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가 선정한 이 한 편의 시 후보작
정영선, 박분필, 김정원, 허이서, 손택수, 권기선, 아타세벤 파덴, 안정옥, 강기원 이병일
빨래
정영선
슬픔이 탈수된 난닝은
시들시들 마른다 방안 건조대에서
햇빛 없이
바람 없이
꿈 없이
홍콩 뒷골목 아파트
수건, 팬티가 창밖 내민 긴 막대에 매달려
아슬아슬 곡예한다
바람이 흔들고
햇빛이 잡아주고
먼지가 매만지고
에너지가 넘친다
키르키스탄 벌판, 유르트에
둘러진 밧줄에
꽁꽁 찡겨 있는
헌 내복
눈발에 적셔지다
낡은 햇살에 꾸들꾸들 말려지다
문명의 강풍이 데려가지 못하는
문명 무풍지대
조국이 씌운
난민의 운명 같은 거
---애지 가을호에서
바다경마장
박분필
바람이 바다에 가면 바다의 비늘처럼
촘촘하게 연이어진 파도가 된다
흥분과 설렘이 가득한 바다 경마장이 된다
모든 파도가 앞발을 번쩍 들고 동일한 움직임으로
박자와 리듬 움직임과 속도 그리고 철썩 철썩
등짝을 치는 말발굽소리까지
멈추는 법을 잊어버린 기마행렬의
숨결과 채찍소리 고스란히 전달되어온다
바람도 가끔은 만질 수 없는 것들을 바라보고
들리지 않는 것들을 듣는 상상을 하지
하늘이 막 피워낸 하얀 눈꽃송이들이
속옷만 걸친 애마부인처럼 쏟아져 내려
앞만 보고 달려가는 거친 말 등에 올라탄다
짜릿한 허공의 냄새
싱싱하고 힘찬 기운
눈 내리는 푸른바다를 푸른 초원처럼
자유롭게 달리는 나는 바람의 노마드다
기수도 고삐도 없는 흰말이고, 푸른 파도다
---애지 가을호에서
분재
김정원
그는 자신이 바라는 삶을 살고 싶다
그러나,
야무진 바람의 가지와 뿌리가 무참히 잘려 나가고
사람이 원하는 수형으로 사육되는
소사나무
노예 발목에 채운 차꼬 같은 화분 밖에서
비바람 맞으며 자기 뜻대로 사는 나무들이 보기에
아름답기보다는 괴로운 기형이다
나 자신이 바라는 내가 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내가 된 꼭두각시 인생처럼
밑동이 굽은
후회가 굵다
---애지 가을호에서
꽃그늘
허이서
동창회에 가면 입들은 행복이 넘친다
돈 자랑, 집 자랑, 차 자랑, 자식 자랑, 남편 자랑
자랑들 식당 안에 뜨겁게 둥둥 떠다닌다
잉꼬부부 자칭하는 누군가 나서 우쭐대며 말한다
끼리끼리 만나 팔자대로 사는 거라고
자랑할 거 없어 구석쯤에 앉아 물만 마시던 나도
없는 자랑거리 만들어 더 큰소리로 합세하자
시끌벅적 자랑들로 둥둥 식당이 떠내려간다
늦은 밤 동창회 마치고 돌아오는 길
세상 하나뿐인 모양과 빛깔로
험한 골짜기 어렵사리 핀 나만의 꽃이
시들시들하더니 이내 꽃잎을 닫는다
그들의 입이 함빡 피어 올린 꽃그늘 아래서
---애지 가을호에서
돌담 쌓는 사람 인터뷰 중에
손택수
담은 어떻게 쌓는가?
담을 쌓기 전에 가만히 앉아서 바람 소리를 먼저 들어줘야 한다 바람이 다니는 길을 알아야 돌담을 쌓을 수 있다 알 수 없으면 몇날 며칠 바람이 불길 기다릴 때도 있다 아무 일 않는 것 같아도 방향이며 높이며 위치를 그렇게 결정한다 기다림이 공정의 모든 것이다
어떤 돌을 취하는가?
돌을 순치시키는 게 마냥 능사는 아니다 반듯하게 각을 지어 다듬은 돌담이 태풍에 더 잘 무너진다 저마다의 생김새대로 돌담도 되고 산담도 된다 그 사이로 바람을 죄었다 푸는 입술이 생겨나야 한다 땅이 얼부풀거나 꺼질 때, 새들이 앉았다 떠날 때, 틈 새로 풀잎이 돋아날 때 어깨 겯고 서로 반응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마지막 공정은?
한쪽 끝에서 돌담을 흔들어본다 맞은편까지 잘 흔들리나 보려고, 누가 옆구리를 찔렀는데 찌른 쪽만 반응하면 살았다 할 수 있나 담은 미완을 품는 것이다 구조물로 굳어진 뒤에도 미동을 잃지 않는 것이 돌담이다
왜 돌담인가?
명절이면 모여서 돌담 수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홍어전에 막걸리 주전자가 돌아가는 고샅이야말로 보람 중의 보람이다 추석 가까우면 기꺼이 무너질 자세로 태풍을 기다리고 있는 돌담 걱정으로 귀성을 해본 적 있는가
당신에게 돌은 무엇인가?
돌 속에 누가 숨어 있다 항아리 속에서 술래를 기다리다 잠이 든 아이처럼, 찾다 그만 둔 아이를 품고 돌은 지금 만삭이다
---애지 가을호에서
if 빙하기
권기선
그날 지구에는 밀가루처럼 눈이 내렸다. 나쁜 마음을 먹기도 해야 하는 일일까. 쌓이는 눈을 보면서 생각했다. 사람은 다 이렇게 살아, 평범하게 살아가라는 말 그것이 정답이 될 수는 없었다. 목적지 없이 맴돌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
심호흡하고 나면 하늘의 자세가 불편해 보였다. 사람에 상처받아 일을 그만둔 나는 빙하기 같았다. 세상 모든 일을 짊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굴다
미친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되지는 말아라, 아버지와 술을 마시다 혼자 술잔을 이어간 날
내 방에도 밀가루처럼 눈이 내렸다. 사람을 탓했고 사람들을 원망했다. 아무와도 만나고 싶지 않은 기분으로
내가 아닌 사람들은 모두 잘살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고 사람과 대화를 나눈 계절은 끝나 빙하기가 시작된 것 같은,
지구가 얼어붙고 이제 건조한 영화가 시작된 것 같은,
사랑하는 일을 말하고 기억하는 것의 온도가 깨진,
사람과 멀어지는 계절과 사람이 싫어지는 계절만 있는 나라
따뜻한 사람이고자 했던 내가 약해지는 모습으로 점점 추락하고 마는 시간이었던,
차가운 눈이 내리는 방
내 방에서 가장 슬픈 눈물이 뭉치고 있다.
아름다운 일만 있는 것이 아닌
마음의 빙하기
그날 지구는 폭포수 같은 눈을 계속해서 내렸다. 나쁜 행성이 되어가는 것만 같았다.
---애지 가을호에서
수면 운동가
아타세벤 파덴
누가 물어보면
취미가 뭐냐고
망설임 없이
내 대답은
잠자기
스트레스 해소 방법도
언제나 한 가지다
침대 속으로 들어가
이불을 둘러싸고
눈 감으면 끝이다
수면도 운동이 돼서
살이 좀 찐 것 같을 때도
정신 놓고
며칠을 자고 나면
더할 나위가 없다
아침부터 배를 채우려는 것에
당연히 반대 목소리를 내야 한다
세 번 먹고 한 번 자는 것은
아무래도 나 같은 수면 운동가들에게
불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어떤 나라에서는 근무제를 69시간으로 하려고 하고
어떤 나라에서는 월급이 오르고 올라도 500달러에도 미치지 못하고
내게는 돈보다, 휴가보다 잠이 필요하고
나는 여행 체질이 아니다*
나는 수면 운동가
떨어진 체력을 타고난 체질이다
누구로부터 상처받고
논문이나 글이 잘 써질 때도
포근한 침대
혹은 딱딱한 소파여도 좋다
꿈속에서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종일 책 읽다가
꾸뻑꾸뻑 졸면
책을 얼굴에 덮고
잠깐 눈을 붙이는 것보다
달콤한 것이 없다
이야기는 꿈속에서 계속되고
새로운 아이디어도 떠오르고
눈 뜨자마자 이어서 읽으면
또 다른 이야기도 탄생한다
나는 오늘도
‘끼니와 수면을 평등하게’
라는 팻말을 들고 침대에 누웠다
말이 어눌해지고
생각이 어긋나면
점점 잠이 다가온다는 뜻이다
가장 긴 햇살이 내 얼굴을 핥는다
웅크리며 자는 고양이의 숨소리가 들린다
가장 아름다운 꿈은 아직 꿔보지 않은 꿈이다*
---애지 가을호에서
빗자루는 흔한 것이잖아
안정옥
날아다니는 빗자루가 혼란스러운 적 있지 내 방문을 잡아채려는
마녀, 그들 빗자루를 그냥 두길, 내가 빗나갈 때 빗자루로 맞기도
했지 늘 세워둬 그러나 밤이 되면 빗자루 타고 어디든 날아가야
해, 이것저것 몸소 겪은 뒤, 내 안에도 나를 지켜주려 애쓰는 이
가 있다는 걸 알아볼 줄도
지금도 마녀 탓에 죽어가긴 해 내가 죽은 후 화형을 당하긴 마찬
가지 원래의 뜻과 상관없이 삶은 함부로 뒤섞여있지 풀려 하면 더
엉켜 그러니 흔하고 보잘것없는 빗자루나 타고 날아갈 상상이나 할
수밖에
나를 지켜주는 이의 이름을 부를 때 있어 가파름을 건널 때 내 양
어깨를 잡아준 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고 어떻게 밤이 지나면 상심의
무게가 반으로 줄었겠어 눈물의 반도 누군가 울컥 삼켰어 혼자여서
잘 버틸 수 있었던, 그러니까 내가 달빛을 받으며 빗자루를 타고 멀
리 날아가는 걸 목격해도 못 본 척해
---애지 가을호에서
거북
강기원
내 몸속에 거북 한 마리 들어와 산다
언제부터였을까 나 대신
주억거리고 도리질하고 비굴하게 움츠러들기도 한다
학이라면 모를까 거북이는 되고 싶지 않았는데
녀석이 머리에 달려 있으니
걸음도 갈짓자, 등도 시멘트 들이부은 듯 딱딱하게 굳어간다
횡단보도 건너갈 일이 사막처럼 아득해지고
낯가림이 심해지고
낳아 놓은 자식들 제 알아서
살 놈 살고 잘못돼도 내 탓 아니려니 싶어진다
이미 지난 일 후회하면 뭐하나 뒤돌아보는 일도 없다
그 뿐인가
짧은 목 길게 빼어 바라보는 곳은
비린 바람 불어오는 바다 뿐
태내에서부터 출렁이던 양수의 바다 뿐
나 죽거든 문무왕처럼 나라지킴이는 못되어도
낙산 바다에 뿌려 달라 유서도 쓸까한다
이 난감한 녀석을 어찌 내보내야할지 궁리하는 대신
나는 점점 거북이 되어간다
침침한 눈 끔뻑이며, 홀로 거니는 고독한 거북
내 등판이 돌덩이인줄 알고 누군가 주저앉아도
무심결에 밟아도
끄덕끄덕과 도리도리 사이에서
굼뜬, 굼뜬, 거북한 거북이
---애지 가을호에서
허물 가진 것이 나는 좋다
이병일
우리는 허물 가진 것들을 보면
참, 독해
끔찍해
무서워
사막에 그슬린 돌덩이 같은 말을 한다
나는 허물 가진 것이 좋다
허물을 먹지 않고 사는 목숨은 없다
가재, 뱀, 누에, 매미
벗는 몸을 갖기 위해
끈끈한 허물을 가진다
숨을 갖기 위해
벗는다
몸이 출렁거리지 않도록
정말이지, 절망도 가둘 몸집을 가졌구나
허물 벗는데
여생을 모두 썼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러나 벗어도 벗겨내도 벗지 못한 허물이 있듯
히말라야 어느 고승은 정신이 허물이라고 했다
아하, 그렇다면 죽음도 허물이다
반 고흐, 칭기즈칸, 도스토예프스키
비석 뒤의 이야기로 반짝인다
한낱 이야기 앞에서
내가 공하게 믿어온 것들이 깨진다
다음이라는 것이 없는 몸들, 허물만 믿는다
---애지 가을호에서