차를 가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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